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life Agent RAW novel - Chapter (301)
리라이프 에이전트-301화 (완결)(301/301)
301. 슬슬 다시 활동을 시작할 때가 되긴 했지.
보름 뒤, 뉴욕 웨스트 29번가.
평소라면 오가는 차들과 행인들로 붐볐겠지만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거리가 한산했다.
감염 우려에 대부분의 회사들이 사무실을 폐쇄하고 재택 근무를 실시하면서 빌딩들 상당수가 불이 꺼진 채 텅 비었다.
그러자 손님이 확 줄어든 가게들 역시 문을 닫으며 임시 휴업에 들어갔다.
그나마 간간이 보이는 사람들도 마스크를 쓴 채 타인과 접촉을 최대한 꺼리며 지나가는 모습이었다.
여기가 뉴욕이 맞나 싶을 정도로 활기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고 황량한 분위기마저 느껴지는 가운데 흰색 토요타 랜드크루저 한 대가 나타나 도로 한쪽에 멈춰 섰다.
이내 차문이 열리며 마스크를 쓴 건장한 사내 셋이 내렸다.
키노와 토레스 그리고 휴즈였다.
야구모자에 남색 바람막이를 걸친 휴즈가 꽤 낡아 보이는 20층짜리 빌딩을 올려다보면서 물었다.
“제대로 온 거 맞지?”
“몇 번이나 묻는 거야. 방금 네비도 확인했잖아.”
토레스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대꾸했다.
여기까지 오는 도중에도 계속 옆에서 주절대는 탓에 한 대 쥐어박고 싶은 걸 겨우 눌러 참고 있는 상태였다.
선글라스를 쓴 키노가 주변을 둘러보곤 손에 든 보스턴 백을 꽉 움켜쥐었다.
“들어가 보면 알겠지.”
그렇게 말하면서 먼저 걸음을 떼는 키노의 뒤로 휴즈와 토레스가 나란히 따라붙었다.
유리문을 열고 작은 로비로 들어서자 유니폼을 입고 허리에 권총을 찬 경비원이 무료한 얼굴로 한쪽에 앉아 있다가 세 사람을 막아섰다.
“여긴 어떻게 오셨습니까?”
“402호에 볼일이 있어서 왔습니다.”
토레스가 카드로 된 빌딩 출입증을 내보였다.
“거긴 사용을 안 한 지 벌써 몇 달이 됐는데…….”
반쯤 내리깐 눈으로 출입증을 확인한 경비원이 의심스러워하는 시선으로 일행을 쳐다봤다.
“별건 아니고 안에 보관해둔 짐만 가지고 나오면 됩니다.”
“흠.”
척 보기에도 덩치 크고 근육질인 남자 셋이 함께 몰려다니는 게 약간 수상하긴 했으나 출입증을 가지고 있으니 딱히 막을 이유가 없었다.
경비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옆으로 비켜서자 세 사람은 로비 왼편에 있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곧장 4층으로 향했다.
양쪽으로 사무실이 쭉 늘어선 복도는 대낮인데도 군데군데 조명을 꺼놔서 어두컴컴했다.
사무실 대부분이 팬데믹으로 인해 임시 폐쇄한 상태인지 인기척 하나 없이 조용하기만 했다.
“여기 사무실들은 다 빈 것 같은데?”
“그럼 더 잘 됐지.”
휴즈의 말에 토레스가 주변을 살피며 말을 받았다.
그때 앞장서서 걷던 키노가 복도 왼쪽에 붙은 철문 앞에 멈춰 섰다.
“여기네.”
굳게 닫혀 있는 철문에는 402호라는 팻말이 붙어 있었다.
키노가 주머니에서 민성한테 받은 열쇠를 꺼내 구멍에 넣고 돌리자 철컥하는 쇳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손잡이를 밀고 들어가자 꽤 넓은 사무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50평 남짓한 크기에 정면에 나 있는 커다란 창문으로 햇빛이 쏟아지고 있어서 불을 켜지 않고도 내부가 환하니 밝았다.
ㄱ자 모양으로 붙여 놓은 책상들은 먼지가 쌓이지 않게 커다란 천으로 덮여 있었고 구석엔 종이박스와 의자 복사기 같은 사무용 집기들이 쌓여 있었다.
내부를 둘러본 키노는 손에 들고 있던 보스턴 백을 바닥에 내려고는 왼쪽 벽을 주먹으로 노크하듯 가볍게 두드렸다.
퉁퉁.
