Reincarnated, Fallen Noble RAW novel - Chapter (87)
혁명(4)
소녀는 왕관을 매만졌다.
그녀의 것이 아니지만, 그녀의 손길이 닿았다.
“완성된 건가?”
“그렇습니다. 제게 이런 기회를 주신 것,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빛나는 희고 푸른 별이 박히는 것으로 완성된 왕관을 내려놓은 소녀는 조심스럽게 상자에 담았다.
어느 나라 왕관처럼 상자에 잘못 넣었다가 찌그러져버리는 불상사 따위 없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음은 물론이었다.
왕관을 마땅히 있어야 할 곳으로 돌려놓으며, 그녀는 빙긋 웃었다.
“왕관을 써야 할 자는 마땅히 왕이지.”
그래, 왕이다. 그게 아니라면 황제도 좋다.
그녀는 분명히 배웠다.
모든 기술문명은 그 사회를 따라간다고.
따라서 기술을 진정으로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좋은 점을 진정으로 취하고자 한다면, 모든 것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자신의 것을 모두 포기할 각오로.
그러니, 받아들인다. 모두 버리고, 받아들여서, 채워나간다.
“채워내야지.”
소녀는 나직이 웃었다.
저 밖에서, 호외를 외치는 신문팔이 소년들의 외침이 들렸다.
“이탈리아에서 승리! 대영제국이 또 다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혁명의 마지막 불꽃이 짓밟혔다.
그 마지막 불꽃을 이끌던 가리발디가 미국으로 망명했다는 소식을 호외로 알리는 신문팔이 소년들의 목소리가 런던의 하늘을 울리고 있었다.
***
같은 시간, 한양, 남대문.
“그렇게들 말하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는 법이라고.”
곳곳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하늘을 검게 물들였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해가 뜨지 않는 도시, 런던을 떠올렷다.
“당신들 같은 혁명가가 흔히 저지르는 가장 큰 실수는 인민을 ‘계도’, 혹은 ‘계몽’시킬 대상으로 본다는 거네, 자기들보다 못하니까 이끌어줘야 한다, 뭐, 상당수의 인민들이 그렇다는 건 맞지만, 동시에 인민을 너무 무시한다는 게 문제야.”
총성이 희미하게 섞여든다. 아마 내 귀에 들리지만 않을 뿐, 비명소리와 칼 부딪히는 소리도 제법 나겠지.
“인민은 결코 바보가 아니야.”
나는 성루 위에서 지팡이로 바닥을 툭툭 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내 발등을 한 번 찍어버린 뒤에야 기다리던 사람이 도착했다.
“연, 어떻게 됐지?”
“보시는 대로에요. 궁전 수비대와 민중이 교전을 시작했어요.”
“그렇군.”
다른 말로 하자면, 이미 궁전 밖에 있는 이들은 전부 참살당했을 거라는 의미다.
내 손은 천천히 움직였다.
“정보 차단으로 진실을 감추는 건 한계가 있지, 결국 터질 걸 터지게 했을 뿐이야. 하지만…”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궁전 수비대는 이미 저들에게 충동된 이들이 거의 전부고, 저 밖의 민병대는 충동되지는 않았지만 이미 늦었지.”
호랑이 등에 탔다는 말이 딱 알맞았다.
“왜죠? 조선의 민란에 대한 처벌은 제법 관대한 것으로 아는데 말이죠.”
“지금 왕실의 제일 어른은 순조의 비이자 헌종의 할머니였던 순헌왕후.”
그리고 안동 김씨다.
“조선인들 상당수는 이미 상당히 유럽에 접촉하게 되었어, 그리고 소위 말하는 ‘양놈’들이 하나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지.”
그리고 안동 김씨는 나와 유착되어 있다는 걸 모르는 이가 없다.
영길리와 유착한 안동 김씨, 그리고 영길리와 사이가 나쁜 불란서에서 온 코쟁이들. 실제로 저들이 안동 김씨에 맞서 뭉친 연합세력의 일원이기도 했으니 이게 영길리와 불란서의 대리전이라는 건 매우 설득력이 높다.
그리고 순헌왕후가 새 왕을 지명하고 수렴청정에 들어가면 영길리가 피의 보복을 하리라는 소문은 매우 신빙성이 있다.
“저들도 알아, 우리의 힘을. 아니, 적어도 한성의 시민들은 알고 있지. 그리고 민병대가 한성 시민들과 접촉을 안 한 것도 아니고. 우리가 저지른 짓을 못 본 것도 아니지.”
트라우마가 더 적합한 표현일 것이다.
