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life Player RAW novel - Chapter 125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외제차.
전경이 뒤로 밀려나고, 새로운 전경이 나타났다.
그 역시 뒤로 밀려났다.
아무도 없는 고속도로를 달리던 외제차는 춘천시로 들어가는 진입구간에서 속도를 낮췄다.
구불구불한 아스팔트 도로를 올라, 외제차가 당도한 곳에는 나팔꽃을 형상화한 심벌이 있었다.
새벽그룹의 상징이었다.
“어서와, 새벽부터 오느라 피곤하지 않았어?”
“너야말로. 이런 외진 곳으로 불러서 미안하다.” “미안하긴 뭘. 어차피 내 일이 호텔 관리인데.”
외제차에서 내린 이병인을 반긴 이는 정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정인이었다.
이정인이 손을 내밀었고, 이병인은 입가에 미소를 그리며 손을 맞잡았다.
이제부터였다.
이 모든 상황을 뒤집을 반전이 시작되는 것은.
원래 인생은 소설보다도 더 소설 같은 법이고, 그렇기에 마지막까지 읽지 않고서는 모르는 법이다.
그러니 정이 많고 바보 같이 착한 동생이여─.
“힘들다. 아침부터 들면서 이야기나 할까.”
“그거 좋지.”
─그때 네가 어떤 선택을 내릴지 궁금하구나.
☆
수련회 둘째 날.
저녁을 먹은 아이들은 호텔 뒤편에 마련된 운동장에서 캠프파이어를 즐겼다.
주변이 수풀로 둘러싸인 호텔.
밤이 되면 호텔의 불빛과 별빛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에서, 드높이 쌓아올린 모닥불은 활활 타올랐다.
아이들은 수련회 강사들의 진행에 따라 게임을 즐겼고, 마지막에는 눈물을 터뜨렸다.
수련회 강사들이 서울에 있을 부모님에게 고마움을 전하라 했기 때문이다.
물론 울지 않은 아이들도 있었다.
은하나 서나는 쪼그려 우는 아이들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지금부터 담력시험을 시작하겠습니다.
여기는 서울과 달리, 매우 어둡습니다. 밤길이 어두워 다칠 수도 있으니, 모두 강사의 지시를 따라주기 바랍니다.”
수련회 강사는 캠프파이어를 즐기던 아이들에게 담력시험에 대해 설명했다.
담력시험은 이제는 다 쓰러져가는 이름 모를 절로 이어지는 길이 있는데, 그 절에서 강사가 준비한 방울을 가져오는 것이었다.
담력시험은 남녀 2인 1조로 이루어졌다.
아이들은 임도훈이 가져온 상자에서 번호가 적힌 종이를 뽑았다.
“…4번이네.”
민지는 상자에서 꺼낸 종이를 보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자아이들이 서로 몇 번을 뽑았는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중에는 신민영도 있었다.
사전에 그녀에게 협력을 자처한 아이들은 상자에서 종이를 꺼낸 은하에게 슬그머니 다가갔다.
“은하 너는 몇 번이야?” “…11번.”
하여간, 노은하 쟤는 저런다니까.
민지는 귀찮아하는 얼굴이 역력한 은하를 보고는 그럴 줄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아이들은 은하가 어떤 아이인지 모른다.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는 그를 단순히 시크하다는 말로 포장했다가는, 실체를 알게 되었을 때 그 괴리를 느끼고 상처받으리라.
그래서 11번을 뽑은 아이와 번호를 바꾸려하는 신민영이 불쌍했다.
그래도 조금 부럽네.
좋아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는 것은 굉장히 용기 있는 행동이다.
결코 비난 받을 행동이 아니다.
고백이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행동이 아닐까.
나도…, 에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너무 깊이 빠졌다.
민지는 고개를 젓고, 파트너를 찾기로 했다.
“어? 너도 4번이야?”
“그러게. 네가 내 짝이었구나.”
민지는 자신과 출석번호가 비슷한 남자아이를 보고는 남몰래 한숨을 쉬었다.
노은하에게 물든 아이 중 한 명이었다.
아이는 말투나 행동을 은하처럼 따라하고 있었다.
발끝에도 미치지 않았지만.
