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life Player RAW novel - Chapter 118
선력 6년, 은하는 11세가 되었다.
겨울방학을 마친 지 일주일이 흐른 그는 종업식을 맞이했다.
“올해도 모두 같은 반이네.”
새로운 반을 배정받은 은하는 아무런 감흥도 들지 않았다.
예상했던 바였다.
담임이 누구인지는 1학기가 시작되어야 알게 될 일이지만, 어차피 누가 될지는 뻔했다.
다른 아이들도 이제는 그러려니 하는 눈치였다.
“대장, 오늘도 공터에 가 있을까?” “오늘은 일이 있어서 못 갈 것 같아. 오늘은 너 혼자 훈련하고 있어.” “응, 그럴게.”
은하는 해를 넘기고부터 은혁에게 전투에 적합한 기술을 가르쳐주고 있었다.
훈련 도중 체력이 다해 쓰러지는 은혁이었지만, 그만두고 싶다는 말은 지금까지 한 번도 꺼낸 적이 없었다.
어린 것이 참 독했다. 지쳐 쓰러지더라도 어떻게든 일어나려 하는 모습은 포기라는 단어를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럴수록 은하는 진지하고 엄격하게 가르쳤다. 하나라도 더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너 어디 가려고?” “말했잖아. 오늘 은애 유치원 소집일이라니까.” “거기를 네가 왜 가.”
“왜. 내가 내 동생 보러 가겠다는데 뭐.”
가방을 챙기고 일어난 은하가 투덜거렸다.
여자아이들은 성장이 빨랐다.
민지는 겨울방학 사이에 은혁과 비슷할 정도로 키가 부쩍 자랐다.
은하도 제법 자라기는 했어도, 여자아이들의 성장을 따라잡으려면 아직 멀었다.
더군다나 작년까지만 하더라도 아이들 사이에서 제일 작았던 하양이 자신과 엇비슷하게 자랐을 때에는 충격을 받아야 했다.
내가 정말 얼른 키 크고 만다.
진짜 몇 년만 지나 봐라.
남몰래 결의를 다진 은하는 건성으로 손을 흔들고 학교를 나섰다.
목적지는 정해져 있었다.
3년만에 방문하는 도안유치원.
오랜만에 방문했는데에도 유치원 은 바뀐 데가 없는 것 같았다. 기억 속 그대로였다.
오늘은 은애의 유치원 소집이 있는 날이었다.
어머니는 굳이 오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지만, 은아가 중등아카데미에서 생활하느라 오지 못하니 자신만이라도 보러가고 싶었다.
게다가 개학을 하면 은애의 유치원 생활을 아예 보지 못할 테니까.
이렇게 작았나.
오랜만에 방문해서 새삼 신기하기도 했다. 모든 것이 작다는 생각이 들었고, 낯설게 느껴졌다.
소집일이라 그런지 유치원 내부는 비교적 한산했다.
은하는 유아용 슬리퍼를 반쯤 신다 도로 돌려놓았다.
발이 들어가지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어른용 슬리퍼를 질질 끌고 학예회장으로 내려갔다.
“은하야, 여기야, 여기.”
“아, 엄마. 은애는?”
“은애는 저기 맨 앞에. 보이니?” “…아, 찾았다.”
학부모들 사이에 있던 어머니를 발견했다.
어머니의 곁에 선 은하는 유치원 선생님들로부터 설명을 듣고 있는 어린아이들을 살폈다.
은애는 맨 앞에 있었다.
아이들은 제대로 집중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은애는 무엇이 그리 신기한지 유치원 선생님들의 설명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은애 반 선생님은 타요 선생님이야. 은하 너도 알지?” “타요 선생님이? 누나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우리가 타요 선생님이랑 인연이라도 있나 보네.”
“그러게. 타요 선생님도 신기해하시더라.”
어머니는 단상 한편에서 노트북을 조작하고 있던 타요 선생님을 가리켰다.
3년이 지났어도 타요 선생님은 크게 달라진 점이 없었다.
올해로 서른 중반을 넘겼을 텐데도 의외로 동안의 외모를 유지하고 있었다.
저 선생님은 하나도 안 늙었네.
누나가 유치원생일 때 찍었던 사진에서도 저 모습이었는데 정말 사람 맞아?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은하는 정말 늙지도 않고 변하지 않는 모습을 유지하는 사람들을 알고 있었다.
