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life Player RAW novel - Chapter 117
선력 5년이 끝나간다.
은하는 샹들리에 아래에서 즐거이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을 보며 한 해를 돌아보았다.
즐거운 날도 있었는가 하면, 마음이 가라앉는 날도 있었다.
뜻대로 되는 일이 있는가 하면, 뜻대로 되지 않는 일도 있었다.
이유는 알고 있다.
알고 있지만 현실로부터 고개를 돌리고 싶었다.
그래서 무알콜 샴페인을 단숨에 들이켰다.
“…더럽게 맛없네.”
차라리 탄산수를 마시는 게 낫겠다. 작년에도 마시고 후회했던 은하는 눈살을 찌푸리며 지나가던 직원에게 빈 잔을 건넸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시리우스 계열사의 사람들은 올해도 다른 사람들과 연을 잇기 위해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었다.
가볍게 어깨를 들썩이면서도 사실은 어깨가 무거운 사람들이 바로 저들이었다.
아버지도 마찬가지.
연회장에 들어오고부터 잔을 손에 쥐기만 할뿐, 샴페인을 마시지도 못하고 대화를 나누기 바빴다.
“못 보던 애들도 있네. 눈치 볼 것도 없는데, 쟤네들 왜 저래?”
은하는 시리우스그룹 계열사 연말파티에 참석한 지 올해로 세 번째였다.
그러니 파티에 참석하는 아이들의 얼굴이 낯이 익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는 여름방학 때, 계열사 임원급의 아이들을 만나기도 했다.
누가 파티에 처음 참석했는지, 올해도 참석했는지쯤은 알 수 있었다.
행동으로도 알 수 있었다.
처음 참석한 아이들은 과할 정도로 눈치를 살폈고, 참석한 경험이 있는 아이들은 아는 아이들과 어울려 다니고 있었다.
은아처럼.
“은아 너는 초등학교 졸업하고 더 예뻐졌다!”
“에이, 왜 그래. 근데 입술 정말 예쁘다. 무슨 색이야?”
“은아 언니, 이건 어때? 이 색도 예쁘지 않아?”
중등아카데미에 입학하고부터 분위기가 몰라보게 달라진 은아는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여자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계열사 연말파티라고 한껏 멋을 부린 아이들도 사춘기에 들어서면서부터 윤곽이 잡히기 시작한 가슴과 가느다란 허리를 강조한 드레스를 입은 그녀보다 눈에 띌 수는 없었다.
“…예쁘다.”
“저 사람 누구야?” “은아 누나 몰라? 노은아.” “노은아? 몇 살이야?” “14살.” “14살이면 나보다 2살 어리네. 여기에 저런 애도 있었구나.”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나, 기둥에 기대 있던 은하는 바로 앞에서 떠드는 남자아이들을 노려보았다.
보아하니 은아에게 마음을 빼앗긴 남자아이는 올해 처음으로 파티에 참석한 모양이었다.
아마도 부모가 올해부터 중요한 직책으로 임명된 것이리라.
연회장에는 은하가 주시하는 아이 외에도, 그녀에게 말을 붙이려고 기웃거리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 동안 초등학생이었던 그녀에게 별반 관심을 보이지 않던 중고등학생쯤 돼 보이는 아이들이 눈빛을 달리한 것이다.
“말이라도 걸어볼까?”
“용기 있는 자가 미인을 얻는다고 했어.” “어디 계열사 애지? 시리우스 보험이면 그래도 비벼볼 수 있지 않을까?”
“시꺼, 임마. 남자는 자신감이야, 자신감. 딱 보니까 남자랑 사귀어본 적도 없는 것 같은데, 자신감으로 밀어붙이면 된다니까.” “그래, 자신감이지. 잘 보고 있어. 내가 번호 따고 온다.”
기회를 엿보고 있던 아이들이 거의 동시에 움직였다.
양손에 잔을 쥐고 걸어가다 서로 눈을 마주친 아이들.
시선만으로 통했다.
아이들은 상대가 마음에 둔 아이가 자신과 같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물론 그들은 그녀에게 도달하지 못했다.
