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incarnated Fallen sword emperor RAW novel - Chapter 115
115화. 들를 곳 (3)
나는 뚫린 문 가운데에 버티고 선 채 정면을 향해 월영검을 뻗었다.
내지른 검끝이 얼음창의 뾰족한 창끝에 정확히 닿자,
파스스!
단단한 얼음창이 단번에 박살났다.
조각난 얼음이 만들어낸 뿌연 안개 사이로 내가 느릿느릿 걸음을 내디뎠다.
뿌연 안개가 걷히자 일그러진 한수길의 얼굴이 또렷하게 보였다.
“어띠 이리 무례하게 행동허시오?”
“무례?”
“…훈련소장을 살해한 책임은 내 묻디 않갔소. 나럴 방문허신 용건을 말씀하신다면 내 귀담아들으리다.”
“용건?”
“걸음허신 이유 말이오.”
한수길은 대화를 이으려 필사적이었다.
이 높은 곳에서 순찰단이 박살나고 경호단이 박살나는 광경을 모두 확인하고 기습까지 실패하자 자신의 무위로는 답이 없다는 결론을 내린 모양이다.
공주와 애들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 사이 어디론가 피신을 시킨 듯했다.
애들 앞에서 아빠 후드려 패기가 마음에 걸렸는데 아주 잘 되었다.
나는 입술 끝을 들어 올리며 팔짱을 꼈다.
“용건, 있지. 있고말고.”
“바라는 거이 있으시다면….”
퍼억.
대가리를 후려 맞은 놈이 대번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내력을 꽤나 실었으니 아프기는 아플 거다, 이놈아.
“누구시오. 대체 나에게 왜 이러시….”
놈이 억울한 표정으로 주절거렸다.
왜 이러시기는. 이러려고 왔으니까 이러지.
“이게 내 용건이다, 이놈아.”
퍼억. 퍽. 퍼억. 퍼버버버버버버버버벅.
월영검의 검집이 현란하게 움직였다.
한수길 놈이 저항을 했으나 결과에 영향은 미치지 못했다.
스페셜 서비스로다가 분근착골까지.
잠시 후.
풀코스를 맛본 한수길은 무릎을 꿇고 내 앞에 앉았다.
얼굴이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었다.
“이러디 마시고, 제발 말씀을, 말씀을 허시디요…….”
놈은 여전히 삶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았다.
아무튼 끈질긴 놈이다.
그러게 왜 준 걸 다시 내놓으라고 지랄이니.
그 보도가 끝내주기는 하다만, 사람이 미련을 버릴 줄 알아야지.
나는 놈의 앞에 짝다리를 짚고 섰다.
얼굴을 덮은 인피면구를 천천히 벗자, 놈의 눈이 실시간으로 확장되었다.
한수길의 동공이 거칠게 흔들렸다.
“…계룡, 검룡….”
“그래. 계룡검룡이다, 이 새끼야. 이제 왜 처맞았는지 알겠냐?”
잘도 나불거리던 주둥아리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독황? 그 따위 놈에게 암살 의뢰를 해? 그래놓고 발 뻗고 편히 잠이 오디?”
“아닙네다! 절대로, 검룡님의 암살을 의뢰허디는 않었습네다! 저이 그런 무도헌 생각을 한 적도 있었디만, 그날의 신위를 목격허고, 불가능허다는 사실을 깨달… 으악! 저이 그저 보도럴, 보도럴 되찾고 싶은 마음에… 악!”
“누가 들으면 내가 도둑놈인지 알겠네. 내가 쌔볐냐? 네놈이 주기로 했잖아. 네놈이 약조하는 말을 들은 귀가 몇 개인데. 되찾아? 되찾기는 뭘 되찾아.”
“악! 으악! 으으… 악! 윽! 죄송, 합네다. 너무 아쉬운 마음에 잘못된 행동을 했습네다.”
한수길은 납작 엎드렸다.
몸으로도 엎드렸고 말로도 엎드렸다.
언행일치가 잘되는 놈이다. 그 속마음이야 어쩐지 모르겠지만.
나는 놈의 뒤통수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피 묻은 목덜미가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진작부터 나는 한수길을 죽이지 않기로 결정했다.
배알이 뒤틀리는 일이지만, 사람 목숨의 무게는 같지 않기 때문.
700년 전에도 그랬고, 한지혁의 세상에서도 그랬고, 블랙데이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한수길은 조선국왕의 사위.
놈을 죽이면 자칫하면 전쟁으로 이어질지도 모른다.
전쟁은 언제나 최후의 수단이어야만 한다. 분명 누군가가 죽고, 그 누군가는 아마 내가 아닐 테니까.
그리고…….
‘그 애기들한테 원수 취급받고 싶지도 않고.’
퍼억.
월영검의 검집이 놈의 목덜미를 거세게 후려쳤다.
놈의 악문 이빨 사이로 억눌린 신음이 샜다.
“입 벌려.”