안이 빈 것 같은 소리에 눈을 반짝인 키노가 몸을 돌려 휴즈와 토레스에게 말했다.
“민성이 말한 대로네. 이거 가벽이야.”
그러자 휴즈가 한껏 기대에 부푼 얼굴을 했다.
“일단 거짓말을 한 건 아니네. 그럼 이 안에…… 그게 있다는 거지?”
토레스가 바닥에 내려둔 보스턴 백에서 쇠로 된 망치를 꺼내 들었다.
“지금부터 확인해 보면 알겠지.”
가벽 앞으로 간 토레스가 망치를 들어서 세게 내려치자 석고 보드와 목재가 힘없이 부서지며 구멍이 뚫렸다.
망치 뒤에 달린 빠루로 석고 보드를 뜯어낸 토레스가 가볍게 휘파람을 불었다.
“어이, 이것 봐.”
투명한 비닐로 밀봉된 채 가벽 뒤에 숨겨져 있던 현금 뭉치 일부가 일행의 눈앞에 살짝 드러나 있었다.
“가벽 전체가 이런 건 아니겠지?”
“설마 그렇기야 하겠어.”
그 사이 보스턴 백에서 쇠지렛대를 꺼내 온 키노가 두 사람을 향해 뭐하냐는 듯 말했다.
“잡담하지 말고 빨리 움직여. 이걸 다 뜯어내야 하는데 언제까지 놀고 있을 거야.”
굵은 팔뚝에 힘을 불끈 준 키노가 쇠지렛대로 가벽을 마구 부수기 시작했다.
그걸 본 휴즈와 토레스도 잡담을 멈추고 쇠망치를 휘두르는 데 집중했다.
잠시 뒤 가벽을 전부 부순 일행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눈을 한껏 크게 떴다.
설마 했던 대로 사무실 한쪽 벽 전체가 투명한 비닐로 밀봉된 현금 뭉치들로 가득 차 있었던 거였다.
벽돌처럼 사람 키보다 더 높게 현금 뭉치들이 벽을 따라 빽빽하게 쌓여 있는 걸 보면서 휴즈가 입을 떡 벌렸다.
“미친…… 이게 다 얼마야.”
“수천만 달러는 될 것 같은데.”
토레스 역시 떨리는 눈동자로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한참 동안 현금 뭉치들을 쳐다보던 키노가 고개를 돌려 바닥에 놔둔 보스턴 백을 보고 중얼거렸다.
“저걸 다 가져가려면 가방이 더 필요하겠는데.”
고작 보스턴 백 하나로는 몇 번을 왕복해도 옮기지 못할 양이었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현금 뭉치를 하나 빼낸 휴즈가 비닐을 벗기고 진짜 돈임을 확인했다.
“제대로 한몫 챙겨준다더니 진짜였잖아.”
민성이 여기에 의뢰비로 줄 현금을 숨겨놨다고 해서 오긴 했지만 이렇게나 많을 줄은 몰랐다.
“그 녀석 성격이 좀 화끈하긴 하지.”
“돈 쓸 때는 확실하게 쓸 줄 안다니까.”
저절로 위로 솟구치는 입꼬리를 숨기지 않으며 키노와 토레스도 머리를 끄덕였다.
****
평일 낮이라 빈자리가 많은 아파트 지하주차장 한쪽 기둥 옆에 BMW X6 한 대가 시동을 끈 채 세워져 있었다.
어두운 운전석에는 민성이 앉아 전화를 하고 있었다.
[이걸 정말 다 나한테 주겠다고?]귀에 댄 스마트폰에서 들리는 박원곤의 목소리에 민성이 담담히 말했다.
“여러 번 돌려서 깨끗하게 세탁한 돈이니까. 안심하고 써도 될 거야.”
[그게 아니라 액수가 이게 맞냐고.]“왜. 부족해?”
민성이 푹신한 가죽 시트에 몸을 기댄 채 물었다.
[너무 많으니까 문제지.]“가족들의 목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뭐 그렇다면 사양하지 않고 받겠어.]박원곤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진심 어린 어조로 말했다.
[그건 그렇고 일이 잘 마무리돼서 다행이야.]“그래.”
민성이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도와줘서 고마워.”
[나야 돈을 받은 만큼 일한 거니까. 다음에도 필요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불러줘.]“그러지.”
민성은 짧은 인사를 건네고 통화를 끝냈다.
별거 아닌 것처럼 이야기했지만 쉽게 나서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손을 떼지 않고 끝까지 도와준 박원곤에게 민성은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꼈다.
