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life Player RAW novel - Chapter 11
어버이의 날에 대해 떠오르는 기억은 희미했다.
아니, 없다고 해도 되겠지.
회귀 전 은하는 6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가족을 잃고 말았다.
어버이에 대해 감사를 표하기 전에 어버이를 잃고 만 것이다.
가족을 잃고 자폐아처럼 살아온 5년. 그리고 죽는 날까지 몬스터에 대한 증오로 불태웠던 생애.
‘이런 말 하기 미안하지만, 애가 조금 무서워요.’
‘쟤는 하루 종일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걸까요? 보일 때마다 하늘만 올려다보고 있네요.’
‘은하가 학교에서 아이들하고 잘 어울리지 못하는 모양이에요.’
‘엄마, 쟤 기분 나빠. 나 쟤 싫어.’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야. 은하는 조금… 아픈 거뿐이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늙은 사람 혼자서 키우는데 적어도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닌가?’
‘말을 걸어도 무시하기나 하고. 입만 다물고 있고.’
‘애가 조금 그래.’
할머니는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이 꺼림칙하다고, 때로는 미친 게 분명하다고 손가락질하던 그를, 눈을 감으시는 날까지 보듬어주었다.
그 동안 은하는 한 번도 할머니에게 어버이의 날에 대한 감사를 드린 적이 없었다.
초등학교에서는 어버이의 날이 다가오면 색종이로 카네이션을 만들곤 했다.
그때마다 은하는 빨간 색종이만 하염없이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누구를 위해 종이를 접어야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수업을 끝내기 위해서라도 카네이션을 만들어야 했다. 그때마다 억지로 만든 카네이션을 가방 안에 쑤셔 넣었다.
은하는 카네이션을 할머니에게 건네지 않았다.
무슨 말로 건네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어떤 얼굴로 건네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할머니에게 카네이션을 건네는 순간 무언가가 완전히 끝날 것만 같았다.
할머니는 내 마음을 아셨을까.
응, 모르실 리가 없었겠지. 할머니는 무엇이든 꿰뚫어보았으니까.
할머니는 학교에서 돌아온 은하의 가방을 정리하면서도 카네이션이 들어있었다는 말은 한사코 하지 않았다.
다만 할머니는 신발장 위에 볼품없는 카네이션을 걸어놓았다.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무언가에 떠밀린 듯이 만들어진 카네이션은 집안 어딘가에 장식되어 있었다.
그 다음은 편지였던가.
중학교에서는 어버이의 날이 다가오면 편지를 쓰게 했다.
그는 할머니에게 어떤 마음을 전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기억이 나지 않는 이유는 기억할 가치도 없었던 내용이었겠지.
그가 유일하게 기억하는 것이라고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편지를 찢어버린 것이다.
그때는 왜 그랬을까.
죽음은 자신을 객관적으로 돌아볼 수 있게 해주었다.
두 번째 삶을 살고 있는 그는 회귀 전의 자신을 떠올리고는 어리고 못난 겁쟁이라고 평가했다.
겁쟁이.
그때 그는 할머니에게 카네이션을 건네는 순간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손에 놓고 말 것이라 생각했다. 편지를 건네는 순간에는 몬스터에 대한 증오가 희석될 것만 같았다.
돌이켜보면 카네이션과 편지는 단순한 계기에 지나지 않았다.
나이 어린 그가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훌훌 털어버리고 새로이 삶을 사는, 몬스터에 대한 망집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삶을 살게 해주는 계기에 불과했음을.
그래서 할머니는 아무 말 없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으리라.
그가 세상에 대한 분노를 버리기를. 그를 옭아매는 모든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자신만의 삶을 살기를 기다리고 있었으리라.
하지만 은하는 할머니가 돌아가시는 그날까지 어떤 마음도 전하지 않았다.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이 눈앞에 있었으면서도 굳이 불행해지는 길을 택했다.
할머니는 마지막까지 나를 어떻게 생각하셨을까.
결국 가족의 죽음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나를 가엾이 여기셨을까.
알 수 없었다.
부모의 마음은 바다와도 같다던데 그에게 할머니는 그런 존재였다.
어렴풋이 알 것 같았지만 할머니의 마음을 멋대로 단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단지 한 번 죽음을 맞이하고,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그가 전할 수 있는 말은 두 가지.
불효자라서 죄송합니다.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32년이 넘도록 고작 이런 말 하나도 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후회되었다.
할머니가 살아생전에 한 번이라도 말했으면 좋았을 것을.
할머니에게 해드릴 수 있는 유일한 말이었을 것을.
자신은 불효자였다. 지옥에 가더라도 불만을 토로할 수 없는.
그러니 이번 생에는 꼭─.
“나는 천 마리 접을 거야!”
“이 바보야 카네이션은 송이라고 세는 거야!”
“하아….”
─카네이션을 접고 있다.
아이들은 오늘도 여전히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다.
