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life Player RAW novel - Chapter (72)
리라이프 플레이어 072
[Chapter 032] [형이 거기서 왜 나와?(2)]비가 오는 날이었다. 우산을 쓰고 있어도 치마 끝자락이 젖는 일은 피할 수 없었다.
그래도 몸은 가볍기만 했다.
오랜만에 아이들이 찾아오니까.
은하는 고기를 좋아했고, 은아는 과일을 좋아했던가? 은애가 올해 3살이면, 먹을 수 있는 것도 있을 텐데.
사랑하는 사람이 눈을 감고, 하나뿐인 딸이 시집을 가니 집안이 넓게 느껴졌다. 때로는 반겨주는 이 없는 집에 들어갈 때마다 외롭기도 했다.
노 서방과 딸이 몇 번이고 서울에서 살자는 이야기를 꺼냈지만, 그녀는 반대했다.
외롭기는 했어도 이 집에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딸의 성장이 담긴 추억이 구석구석 놓여 있었다.
이 집을 떠나는 일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어머.”
시장에서 장을 보고 돌아오는 길.
“옷이 다 젖겠네.”
빗줄기가 거세졌다. 그나마 바람이라도 불지 않아 천만다행이었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비에 옷이 젖으면서도 느긋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문득 무언가를 떠올려서는 미소를 지었다.
비가 오는 날이면 뜻하지 않는 만남이 있고는 했다.
그이를 만났던 날도 비가 오는 날이었다. 우산을 가지고 나오지 못해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던 중, 마침 비를 피하고 있던 그이와 만나게 되었다.
딸이 태어났던 날도 비가 오는 날이었다. 갓 태어난 딸은 마치 자신이 우는 소리가 빗소리에 묻히는 건 아닌지 우려하는양 귀가 달아나도록 울었다.
딸이 노 서방을 데려온 날도 비가 오는 날이었던가. 비에 쫄딱 젖은 두 사람은 어디 물에라도 빠졌다가 나온 줄 알았다.
그리고 은하랑 은아도. 마지막으로 은애도.
“신기하네. 우리 가족은 비와 인연이라도 있는 걸까.”
새삼 생각하니 신기했다.
그렇다면 오늘도 모종의 만남이라도 있는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던 차였다.
“으….”
빗소리에 파묻히는 소리. 간헐적으로 신음이 들려왔다.
잘못 들었나?
주변을 둘러보아도 아무것도 없었다.
“으으….”
하지만 이 소리가 사라지는 일은 없었다.
걸음을 멈추고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역시 아무것도 없었다.
“아.”
혹시.
혹시 하는 생각으로 골목길로 다가섰다.
희미한 불빛이 들어오는 전봇대 아래에는 커다란 쓰레기통이 하나 있었다.
쓰레기통 뚜껑을 열어보자,
“…세상에….”
아이가 몸을 동그랗게 만 채로 끙끙 앓고 있지 않는가.
“애가 왜 여기에….”
그러다 아이가 아인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아.”
그녀는 을 몸소 경험한 사람이었다.
그때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세상이었다. 오늘 만난 친구가 내일은 몬스터에게 잡아먹히는 일도 있었으며, 서로가 살기 위해 먹을 것을 두고 다투는 일도 있었다.
부모를 잃은 아이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아이들을 받아줄 형편이 되지 않았다. 부모를 잃은 아이들은 홀로 힘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 식으로 자라난 아이들은 뿌리부터 몬스터에 대한 적개심과 증오심을 가지게 되었다.
가장 심각한 피해자는 아인이었다. 태아상태에서 마나의 편재 혹은 몬스터가 일으킨 영향을 받고 태어난 아이는 몬스터와 같은 외형을 가지고 있었다.
인류는 몬스터를 증오했고, 플레이어와 달리 몬스터를 쓰러뜨리지 못하는 사람들은 아인을 마치 몬스터라 여기며 적개심을 분출했다.
그래서 아인을 낳은 부모는 사회적 시선을 이기지 못하고 아이를 유기하는 일이 많았다.
고아원에서도 아인을 받아들이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태어날 때부터 갈 곳을 잃은 아인들이 향한 곳은 결국 빈민가나 하수도였다.
그리고 이 골목은 빈민가로 이어지는 길목 중 하나였다.