그때 차 앞유리창 너머로 공동 현관문이 열리며 고서정이 나오는 걸 본 민성이 스마트폰을 안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국정원 시절에 몸에 밴 습관대로 주위를 한번 둘러본 고서정은 곧장 차 가까이 걸어와 조수석에 올라탔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요?”
고서정이 약간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
“줄 게 있어서 불렀어.”
민성이 턱으로 뒷자리를 가리키자 고서정도 따라서 고개를 뒤로 돌렸다.
뒷좌석 시트 아래에 큼지막한 28인치 여행용 캐리어가 놓여 있었다.
“저게 뭐예요?”
“보너스야.”
“……?”
고서정이 얼굴에 물음표를 띄웠다.
“돈은 이미 받았는데요.”
“방금 말했잖아. 보너스라고.”
그러자 고서정이 다시 한번 여행용 캐리어를 쳐다보더니 설마 하는 얼굴로 물었다.
“혹시 저기에 현금이 들어있는 건 아니죠?”
“맞아. 10억이 들어있어.”
민성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 것과 달리 그녀는 금액을 듣자마자 눈을 찢어질 듯 크게 흡 떴다.
“10억이요?”
“그래.”
“…….”
“보너스를 확실히 챙겨주겠다고 약속했었잖아. 자리를 비운 동안 가족을 안전하게 지켜줘서 고마웠어.”
CIA의 추적을 피해 강릉에 있는 전원주택으로 피신했을 때 그런 이야기를 했던 걸 떠올린 고서정은 얼굴을 환하게 밝혔다.
“보너스가 10억이라. 이거 일할 맛 나네요.”
활짝 웃은 고서정이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왕 챙겨주시는 거니까 사양하지 않고 받을게요.”
역시나 예상했던 반응에 민성이 피식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저, 그런데 카페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예요?”
“누나가 계속하고 싶다고 해서 수리를 한 다음에 다시 영업을 시작할 거야.”
“아 그래요…….”
왠지 아쉽다는 투로 고서정이 말끝을 흐렸다.
“그래서 말인데 카페를 열면 다시 나와서 일해 줄 수 있어.”
“네? 저요?”
고서정이 놀란 듯 되물었다.
“다시 카페 일을 하라는 거예요?”
“정확히 말하면 카페 직원 겸 경호원이지.”
민성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CIA하고 엮인 악연은 매듭을 지었지만 알다시피 내가 하는 일이 그렇다 보니 어떤 위협이 있을지 모르잖아. 그래서 괜찮다면 지난번에 했던 계약을 연장하고 싶어.”
이제 와서 다른 경호원을 구하는 것도 번거롭고, 무엇보다 누나와 많이 친해지고 신뢰하는 만큼 고서정이 적격이었다.
“할 생각 있어?”
“네! 그럴게요.”
고서정이 기다렸다는 듯 기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안 그래도 그녀 역시 최지영을 비롯한 카페 사람들과 정이 많이 들었던 터였다.
게다가 나름 바리스타 일도 적성에 맞았는데 앞으로 함께 못 한다고 생각하니 속으로 아쉬워하던 차였기에 냉큼 제안을 받아들였다.
“잘됐네.”
그 역시 이번 일을 통해 확실히 믿을 수 있게 된 고서정이 누나 옆에 있어 준다면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내일부터 바로 출근할까요?”
의욕적으로 묻는 고서정에게 민성이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은 내부 수리 중이라서 그럴 필요 없어.”
“아 그랬죠.”
“대신 일주일 뒤에 오픈 예정이니까 그때부터 나오면 돼.”
“알겠습니다.”
고서정이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
경기도 양평 옥천면.
구형 소나타 한 대가 구불구불하게 나 있는 좁은 1차선 도로를 따라 야트막한 야산 중턱으로 올라왔다.
고급스럽게 지어진 전원주택이 나오자 앞에 있는 자갈이 깔린 공터에 구형 소나타가 멈춰 섰다.
덜컥.
차 문을 열고 운전석에서 내린 건 바로 박상규 팀장이었다.
아니 이제 사표를 쓰고 국정원에서 나왔으니 더 이상 팀장이 아니었다.
최대한 조심했지만 민성과 팀원들이 어떻게 미국으로 건너갈 수 있었는지 국정원이 자체적으로 내사를 벌이는 과정에서 결국 박상규 팀장이 도와준 것이 드러나고 말았다.