은하는 1, 2학년 때만 하더라도 아이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가 1학년 때 진세나의 기를 꺾어버린 사건은 아직도 종종 회자되었다.
그런데 3학년이 되면서부터 조금씩 달라졌다.
그에 대한 소문이 민지를 비롯한 아이들의 힘에 의해 희미해진 탓도 있었지만, 은하의 능력을 알아보는 아이들이 생겼기 때문이다.
은하는 만사가 귀찮다고 투덜거리면서도,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일을 잘했다.
어른스러운 행동을 보이면서도, 때로는 주도적으로 아이들을 이끌며 장난을 벌이기도 했다.
주변에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서도, 다른 사람이 보지 못했던 것을 알아차리거나, 곤경에 처한 사람을 배려하기도 했다.
치기 어리기만 했던 아이들이 나이를 더하면서 그에게서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의 인기는 4학년이 되면서부터 과열했다.
여자아이들로부터 은하에 대해 알려달라거나, 은연중에 은하랑 같이 놀자는 제안을 받은 횟수가 손가락으로 꼽을 수 없었다.
“길이 어둡네.” “그러게.” “뭐, 어떻게든 되겠지. 귀찮으니까 대충 끝내고 돌아가자.”
“에휴.”
남자아이가 터덜터덜 걸어갔다.
민지 눈에는 보였다.
남자아이가 만사가 귀찮다는 듯이 행동하려다, 너무 의식한 나머지 담력시험을 끝내려 하는데 몰두하고 있다는 것을.
어설프고, 작위적이었다.
노은하가 백 배 낫지.
민지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수도권 바깥에서 올려다보는 밤하늘은 한없이 맑았다.
달이 어둠을 밝히고, 별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노은하를 어떻게 생각하는 걸까.
모르겠다.
답이 나오지 않았다.
본인은 아니라고 부인하겠지만, 은하는 밤하늘을 밝히는 달이었다.
이상하게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막연히 길을 걷다가 무심코 밤하늘을 올려다보듯이.
그녀는 언제나 은하를 찾고 있었다.
친구들도 마찬가지이리라.
이 밤을 밝히는 달에 별이 모여들 듯이, 그의 주변으로 아이들이 모여들었다.
민지 역시 그랬다.
부드러운 달빛에 감싸인 별들처럼, 그녀 역시 별이 되고 싶었다.
☆
독 사과를 먹고 잠에 빠진 백설공주를 깨우는 사람은 왕자님이다.
유리구두를 신은 신데렐라에게 손을 내미는 사람도.
높은 탑에 갇힌 라푼젤을 구출하는 사람도.
물레바늘에 찔려 영원의 잠에 빠진 공주를 구하는 사람도.
모두, 모두.
위기에 처한 공주님을 구하는 사람은 언제나 왕자님이었다.
“거기서 뭐해?”
“…미안! 지금 갈게!”
손전등을 쥔 채 우두커니 서 있던 하양은 은혁이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어올렸다.
은하도, 그랬는데.
아직도 기억한다.
은하가 자신을 구하기 위해 고블린을 상대로 검을 휘둘렀던 모습을.
그때, 은하는 왕자님이었다.
그리고 왕자님에게 사랑에 빠지는 일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날 똑바로 봐.’
어젯밤, 은하는 그렇게 말했다.
하양은 그가 말하는 의미를 이해하면서도 완전히 납득하지 못했다.
그 일이 있은 뒤로도, 은하는 위기에 처하는 순간마다 나타나 구해주었으니까.
은하는 왕자님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왕자님이었다.
‘이 세상에 왕자님 같은 건 없어.’
왕자님은 행복을 가져다주는 사람.
어떤 이야기든 ‘그리고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고 끝을 내도록 이끄는 존재.
그래서 인어공주를 좋아하지 않았다.
인어공주는 끝내 왕자님의 사랑을 얻지 못하고, 물거품이 되어 사라져버리니까.
‘나는 왕자님 같은 게 아니야.’
은하는 왕자님 같은 존재가 아니다.
그와 몇 년이나 되는 시간을 보낸 하양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었다.
은하는 때로는 다정하면서도 때로는 비정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가 행복을 가져다주는 사람이라는 데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정하양. 안 오면 두고 간다?”