“…얘, 괜찮니?”
그녀 역시 이 남긴 상흔을 가슴 속에 간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은하, 은아 또래의 아이가 쓰레기통 속에서 앓고 있었다. 이대로 지나칠 수는 없었다.
“으으….”
아이가 몸을 웅크리고 있어, 얼마나 다쳤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하지만 누더기나 다름없는 옷을 입고 있는 아이는 드러난 부분 여기저기에 시퍼런 멍이 들어 있었다. 얼굴도 퉁퉁 부은 것 같았다.
“대체 누가….”
대체 누가 어린아이를 때린 뒤 쓰레기통에 버린 것일까.
저희들 말로는 힘이야말로 법이라고 말하는 빈민가 사람들에게 화가 치밀었다.
“얘, 괜찮니? 응?”
일단 아이를 구하는 게 우선이었다. 그녀는 아이를 끄집어내기 위해 쓰레기통 속으로 손을 내밀었다.
바로 그때.
“크아아아앙!”
눈을 번쩍 뜬 아이가 짐승과도 같은 소리를 질러서는 쓰레기통 밖으로 튀어나왔다.
쓰레기통이 기우뚱하며 쓰러지고, 내용물이 발밑까지 흘러내렸다. 쓰레기더미를 뒤집어쓴 아이는 적의 어린 시선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시…팔…. 넌 또 뭐야!?”
마치 자신을 지키기 위해 몸집을 부풀리는 고양이처럼.
아이의 모습은 꼭 그와 같았다.
“저리, 가!”
아이가 소리쳤다.
그녀는 도저히 발을 뗄 수가 없었다.
아이의 상태가 심각했다. 몸은 삐쩍 마른 데다, 몸 구석구석이 상처 투성이였다.
무엇보다 얼굴에 가득 찬 독기.
저 아이를 이대로 두고 떠날 수 있을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가장 좋은 선택은 무엇일까.
이대로 경찰에 신고한다고 하더라도, 아이는 다시 빈민가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
어차피 아인이 학대받는 일은 비일비재 하니까.
어차피 법이 통하지 않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이니까.
어차피 이들이 지켜야할 국민은 빈민가도 아인도 아니니까.
가장 좋은 선택은 집으로 데려가는 일이겠지.
비 오는 날,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은 아이를 만난 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이었다.
그녀는 생각에 잠겼다.
집은 홀로 생활하고도 남을 정도로 넓었다.
만약 집에 누구라도 한 명 있었더라면, 혹은 아이라도 기르고 있었더라면, 눈앞에서 이를 드러내는 아이를 경찰에 넘기는 선에서 끝냈을 것이다.
“…인연이라면 인연이지.”
살며시 미소를 지은 그녀가 아이에게 다가갔다.
“오지 말라니까!”
아이가 쩍쩍 갈라지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가가서는 무릎을 굽혔다. 쓰고 있던 우산을 내밀었다.
“갈 곳이 없으면 우리 집에 오겠니?”
그것이 그녀와 진파랑의 만남이었다.
과거에는 스쳐 지나갔을 뿐이었을 만남.
☆
“아무리 그래도 저희한테 얘기는 하셨어야죠.”
이야기를 모두 들은 아버지가 크게 숨을 토했다.
“맞아. 우리가 딱히 반대할 리도 없을 텐데.”
어머니도 입술을 삐죽이며 투덜거렸다. 할머니가 지금까지 말을 하지 않았던 것이 못내 서운한 모양이었다.
“어차피 너희가 온다고 했으니, 그때 말하려고 했지.”
할머니는 아무것도 아닌 일인 양, 술잔에 술을 따라주며 말했다.
“끙….”
“에휴.”
아버지와 어머니는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은 할머니가 한 번 뜻을 정하면 좀처럼 바꾸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제 보니 은아가 할머니를 똑 닮았다.
두 사람은 결국 할머니가 따라준 술만 마셔야 했다.
“뭐야? 뭘 꼬라봐?”
한편, 은하는 치킨을 게걸스럽게 먹는 진파랑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전에는 얼마나 놀랐던가.
설마 파랑이 할머니가 입는 후줄근한 잠옷을 입은 채, 과자를 먹으며 TV를 보고 있을 줄은 몰랐다.
