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incarnated, Fallen Noble RAW novel - Chapter (95)
디바이드 앤 룰(3)
런던. 이중제국.
이중제국, 정식 명칭 그레이트브리튼-러시아 이중제국에서 유학을 명목으로 거주 중인 베트남 출신 유학생 조이는 새삼스러움을 느꼈다.
“초대에 감사드립니다.”
이제는 몸에 많이 익은 영국의 예법대로 파티의 호스트, 벤저민 디즈레일리 재무부 장관에게 인사했다.
“대영제국을 찾아주신 귀한 손님께 최대한 좋은 것만 많이 보여드리고, 경험하게 해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디즈레일리는 수염을 쓰다듬었다.
“조만간 더비 백작께서 정계에서 은퇴하신다는 이야기가 돌던데, 사실인가요?”
더비 백작 에드워드 스미스스텐리, 현 보수당의 1인자에 대해 묻자, 디즈레일리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뭐, 전쟁과 전후 수습 관련해서 건강을 제법 해치셔서… 하지만 본인께서 은퇴 의사를 명확하게 밝히신 적은 없습니다.”
조이는 지금 누구보다도 총리의 은퇴를 간절하게 바라고 있을 사람이 눈앞의 정치인이라는 데에 전 재산을 걸 수 있었다.
총리가 은퇴하면 다음 보수당의 대표는 자신의 눈 앞에 있는 사람이 될 것이고, 당연히 총리직도 그가 물려받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공작님께서 함께 오셨으면 더 좋았을 텐데요. 런던이 많이 바뀌기는 했죠?”
조이는 속으로 한숨을 푹푹 쉬었다. 빨리 여기서 빠져나가고 싶었다. 안 보는 척하면서도 자기 허리춤을 훑는 주위의 시선도 짜증나기 그지없었다.
‘홍보를 하고 싶으면 자기가 직접 입고 와서 할 것이지 왜 애먼 나한테 시켜?’
젠티안 공작이 저 극동에서 21세기 식으로 슥슥 그려서 디자인하고, 그걸 연이 조금 더 손 본 ‘이스턴 드레스’를 입은 조이는 속으로 앓는 소리만 냈다.
사실 21세기의 의상 디자이너에게 물어본다면 아오자이도 아니고 치파오를 대충 섞어서 디자인한 이도저도 아닌 옷이라는 평가를 받을 가능성이 높지만, 애초에 아오자이는 있지도 않은 시대에, 1920년대 이전의 중국인에게 21세기의 치파오를 보여줘도 이게 어딜 봐서 치파오냐는 답을 들을 테니 젠티안 공작은 눈곱만큼의 죄책감도 없이 치파오공정을 벌일 수 있었다.
이게 베트남 전통복이 되든 한국 전통복이 되든 간에 그걸 사들일 유럽의 ‘신사’들에게 중요한 건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착용 당사자인 조이는 자기 머릿속에 자기 언니에게 보낼 5700자짜리 항의 내용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다리 노출이 너무 심해서 하체에 자신 없는 사람은 안 입을 거 같은데, 그리고 뭣보다 너무 조이잖아. 또 신발은 뭐가 이렇게 굽이 높아?’
이거 입고 식사가 가능하긴 하겠냐, 나니까 이런 굽 높은 구두 신고 돌아다니지 이거 까딱하다가는 발목 부러지겠다, 자기가 입어보지도 않고 보냈냐면서 속으로 그녀가 구시렁거리든 말든, 파티장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효과는 확실하게 보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옷은 혹시 동양의 전통복장입니까?”
“네.”
물론 베트남에서 살 때도 이딴 건 본 적도 없긴 했지만, 일단 그렇게 대답한다. 이것도 편지에서 시킨 대로였다.
서양 사람들은 원래 동방의 전통적인 뭐시기 이런 거에 환장하거든? 그러면서 그게 진짜인지 확인하려고 들지는 않아, 자기들 눈에 그럴듯하면 그런가 보다 하지, 그러니까 일단 전통이냐고 하면 맞다고 해, 전통의상이라고, 이거 제대로 광고하면 금화가 쏟아질 거야, 본국의 구멍 숭숭 뚫린 재정에도 어느 정도 보탬이 되겠지.>
‘그놈의 돈, 돈, 돈.’
돈 없이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건 알지만, 문득 자괴감이 들었다.
얼마 뒤, 밀려들어오기 시작한 주문 탓에 어마어마한 장부를 관리하게 된 조이는 자기 언니에게 다시 만나기만 하면 하이힐을 신고 지그시 발등을 밟아주겠다면서 이를 갈기 시작했다.
***
“흔한 건 귀하지 않지.”
나는 펜에 잉크를 채우면서 말했다.
“당연한 소리 아닌가요?”
