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life Player RAW novel - Chapter (69)
리라이프 플레이어 069
[Chapter 030] [플레이어라면(2)]대한민국은 이후 몬스터로부터 일부 구역을 점령당하거나, 폐허로 변해버린 지역을 그대로 방치했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나, 선녀가 취임했으면서도 방치된 지역은 거의 변화 없이 유지 중이었다. 나날이 점령된 지역을 탈환하거나 부서진 도시를 재건하자는 이야기는 나오고 있으나, 현재로서는 기존의 지역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벅찼기 때문이다.
“슬슬 올 때가 됐는데.”
은하가 은아를 데려온 곳도 정부로부터 방치된 지역의 빌딩이었다.
조금만 움직여도 바닥에 쌓인 먼지가 자욱이 일렁였다. 바닥을 내려다보면 신발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을 정도였다.
두 사람은 먼지가 호흡기로 침투하지 않도록 체내 마나를 끌어올렸다.
“은하 너는 그 언니를 어떻게 알게 된 거야?”
“…해피니스에서 만난 뒤로 친해졌어.”
괜한 이야기를 꺼냈다가는 수습하기가 곤란했다.
은하는 뺨을 긁적이며 말했다.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은하는 북한산에서 신서영을 처음 만나기는 했으나, 그녀와 친해진 것은 해피니스에서 점심을 먹으면서부터였다.
그대로 그는 답하기 곤란한 질문은 회피하면서, 신서영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온다.”
“아.”
얼마 지나지 않아 마나의 흐름이 관측되었다.
감지망을 전개하는데 전보다 나아진 은아도 비정상적인 흐름을 알아차렸다.
바람이 불었다. 바람이라고는 불 수 없는 건물 내에서.
“와….”
은아는 제각기 다른 방향에서 불어온 바람이 한복판에서 이리저리 얽히는 모습을 보고는 입을 벌렸다.
단순하면서도 체계적인 술식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누구나 할 수 있을 것 같은 마법.
하지만 은아는 바람의 형상을 상상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고 있었다. 바람에 대한 상상력이 받쳐주기 때문에야말로 술식이 어우러져, 진정한 의미의 마법으로 발현되고 있는 것이다.
“대단…해….”
은아가 아는 신서영의 힘은 파티회장에서 자신이 구축한 마법을 풀어헤친 것이 유일했다.
그녀가 이라 불리는 이유를 눈앞에서 목격하는 것 처음이었다.
“미안. 조금 기다렸지?”
“조금이 아니라 오래 기다렸거든요.”
“너 정말 까칠하구나?”
바람 속에서 걸어 나온 신서영. 머리칼을 귀 뒤로 쓸어 올린 그녀는 대뜸 핀잔을 주는 은하를 보고는 입술을 삐죽였다.
“안녕?”
“아, 안녕하세요!”
은아는 재빨리 상체를 직각으로 굽히며 인사했다. 그녀는 신풍의 일면을 엿본 순간부터 더더욱 마법을 배우고 싶어진 것이다.
“전에도 소개했지만, 신서영이라고 해. 십이좌니 이니 뭐니 부르지 말고, 서영 언니라고 불러주면 돼.”
“네! 서영 언니!”
“응, 좋아.”
신서영은 눈을 반짝이는 은아를 보고는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걸려들었네.
이 모든 일이 계획대로였다.
사실 마법을 사용해서까지 나타날 필요는 없었다. 단지 그녀는 앞으로 제자가 될 은아에게 스승으로서의 일면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과 은아의 마음을 자극하고 싶었을 뿐이다.
물론 은하는 그녀가 보여준 모습에도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진즉 그녀의 의도를 알아차린 그로서는 시큰둥한 반응만 보이고 있었다.
서영은 은하의 반응을 아쉬워하지 않았다.
오늘 그녀의 타겟은 은아였으니까.
어디 조금만 더 보여줘 볼까?
“여기는 먼지가 너무 많네. 잠깐 환기 좀 할게.”
그녀가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그 순간, 손바닥 아래에서 퍼져나간 파문이 바람이 되어 바닥에 쌓인 먼지를 날려 보냈다.
“와…!”
은아는 예상했던 대로 감탄했고,
“오, 집집마다 하나씩 있으면 좋겠네.”
은하는 다른 의미에서 감탄했다.
“은하 너….”
“네? 왜요?”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활짝 웃는 은하.
얘가 얼마 안 본 사이에 연기가 늘었네, 늘었어.