☆
5월이 머지않았다. 가족들을 잃은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 동안 은하가 대처한 것이라고는 전무했다.
6살 어린아이의 몸으로 움직이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예를 들어, 그는 어머니에게 홀로 심부름을 다녀오겠다고 졸랐다.
그리고 그는 가게에서 부탁받은 물건을 사오던 중, 공중전화에 들려 한국마나관리기구 마나관리국에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마나관리국이죠?’
‘네. 그런데요. 혹시 나이가 어떻게 되시나요?’
‘나이요? 6살인데요.’
‘하아…, 그래요. 네, 무슨 일로 전화를 주신 건가요? 이거 통화 녹음되는데, 혹시 장난으로 전화를 거신 거라면 문제가 될 수 있어요.’
‘장난으로 전화 건 거 아니라니까요.’
‘네, 죄송합니다. 그럼 말씀해주세요.’
‘5월 4일, 저녁쯤 한강에서 대규모 몬스터가 출몰할 거예요. 출몰한 몬스터들 중에는 크라켄이 있어서 막대한 인명피해가….’
‘…네. 다음부터는 이런 데에다 전화 걸면 안 돼요. 경찰 아저씨가 이놈! 할 테니까요. 전화 끊어주실래요?’
‘아니, 제 말은 거짓말이 아니라….’
은하는 답답한 마음에 전화 너머로 주저리 설명을 했지만, 어린아이가 하는 말을 믿어줄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결국 뚜뚜 거리는 신호음만이 들렸을 뿐이었다.
그냥 내가 회귀했다고 확 이야기해버려?
그는 홧김에 그래야겠다는 생각도 해보았다.
하지만 마나관리기구에 전화를 걸었던 것처럼 어린아이의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믿어주는 사람이 있을까.
뒷말은 듣지도 않고 발이나 닦고 자라는 소리나 듣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결국 그가 그나마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최악의 사태를 대비해 체내 마나를 모아두는 일이었다.
6년 동안 필사적으로 모았으면서도 은아가 축적한 마나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했을 때에는 얼마나 절망했는지 모른다.
플레이어의 세계에서 오래도록 뼈를 묻었기에, 노력이 자질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그였다.
다만 6년 동안의 수고가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직접 체감했을 때에는 좌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사이에도 시간은 나날이 지나갔다.
유치원 생활은 한가했다.
그는 홀로 책을 읽거나 구석에서 잠을 자는 나날을 보냈다.
그럴 때마다 따돌림을 주도하고 있던 은혁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걸핏하면 찾아와서는 어떻게든 괴롭히려 들었다.
유치하기는. 나야 좋다만.
코흘리개 꼬마들에게 따돌림을 당했다고 기가 죽을 은하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멀찍이 떨어져서 자신을 주시하는 아이들을 무시했다.
모든 아이들이 다가오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동네에서 놀던 아이들은 뭐만 하려 하면 그를 부르고는 했다.
그가 같이 놀지 않겠다고 말했을 때에도 익숙하게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여자아이들은 또 어떻고.
그날 이후 여자아이들이 홀로 남은 은하를 못 본 척하지 못하고 있었다.
뒤에서 민지가 신경을 써주기라도 했는지 여자아이들은 그를 친절하게 대했다. 때로는 극진한 대접까지 해줘서 고개를 갸웃거릴 정도였다.
아무렴 어때 뭐.
그런 상황에서 은혁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그가 은하를 교묘하게 괴롭히는 일이 날이 갈수록 늘어났다.
물론 가만히 당하고 있을 은하도 아니었다. 상대를 봐도 한참을 잘못 본 것이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
당하면 배로 갚아준다.
은하의 철칙은 아이들이라고 무르지 않았다.
그를 괴롭히려다 되레 반격을 당한 은혁과 그를 따르는 마방진, 연성진이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남자들의 세계에서 눈물을 보이면 지는 것이라는 암묵적인 룰이 존재했다.
그날, 이들은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은하에게 지고 말았다.
‘너, 치사하게 이러기냐!’
‘치사하게 나온 쪽이 누군데 그래.’
‘비겁해.’
‘맞아, 비겁해. 치사해!’
‘그래서? 더 해볼 거야? 이번에는 바지에 오줌이라도 싸게 만들어줄까?’
회귀 전에도 적대하던 사람들을 사로잡아 고문을 감행했던 그였다. 어디를 공격하면, 어디를 자극하면 좋은지 잘 알고 있었다.
그날, 아이들은 내내 그에게 시달려야 했다. 마지막에는 은혁이 눈물, 콧물을 흘리며 잘못했다는 말을 꺼냈을 정도였다.
이후로 자존심이 크게 꺾인 은혁 패거리가 은하를 괴롭히는 일은 현저히 줄어들었다.
반대로 다른 아이들이 그에게 관심을 가지고 몰려들었다고 해야 하나.
깨달았을 때에는 늘푸른솔반에는 민지를 위시한 여자아이 그룹, 은혁을 따르는 남자아이 그룹, 은하를 부르는 혼성 그룹이 만들어져 있었다.