한수길은 되묻지 않고 시키는 대로 했다.
피 묻은 주둥이와 깨진 이빨 사이로 내가 깊숙이 손을 집어넣었다.
“삼켜.”
꿀꺽.
한수길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그리고, 곧 놈이 눈을 까뒤집기 시작했다. 피 묻은 입술 사이에서 피가 질질 흘렀다.
나는 바닥을 기며 꿈틀대는 놈을 가만히 응시했다.
금잠고독환(金蠶蠱毒丸).
나에게 독환을 빼앗긴… 아니, 선물한 당가주가 설명한 대로라면 천 년 묵은 금잠에게서 채취한 고독(蠱毒)과 만 마리 전갈의 독에다가 백사(白蛇)의 독과 또 이러저러하고 저러이러한 독을 섞어 제조한, 당문에서도 딱 12개밖에 없는 스페셜 독환이다.
세트로 제조한 해독약을 제외하고는 절대로 그 누구도 해독할 수 없는 최고최상의 독환이라고 했다.
워낙 과장이 심한 인간이었던지라 다 믿을 수는 없지만 이걸 나에게 빼… 아니, 선물할 때 당가주의 미련 뚝 뚝 떨어지던 똥 씹은 표정을 생각하면 좋기는 좋은 독환이겠지.
독환과 함께 월악의 비동에서 찾은 자소단과 태청단은 내 내력으로 화한지 오래.
원래는 이 독환을 내력으로 흡수해 만독불침을 이룰 생각이었으나 아직 대환단도 다 소화시키지 못한 판이라 일단 미뤄둔 참이었다.
“으… 으으…….”
비비적대는 한수길의 입에서 언어가 되지 못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천만 마리의 벌레가 혈관을 기어다니는 듯한, 이루 말할 수 없는 지독한 고통이라던가.
“그러게 왜 내 뒤를 노려.”
물론 대답은 없었다. 한수길은 대답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므로.
발작은 5분 만에 멈췄다.
동공이 풀린 놈이 비척거리며 무릎을 꿇고 앉았다. 제정신이 아닐 텐데도 동작이 빠릿빠릿한 것이 아주 기합이 빡 들었다.
나는 한수길에게 친절히 설명을 해 주었다.
“네가 먹은 건 독환이야. 앞으로 한 달에 한 번 지금처럼 발작을 할 거야. 열두 번 발작할 때까지 해독약을 먹지 못하면 지금과 같은 고통 속에서 사망하지.”
한수길의 창백한 낯빛이 새파랗게 질렸다.
“내 목을 노린 새끼 목숨을 일 년이나 연장해 주었는데 어째 반응이 좀 그렇다?”
“…감, 감읍하옵네다…….”
“감읍까지는 필요 없고.”
“감사합네다…….”
“해독술사가 해독 못할 테니까 괜히 헛수고하지 말고. 뭐, 헛수고하고 싶다면 막지는 않을게.”
이 정도면 대충 알아들었을 테고.
본론으로 들어갈 시간이다.
“자. 해독약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원하시는 것을 말씀만 허시디요. 저이 어띠해서라도 꼭 마련허겠습네다. 어떤 것이라도 말씀만 허시면….”
시키기만 하면 10톤짜리 금괴라도 대령할 기세다.
이 기회에 원산성 기둥뿌리를 뽑아 계룡문 창고를 가득 채우면 개꿀인데 말이지.
하지만 행협멸악 구약보세를 문훈으로 삼는 월악문의 개파시조로서 그런 사파 새끼들이나 하는 짓을 할 수는….
“일단 가진 거 다 내놓고, 한 달 뒤에 올 테니까 일억 돈 준비해두… 악! 왜 때려, 형!”
불쑥 끼어들었던 김강산이 억울한 목소리로 외쳤다.
“우리가 사파 새끼냐? 아무한테나 돈 뜯어내게?”
“저 새끼가 왜 아무야! 저 새끼가 암살자한테 의뢰해서 우리가 얼마나 개고생했는데! 보상받아야지!”
어… 그런가.
한수길이 재빠르게 반응했다.
“당연허디요. 제 잘못으로 고생허셨는데 당연히 보상을 해드려야디요. 가시는 길에 단단히 챙겨 드리갔습네다.”
그 정도는 받아도 되겠지.
내가 그 본체놈 잡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말도 못 한다.
“받고, 추가할게.”
“예. 무엇이든디 말씀하시디요.”
한수길이 공손히 고개를 처박았다.
“훈련소에서 애들 학대하지 않게 해. 그리고 보육원 세워서 부모 잃은 애들 제대로 돌보고.”
원산성에는 부모 없는 애들이 꽤나 많았다. 허름하고 찢어진 옷을 입은 아이들은 장마당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입에 풀칠을 했다. 비쩍 마른 아이들이 자기 몸통만한 물통을 지고 다니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한수길이 알겠다 대답하며 고개를 깊이 숙였다.