이유가 뭐든 간에 직권을 남용해 수배범들의 도피를 도운 거였기에 옷을 벗고 국정원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지금까지 세운 공로가 있었기에 기소까지는 가지 않고 사표를 수리하는 걸로 일을 마무리 지었다.
물론 박상규 팀장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일을 크게 키우면 민성과 관련된 사건이 드러나게 되고 결과적으로 국정원 수뇌부들한테 득될 것이 없었기에 적당한 선에서 정리한 거였다.
어찌 됐건 결과적으로 박상규 팀장은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국가를 위한다는 일념 하나로 젊음과 열정을 바치며 헌신한 국정원에서 나와 지난주부터 백수가 되어 있었다.
아직 중년이라고 하기에도 뭣한 나이인 데다가 딸들도 어렸기에 퇴직금이 나온 걸로 정말 치킨집이라도 차려야 되나 고민하고 있을 때 민성에게 연락을 받고 여기로 온 거였다.
“멋지네.”
넥타이를 매지 않고 목 근처의 셔츠 단추를 편하게 두어 개 풀어 내린 박상규 팀장이 전원주택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2층 콘크리트 건물로 지어진 전원주택은 유명 건축가가 설계한 것처럼 아주 세련된 디자인에 고급스러운 느낌을 줬다.
이 집을 그대로 들어다가 강남에 있는 비싼 주택가에 옮겨놔도 위화감이 없을 정도였다.
전원주택의 외관을 잠시 감상하듯 쳐다본 박상규 팀장은 곧 걸음을 옮겨 본채를 돌아 정원으로 향했다.
원목 데크와 함께 잔디가 곱게 깔린 정원은 아주 넓고 관리가 잘 되어 있었는데 주변에 있는 수목들과도 매우 잘 어울렸다.
무엇보다 제일 멋진 건 탁 트인 전망과 함께 바로 앞에 내려다보이는 남한강이었다.
그리 높지 않은 산들과 넓고 푸른 강물이 시야에 함께 담기는 풍경은 그 자체만으로도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 같았다.
박상규 팀장은 정원 한가운데 있는 하얀 파라솔 테이블에 누군가 앉아 있는 걸 보고 가까이 걸어갔다.
“왔어요?”
선글라스를 낀 채 의자에 앉아 강을 바라보고 있던 민성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아주 멋진 곳이군.”
“마음에 듭니까?”
박상규 팀장은 비어 있는 맞은편 자리에 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곳에서 유유자적 낚시나 즐기면서 은퇴 생활을 할 수 있으면 그것보다 좋은 게 없겠지.”
박상규 팀장이 쓰게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물론 나 같은 소시민한테는 꿈같은 이야기겠지만 말이야.”
아무리 퇴직금이 있다고 해도 이런 멋진 집을 살 만큼은 못 됐다.
아니 무리를 하면 살 수는 있겠지만 그러고 나서는 먹고 살 일이 문제였다.
“그럼 그렇게 하면 되겠군요.”
“무슨 소리야?”
“여기서 원하는 대로 은퇴 생활을 즐기시라는 말입니다.”
민성이 말을 툭 내뱉고는 안주머니에서 현관 키 카드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렸다.
“사표를 쓰고 국정원에서 나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박상규 팀장은 키 카드를 힐끔 쳐다보고는 턱을 살짝 긁적였다.
“회사를 그만둔 건 맞지만 그렇다고 이럴 필요는 없어.”
“지난번에도 이런 곳에 집을 짓고 살고 싶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은퇴 선물이라고 생각해요.”
예전에 의뢰를 맡기려고 연락했을 때 비슷한 분위기의 카페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
그때 잠깐 나눴던 대화가 설마 이런 식으로 돌아올 줄은 몰랐던 박상규 팀장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걸 아직 기억하고 있었어?”
민성은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박상규 팀장을 쳐다보고 말했다.
“도와준 덕분에 일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으니 은혜를 갚아야죠. 어차피 이제 국정원 직원도 아닌데 받아도 문제 될 건 없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집 한 채를 덥석 받으려니 조금 망설여졌다.
하지만 곧 자신의 처지를 떠올린 박상규 팀장이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뭐 준다고 하니 거절하진 않겠어.”
“잘 생각했어요.”
민성은 느긋하게 앉아 있던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 그리고 이것도 은퇴 선물입니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 민성이 옆에 놔둔 대형 여행용 캐리어를 턱으로 가리켰다.
“뭐가 들어있는지 물어봐도 되나?”
“직접 확인해 보시죠.”
민성은 그대로 손을 흔들며 걸어갔다.