서영은 혀를 끌끌 찼다. 자고로 어린아이는 귀여운 법이건만, 그는 하나도 귀엽지 않았다.
꼭 매사에 무관심한 사람을 상대하는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누나, 가지고 왔어요?”
“부탁한 대로 가지고 왔어.”
은하는 혀를 내두르는 그녀의 반응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 역시 그럴 줄 알았다고 한숨을 쉬고는 벨트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녀가 그에게 건넨 것은 조그마한 마석이었다.
은하는 마석을 이리저리 살핀 뒤에 빛을 비춰보기 위해 창가로 다가갔다. 높은 건물을 스쳐 들어오는 햇빛으로도 마석의 상태를 확인하는 데에는 충분했다.
괜찮네.
마석은 매끄러운 단면만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자잘한 흠도 보이지 않는 최상급에 해당하는 제8위계 마석이었다.
“누나. 전에도 말했지? 플레이어는 위험한 일이라고.”
“응.”
각오하고 있다는 얼굴로 답하는 은아. 이미 그녀는 이곳에 오기 전부터 설명을 들은 뒤였다.
“그래도 누나가 플레이어가 되겠다고 해도, 나는 이제 반대하지 않아. 반대하지는 않지만, 누나가 플레이어가 될 수 있는지 시험은 볼 거야.”
은하는 조그마한 마석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그가 흘려보낸 마나는 소량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마나는 마나를 끌어들이는 성질이 있다. 소량의 마나로 이루어진 편재였음에도, 대기 중에 녹아 있던 마나가 마석 주변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서영 누나, 부탁해요.”
“그래.”
은하는 마석을 바닥에 툭 던졌다. 그러자 이때를 기다렸다는 것처럼 마나가 달려들었다.
그 즉시 층 전체에 방벽을 두르는 서영.
“서영 누나, 플레이어 디바이스는요?”
“여기 있어.”
“자, 누나.”
서영이 꺼낸 플레이어 디바이스는 아이라도 휘두를 수 있는 크기의 칼이었다.
은하는 디바이스에 문제가 있는지 살펴보고는 은아에게 건넸다.
“…응.”
디바이스를 쥐는 건 처음이었다. 그녀는 날카롭게 벼려진 날 위에 손을 올렸다.
차가웠다. 매우.
온기라고는 한 점 느낄 수 없는 칼. 이것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는 알고 있었다.
“…시작할게.”
무대는 이미 준비되었다.
은하는 편재 속에서 태어나는 몬스터를 가리켰다.
“…어?”
몸에 붙은 마나를 털어내며 주변을 둘러보는 몬스터.
조심스럽게 칼을 쥐고 있던 은아는 몬스터와 눈을 마주치고는 당황하고 말았다.
몬스터는 손바닥 크기에 불과한 파란 다람쥐였으니까.
“제8위계 몬스터 뽀로리. 그게 바로 누나 적이야.”
은하가 담담하게 말했다.
은아는 더더욱 알 수 없었다.
“이게…, 몬스터라고…?”
그녀는 몬스터란 사람을 해치는 위험한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렸을 때 마주했던 몬스터도, 새벽백화점에서 상대했던 몬스터도 그러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토록 작고 귀여운 몬스터라니.
사람을 해칠 거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방심하지 마.”
은하의 조언은 들리지도 않았다.
조심스럽게 다가온 뽀로리가 조그마한 머리를 갸웃했으니까.
나 때릴 거야?
동글동글한 눈망울이 꼭 그렇게 묻는 것만 같았다.
꺄아, 너무 귀여워…!
당장에라도 뛰어가서 껴안고 싶었다. 얼굴을 비비고 싶었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에는 이미 뽀로리의 접근을 완전히 허락한 뒤였다.
“…어?”
대뜸 머리를 부풀려 톱니가 무성한 입을 벌리는 뽀로리.
“뽀로, 리야?”
대체 저 작은 몸에서 머리 하나는 집어삼킬 만한 크기는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너무나 갑작스레 일어난 일이었다.
미처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죽는다.
“그래서 방심하지 말라고 했잖아.”
은하가 뽀로리를 발로 걷어차지 않았더라면 머리가 뜯겨졌을지도 몰랐다.
“제8위계 몬스터 뽀로리. 상대를 귀여운 모습으로 방심시킨 다음에 무엇이든 입 안에 집어넣는 몬스터야.”
“아….”
그제야 그녀는 은하가 미리 일러주었던 말을 떠올렸다.
인간과 몬스터는 공존할 수 없다고.
편재 속에서 태어난 몬스터는 마나를 탐하기 위해 인간을 죽인다고.