여기까지는 행협멸악 구약보세를 문훈으로 삼는 월악문의 개파시조로서 하는 말이었고.
지금부터는 서림으로서 하는 말이다.
“그리고, 고개 좀 들어봐.”
한수길이 눈물콧물핏물로 범벅된 얼굴을 들었다.
그 눈동자가 내 검지가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빠릿하게 움직였다.
뻥 뚫린 문을 막고 서 있는 김강산의 등에는 거도가 매달려 있었다.
진룡보도…였다가 이제 좌룡보도로 이름이 바뀐 거도.
도집에 새겨진 화려한 양각,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용은 도집을 둘둘 말아 둔 오크 가죽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꼴은 저 모양이지만 뭔지 알겠지?”
“…진룡보도 아닙네까.”
“저게 꽤 좋더라고. 성주님이 미련 가질 만해.”
처음 봤을 때부터 좋은 도라고 생각은 했다.
하지만 사용해보니 단순히 좋은 수준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보도 중의 보도.
아주 날카롭고, 아주 단단하고, 탄력까지 갖추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력감응력이 끝내줬다.
무인에게 좋은 무구란 목숨을 걸만한 가치가 있다.
검황이던 시절, 전대 고수 천륭검제의 무덤이 발견되었을 때도 강호에 한바탕 피바람이 불었었다. 그곳에 묻혀 있다던 비급과 보검, 영약을 노린 이들이 그야말로 구울 떼처럼 바글바글 몰려들었다.
천륭검제의 무덤 앞에서 펼쳐진 급작스러운 무공 대결에서 나에게 대갈팍 깨지도록 후려맞은 놈들이 백은 넘었다.
자신들의 무위로 나에게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서도 얼마나 끈질기게 덤벼들던지.
사흘 밤낮으로 이어진 무공 대결의 끝에 소화는 은영신녀라는 이름을, 설표는 질풍검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또한 나는 해동검황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말하자면 좋은 무구란 그토록 무인들의 눈깔이 뒤집히게 만든다는 거다.
더군다나 저 보도에서 풍기는 기운은…….
‘닮았어.’
아주 미약하지만, 분명히 닮아 있다.
추혼마인에게서 나온 암핵(暗核)에서 풍기는 그 기운과.
“지금 내가 뭐를 좀 물어볼 건데. 생각이 안 나도 꼭 생각해 내는 게 좋을 거야.”
일단, 보도를 만든 사람을 만나야겠다.
“저거. 제작자가 누구야?”
한수길이 데굴데굴 눈을 굴렸다.
“딴생각 하지 말고.”
“아닙네다! 절대로, 그런 건 아닙네다만…….”
“말해. 당장.”
“그거이, 저도 진실로 모르는 일이라…….”
창백한 낯빛을 보니 진짜로 모르는 얼굴이었다.
국왕이 하사했다고 하니, 조선국왕이라도 찾아가야 하나.
…국왕이 나를 반기지는 않을 텐데.
뻥 뚫린 문 뒤에서 안미령이 조용히 나타난 것은 그때였다.
“…검룡님, 좌룡님. 다시 뵙습네다.”
“공주! 여기가 어데라고 왔소. 숨어 있으라니까!”
한수길이 애처롭게 외쳤다.
꼴이 엉망인 남편을 잠시 살핀 안미령의 시선이 이내 나에게 되돌아왔다.
어째 올 때마다 남편 패는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미안하지는 않고, 아무래도 안미령이 결혼을 잘못한 것 같은데.
“잘 있었어요?”
“…예.”
“공주님 남편한테 뭐 좀 물어보던 중이었어요.”
“밖에서 들었습네다.”
중간부터 기운이 느껴지기는 했었다.
애들을 피신시키고 되돌아온 듯했다. 이런 새끼도 남편이라고 걱정이 되었나 보지.
안미령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제가 검룡님께서 바라시는 답을 드릴 수 있을 듯합네다만.”
아, 맞네.
얘 공주였지.
***
안미령은 숨을 들이쉬며 생각을 가다듬었다.
‘외인에게 이리 긴한 이야기를 털어놓아도 될는디.’
확신은 서지 않았다.
막연한 기대일 따름이다. 눈앞의 미청년, 계룡검룡이라면 이 조선국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으리라는 기대. 아주 막연하고 불확실하고 무책임한 기대.
‘아바이께서 잘못허시는 것일까.’
굶주리고 헐벗은 신민들을 마주칠 때면 가끔 그런 생각을 떠올렸었다.
자주 하는 생각은 아니었다.
어렴풋한 회의감은 흐릿하게 떠올랐다가 금방 사라지곤 했다.
하지만.
이번에 계룡검룡에게 납치를 당했다가 돌아온 후로 그 생각은 줄곧 머리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공주가 된 후로 성벽 바깥으로 나가본 일은 두 번째였다.
왕성에서 원산성으로 올 때. 그리고 이번에 납치를 당해서.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성에서 이동되었으니 분명히 납치이기는 했다. 납치이기는 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