…미래는 바뀐 건가.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미래는 바뀌었다. 크라켄으로부터 가족을 구하고, 할머니가 아닌 가족들과 살아가는 미래를 선택함으로써.
조금 전에도 할머니는 말하지 않았던가.
집에 누구 한 명이라도 있었더라면 파랑을 데려오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고.
회귀 전, 가족을 잃었던 은하는 할머니의 보살핌 아래 자폐아와 같은 몇 년을 보냈다.
할머니가 그때에도 파랑을 만났다고 하더라도, 그를 집으로 데려오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이런 우연도 다 있었네.
생각해보니 파랑 역시 인천 출신이지 않았던가.
파랑과의 인연이 설마 어릴 때부터 이어져 있었을 줄은 몰랐다.
“…미래는 얼마나 바뀐 거지?”
“응? 왜 그래?”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은하는 옆에서 치킨을 먹고 있던 은아에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으로 미래가 바뀌었다는 생각을 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더욱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측할 수 없었다.
방해가 되면 죽일 뿐이지만.
물론 파랑을 다시 만난 것은 기쁘지만.
다만,
“너 자꾸 왜 날 쳐다봐? 이건 내 꺼야. 줄 생각 없으니까 꺼져.”
“파랑아. 할머니가 그런 말은 쓰지 말라 했을 텐데?”
“아씨, 쟤가 자꾸 노려보잖아.”
“아씨?”
“할망구 주제에.”
이거 버릇을 완전히 고쳐놔야겠는걸.
은하는 할머니에게 막말을 하는 파랑을 보며 소리 없이 웃었다.
“뭐, 뭐야. 왜 혼자 웃고 난리야.”
생각해보면 그랬다. 파랑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사람을 가리지 않고 무는 미친 개가 따로 없었다.
‘미친 개는 매가 약이지.’
그러다 은하를 만났다.
두 사람이 만난 시기는 은하가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시기.
당시 활동하고 있던 파티에서 추방당한 파랑은 홧김에 술을 마시다 취했고, 재수 없게 은하에게 걸려 얻어터져야 했다.
‘야, 씨발! 기다려 임마! 말도 하지 않고 시작하는 게 어디 있냐!’
‘개가 말도 다하나.’
‘야, 이 씨발 놈아! 나는 개가 아니라 늑대형 아인이거든! 그리고 내가 너보다 아카데미 1년 선배야, 알아 몰라!?’
‘늑대나 개나. 어차피 우는 소리는 똑같을 텐데. 그리고 내가 왜 내 위에 누가 있는지를 알아야 하지?’
‘와~, 나! 이거 돌… 그만 좀 때리라고! 진짜 돌아버리겠네! 사이코 새끼라는 이야기는 들었어도, 이 새끼 완전 사이코구만?’
‘오냐.’
파랑이 술에 취해 몸을 가누지 못하더라도 예외가 아니었다.
오히려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은 은하가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도록 패버렸다.
‘아, 크윽….’
그날 파랑은 제대로 반격도 하지 못하고 만신창이가 되었다.
후에 그가 말하길, 눈물이 나올 정도로 서럽도록 얻어맞은 적은 그때가 처음이었다고 한다. 오죽하면 빈민가에서도 그런 식으로 사람을 패는 일이 없다고 토로했을 정도였다.
그래도 인연이라면 인연이었다. 당시 진파랑이 파티에서 추방당한 이유는 그가 아인이라는 점을 빌미로 부당한 대우를 당하다, 정당한 대가를 받기 위해 권리를 주장했다는 데 있었다.
은하는 상대가 아인이더라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오직 얼마나 몬스터를 죽일 수 있는지만 지향하고 있었다.
그러니 진파랑의 영입은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미친 개는 매가 약이지.”
“왜, 왜 실실 쪼개는 거야? 너 치킨 잘못 먹었냐!?”
파랑이 기겁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러거나 말거나 닭다리를 뜯고 있던 은하는 연신 그를 보며 어깨를 들썩였다.
이 형은 한 번 콧대를 꺾어줘야 정신을 차리지.
후에 헌터와 텔레파시스트를 겸임하며, 아인 플레이어의 대표주자 중 한 명으로 거듭나는 진파랑.
정작 성격이 개 같아서 그를 영입하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은하가 지휘했던 파티에서 일으킨 말썽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오랜 시간을 걸쳐 패서야 그나마 사람으로 만들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어릴 때부터 제 주인이 누구인지 알려주는 게 나았다.