아이들이 제각기 싸우는 사이, 시야 끝에서 접근한 은하가 은아를 낚아챘기 때문이다.
“누나.”
“어? 은하
야! 왜?”
“계속 얘네들하고만 놀 거야? 난 안 놀아줘?” “…미안해! 내가 너무 심심하게 했지!?”
외모는 제법 어른스러워졌어도 은아는 은아였다.
아이들에게는 보이지 않던 미소를 지은 그녀는 다른 사람의 시선은 신경 쓰지도 않고 은하를 덥석 끌어안았다. 화장을 했다는 것도 잊은 채 뺨을 비볐다.
저리 꺼져, 이것들아.
이 오징어들이 어디서 우리 누나한테 집적거리려 그래.
은하는 은은한 향기를 풍기는 그녀에게 안긴 채, 어깨너머로 보이는 남자애들을 깔봤다.
닭 쫓던 개가 지붕 쳐다보는 신세가 된 아이들이 얼굴을 구겼다.
은하는 어쩌라는 식으로 시선만으로 응수했다.
때마침 음악이 흘렀다.
“레이디, 손을.”
“어머.”
“저와 한 곡 추시겠습니까?” “…좋아요.”
연말파티는 사람들이 연을 잇기 위해 교류를 가지는 자리가 아니었다.
시리우스그룹에서 주최한 연말파티는 한 해의 수고를 위로하기 위함이었다.
격식을 차리지 않는 연말파티에는 중간 중간 춤을 출 수 있는 곡이 흘러나왔다.
사람들은 음악이 흐르면 마음에 드는 이성에게 춤을 신청하거나, 사이좋은 부부들은 손을 잡고 연회장 중앙으로 걸어나갔다.
남자 아이들의 노림수도 이것이었으리라.
어디서 감히.
은하는 남자아이들에게 보란 듯이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예쁜 누나, 나랑 춤출래요?”
은하가 씩 하고 미소를 지었다.
은아가 넘어오지 않을 리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작은 탄성을 삼킨 그녀가 눈을 빛내며 손을 잡았다.
“네, 좋아요.”
은하는 은아를 데리고 연회장 중앙으로 이동했다.
몇몇 사람들이 감미로운 선율에 맞춰 춤을 추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한도영과 춤을 추고 있던 한서연도 있었다.
“은아야, 은하야 안녕. 너희도 춤추러 왔구나?” “안녕, 서연아. 아저씨도 안녕하세요.”
“그래, 오랜만이다.”
은하는 박스 모양을 그리며 멀어지는 두 사람에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했다.
은아의 겨드랑이 사이로 손을 뻗었다. 한 손으로는 그녀의 어깻죽지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손을 맞댄 뒤, 오른발을 움직였다.
“그런데 은하야. 춤출 줄 알아?” “이런 건 껌이지.”
내가 회귀 전에 얼마나 춤을 잘 췄는데.
사교댄스에는 도가 텄다.
플레이어 아카데미에서 가르치기도 했고, 본의 아니게 파티나 모임에 참석해야 하는 일이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춤을 춰야 하는 일이 오죽 많았으면 이라고 불리던 시기에 백련에게 춤을 알려주기도 했다.
그녀와 키 차이가 났던 터라 상체를 숙이고 춤을 춰야 했지만, 스텝을 밟을 줄은 알았다.
‘…아저씨, 한 박자 쉬고 들어와야 하지 않아요?’
‘하나, 둘…, 아, 그러네. 다시.’
‘…아저씨, 둘에 들어오는 거예요. 하나, 둘!, 셋, 넷, 하나, 둘 아….’
‘…다시.’
밤마다 백련의 춤 상대를 하느라 허리가 얼마나 아팠던지.
그랬던 애가 언젠가부터 여자가 되어 있었다.
‘오빠, 이따가 저랑 춤추지 않을래요?’
‘너 춤 잘 추잖아. 뭐 하러?’
‘요즘에는 오빠랑 춤출 일이 통 없었잖아요.’
‘…알았어. 하, 또 허리 아프게 생겼네.’
‘그때보다 저 키 좀 컸거든요~’
‘그래봤자 이 정도잖아.’