타요 선생님은 굉장히 동안인 점을 제외하면 평범한 사람에 불과했다.
노은하 그가 라고 불릴 때에도 소년의 외형을 하고 있던 윤성진이나, 수백 년을 살았다는 소문마저 있을 정도로 나이를 확인할 수 없는 프리시스 메모리는 시간의 흐름에 얽매이지 않는 자들이었다.
아, 끝났나 보네.
설명회가 끝났다.
한시도 자리에 있지 못하고 들썩이던 아이들이나, 주의가 산만했던 아이들이 부모에게 뛰어갔다.
제법 얌전한 아이들은 부모가 다가올 때까지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예를 들면, 은애처럼.
“아, 오빠!” “착하네. 다른 애들처럼 울지도 않고 있어서.” “헤헤, 오늘 울지 않으면 엄마가 오징어땅콩이랑 맛동산이랑 뽀빠이 사준댔어!”
“그거 다 먹을 수 있어?”
“음~ 그럼 은애는 맛동산 먹을래!”
우리 아빠가 은애 입맛을 아재취향으로 만들어버렸어.
은하는 소란을 피우지 않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요새 은애는 아버지가 쟁여둔 과자에 맛이 들렸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오감자와 허니버터칩을 좋아했던 입맛이 그새 바뀌어버린 것이다.
그래도 여동생이 헤실헤실 웃으며 달라붙으니 그녀에 대한 걱정이 싹 사라졌다.
“은하도 왔구나. 못 보던 사이에 많이 자랐네.”
“안녕하세요, 선생님.”
자리를 정리하다 은하를 발견한 타요 선생님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은하는 툭 하면 민지나 은혁과 다툼을 벌이다 혼이 났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가 그립기도 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시끄럽지 않은 날이 없었지만, 이상하게 그때가 그리웠다.
그 생각은 1분도 채 안 돼서 사라졌지만.
“타요! 타요! 선생님!” “응?”
“은애야. 선생님은 타요타요 선생님이 아니라 타요 선생님이란다.” “타요 선생님!”
은하에게 달라붙어 있던 은애가 쪼르르 달려가서는 타요 선생님의 앞치마를 잡아당긴 것이다.
타요 선생님이 무릎을 굽혀 은애와 눈높이를 맞췄다.
그러자 은애가 눈을 반짝이고서,
“은애도, 고블린 죽일 거예요!”
“…응?”
까치발을 들어 올려 자기의견을 피력하는 노은애, 5살.
반면에 타요 선생님은 그대로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은하는 알고 있었다.
그가 지금 웃는 게 웃는 게 아니라는 것을.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이미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가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갸웃거릴 때에는 어서 도망쳐야 한다는 것을.
…도망쳐야겠다.
은하는 슬그머니 뒷걸음질을 쳤다.
하지만 그는 깜빡 잊고 있었다.
피해야 할 사람은 타요 선생님만이 아니라는 것을.
“은하야?”
뒤에서 어머니가 차디찬 미소로 서 있었다.
“은하 네가 알려준 거니?”
뒤에는 어머니요, 앞에는 타요 선생님.
은하는 조금씩 거리를 좁혀오는 두 사람을 보며 곤혹함을 감추지 못했다.
“…에이, 누나가 했겠지.”
사실 은하는 며칠 전에 유치원 생활이 궁금하다는 은애에게 자신의 무용담을 들려준 적이 있었다.
‘내가, 어? 장난감 칼로 막! 막! 팟 하고 때리니까 고블린이 죽은 거 있지?’
‘우와~! 우리 오빠 최고! 은애도 하고 싶어! 팟 하고!’
지금은 살아야 했다.
은아를 파는 일이 가슴 아프기는 했지만 일단 살고 봐야 했다.
그의 거짓말은 은애 앞에서 허무하게 들통나버렸지만.
“오빠가 그랬어! 칼로 막! 막! 고블린 죽였다고! 은애도 고블린 죽이고 싶어요!”
“하, 하, 하….”
애 앞에서는 아무 말도 못하겠다.
다시금 은애 앞에서는 말조심을 해야 한다는 교훈을 배운 그였다.
“어머님.”
“네.” “잠시 은하 좀 혼내겠습니다.” “네, 선생님이 오랜만에 혼내주세요.”
어머니가 선뜻 대답했다.
입가를 끌어올린 타요 선생님이 은하의 볼을 잡아 늘렸다.