무엇보다.
우리 할머니한테 무슨 말버릇이야.
파랑의 말투는 회귀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할머니에게 말하는 투도 빈민가에서 살아온 그가 친근함을 표현하는 방법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은하는 그의 태도를 가만히 넘길 수가 없었다. 이 기회에 회귀 전에는 고치지 못했던 말버릇까지 고쳐주겠다고 다짐했다.
이참에 알아봐야 할 것도 있고.
은하는 회귀 전, 파랑이 콧대를 세우며 했던 자랑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허, 참! 왜 너희들은 내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모르는 거냐.
어릴 때부터 텔레파시를 쓸 수 있는 아인이 얼마나 적은데! 너희는 그런 나를 텔레파시스트로 둬서 다행인 줄 알아, 이것들아!
그리고 내가 어? 헌터도 해주고, 물 길러 오라 그러면 길러오고, 불 피우라 그러면 불 피우고 어? 내가 아주 다 해주잖아! 너희 연놈들은 복 받은 거야, 이것들아!’
‘응, 그래. 파랑 오빠 들어가. 다음부터는 재미있는 얘기 좀 준비해오고.’
‘언니, 언니. 나는 입만 산 남자는 별로더라.’
‘나도 얘. 남자는 아랫도리가 살아야지, 윗도리가 살아서는 어떡하니?’
‘헐! 언니, 언니! 나 지금 좋은 생각났어. 그럼 위는 파랑 오빠한테 맡기고, 아래는 리더한테 맡기면 되는 부분 아닌감?’
‘기다려, 얘. 리더가 아랫도리가 살아 있는지는 아직 모르는 거잖아. 유정이한테 먼저 물어보고….’
‘하, 너희들도 제발 입 좀 다물어주면 안 될까?’
‘너희들 전부 입 다물어.’
도시 바깥에서 야영을 하던 날. 그때 파랑은 자신만큼은 불침번에서 제외해줘야 한다며 성화를 부렸다.
급기야 어릴 때부터 텔레파시를 쓸 수 있었다며 호언장담까지 하지 않았던가.
그때야 그의 어린 시절을 모르니 그러려니 넘어갔었지만, 이제는 직접 확인해볼 수 있지 않은가.
어디 서나보다 잘하는지도 보고.
파랑이 거짓말을 친 것이라면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해줄 예정이었다.
설사 그것이 회귀 전의 진파랑이 아니더라도.
입가를 씩 하고 끌어올린 은하는,
“저는 파랑 형이랑 밖에서 놀다 올게요.”
“응? 이런 시간에?”
아버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도 갈래.”
“아니야. 누나는 치킨 먹고 있어.”
은아는 바삭한 껍질을 뜯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천천히 놀다 오렴.”
은애를 보살피고 있던 할머니는 아무 의심도 품지 않았다.
“자, 나가자, 파랑 형.”
“…왜 이래. 내가 언제 너랑 논다 그랬어?”
귀와 꼬리를 바짝 세운 파랑이 은하를 노려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은하는 저항할 틈도 주지 않고 목덜미를 잡아끌었다.
“이야아아!! 뭐야! 이거 안 놔!? 너 죽을래, 어!?”
은하는 발버둥치는 그를 끌고 나왔고,
“야, 기다려! 적어도 치킨은 먹게 해줘야지!”
“아이씨! 딱 하나만! 하나만 먹자고!”
“야, 이 사람도 아닌 새끼야! 밥 먹는 데에는 개도 안 건드린다는데, 치킨도 못 먹게 하냐!?”
마당에다 휙 하고 집어던졌다.
그러고는 피식 웃었다.
“뭐래? 개야 무니까 안 건드리는 거지. 그리고 그런 개는─.”
은하가 손으로 허공을 갈랐다.
파문처럼 퍼져나간 마나가 두 사람을 가두는 방음결계를 만들었다.
“─지 주인을 알게 해줘야지.”
이제부터 주인이 누구인지 알려줄 것이다.
그것을 깨달았을 파랑은 고개를 숙인 채,
“내, 내 치킨….”
바닥에 떨어진 치킨을 내려다보며 울먹거리고 있었다.
아 놔, 저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