“겉보기로 판단해서는 안 돼. 플레이어라면 몬스터를 상대로 망설이면 안 돼. 죽는 건 누나니까.”
모름지기 플레이어라면 몬스터를 죽이는 존재.
하지만 그녀는 바로 조금 전만 하더라도 해를 끼치지 않는 몬스터도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 안일함이 죽음을 자처했다.
몬스터는 몬스터였다. 몬스터와 인간의 공존은 불가능했다.
그래도, 그래도….
그녀는 바닥에 떨어뜨린 칼을 내려다보았다. 고개를 들어 올려서는 거리를 벌린 채 경계하는 뽀로리를 보고는 주저했다.
저런 애를…, 죽여야 한다고?
이제는 눈을 마주치자마자 겁을 먹고 도망치는 뽀로리. 층 전체가 방벽으로 둘러싸여 있단 것을 확인한 몬스터는 모퉁이에서 몸을 바짝 말고 있었다.
그 모습이 꼭 겁을 먹은 강아지 같은 몰골이었다.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괜찮다고 위로해주고 싶을 만큼.
뽀로리가 몬스터임을 인지했어도, 조그마한 생물을 죽인다는 것에 저항감이 일었다.
“아….”
이건 칼이었지.
디바이스라고 하더라도 결국 생명을 죽일 수 있는 흉기였다.
그것을 인지하는 순간부터 칼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불현듯 새벽백화점에서 겪었던 일이 떠올랐다. 그때도 그녀는 남자를 죽일 수 있는 상황에서도 죽이지 못했다.
이번에는 죽여야 한다.
은하와 약속했으니까. 플레이어가 되고 싶다면 적어도 몬스터를 죽일 줄 알아야 한다고.
그래도 전보다는 낫지 않은가.
몬스터니까. 사람이 아니라.
“더 할 수 있어?”
은하가 칼도 제대로 쥐지 못하는 그녀에게 물었다.
은아는 억지로라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나는 플레이어가 되고 싶어.
처음부터 플레이어가 되겠다는 생각은 품지 않았다.
그날, 홀로 크라켄을 상대하러 뛰어가는 은하를 보며.
그날, 은하가 친구들을 구하기 위해 고블린을 쓰러뜨렸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날, 병실 침대에서 잠든 은하를 보며.
그날, 자신에 대한 무력감을 느낀 채 남자들에게 잡혀가는 줄리에타를 보며.
그날, 지옥과도 같았던 순간을 단숨에 뒤집는 브루노를 보며.
약한 것은 잘못이 아니다.
남겨지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보호받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하지만 그녀는 무력감을 느끼며 홀로 관망하고 싶지 않았다.
사랑하는 동생이 홀로 모든 것을 하게하고 싶지 않았다. 그와 나란히 설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좋아하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했다. 그들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은아는 나이프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이겨내야 했다.
☆
무서운 애야. 정말.
달마다 은하와 점심을 먹는 서영은 그에게 은아의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의외였다.
그가 이리도 냉정하게 은아를 대하는 모습은.
“왜요? 제 얼굴에 뭐 묻었어요?”
은하는 뽀로리와 사투를 벌이는 은아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물었다.
“내 생각보다 네가 냉정해서.”
“…냉정할 리가 없잖아요.”
그녀는 그제야 알아차렸다. 이제 보니 은하는 당장이라도 뽀로리를 죽이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있는 중이었다. 조금이라도 건드렸다가는 사람을 해치는 마나가 폭발하듯 터질 것 같았다.
“그래도 이래야 해요.”
“플레이어는 위험하니까?”
은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플레이어는 인류를 위협하는 몬스터를 죽이는 존재가 아니었다.
플레이어는 누구보다도 탐욕적이고, 이기적이며, 개인의 욕구에 충실한 자들이었다.
그녀는 인류의 수호자가 되리라는 정의감을 품고 아카데미에 입학한 사람들이 어떤 결말을 맞는지 잘 알고 있었다.
일부는 도중에 포기하고.
일부는 현실에 순응하고.
일부는 끝끝내 도태된다.
인류의 수호자로서 활약하는 플레이어는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나는 어느 쪽이지.
그녀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현실에 순응한 쪽이었다. 인류의 수호자라는 가면을 쓰고.
“…누나는 누나로서 있으면 해요. 그래서 누나가 플레이어가 되는 걸 바라지 않아요.”
벌써 몇 번째일까.
은아는 뽀로리를 죽일 수 있는 상황에서도 선뜻 칼을 휘두르지 못했다.