“내가 디자인한 이스턴 드레스는 그 특성상 기성품이 없어, 몸에 딱 달라붙으니까 전부 맞춤제작을 해야 하지. 기장도 본인 취향에 따라 맞춤제작, 거기에 옷은 전부 최고급 비단에 보석 같은 것도 달고, 금실 은실로 자수도 놓는다?”
당연히 그 비용은 억 소리가 절로 나올 수밖에 없다.
“거기에 한 세트로 파는 하이힐도 맞춤인데 그것도 어디 한두 푼 하냐? 당연히 재료들은 다 최고급이고.”
그러니까 가격은 천문학적으로 올라가고, 물건이 시장에 풀리는 속도도 느릴 수밖에 없다.
“귀족들이나 부르주아들이 환장을 하는 게 당연하지,”
애초에 우리가 아는 치파오는 중국의 전통복장이나 만주족의 전통복장과는 많이 다르다. 애초에 1920년대에 만주족 전통 의복에 서양식 의복의 특성이 섞여들어가서 새롭게 생성된 거니까. 아오자이는 응우옌 왕조 시절에 입던 옷을 30년대에 몸에 달라붙는 방식으로 재구성한 거니까 논외고. 둘은 기본적으로 아무런 관련도 없다.
당장 그 옆트임만 봐도 여자가 말 탈 때 편하라고 틔워놓은 거다. 주변 사람 눈요기하라고 틔워놓은 게 아니다. 괜히 치파오가 중화민국 시기에 여성해방의 상징이 아니었다니까?
막말로 지금 그 옷들과 조이가 입고 돌아다니고 있는 옷은 이름만 빌려온 수준으로 차이가 크다. 그리고 바로 그래서 유럽과 미국에서 인기를 끌 수 있는 거고.
“졸지에 홍보대사로 만들어버린 건 좀 미안하네요.”
“미안하면 가서 교대할래?”
“아 그건 좀…… 그리고 참모로는 단순한 애보다는 제가 낫지 않은가요?”
“걔가 좀 단순하긴 하지. 그래서 보는 맛이 있는 거지만. 귀엽잖아?”
나는 벽에 걸린 지도를 힐끔 보았다.
“미국에도 팔아보라고 할까?”
“걔가 칼 들고 극동으로 쳐들어오는 거 보고 싶지 않으면 적당히 부려먹으시는 게…”
“조이는 머리가 나쁜 게 아냐, 머리를 쓸 생각을 안 하는 거지. 잔머리는 또 지독하게 굴리잖아?”
“그거랑 이건 좀 다르지 않나요.”
“봐, 말로는 힘들다 힘들다 해도 재무지표는 거짓말 안 하거든?”
아무리 대박 상품이라고 해도 경영을 개판으로 하면 큰 수익을 올리기 어렵다.
그런 면에서, 조이의 경영 능력은 저평가될 수 없었다.
“약속대로 배당금은 지급될 거야, 현물로.”
기계, 공장 노하우.
근대화를 위한 비용들.
후발주자로써 근대화를 하려면 빚 위에 빚을 쌓는 수밖에 없기에, 이러한 상품들을 선점하는 것만으로도 적잖은 도움이 되리라.
“감사합니다.”
잠시 대화가 끊겼다. 그러고서는 천천히 조연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공작님.”
“응?”
“윤회란 게 있을까요.”
“……….”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죽고 난다면, 우리에게 다음이란 게 있을까요.”
“……… 없으라는 법도 없지.”
나는 내가 왜 이곳에 환생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내가 다음에 21세기 한국에서 환생을 할지, 아니면 어디 좀 다른 세계관에서 3회차를 뛸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마 누군지 모르지만 나를 과거로 돌려보낸 존재, 인간인지 신인지 외계인인지는 몰라도 그런 존재만이 알지 않을까.
“동양과 서양의 차이 중 제게 가장 와 닿았던 건, 동방에서는 능력이 있는 인물은 아내를 여럿 들여도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여기서는 아니라는 거에요.”
그녀의 눈은 밤하늘이 가득 담긴 듯이 빛났다.
“그게 참 아쉬웠어요.”
그녀의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는 비가 온 직후의 흙처럼 약간 촉촉해져 있었다.
“당신을 좀 더 일찍 만났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있지만, 이미 지난 일을 아쉬워하다 보면 앞으로 나아갈 때를 놓치기 마련. 질투하는 건 아니에요. 그저 저와 관련이 없고, 앞으로도 없을 일에 대해 아쉬움을 표할 뿐.”
우리의 관계는 공식화되는 것이 오히려 마이너스가 되는 관계.
내연, 불륜, 뭐라고 해도 좋다. 그냥 그런 관계로 시작하고, 그런 관계로 끝나는 것이 서로에게 최선인 관계다.
관계를 유지하되 서로를 구속하지 않는, 구속할 수도 없는 관계. 정치적 리스크를 최소화하는 관계.