은하의 볼이 오랜만에 찹쌀떡처럼 볼이 늘어났다.
“은애도! 타요타요 선생님! 은애도 해주세요!”
은애는 순진무구한 얼굴로 폴짝폴짝 뛰어올라 타요 선생님을 보챘다.
☆
“오빠, 은애 친구.”
“친구?”
볼 빨간 유년기를 돌이킨 은하는 은애가 데려온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곰 인형을 끌어안고 있는 여자아이.
아이는 낯설어하며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안녕?” “…안녕, 하세요.”
은애가 데려온 아이는 놀이터에서 놀고 있던 아이였다.
할머니와 같이 온 것인지, 은하는 여자아이의 뒤에서 그녀를 지켜보고 있던 할머니를 발견했다.
눈이 마주친 할머니가 살며시 손을 흔들었다.
고개를 숙여 인사한 은하는 은애의 손을 꼭 붙잡고 있는 여자아이의 이름을 물었다.
“선미예…입니다.”
“미에라고 해!”
“아니야, 미예야, 미예.” “미에?”
“미예.” “미에!” “미예.”
고개를 붕붕 저은 아이는 은애에게 연신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었다.
하지만 은애는 미예의 이름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했다.
결국 은애가 택한 것은,
“그럼 선미 하자!”
“선미? 그게 뭐야?” “선미에니까 선미지.” “응, 그럼 선미 할래.”
은하는 행여나 다치지 않을지 미예의 손을 잡고 놀이터로 뛰어가는 은애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선미예라.
어째 이름이 낯익었다.
기억을 떠올리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게 우리 미예야, 선미예.
어때, 예쁘지? 우리 딸이 말이지, 살아 있었으면 분명 연예인 뺨치게 예뻤을…, 텐데….’
안개꽃 파티의 일원이자, 안개꽃 파티를 최심부까지 도달하게 해주었던 가디언.
선기준.
지키지 못해 아무도 지키지 않는 가디언이 된 그는 술에 취했다 하면 자신의 손으로 죽인 딸아이의 사진을 보고 눈물을 흘리고는 했다.
은하도 그의 술주정을 들어준 적이 있었다.
귀에 닳도록 들었던 나머지, 딸아이의 이름이 선미예라는 것마저 기억할 정도로.
그 아저씨 딸이, 저만하긴 하겠네.
은하는 미끄럼틀을 거꾸로 오르는 은애와 미예를 보며 과거에 잠겼다.
선기준, 그는 자신의 딸을 목을 졸라 죽였다.
사람들은 모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노라고 위로했다.
몬스터에게 감염된 존재는 다시는 원래대로 돌아오지 못하니까.
그는 결국 몬스터로 변모해가던 딸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다만 과정이 달랐을 뿐이다.
자신을 죽이려 달려들던 딸아이를, 자신의 손으로 목을 졸라 죽였을 뿐.
‘지금도 몇 번이나 생각해.
그때 내가 왜 그랬을까 하고.
차라리 그때, 미예하고 같이 몬스터가 되고 말지 나 혼자 살겠다고 내 손으로 죽이다니….’
사람들이 아무리 그를 위로해도, 선기준은 그날 자신이 저질렀던 짓을 후회했다.
그때를 후회하고, 자신을 증오하며 술독에 빠져 살았다.
전선에서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싸우던 가디언은, 정작 자신이 지켜야 할 소중한 것을 지키지 못하고, 싸워야 할 이유를 잃어버렸다.
그를 찾는 파티는 어디에도 없었다.
플레이어의 세계에서 가디언은 포지션 자체로 신뢰의 대상이었다.
가디언은 이름 그대로 파티를 지키기 위한 존재였으니까.
물론, 가디언은 자신의 목숨을 다해 파티를 지키는 만큼, 섣불리 파티를 고르지 않았다.
파티에 가디언이 있고 없고로, 그 파티가 믿을만한지 그렇지 않은지를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한 번 신용을 잃은 가디언은 두 번 다시 재기할 수 없었다.
플레이어들이 가디언을 신뢰하고 신용하는 만큼, 자신의 목숨을 지켜줄 가디언에게 엄격한 잣대를 요구했다.
예를 들어, 파티를 지켜야 할 가디언이 혼자 살겠다며 도망쳐 나왔을 경우.
예를 들어, 아무도 지키지 못하고 홀로 살아남았을 경우.
