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life Player RAW novel - Chapter 12
‘이제 오빠한테 카네이션 안 줄 거예요!’
얼굴을 붉히며 소리친 백련의 진의를 알게 되었을 때에는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흐른 뒤였다.
물론, 어버이의 날마다 라면을 끓여먹는 건 변하지 않았지만.
언젠가부터 그녀는 다른 라면을 요구하러 오기도 했다.
‘오빠, 은하 오빠. 오늘 우리 집에서 라면 먹고 갈래요?’
‘…하아. 이보세요, 선녀님. 지금 나보고 청와대에서 라면 먹고 가라는 소리신지. 내가 왜 청와대까지 가서 라면이나 먹어야 하는데.’
‘오빠. 그 얘기가 아니잖아요. 눈치가 없는 거예요, 없는 척 하는 거예요?’
‘내가 어디서부터 이 녀석을 잘못 키운 건지.’
‘오빠, 오빠. 요새는 그게 대세래요.’
‘뭐가. 아니, 별로 알고 싶지도 않다.’
‘에이, 조금만 듣고 가요.’
‘그래, 뭔데.’
‘키·잡.’
‘…내가 정말 어디서부터 널 잘못 키웠는지 모르겠다. 나는 이제 그만 가련다.’
‘벌써 가게요? 에이…. 오빠, 다음에는 꼭 라면 끓여주셔야 돼요? 그 라면이 아니라, 우리 어렸을 때 먹었던 라면이요.’
‘…나중에 청와대 부엌 비워놔. 파도 송송
썰어줄게.’
낯가림이 심하던 아이는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를 좋아하는 여자가 되어 있었다.
카네이션을 받을 날을 기대하고 있던 그로서는, 그녀의 진의를 알아차리고 포커페이스를 잃을 정도로 당황했었다.
그래도 보고 싶네, 꼬맹이.
‘꼬맹이라 부르지 말라니까요!’
두 팔을 붕붕 휘저으며 항의하는 그녀가 눈에 선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집에 가고 싶어서.”
어이, 먹민지. 내 추억에 얼굴을 불쑥 들이밀지 말란 말이야.
은하는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답했다.
“아직 점심도 안 먹었는데. 엄마가 보고 싶어서 그러는 거지? 마마보이구나.”
“우리 엄마가 너희 엄마보다 예쁘기는 하지.”
“우리 엄마도 예쁘거든.”
“참고로 누나는 더 예뻐.”
“나도 알거든!”
아무 말 대잔치를 벌이는 두 사람이었다. 뜻밖의 소득은 민지도 자신의 어머니와 누나를 예쁘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하긴 동네에서 소문이 자자하다는데 옆집에 사는 얘가 모를 리가 없지.
아버지야 뭐….
…나는 아버지를 닮았다니까, 응….
아, 눈에 먼지가.
“그나저나 쟤들이 자꾸 뭘 던지는데 무시할 거야?”
“아아….”
조금 전부터 종이뭉치가 뒤통수를 때리고 있었다. 적당히 무시하고 있었더니 이제는 시도 때도 없이 날아오고 있었다.
누가 시비를 걸고 있는지 모르지는 않았다.
뒤쪽 테이블에서 카네이션을 접고 있던 은혁 패거리였다. 카네이션을 접으라고 준비한 종이로 이따위 장난을 치고 있는 것이다.
일전에 된통 당하고 나서 다가오지도 않더니, 약효가 떨어진 모양이었다.
“쟤 무시하는데?”
“바보 같이 쫄아서 그래.”
“겁쟁이, 겁쟁이.”
그가 겁이라도 먹었다고 생각했는지, 이제는 대놓고 낄낄거리며 놀리는 중이었다.
이 녀석들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나.
“신경 꺼.”
은하는 민지에게 그렇게 말해놓고서는, 바닥에 떨어진 종이뭉치를 몇 개 주워들었다.
말했지? 당하면 배로 갚아준다고.
아주 뒤지는 거야 그냥.
뒤돌아서 조준할 필요도 없었다.
마나 감지망은 위대했으니까.
은하는 카네이션을 접는 사이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마방진의 입에 종이뭉치를 던졌다.
“악!”
마나를 실어서 좀 아플 거다.
소리는 하나로 끝나지 않았다. 옆에 있던 연성진도 마방진처럼 입에 종이뭉치를 물고 말았다.