이 길고 지루한 전투가 이어지는 이유였다.
“하지만 누나가 플레이어가 되고 싶다면, 누나가 바라는 플레이어가 될 수 있도록 도와야죠.”
“그게 아직 초등학생인 아이에게 몬스터를 죽이게 하는 일이니?”
서영은 어이가 없었다.
정상적인 인간은 생물을 죽이는데 저항감을 지닌다.
플레이어 아카데미에서도 신입생에게 다짜고짜 몬스터를 죽여보라는 미친 짓은 시키지 않는다.
그래, 이것은 미친 짓이다. 지금 그는 플레이어가 되고 싶으면 몬스터를 죽이라는 미친 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아, 얘가 머리가 이상하기는 했지.
“지금 무슨 생각했어요?”
“아니. 아무것도. 그냥, 네가 너무 예민한 거 아닐까? 아카데미에 입학하고 해도 늦지 않았다고 생각하는데.”
“원래는 사람을 죽이라고 하고 싶었는데, 미친 놈이라는 소리를 들을까봐 몬스터로 낮춘 거예요?”
얘가 뭐라니.
못 들은 걸로 해야겠다.
서영은 대꾸하지 않았다. 대꾸했다가는 이 세상이 얼마나 미쳐 돌아가는지 알게 될 것만 같았다.
“이 시험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어요. 하나는 누나가 이대로 포기하기를 바라요. 누군가를 구하는 행위가 누군가를 죽이는 행위와 다르지 않다는 걸 알게 하고 싶었어요.”
서영도 이 말에는 동의하는 바였다.
누군가를 구하겠다는 의미는 누군가를 죽이겠다는 의미.
적어도 플레이어의 세계에서는 그랬다. 플레이어는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서 누군가를 희생해야 하는 일도 있었고, 누군가를 죽여야만 누군가를 구할 수 있는 일도 있었다.
그럼 다른 이유는?
“나머지 하나는…, 누나가 플레이어가 된다면 강한 플레이어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적어도 험한 일은 당하지 않을 테니까요.”
서영은 이 말에도 동의하는 바였다.
플레이어의 세계는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계.
약한 것은 잘못이었다. 죽기 전에 죽여야 했다.
남겨지는 것은 잘못이었다. 도태되기 전에 도태시켜야 했다.
보호받는 것은 잘못이었다. 배신당하기 전에 배신해야 했다.
그녀 역시 그러지 않았던가. 그녀는 이 자리에 오르기까지 이루 말할 수 없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그 수모를 주었던 사람들은 이제 없지만.
처음부터 누구도 넘볼 수 없는 힘을 지녔더라면 험난한 시간을 보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괴롭고 복잡한 감정을 겪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니, 잠깐.
그녀는 은하를 내려다보았다.
이 아이는 플레이어의 세계를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일까.
무엇보다 그는 마치 아무도 믿어서는 안 되노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무도 마음을 맡겨서는 안 되노라고.
“플레이어라면, 적어도 몬스터는 죽일 수 있어야죠.”
그것이 이상적인 플레이어의 삶이지만.
플레이어도 결국 사람인 이상, 누군가에게 마음을 맡기는 일도 어쩔 수 없었다.
그것 자체를 완전히 부정하다니.
아직 어려서 그런가?
아니면 저 나이에 어떤 경험을 했으면 그런 생각이 나오는 걸까.
서영은 가능한 전자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
은아가 뽀로리를 죽일 수 있었던 기회는 14번.
그리고 15번이 되어서야, 그녀는 몬스터의 숨통을 끊을 수 있었다.
폐허 한복판. 그만한 전투를 벌였음에도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딸랑.
단지 바닥에 소리를 내며 떨어진 마석뿐.
“아….”
은아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언젠가부터 칼을 쥔 떨림은 멈췄건만.
시뻘건 피가 묻은 손을 바라보고 있자니 안간힘을 부리던 몬스터를 죽일 때의 감각이 되살아났다.
“아아….”
무언가가 울컥 올라왔다. 뱉어내지 않기 위해 몸을 숙였다. 손으로 입을 막았다.
가까스로 참았다.
그러자 눈물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피가 묻은 손으로 벅벅 문질렀다. 땀과 눈물, 그리고 먼지로 뒤섞인 얼굴에 피가 번질 때까지.
“…잘했어. 잘한 거야.”
조용히 다가간 은하는 더러워진 얼굴을 닦아주었다.
그녀는 그를 끌어안으며 소리 없이 오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