은하는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가리켰고, 그만한 키에 달했던 백련은 볼을 부풀렸다.
세간의 사정으로 어쩔 수 없이 선녀가 되었던 아이는 너무 일찍 어른이 되어야 했다.
나이에 맞지 않는 분위기와 외모를 갖추게 되었어도, 앳된 면이 남아 있었다.
그와 있을 때면 더더욱.
‘…야, 너 지금 뭐하는 거야.’
‘왜요? 왈츠는 이래야 하는 거 몰라요?’
‘언제부터 왈츠가 하반신을 부대끼는 댄스가 된 거지?’
‘있죠, 오빠. 옛날에는 저랑 추면 허리 아프다고 했잖아요.’
‘왜. 또 무슨 이상한 말을 하려고.’
‘집무실에 아무도 없는데. 아까 모두 물렸어요.’
‘…….’
‘제가 허리 아프게 해줄게요. 대신 오빠가 골반 아프게 해주세요.’
“…내가 어디서부터 잘못 키웠던 걸까.”
“응? 뭐가?”
“아니야.”
은하는 회귀 전에 있었던 일을 애써 잊으려 했다.
그날 밤은 정말 위험했다.
때마침 류연화가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갓 성인이 된 아이와 청와대 집무실에서 선을 넘었을 수도 있었다.
“아, 미안.” “맞아. 은하 너는 음치에, 박치였지.”
은아는 이미 달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은하가 벌써 몇 번이나 발을 밟았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춰서 그래.” “오랜만에?”
“…옛날에 초등학교에서 배웠어.” “나는 안 배웠는데. 그렇구나. 근데 은하야, 이건 좀….”
“왜. 누나는 지금 아카데미에서 배우고 있어서 잘하는 거야.”
“…응.”
은아는 그래도 웃었다.
발이 아프기는 했어도 남동생이 변명하듯 투덜거리는 모습이 귀여웠기 때문이다.
“아, 음악 끝났다.”
“그러게. 재미있었어, 누나.”
“나도 재미있었어!”
“어디 가서 이상한 애들이랑 춤추지 말고.”
“네네, 알겠습니다! 은하 너하고만 춤추면 되는 거지?”
“…은아야, 아빠는?”
“네, 다음 아빠~”
“응, 안 돼~”
연말파티에서 아버지의 근처에 있다가는 숨을 돌릴 틈이 없었다.
은하는 작년에 멋모르고 아버지의 곁에 있다가, 사람들로부터 각별한 관심을 받느라 고생했었다.
아드님이 잘생겼다느니, 아드님이 머리가 좋아 보인다느니 되지도 않고 지껄이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았다.
은아도 동감인 모양이었다.
두 사람은 음악이 흐르는 동안에야 자유를 찾은 아버지로부터 도망쳤다.
은아는 여자아이들 속으로 사라졌고, 은하는 답답한 연회장에서 벗어나기 위해 정원으로 도망쳤다.
“으, 은아야….”
은아와 춤을 출 기회만 노리고 있던 아버지는 음악이 끝나자마자 다시금 찾아드는 사람들을 상대해야 했다.
☆
“내가 왜 오늘은 안 보이나 했다.”
“대뜸 무슨 소리니?” “솔직히 말해봐. 왜 내가 가는 곳마다 있는 거야?”
숨도 돌리고, 찬 공기도 들이킬 겸 정원으로 나온 은하.
그는 기능하지 않는 분수대 앞에서 멍하니 벤치에 앉아 있던 한서현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녀와 거리를 두고 벤치 끄트머리에 앉아서는 손가락을 들어 쏘아붙인 것이다.
지목당한 한서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여기 먼저 온 건 네가 아니라 나야.
그리고. 만나자마자 하는 소리가 그게 뭐니?”
“파티마다 매년 만나는 게 신기해서 그런다 왜.”
“너 내가 편하게 말하라고 했다고 말을 막 하는 구나? 혼날래?”
이래야 한서현이지.
은하는 피식 웃었다.
정원으로 나가는 계단을 내려갈 때만 하더라도, 벤치에 앉아 있던 그녀의 뒷모습이 어딘가 쓸쓸해보였다.