멀어지는 민성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박상규 팀장은 이내 묵직한 여행용 캐리어를 들어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지퍼를 내려서 캐리어를 활짝 열어젖히자 그 안에 가득 들어있는 5만 원권 현금 뭉치가 드러났다.
얼핏 봐도 10억은 훌쩍 넘을 금액이었다.
놀란 박상규 팀장이 얼른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민성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올 때 공터에 주차되어 있는 걸 봤던 BMW X5의 거친 엔진 소리만 멀리 들렸다.
“허, 나 참.”
캐리어를 가득 채우고 있는 현금 뭉치들을 내려다본 박상규 팀장은 이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이러면 굳이 치킨을 튀길 생각은 할 필요가 없겠네.”
박상규 팀장은 다시 의자에 앉아 다리를 쭉 펼쳤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강물을 감상하는 박상규 팀장의 얼굴에 어느새 미소가 가득 번졌다.
****
강남에 있는 아지트로 돌아오자 높은 빌딩 사이로 붉은 석양이 지는 저녁이 되어 있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사무실로 들어가자 평소처럼 에릭이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가 고개를 쭉 내밀었다.
“왔어.”
소파에는 사격장에서 총을 쐈는지 오수연이 테이블 위에 담요를 펼쳐놓고 분해한 권총을 손질하는 중이었다.
예전 일상으로 다시 돌아온 모습에 민성이 내심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을 때 에릭이 물었다.
“다녀온 건 잘 끝냈어?”
“그래.”
민성은 에릭의 뒤에 서서 의자에 손을 올리고 물었다.
“비트코인은 다 처분했어?”
“응. 평단가 16,000달러에 7,560개 전부 다 팔았지.”
돈 얘기가 나오자 오수연이 반짝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럼 다 얼마야.”
“1억 2천 96만 달러.”
대충 머릿속으로 환율을 계산해 본 오수연이 말했다.
“그럼 한화로…… 천 3백억이 넘는 거네.”
“그렇지.”
“대박.”
CIA 메인 서버를 해킹해 데이터를 빼낼 때 보관되어 있던 상당량의 비트코인이 함께 묻어 나왔는데 그걸 처분한 거였다.
“그런데 CIA에서 가지고 있던 코인을 이렇게 팔아도 괜찮은 거야?”
오수연이 살짝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에릭은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CIA가 아니라 제롬 국장이 개인적으로 은닉해둔 거잖아. 우리 마음대로 해도 상관없을걸.”
처음에는 비트코인을 왜 거기에 숨겨둔 건지 의아했지만 세계에서 제일 보안이 철저한 곳이 바로 CIA 메인 서버인 걸 생각해보니 어쩌면 가장 안전한 곳에 보관해 둔 걸지도 몰랐다.
“그리고 네메시스 프로젝트로 벌어들인 돈이니까 민성하고 내 몫의 퇴직금을 받은 거라고 생각하면 되지.”
민성도 동의하듯 머리를 끄덕였다.
“이야기한 대로 세 등분해서 나눠.”
“알았어. 근데 요즘 비트코인이 오르는 추세인데 조금 아깝네.”
이대로 조금 더 묻어 두면 가치가 몇 배로 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지금도 충분히 비싸게 판 거니까 너무 욕심내지 마.”
“하긴 그렇지.”
단순히 아쉬웠을 뿐인지 에릭도 금방 수긍했다.
그리고 비트코인을 판 돈을 나눠서 세 사람의 해외 비밀 계좌로 옮기려고 할 때 모니터 중간에 팝업창이 떠올랐다.
“어? 다크 웹으로 방금 의뢰가 들어왔네.”
“내용이 뭐야?”
“나이지리아에서 무장 반군에 납치된 인질을 구출해달라는데. 할 거야?”
민성이 고개를 돌려 오수연을 봤다.
“어떻게 할래?”
그러자 오수연이 소파에 앉은 채 뒤로 몸을 기대면서 대답했다.
“대장이 결정해요.”
에릭도 민성의 결정을 기다리는 듯 가만히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잠시 생각한 민성은 이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슬슬 다시 활동을 시작할 때가 되긴 했지. 일단 구체적인 상황을 파악해 봐.”
“오케이!”
목소리를 크게 높인 에릭이 신나게 키보드를 두드려댔고, 오수연은 그런 모습을 보면서 슬쩍 미소 지은 얼굴로 다시 권총을 손질하는 데 집중했다.
민성은 가만히 서서 평소와 같은 사무실 풍경을 눈에 담았다.
그가 지키고 싶었던 사람들과 일상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