우리는 분명히 한양까지 쳐들어왔고, 그게 그리 오래 전도 아니니까.
“따라서 민병대는 살기 위해서 혁명가들을 도울 수밖에 없어, 새 왕이 세워지면 자기들은 예외 없이 전부 죽은 목숨이란 걸 알거든.”
기호지세가 이런 때 쓰는 단어가 맞던가.
“이제 선택을 내리셔야지, 프루동.”
나는 싸늘히 웃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미 죽었으리라,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이 궁궐 밖으로 나온 걸 확인한 뒤에 폭동을 일으켰으니까.
아마 맞아 죽든 밟혀 죽든 하지 않았을까?
“허수아비 왕이라도 데려와서 왕정을 다시 세우든, 아니면 이 저항을 어떻게든 전부 이겨내고 최후의 승자가 되든.”
결국 우리의 국익에는 손상이 가지 않는다.
“하지만 이 소식을 들으면 한양으로 안 끝날 거에요, 각지에서 근왕군이…..”
“근왕군 좋지, 그런데 근왕군이 누가 누굴 옹립하냐?”
철종도 원칙적으로는 왕이 될 수 없다. 헌종의 숙부뻘이거든.
그런데 나머지는 다 너무 멀다. 그나마 가까운 쪽도 익평군 이익인데 이 양반도 헌종보다 항렬이 높으니 어디 사대부가 제멋대로 옹립했다가 대왕대비에게 퇴짜맞으면?
비슷한 사례가 있다. 성종이라고.
원래 성종은 왕위에 오를 수 없는 입장이었는데 자기 친형인 월산대군조차 제치고 왕위에 올랐고, 그 이유는 성종이 한명회의 사위인지라 장인의 덕을 봤다는 게 유력하다. 명분이야 월산대군이 몸이 안 좋아서 그랬다지만 누가 믿나?
그러니까 정통성 취약한 양반 어거지로 옹립하려고 했다가 이긴 뒤에도 대왕대비의 명령 한 번에 모가지가 날아가고도 남는다. 본인만 일어나는 게 아니라 다른 이들도 들고일어난 상황이라 문자 그대로 전장의 안개 상황이라면 더더욱.
“결정적으로 은근히 호응이 있을 거야, 기본적으로 프루동의 주장은 유교의 ‘경자유전’ 원칙과 크게 다르지 않으니까.”
더 간단히 말하자면 이 빌어먹을 나라를 엎어버리자는 것.
“홍경래의 주장과 비슷하지, 문제는 그 홍경래가 지금 궁궐에 들어앉아서 신무기로 무장하고 농성하고 있다는 거고, 지방에서 호응하는 세력은 충분히 있을 거야.”
홍경래가 살아 있다는 소문은 아직도 돌고 있다.
그 의미는 여전히 농민들은 이 조선 왕조의 모순 자체에 분개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프루동의 이상은 이 농민들의 가려운 곳을 시원하게 긁어주는 것이다.
경자유전, 토지개혁, 학정 없는 국가.
얼마나 달콤하겠는가.
“농민들의 지지를 얻고, 우리의 힘을 빌려 기존의 지배층을 숙청하고, 공화정을 세우는 게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그리고 이렇게까지 몰린 이상, 가장 빠르게 조선을 안정화시킬 수 있는 수단이기도 하다. 나머지 세력들은 다 정통성은 거기서 거기니만큼 내전은 확정 루트거든.
그러니 프루동은 결국 내게 굴복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조선은 어느 정도 혼란스러워야 하지만, 내 손아귀에서 벗어나면 안 된다. 이들이 태평천국을 칠 교두보가 되어야 하니까.
공화정을 억지로 세운다? 당연히 반발이 빗발치겠지. 하지만 그런 만큼 신정부는 내 바지가랑이를 잡고 늘어질 수밖에 없다. 영국의 국익은 몰라도 적어도 내게는 확실한 이득이다.
그리고 영국 입장에서도 손해만은 아닌 것은 조선보다는 중국에 대한 이권이 훨씬 크기 때문.
이 조그마한 반도에서 우리가 얻은 이권은 태평천국을 격멸하고 우리가 뜯어낼 수 있는 이권에 비해 한줌에 불과하니, 손익계산을 해보고 쉽사리 포기해도 상관없다.
그러니…. 선택을 해라.
시간은 이미 없으니까.
***
프루동은 눈을 질끈 감았다.
총성, 총성이 미친 듯이 울리고 있었다.
볼리 건을 쏴대는 수비대와, 시민군의 후방에서 그들을 공격하는 농민 반군까지.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그들에게 유리해져 가고 있었다.
