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life Player RAW novel - Chapter 124
자고로 걸어온 싸움은 피하지 않는 법이었다.
“…헐. 으, 은하야?” “누구야. 나한테 베개 던진 놈.”
은하는 바닥에 떨어진 베개를 주워들었다.
5명이 활개를 치더라도 충분하고도 남을 공간에는 다른 방에서 온 아이들도 있었다.
그러다 옆 반 연금술 콤비를 발견했다.
“오호라, 너희들이 던졌구나?”
“아, 아니야! 연성진이 던졌어!” “둘 다 맞으면 되지 뭘 그래.”
눈을 마주친 연금술 콤비가 두 손을 펼쳐들며 당황해했다.
은하는 두 사람의 해명은 들으려 하지도 않았다.
들을 필요도 없었다.
두 사람 다 처리해버리면 그만이니까.
손에 들고 있던 베개를 연성진에게 던지고, 문가에 기대자고 있던 백현율에게서 베개를 빼앗아 마방진에게 던졌다.
두 사람은 베개를 맞고 뒤로 자빠졌다.
“켁!”
“컥!”
“…내 베개.”
베개를 잃고 앞으로 고꾸라진 현율이 졸린 눈을 비볐다. 근처에 아무 짝에나 떨어져 있던 베개를 껴안고는 아예 드러누웠다.
“자, 다음 사람 나오시지.”
은하는 떨어진 베개를 주워들고는 주위를 돌아보았다.
같은 방 아이들을 포함해 다른 방에서 온 아이들이 베개를 쥔 채로 뒤로 물러났다.
남자아이들은 모두 그가 최은혁보다 운동신경이 좋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힘을 합쳐도 이길 수 있을까.
아직 은하를 모르는 아이들 중에는 눈알을 굴리며 기회를 엿보는 아이들도 있었다.
이, 이건 무리야.
은하를 적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고!
마방진은 알고 있었다.
이러다 겨우 한 명에 의해 전멸해버릴지도 모른다는 것을.
은하가 진심을 다하기 전에 남자아이들을 말려야 했다.
“자, 잠깐─!!”
떨어진 안경을 고쳐 쓴 마방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베개를 얻어맞은 충격으로 머리가 어지럽기는 했지만, 그럭저럭 참을 만했다.
“으, 은하야. 우리끼리만 하면 재미없잖아?” “그래서?” “우리 이러지 말고 여자아이들 방으로 내려가자. 김민지한테 한 방 먹이고 싶지 않아?”
어라, 그거 좋은 생각이네.
적의 적은 내 편이라고.
마방진은 은하의 환기를 돌리기 위해 새로운 적을 제시한 것이다.
때마침 남자아이들은 여자아이들의 방으로 놀러가고 싶어 했다.
2박 3일이나 진행되는 수련회였다.
집을 떠나 밖으로 나온 아이들이 자유분방한 분위기 속에서 무언가의 해프닝이나 이벤트를 기대하지 않았을 리 없었다.
여자아이들의 방으로 놀러가고 싶어도 이렇다 할 이유를 찾지 못하고 저희들끼리 놀고 있던 아이들이었다.
“나는 찬성.”
“재밌어 보이는데?”
베개 싸움이라는 명분을 거머쥔 아이들이 시선으로 은하를 보챘다.
그리고 은하는─,
“─나를 따르라.”
4학년 3반을 비롯해 4학년 4반 아이들이 집합한 것은 순식간이었다.
은하는 좌우에 연금술 콤비를 거느린 채 복도를 걸었다.
모퉁이를 돌자 강사의 붉은 모자가 보였다.
정찰대로 나갔던 마방진이 손가락을 들어 올려 조용히 하라는 사인을 보냈다.
강사는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지킨 채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은하는 연성진을 바라보았다.
말할 필요도 없었다.
이들은 전우였다.
눈빛만으로 알 수 있는.
안경을 고쳐 쓴 연성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건투를 빈다.” “어.”
몇몇 아이들을 차출한 연성진이 모퉁이를 돌자마자 뛰쳐나갔다.
“뭐, 뭐야!?”
“돌겨어억─!!”
“”””와아아아─!!””””
강사는 아이들이 소리를 지르며 뛰쳐나오자 당황한 소리를 질렀다.
강사의 눈에는 아이들이 아래층으로 내려가려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둘 수는 없었다.
강사는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길을 막기 위해 두 팔을 벌렸다.
그런데 아이들이 그를 지나쳐 다시금 모퉁이를 돌아 도망친 것이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강사는 부랴부랴 도망치는 아이들을 쫓았다.
이로써 은하는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길을 확보했다.
“으, 은하야. 쟤네들 괜찮을까?”