설령 내가 홀몸이라고 한들 나는 그녀와 결혼할 수 없다. 해서도 안 된다. 서로에게 리스크만을 안겨주니까. 그리고 그녀도 그걸 매우 잘 알고 있었다.
“이번 생에서는 한 남자의 아내로 살아가는 건 글렀으니, 다음 생을 노려본다. 말도 안 되는 상상은 아니잖아요?”
“………. 난 작가다.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게 내 일이지.”
나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별들이 무수하게 뿌려져 있었다.
알파 센타우리, 베텔기우스, 시리우스, 포말하우트, 데네브. 뭐, 내가 보는 별이 정말 그 별들인지는 모른다. 그냥 아는 별들 이름을 마구잡이로 불러볼 뿐.
“그런 내가 만들었던 첫 번째 이야기가 있는데, 누구에게도 들려준 적은 없어.”
나는 눈을 감았다.
“많이 허무맹랑한 이야기인데. 재미도 없을 거고. 그래도 들어보겠어?”
“해줘요.”
“….. 소년은 고아였다.”
친부모가 누군지는 모른다. 기억도 나지 않는 시절 양부모에게 입양되어 양부모를 친부모로 알고 자랐지만. 우연한 기회에 자신이 친자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의 양부모는 친자식이 없었다. 그도 양모가 병석에 누웠을 때 흘린 몇 마디에서 의혹을 품고 그 실마리를 따라가서 그 증거를 찾아내지 못했다면 평생 자신이 양부모가 몇 번의 유산 끝에 어렵사리 낳은 친자식이라고 생각했으리라.
그럼에도 소년은 그의 양부모를 사랑했기에, 자신이 알고 있다는 것을 입밖에 내지 않았다.
어쩌면, 그는 사회의 적당한 상류층으로써 편안히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의 양부모는 명백히 기득권의 일부였으니까, 부모의 재산만으로도 손자 대까지는 넉넉히 먹고살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몸을 담고 있던 국가는 이미 미증유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내우외환. 외국은 침략하려 하고, 국내에서도 뒤흔들리는 혼란.
그는 기득권이었다. 무엇을 하려고 하든 집안의 후광만으로도 한 자리 차지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외국으로 도망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도저히 못 봐줄 상황이었다. 그래서 손을 뻗었다. 잡힐 것 같았으니까. 내가 잡고 칼을 휘둘러대면 바꿀 수 있었을 거 같았으니까. 그래서 잡았다. 아버지의 후광이든, 내 능력이든, 뭐든 동원해서 손에 움켜쥐었다. 이제 길이 열린 듯 했다. 숨이 끊어질 때까지 달려나가면 될 줄 알았다.
실패했다. 세상은 내 생각처럼 쉽게쉽게 굴러가지 않았다. 방관자는 우리를 버렸다. 배신자는 등에 칼을 꽃았다, 침략자는 그 음흉한 눈길을 우리에게 향하며 입맛을 다셨다. 그래서 최후의 수단까지 동원했다. 그러고도 실패했다.
정말 끝인가 싶었을 때 한 줄기 희망이 보였다. 그래서 도박수를 던졌다.
그마저도 실패했다. 그때, 나는 진정으로 하늘을 원망하고, 결심했다.
방관자의 비겁함 속에서 배신자와 침략자 사이에서 우리가 무너져야 한다면, 네놈들의 눈깔은 후벼주고 가겠다고. 전부 다 찢어죽여버리겠다고.
그마저도 허락되지 않았다. 그 순간, 나는 모든 희망을 버렸다.
“결국 승자는 없었지, 모두가 패배했을 뿐이야.”
“암울하네요. 소설로 쓰면 잘 안 팔릴 것 같은 내용이에요.”
“그래서 출판 안 한 거지.”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마치 운명 같지 않은가.
모든 걸 다 포기하고 절망의 심연으로 몸을 던지고서야 시간을 거슬러 새로운 기회가 주어진 것은 얼마나 얄궂은가.
“함무라비 법전에 대해 알아?”
“그게 뭔가요?”
눈을 찌른 자 그 눈을 뽑고 이를 빠지게 한 자 그 이를 뽑는다.
재미있게도 이건 잔인한 복수법이 아니라, 피해를 입은 만큼만 제발 보복하라고 보복의 한계선을 정해놓느라 만들어진 법이라는 게 현대의 통설이었다고 기억한다.
중국을 내 손으로 쪼갤 수는 없다. 그건 영국의 국익에 부합하지 않으니까.
내가 움직이는 건 최소한 대외적으로 이 나라의 국익에 부합해야 한다. 내가 강한 게 아니라 나는 이 나라의 힘을 빌려다 쓰고 있을 뿐이니까, 그걸 잊으면 그 대가를 치르게 될 터.
하지만 두고두고 피눈물이 흐르게 만들어줄 수는 있을 거다.
군자의 복수는 10년이 지나도 늦지 않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국민을 대표해 하는 복수는 100년이 일러도 너무 빠르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