그리고 최은혁도.
“이게!”
입에 들어온 종이뭉치를 바닥에 버린 은혁이 씩씩 거렸다.
비축이라도 해두고 있었던 것일까.
은혁은 마구잡이로 종이뭉치를 던져댔다.
차라리 테이블 아래로 숨었다면 모를까.
은하는 날아오는 종이뭉치를 손으로 툭툭 쳐내며 카네이션을 완성했다.
“와~!”
같은 테이블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아이들이 감탄사를 흘렸다.
어깨를 으쓱한 은하는 아직도 종이뭉치를 날리는 은혁에게 마나를 실어 반격을 가했다.
우선 한 방.
“아!”
잔인하게도 은하는 같은 지점만 노렸다. 그러니 이마가 빨개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은혁 패거리는 공격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일제히 테이블 아래로 기어들어가야 했다.
“와아~”
“너 지금 어떻게 한 거야?”
던지는 족족 맞추는 데다, 은혁 패거리가 눈물을 흘리니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아이들이 놀랄 수밖에.
민지는 그의 멱살까지 잡으며 던지는 요령이나 알려달라며 성화였다.
“노은하 너…!”
반대로 된통 당할 대로 당한 은혁은 잔뜩 성이 난 상태였다.
테이블에서 기어 나온 그나 마방진, 연성진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리기 직전이었다.
여기서 울렸다가는 괜히 더 귀찮아지겠지.
이 정도 선에서 만족한 은하는 은혁의 패거리에게서 신경을 끄기로 했다.
“하던 거나 마저 하자. 너희들 제대로 접고 있는 거지?”
“무시하지 마!”
“에효. 무서운 걸 모르는 것도 참 대단하다.”
얘 좀 봐라. 봐줬더니 아주 기어오르네.
자신이 무시당했다고 느꼈는지 은혁은 은하가 사용하고 있던 가위와 풀을 빼앗았다.
하지만 은하는 이미 카네이션을 만든 뒤였다. 가위와 풀도 유치원의 비품이라 빼앗겨도 신경 쓸 필요도 없었다.
“가위랑 풀은 옆 사람한테 빌려서 사용하고. 하, 최은혁 너도 이제 그만 자리로 돌아가서 카네이션이나 마저 접지 그래.”
“이게…!!”
은혁이 아무리 위협을 가해도 축에도 끼지 못했다.
어린아이에게 겁을 먹어서야, 내가 어디 가서 사람들이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떠는 라고 명함이나 내밀고 다닐 수 있었겠니.
“선생님 최은혁이 자꾸 괴롭혀요!”
“맞아요 선생님!”
“은혁이랑 방진이랑 성진이가 종이뭉치를 막 던졌어요!”
자고로 아이들의 세계에서 어른을 부르는 일은 비겁한 짓으로 통했다. 남자아이가 코피를 보이면 지는 거라고 여기는 것처럼 불문율이었다.
근데 나는 워낙에 비겁한 사람이라서.
그리고 그를 따르는 아이들도 타요 선생님에게 일렀다.
“치사하게 이러기냐!”
“선생님! 최은혁이 또 때리려고 해요!”
이럴 때에는 또 쿵짝이 잘 맞았다. 은하를 따라 지원사격을 해주는 민지였다.
“노은하~! 가만 안 둬!”
“그래, 그래. 은혁이는 자리로 돌아가서 카네이션 만들자.”
결국 타요 선생님에게 끌려 강제 퇴장을 당하는 최은혁이었다.
“은하 너도 잘못했지?”
“저는 카네이션만 만들고 있었는데요.”
“선생님도 은혁이랑 방진이랑 성진이가 괴롭힌 거 알아. 그래도 아이들을 울리면 안 되겠지?”
“네….”
타요 선생님은 그의 볼을 꼬집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건 어떡하지.
그러던 은하는 세 번째로 만든 카네이션을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올해는 할머니를 만나러 갈 계획이 없었다.
만나러 가서는 안 됐다.
하지만 회귀 전 할머니의 슬하에서 자란 기억이 있는 그는, 카네이션을 버리지 못하고 가방 안에 넣었다.
☆
“은하야 고마워.”
저녁을 차리던 어머니가 은하를 꼭 끌어안았다.
별안간 일어난 일에 은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던 그는 어머니의 앞치마에 달려있는 종이꽃이 눈에 들어왔다.