시민군은 누군가의 선동으로 급히 모인 탓에 제대로 된 무장조차 갖추지 못했고, 사기가 꺾이자 순식간에 무너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뭐가 중요한가.
도저히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 일어났는데.
혁명동지들이 민중에게 총을 쏘고 말았는데.
“…….. 이건 아니야.”
이상주의자는 머리를 감쌌다.
“이건 아니라고.”
그런 그의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누굴 원망할 것도 없소, 이건 당신들의 어리석음이 만들어낸 일이니까.”
조선인, 40대 정도의 남자가 유창한 프랑스어로 말하고 있었다.
“새로운 주상 전하를 세우든, 당신의 이상을 실천하고 협력을 구하든, 무엇이든 하지 않고, 그저 일이 잘 풀리기만을 기다리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었소, 이 나라에서 현명하다는 이들이 초야에 묻혀 산 것과 별로 다를 것도 없는 무책임함과 이기심의 발로지. 권력에 눌려 뜻을 펼 수 없으니, 저 외세의 반응이 두려워서, 혹은 다른 이유로 도망치고, 현실을 부정하고 있었잖소? 꼴사납구려.”
“……….”
프루동은 한탄하듯 물었다.
“내가 뭘 어떻게 했어야 한다는 거요, 미스터 킴, 조선인들은 내 사상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고, 외국군은 이 나라에 개입할 틈만 노리고 있었는데.”
“영국의 요구를 받아들였어야 하오. 알고 있지 않소? 이미 대다수의 백성들에게 왕국이냐 공화국이냐는 중요하지 않소, 그저 굶주리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한성은 그나마 나은 편이었지만, 지방의 백성들은 더욱 처참하다.
이미 세금을 낼 사람이 대부분 도망쳐 유랑민이 되어버린 탓에 조선의 국고에 납부되는 세액은 3분의 1로 급감해 있었다.
그마저도 서류상의 금액, 실제로 각종 방식으로 횡령된 액수를 다 빼면 국고에 있는 돈이 얼마나 되는지는 조사를 해 봐야 알겠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현실을 까 보기가 두려웠다.
청에게서 뜯어낸 배상금? 경복궁 중건 비용과 각종 무기를 사들이는 비용으로 전부 저 양이들의 호주머니에 들어갔다.
“그 우유부단함이 지금의 상황을 만든 거요.”
터질 듯 말 듯, 내란 종식 이후 안개 속에서 반년을 넘게 끌었다.
뭔가를 하려고 했으면 진작 했어야 한다.
하지만 혁명을 어떻게 성공시킨 혁명가들은 자기들끼리 싸우면서 그 반년을 헛되이 날렸고, 결국 조선에 많은 이권을 가지고 있는 영국에게 여유를 너무 많이 줘버렸다.
이 상황을 수습하기 위한 방법은…….
‘우리는 어떤 정권이 세워지든, 신경쓰지 않는다.’
영국 정부는 물론이고, 나 자신도 이미 그림자 속으로 사라진 존재에게 집착하지 않는다.
굴복해라, 철두철미하게 복종해라.
그들의 세계전략의 부속품이 되어라.
“그럴 수는 없소.”
이를 악물었다.
“설령 내 몸이 찢겨 죽더라도, 그들에게 이들…. 이 선량한 이들을 던져줄 수는 없소.”
단순히 권력을 탐해서라면, 저기에서 조용히 이곳을 바라보고 있을 그 자의 발바닥이라도 핥았으리라.
그러나 그가 원했던 것은 단 하나뿐이었다.
사람이 사람을 착취하지 않는 세상.
고통받지 않는 세상.
그걸 위해 자신의 모든 생명을 걸어 투신하기로 마음먹은 그에게 있어 지금의 위기를 넘기고자 압제자에게 무릎을 꿇는다는 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 조선 왕조에 대한 회의를, 세도 정치에 대한 회의를, 그리고 조선의 성리학 질서 그 자체에 대한 회의를 품고 떠돌아다니다가 또 다른 방랑자를 만난 조선의 방랑자, 김립(金笠)은 그에게 이야기했다.
“내가 전면에 나서겠소, 농민들의 지지를 얻고, 지주들을… 양반들을 격멸하고. 외국에게 이권을 내주어서라도. 언젠가, 우리 뒤의 누군가라도 다시 되찾아오게 될 거요.”
오만한 일이다.
세상에 사람이 자기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만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자기가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일은, 오만한 일이다.
언젠가 해내리라고 믿으면서 나아가야 한다.
“…… 가능하겠소?”
프루동의 지친 목소리에, 삿갓을 쓴 남자가 답했다.
“가능하게 만들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