“…뒤돌아보지 마. 이대로 멈춰서면 쟤네들이 뭐가 되겠어?”
마방진은 전력을 다해 도망치는 연성진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아이들을 다독인 은하는 뒤를 돌아보는 일 없이 계단을 내려갔다.
아래층에는 강사가 보이지 않았다. 자리를 비운 것 같았다.
마침 운이 좋았다.
아이들은 민지의 이름이 적힌 방을 찾으러 돌아다녔다.
아래층에는 문을 열어둔 방이 중간 중간 있었고, 복도 밖을 기웃거리는 여자아이들도 있었다.
“─돌격.”
알아차리는 이가 적으면 적을수록 우위에 설 수 있는 전투였다.
신호를 받은 아이들이 베개를 쥐고 소리죽여 달려 나갔다.
습격을 당한 여자아이들이 새된 비명을 질렀지만, 알 바가 아니었다.
은하는 남아 있는 아이들을 거느리고 민지의 방으로 나아갔다.
[4학년 3반 – 1조김민지가 왜 그럴까 본방 사수]
이 앞은 던전이었다.
아이들은 모두 침을 꿀꺽 삼키며, 은하의 지시를 기다렸다.
“─전투 준비.”
“…오케이.”
마방진이 문 앞으로 몸을 기댔다.
그가 문을 살며시 재빨리 열고, 뒤로 물러났다.
“꺄악─! 뭐야!?”
“잠깐! 이게 뭐하는 짓이야!”
남자아이들의 기습.
방 안으로 뛰어든 남자아이들이 베개를 휘두르고 던졌다.
은하 역시 마찬가지.
그는 아이들이 만들어준 길을 걸어 보스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설마 네가 올 줄은 몰랐어.”
“인생은 원래 예측 불가능한 거야.”
그게 한 번이든, 두 번이든 말이지.
은하는 베개 끄트머리를 잡았다.
그녀는 김민지였다.
한 번에 해치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길고 긴 싸움이 될 것이다.
민지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그녀 역시 베개 끄트머리를 꽉 쥐고 그를 노려보았다.
“”…….””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상대가 빈틈을 보인 순간을 노리고 있었다.
잠시 후, 먼저 발을 움직인 사람은 바로 그였다.
민지는 옆에서부터 들어오는 베개를 받아칠 준비를 했고, 은하는 허리에 힘을 실어 베개를 휘둘렀다.
“…꺅─!!”
민지가 지른 비명이 아니었다.
옆으로 휘두른 베개가 근처를 지나가던 하양의 뒤통수를 강타한 것이다.
베개를 껴안고 도망치던 하양이 철퍼덕 하는 소리를 내며 엎어졌다.
“저, 정하양, 괜찮아!?”
“하양아!”
다행히 베개가 쿠션 역할을 해준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베개에 파묻힌 얼굴을 들어 올린 하양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히잉…, 너무해.”
“…Just Like TT~”
“…은하 너어….”
아차.
은하가 슬그머니 뒷걸음질 쳤다.
짱구 이마를 드러낸 하양이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귀여웠던 나머지 그만 장난을 치고 말았다.
그래서 잊고 있었다.
그녀를 울리는 일은 쉬워도, 울음을 그치게 하는 일은 워낙에 힘들다는 것을.
하양이 오뉴월에 한을 품으면 눈도 내리게 할 수 있는 힘을 지녔다는 것을.
“…우리, 말로 얘기할까?”
“응! 나도 한 대만 때리고.”
떨어진 베개를 주워들고 마나를 가득 싣는 정하양.
베개가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올랐다.
안 돼. 퇴각해야 해.
바로 앞에는 보스 몬스터 김민지가.
그리고 그녀 옆에는 최종병기 정하양이.
은하는 전황을 살폈다. 난전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아니, 최악이었다.
베개를 두 개나 들고 싸우는 서나가 전황을 악화시키고 있었다.
이 전장은 포기해야 한다.
도망쳐야 했다. 자신만이라도.
은하가 몸을 돌려 도망치려 했지만, 하양이 베개를 던지는 속도가 더 빨랐다.
은하는 황급히 몸을 숙였고,
“대장! 이야기는 들었어! 치사하게 나만 빼고 베개 싸움하…!!”
전선으로 복귀한 은혁이 정통으로 베개를 얻어맞았다.
베개에 얼마나 마나를 불어넣었으면, 베개가 펑 하는 소리를 내며 터졌다.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민지가 휘두른 베개가 은혁을 후려 팬 것이다.
은혁은 선 채로 정신을 잃었다.
바닥에 무릎을 꿇은 그가, 몸을 지탱할 힘도 없이 픽 하고 쓰러졌다.