내 카네이션!
오늘 유치원에서 가방 안에 넣어두었던 카네이션이었다.
언제 꺼내신 거지? 아니, 어머니가 내 가방을 살피지 않았을 리 없지.
“고마워. 내년에도 기대할게.”
“아니, 뭐, 그거 가지고….”
“진짜 카네이션보다 예쁜걸. 은아도 고마워.”
“헤헤! 엄마,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후후, 아이들한테 카네이션을 받는 건 정말 기쁘네.”
겨우 종이로 만든 카네이션이건만.
은하는 괜스레 겸연쩍어졌다.
어머니는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반응을 보이는 그가 귀여운지 연신 볼을 비볐다.
감사해야 할 건 나인걸.
어머니는 모르시겠지. 지금 이렇게 옆에 있어 주는 거야말로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를.
그가 만든 카네이션 옆에는 한 송이가 더 있었다. 은아가 오늘 학교에서 만들어온 모양이었다.
누나, 손재주 너무 없는데.
다음에 마나를 가르치는 것만 아니라 종이접기도 알려줘야겠네.
“자! 은하 네 거.”
어째서인지 은하에게도 카네이션을 내미는 은아.
진작 은아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포기한 은하는 고맙다고 말하며 카네이션을 받아들었다.
누나가 만든 거니까 고이 보관해야지.
“근데 은하야, 카네이션이 세 송이던데, 하나는? 은하도 은아 주려고 만들었니?”
옆에서 누나가 기대 어린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부담스러운데. 그래도 미안, 누나.
“할머니 거야.”
“외할머니?”
아버지는 천애고아였다. 그래서 그에게 할머니는 외할머니밖에 없었다.
“그렇구나. 은하는 할머니를 좋아하는 구나.”
어머니는 그가 아기였을 때에나 만나봤을 할머니에게 카네이션을 준다고 하더라도 크게 의심치 않았다. 오히려 흐뭇한 미소로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다음에 할머니한테 가져다드리자.”
“응.”
올해는 안 되겠지만 내년에는.
은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 왔다!”
“아빠~! 나 오늘 학교에서 카네이션 만들었어!”
조금 늦게 퇴근한 아버지.
은아는 재빨리 현관으로 뛰어가서는 아버지에게 직접 만든 카네이션을 보여주었다.
“이거 아빠 거야!? 역시 은아 밖에 없어! 오늘 피로가 싹 가시는걸!”
“헤헤.”
아버지도 참. 종이로 만든 카네이션이 뭐가 그리 좋다고.
“자, 은하도 아빠한테 줘야지.”
어머니가 살며시 그의 등을 밀었다.
그만 당황한 은하는 어머니를 돌아보았다.
“어? 엄마가 주면 안 돼?”
“은하가 줘야 아버지가 좋아할 거야.”
“으….”
정론이라면 정론이었다.
어머니에게 떠밀리다시피 은하는 아버지에게 다가갔다.
아버지는 잔뜩 기대에 찬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윽, 눈부셔! 너무 그렇게 보지 말라고!
이렇게 된 이상 얼른 주고 끝내야지 원.
“아빠 여기.”
“은하 네가 만든 거니? 누나보다 잘 만들었는데?”
“아빠….”
낮게 불평하는 누나.
“하하! 미안, 미안.”
쾌활하게 웃는 아버지.
“유치원에서 만들었어.”
회귀 전 삶을 통틀어 그는 누군가에게 카네이션을 건넨 적이 없었다.
그래서 어떤 얼굴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난처했다.
걱정은 기우였다.
“고맙다.”
아버지는 큼지막한 손으로 머리가 흐트러질 정도로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고는 한 손에는 은아를, 한 손에는 그를 끌어안아서는, 오늘 하루 들어본 목소리 중에 제일 큰 목소리로 말했다.
“차에 장식하고 다녀야겠는걸! 직장동료들한테도 자랑하고.”
아니, 제발 그러지 마. 쪽팔리니까 참아줘.
그가 말렸지만 어림도 없었다.
하아, 한숨만 절로 나온다.
이리도 간단한 일이었는데.
그냥 주기만 해도 됐을 것을.
내년에는 할머니에게도 드려야겠다.
키워줘서 감사했다고.
뒤늦게나마 전하고 싶은 은하였다.
리라이프 플레이어 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