아니, 쓸쓸해보였다고 하기 보다는 어딘가 초연해보였다.
마치 삶에 대한 이유를 찾지 못한 것처럼.
그녀가 풍기던 분위기가 낯설지 않았다.
익숙했다.
회귀 전에 닥치는 대로 검만 휘둘렀던 자신과 비슷했으니까.
자신처럼 삶에 대한 이유를 찾지 못하고, 바보 같이 죽기 위해 사는 길을 택했던 안개꽃 파티의 사람들을 떠올리게 했으니까.
물론, 그녀가 그 정도까지 초연해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는 생기를 찾은 그녀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등받이에 기댔다.
“피곤하다.”
“얼마나 있었다고. 나보다 많이 있었겠니?”
“얼마나 있었는데?”
“파티 시작하기 전부터.”
“응, 피곤하겠다.”
“당연하지.”
그러더니 서현은 묻지도 않았는데 오늘 파티에서 있었던 일을 떠들었다.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받기 싫은데 한도영이 춤을 추자고 해서 곤란하게 만들었다느니, 서연이 억지로 데리고 다니느라 주구장창 인사만 해야 했다느니.
“따라다니는 애들을 떼어놓는 것도 얼마나 힘들었는데.”
“그러네. 따라다니던 애들이 안 보이네.” “그걸 이제 알았니?”
은하는 여름방학 때, 한서연이 주최했던 모임에서 만난 아이들을 찾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연회장에 있을 때만 하더라도 아이들이 그녀를 따라다니는 모습을 보았는데, 지금은 그녀 혼자밖에 없었다.
“그래도 내가 하나는 도와줬잖아.” “어떤 거?”
달밤을 올려다보고 있던 서현이 물었다.
은하는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안 따라다닌 거.”
“…퍽이나 고맙네.”
서현이 눈살을 찌푸렸다.
생색을 내려던 은하는 그녀가 제대로 반응해주지 않으니 한숨을 쉬었다.
“저번 모임은 어땠어?” “다음부터는 안 불러주면 안 될까?” “그건 나 말고 언니를 설득해야지. 언니는 너를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지만.”
그러게. 네 언니는 왜 날 마음에 들어 하는 걸까.
은하는 서연이 주최했던 모임에서 있는듯 없는듯 활동했다.
그런데도 서연은 은하가 마음에 들었는지 다음 모임 때에도 오라며, 그를 서현의 파벌에 넣으려고 꾀하는 것처럼 보였다.
한서연은 먼 미래에 시리우스그룹을 이어받는다.
그녀가 그를 마음에 들어 하는 게 나쁜 일만은 아니었다.
다만 아이들의 정치놀이에는 끼고 싶지도 않거니와, 파벌에 속하는 것으로 혹시라도 모를 귀찮은 일을 겪고 싶지 않았다.
“은하 네가 저번에 그랬지?”
“뭐라고 그랬는데?”
“포기해. 포기하면 빠르다고.”
“허, 참.”
“이참에 사회생활 일찍 한다고 생각하고.”
“개뿔.” “혼날래?”
은하는 고개를 저었다.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은 서현은 다시금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디에 있더라도 찾을 수 있을 것처럼, 달만은 어둠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았다.
은은한 달빛이 그렇게 별빛도 없는 밤을 밝히고 있었다.
“어?”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강이네.”
음악이 흘렀다.
누군가 발코니를 열어둔 것인지, 저 위에서부터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자.”
서현이 손을 내밀었다.
은하는 그녀가 내민 손을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했다.
“눈치가 없는 거니, 아니면 그냥 바보인 거니?”
“…네, 네.”
벤치에서 일어난 은하.
이미 한 번 은아와 춤을 춘지라, 더 이상 춤을 추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아버지 회사 사장되시는 분의 딸을 소홀히 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일단은 그녀의 파벌에 속해 있기도 했다.
고로 꼬마여왕의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여왕님 뜻대로 해야지 뭘.”
“너 그거 엄청 오글거리는 거 아니?”