예를 들어, 파티를 지켜야 할 가디언이 자신의 가족도 지키지 못하고, 심지어 자신의 가족을 죽이고 말았을 경우.
플레이어의 세계에서 한 번의 오점은 돌이키기 어려웠고, 그 중에서도 가디언의 오점은 돌이킬 수 없었다.
‘지 가족도 지키지 못한 놈한테 어떻게 내 목숨을 맡겨?’
‘불쌍하기는 하지. 근데 불쌍한 거랑 내가 죽을지도 모르는 건 전혀 다른 사정이잖아?’
‘솔직히, 가디언으로서는 끝이지.’
머리와 이성이 아닌, 가슴과 감정으로 살아가는 그들은 선기준의 오점을 무시할 수 없었다.
가족도 지키지 못한 가디언이, 그것도 자신의 딸을 죽인 가디언이 파티를 제대로 지킬 수나 있을까.
플레이어들은 모두 등을 돌렸다.
그리고 가족도, 지켜야 할 사람도, 명예도, 살아야 할 이유도 잃은 채 술만 퍼마시던 그에게 손을 내민 사람이 바로 은하였다.
‘…죽음도 무서워하지 않는 가디언이 필요해.’
‘지금 나는 더 이상 잃을 게 없다, 애송아. 잃을 게 없는 놈에게 무서울 게 있다고 생각하냐?’
‘그러면 와. 조건은…, 전보다 두 배로 쳐주지.’
‘이제 나는 아무도 지키지 않을 거야. 썩 꺼져.’
‘그거 좋네. 나도 누가 날 지켜주는 건 딱 질색이니까.’
‘허, 참. 그럼 가디언이 왜 필요해?’
‘가디언이 길 하나는 잘 뚫으니까. 어그로도 잘 끌고.’
‘이런 미친놈을 봤나. 나보고 어그로나 끌고, 길이나 뚫라는 거냐?’
십 년이 넘는 세월을 술에 절어, 딸을 죽였던 과거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던 가디언.
살고자 했던 이유를 잃었음에도 죽음을 두려워했던 는 그저 죽기 위해 은하가 내민 손을 잡았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얘! 너는 하나밖에 없는 딸내미는 나한테 맡기고 어디를 쏘다녀 온 거니!”
회상에서 돌아온 은하는 숨을 헉헉 쉬며 뛰어온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이야.
서투르게 정장을 입은 남자.
넓은 어깨를 가진 그는 자신의 어머니를 상대하느라 진을 빼면서도, 놀이터에서 놀고 있던 딸아이를 찾고 있었다.
“미예야! 아빠 왔다!”
“아빠~!”
남자에게 쪼르르 달려가는 미예.
남자는 자신의 딸을 안아 올렸다. 곰 인형을 껴안은 아이가 자신의 아버지를 내려다보며 까르르 웃었다.
“늦어서 미안해. 아빠 기다렸지?” “아니, 괜찮아. 아빠.”
“정말?” “응! 나 친구 생겼어.”
“그래? 어디 있는데? 미예 친구면 아빠도 보고 싶은데.”
은하는 딸아이를 행복한 미소로 바라보는 남자, 선기준을 그리운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네가 은애구나. 안녕?”
“안녕! 하세요!” “그리고 이쪽은 은애 오빠인가?”
회귀 전, 안개꽃 파티를 지탱하는 든든한 기둥이 되어주었던 남자.
선기준은 은하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얼굴로 친근하게 말을 붙였다.
얼굴에 자잘한 생채기가 있었지만, 왼쪽 뺨을 사선으로 그은 흉터는 찾을 수 없었다.
“…노은하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이에요, 아저씨.
은하는 은애의 손을 붙잡고 정중히 인사했다.
기준이 당황해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가 할 수 있는 감사의 표시였다. 과거에 자신을 위해 싸워주었던, 아무도 지키지 않겠다면서 역설적으로 자신의 목숨마저 버리며 죽음을 수호했던 가디언.
그가 아는 가디언은 아직 이 세상에 없었다.
그래, 아직이었다.
은하는 알고 있었다.
선기준의 딸이 7세가 되는 해에 몬스터에게 감염되는 것을.
…쟤도, 은애도.
어떻게든 지킬 수단을 마련해야겠네.
못 보고 지나칠 수 없었다.
언젠가 이 세상에 태어날 를 완전히 죽이기로 다짐했다.
리라이프 플레이어 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