때는 그야말로 전국시대.
아이들 사이에서는 우스갯소리로 누가 늘푸른솔반을 차지할지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아니, 필요 없거든. 제발 나 좀 내버려둬라.
그 결과가 이 모양이었다.
“하아…. 쉴 틈이 없어요, 쉴 틈이.”
오늘은 카네이션을 만드는 날이었다. 아이들은 타요 선생님이 알려준 방법으로 카네이션을 만들고 있었다.
문제는 누가 은하의 옆에 앉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은하야! 나랑 같이 앉자.’
‘나 은하 옆에 앉을 거야! 다들 저리 가.’
‘왜 이래. 은하랑 제~일 친한 사람은 나거든?’
‘어머, 나도 은하랑 제~일 친한데?’
‘그러지 말고. 은하야, 누구랑 같이 앉았으면 좋겠어?’
‘응, 난 혼자 앉고 싶어. 제발 좀 가주라.’
은하가 아무 생각 없이 원형테이블에 앉는 순간, 그야말로 전쟁이 일어났다.
아이들은 너도 나도 그의 테이블에 앉겠다고 소란을 피우기 시작한 것이다.
하, 집에 가고 싶다.
민지가 옆자리에 앉지 않았더라면 유혈사태가 벌어졌을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빚을 지었다고 콧대 세우지 마라 먹민지!
“이렇게 접는 건가?”
“이 먹보야 이리 줘봐. 선생님이 이렇게 접으라고 했잖아!”
“나 먹보 아니라니까!”
“네, 다음 먹보~”
“너 진짜~!”
민지는 손재주가 좋지 않았다. 타요 선생님이 그녀를 집중적으로 가르쳤는데에도 엉성하게 따라하는 게 고작이었다.
민지만이 아니었다. 비단 다른 아이들도 그러했다.
아이들은 걸핏하면 타요 선생님을 부르기 일쑤였고, 고사리 같은 손으로 만들어진 결과물은 처참했다.
하기야 6살 애한테 많은 걸 바라서는 안 되지.
하, 어쩔 수 없네.
이대로 타요 선생님만 불렀다가는 제시간에 끝날 것 같지 않았다. 귀찮기는 했어도 은하는 카네이션을 접지 못하는 아이들을 도와주기로 했다.
카네이션을 만드는 게 처음도 아니고.
회귀 전에도 중학생이 되기 전까지 매년 카네이션을 접었던 그였다. 기억이 가물가물하기는 했어도 견본을 보고 만드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백련에게서 카네이션을 받은 적이 있었지.
그가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한창 이라고 조롱당하던 때였다.
그날도 뒤에서 기습을 가해오던 플레이어들을 죽이고 들어온 그는 피 냄새를 지우기 바빴다.
미친 놈이라는 소리를 밥 먹듯이 듣는 그였지만, 초등학생이었던 백련을 위해서라도 몸에 묻은 피를 닦아내야 했다.
잘못 걸렸다가는 유정에게 혼이 나기도 했었으니.
빠르게 샤워를 마친 그는 허기를 달래기 위해서라도 라면을 먹으려 했다.
그리고 그가 끓는 물속으로 라면을 투하하려던 그때, 학교에서 돌아온 백련이 옷을 잡아당겼다.
‘은하 아저씨. 보, 보살펴주셔서 감사합니다.’
모기만한 목소리로 카네이션을 내밀던 백련.
‘…어, 그래.’
‘…저, 잘 만들죠?’
‘그러네. …고맙다.’
‘엄마도 제 카네이션, 정말 좋아했는데.’
카네이션을 건넨 백련은 별안간 울음을 터뜨렸었다.
그는 그녀가 학교에서 어떤 마음으로 카네이션을 만들어야 했을지, 어떤 마음으로 카네이션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와야 했을지 알 것 같았다.
그 역시 그랬었으니까.
하지만 그는 엉엉 눈물을 흘리는 그녀를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위로라면 전문 외였다. 죽이는 거면 몰라도.
그때 그가 할 수 있었던 일이라고는 그저,
‘…라면 먹을래? 어버이의 날에는 라면이지.’
라면을 끓여주는 것이었다.
‘치…, 그게 뭐예요. …라면 주세요. 파도 송송 썰어서.’
‘원하는 게 많네. 앉아 있어. 금방 만들어서 가져갈 테니. 계란은?’
‘계란도 넣어주세요! 그리고… 밥도 먹을래요! 김치도!’
어느새 울음을 멈춘 그녀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그가 끓는 라면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 떠올려 보더라도 마음이 절로 푸근해지는 기분이었다.
딸아이가 있었으면 이랬을까.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녀가 매년 카네이션을 건네는 날을 남몰래 기대하고 있었건만.
둘이서 라면을 끓여먹는 날을 기대
하고 있었건만.
언젠가부터 그녀는 카네이션을 건네지 않게 되었다.
리라이프 플레이어 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