그 말을 듣고 얼굴을 구긴 노은하. 흙을 집어먹은 것처럼 인상을 써서는, 입술을 삐죽이며 궁시렁거렸다.
서현은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아무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단지 그의 손을 쳐내며,
“예의 없게 말도 없이 잡을 거야?” “먼저 내민 사람이 누군데 그래.”
“너 정말 매너가 꽝이구나.”
“그래, 꽝이다. 됐냐.”
“됐냐?” “…됐어? 됐나요?” “…….”
분하지만 을의 인생이 그런 것이거늘.
한숨을 쉰 은하는 자세를 바로하고 벤치에 앉아 있던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Shall We Dance?”
“50점.”
“콱, 씨….”
“씨…, …어?”
물론 은하가 이대로 당하고 있을 리 없었다.
그녀가 당황하는 얼굴을 보고 싶었다.
그래서 그녀가 손을 잡자마자, 있는 힘껏 잡아당겼다.
벤치에 앉아 있던 그녀가 균형을 잃고 앞으로 고꾸라진 건 당연지사.
“50점.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부터 이러면 어떡해?”
서현이 넘어지는 일은 없었다.
그가 자신의 가슴 쪽으로 끌어당겼기 때문이다.
“─흐음.”
서현도 가만히 있지 않았지만.
“아, 아야! 너 지금 뭐하는 거야!” “내가 뭘.”
눈을 깜빡이고만 있던 그녀가 그의 가슴을 꼬집었다.
여자애가 손이 참 매웠다.
결국 춤을 추기 전부터 기를 빼는 두 사람이었다.
☆
─선력 6년.
선녀 임가을은 낭랑한 목소리로 새해인사를 건넸다.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지난해도 다사다난한 해였습니다. 몬스터는 여전히 우리를 위협하고, 코쿤은 우리를 완전히 지켜주지 못합니다.
그래도 우리는 모두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마주하는 것을 택하고, 물러서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는 것을 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내딛는 한 걸음이 겨우 작은 걸음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언젠가 이 걸음이 큰 걸음으로 이어지고, 밝은 미래로 나아갈 것이라고 굳게 믿습니다.
저는 국민 여러분이 자랑스럽습니다. 새해에도 국민 여러분의 손을 잡고 힘차게 전진하고 싶습니다.
1999년. 우리는 인류사에 다시는 없을 재앙으로부터 친구를 잃고, 자식을 잃고, 가족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토지를 잃었습니다.
30년이 넘는 시간이 흘러도 잃었던 아픔은, 상실의 슬픔만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새해는,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의 슬픔을 기쁨으로 덧칠하고 싶습니다.]
바람이 불었다.
임가을이 구두 소리를 울리며 돌길을 걸었다.
[우리는─.]백은의 마나가 그녀를 감쌌다.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 백은색 마나가 그녀의 미모를 비추고, 그녀가 착용한 장신구가 마나에 반응해 빛을 발했다.
그녀가 백은색의 이채가 스쳐간 눈빛으로 열 한 명의 플레이어들을 둘러보았다.
검은 망토를 걸친 이들이 모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이 몸이 백골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십이좌 필두 문준이 맹세했다.
[사용할 수 있는 수는 모두 써서라도.]십이좌 백서진이 읊조렸다.
[눈을 뜨지 못하는 일이 있더라도.]십이좌 윤성진이 중얼거렸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하여.]십이좌 신서영이 답했다.
[적들을 모두 불살라버리는 한이 있더라도.]십이좌 신명환이 고개를 숙였다.
[도심에 새로운 싹을 틔우기 위해.]십이좌 방연지가 다짐했다.
[서로가 어울리는 세상을 위해.]십이좌 오건후가 날개를 펼쳤다.
[마지막 탄환까지.]십이좌 손지희가 말했다.
[이 한 몸 바쳐서라도.]십이좌 이도진이 각오했다.
[누구보다 강하게.]십이좌 강현철이 불꽃을 흘렸다.
[아무도 잃지 않고.]십이좌 박혜림이 석장을 찍었다.
[─우리는─.]십이좌가 만든 길을 내려온 임가을이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의정부를 탈환합니다.]리라이프 플레이어 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