“은혁아, 멋진 희생이었다.”
자신을 위해 대신해서 희생해준 최은혁.
은하는 그의 희생정신에 감사를 표했다.
그를 잊는 일은 결단코 없으리라.
이제 도망치는 일만 남았다.
“지금 이게 뭐하는 짓입니까!!”
소란을 듣고 달려온 강사만 아니었더라면.
결국 아이들은 야밤에 단체기합을 받아야 했다.
☆
“하양이 네가 왜 여기 있어?”
아이들이 모두 잠을 이룬 밤.
버스에서 잠을 자느라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던 은하는 1층 로비로 음료수를 뽑으러 나왔다.
하양은 자판기 앞에 있던 의자에 앉아 있었다.
머리를 푼 채로 창가를 내다보고 있던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한순간 반가워하던 얼굴을 보이던 그녀는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는지 볼을 빵빵하게 부풀렸다.
“흥!”
“내가 미안하다니까.”
얘가 민지를 닮아가나.
한숨을 쉰 은하는 어머니가 챙겨준 동전지갑을 열었다.
자판기에 동전 몇 개를 집어넣고 둘이서 마실 음료를 골랐다.
“자, 이거 좋아하지?”
“으으…, 잘 마실게.”
은하가 내민 음료를 보고 한참이나 고민을 하던 하양.
그녀가 결국 손을 내밀었다.
옆자리에 앉은 은하는 말없이 캔 음료를 홀짝였다.
얘가 왜 이러지.
평소랑 좀 다른 것 같은데.
은하는 곁눈으로 음료는 마시지 않고 캔 따개만 더듬는 그녀를 살폈다.
무언가 고민이 있는 눈치였다.
“무슨 일인데?”
“응?”
“뭘 걱정하고 그래?”
회귀 전이었더라면 누군가 고민이 생겼다고 하더라도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을 것이다.
상대가 말해주지 않을 때까지는 묻지도 않았을 터.
기다리기는 했겠지만.
두 번째 삶을 살면서 성격이 변했다.
가족들, 그리고 아이들의 영향을 받은 것이리라.
“왜. 나한테 말하기 힘든 일이야?” “…아니.”
하양은 고개를 붕붕 저었다.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 넘긴 그녀는 그럼에도 무언가를 말하기 망설이는 눈치였다.
동그란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은하 너는, 왕자님이지?”
“…….”
얘 지금 뭐라니?
은하는 한 손으로는 가슴께에 손을 얹고, 다른 한 손을 의자에 짚고 몸을 기울인 하양을 쳐다보았다.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에게는 중요한 질문인 것 같았다. 흔들리는 눈망울이 자신을 담고 있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왕자님 같은 게 아니야.”
“아얏!”
은하는 손가락으로 하양의 이마를 때렸다.
갑작스런 공격을 당한 하양이 손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하양아. 우리는 이제 유치원생이 아니야.”
음료를 다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난 은하.
자판기 옆에 있던 쓰레기통에 캔을 버렸다. 자리로 돌아와, 아픈 이마를 문지르던 그녀의 볼을 잡아 늘렸다.
“으느하야아 나아아파아….”
힘을 뺐다.
손을 놓지는 않았다.
“이 세상에 왕자님 같은 건 없어.”
“…응.” “내가 누구야?”
“…은하, 노은하.”
“맞아. 그러니까─.”
은하는 하양의 얼굴을 끌어당겼다.
그녀의 눈망울에 오로지 자신만 비치도록 가까이.
“─날 똑바로 봐.”
갑작스런 상황에 눈동자를 빙글빙글 굴리던 하양이 시선을 바로 했다.
맑고 동그란 눈망울이 그를 담았다.
“보고 싶은 것만 보지 마.
이제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 때야.”
“…응.”
은하가 손을 뗐다.
얼굴에 손자국이 남은 하양이 고개를 끄덕였다.
떨림이 멎었다.
자판기 불빛에 비친 그를 바라보았다.
“…응, 그럴게.”
무언가를 결심한 것처럼.
하양이 다시금 답했다.
“아이구, 착하네.”
은하가 놀리는 것처럼 하양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양이 볼을 가득 부풀렸다.
“…있잖아.”
“어, 왜?”
“민영이가 너랑 담력시험 보고 싶대.”
말해도 될까.
하양은 고민했다.
하지만 입을 열자, 지금까지 망설이던 말이 툭 튀어나왔다.
이상하게 신민영에게 미안한 마음은 들지 않았다.
알고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가 뭐라 대답할지.
아니나 다를까.
“
걔가 누군데?”
“응, 은하는 역시 은하네.”
은하가 고개를 갸웃거리든 말든, 하양은 킥 하고 웃음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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