“아, 미안!”
하양은 은혁이 부르는 소리를 듣고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미 은혁은 돌계단을 저만치 올라가 있었다.
그녀는 손전등을 쥔 손을 열심히 흔들며, 낮은 계단이 겹겹이 쌓인 길을 올랐다.
“아까부터 무슨 생각을 그리 하는 거야?”
은혁이 퉁명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계단을 오르느라 숨이 찬 그녀가 은혁을 올려다보았다.
은혁이는 은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은혁이 너는, 아직도 은하가 용사님으로 보여?”
“뭔 소리를 하는 거야?”
은혁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지정된 장소에 있던 방울을 꺼내고는 그녀의 질문에 답했다.
“우리가 이제 애도 아니고…. 대장은 대장이지, 용사님이 아니야.” “그렇…구나….”
은혁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줄 알았다.
하양은 의기소침해졌다.
“뭘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고개를 숙인 그녀의 앞에 방울을 흔들었다.
딸랑 하는 소리가 울렸다.
“대장은 우리와 하나도 다름없는 사람이라고. 즐거운 일이 있으면 웃고, 슬픈 일이 있으면 슬퍼하고, 몬스터에게 다치는 일도 있고….”
“응.”
“악을 무찌르는 용사도, 자신을 희생해서 누군가를 구하는 영웅도 아니야.
대장은…, 응, 그래. 그냥 열심히 사는 사람일 뿐이지.” “열심히 사는 사람?” “어. 그래서 더 멋지지 않아?
용사도 아니고, 영웅도 아니면서 결국 누군가를 구하잖아.”
은혁이 환하게 웃었다.
하양은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
서나는 밤길이 밝았다. 유전자가 변질된 눈은 어둠을 꿰뚫어볼 수 있었다.
그녀에게 손전등은 있으나 마나한 물건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거리가 얼마 남지 않은 절까지 달려갈 수도 있었다.
“얼마 안 남았어.” “나, 나도 알아!”
뒤따라오던 남자아이가 큰소리로 답했다. 그리고 화들짝 놀랐다.
본인이 지른 소리에 본인이 놀란 격이었다.
“주변에 아무것도 없어. 너무 걱정하지 마.” “…네가 어떻게 알아.”
“나한테는 다 보이니까.”
그래, 다 보인다.
서나는 계단을 오르다 남자아이를 내려다보았다.
남자아이가 무서워하는 건 어둠만이 아니었다.
남자아이는 자신을 무서워하고 있었다.
아인인 자신을.
이게 정상인 거겠지.
올해 같은 반이 된 아이들은 모두 그녀에게 친절했다.
그뿐이었다.
서나는 몇몇 아이들이 자신을 꺼려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친근하게 대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아이들이 고마웠다.
적어도 대놓고 무시하지 않으니까.
알고 있다.
태어나자마자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자신이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받아들여지는 일은 없으리라는 것을.
친구들이 특별한 것이다.
그러니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보낼 수 있다.
이 행복이 얼마나 오랫동안 이어질까.
지금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방울을 딸랑이던 그녀는 뒤늦게 올라오는 남자아이를 돌아보았다.
“내가 무서우면, 나 먼저 갈까? 아님 네가 먼저 갈래?”
숨을 헐떡이며 계단을 올라온 남자아이가 얼굴을 붉혔다.
성큼성큼 다가와서는 상자 속에서 방울을 하나 꺼내들었다.
남자아이가 의기양양한 태도로 방울을 들이밀어서는,
“너 내 짝이잖아! 근데 그런 게 어디 있어! 하나도 안 무서우니까 따라오기나 해!”
자신을 무서워하면서도 내치지 않으려 하는 아이.
서나는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올해도 좋은 애들만 반에 모였구나.
서나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친구들이 담력시험을 무사히 치렀을지 궁금했다.
☆
“꺄악─!!”
“자꾸 소리 지르지 마. 짜증나게.” “미, 미안.” “자꾸 들러붙지 좀 말고.”
이, 이게 아닌데.
신민영은 저 앞을 성큼성큼 걸어가는 은하를 보고 당황했다.
그녀가 생각했던 계획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은하와 담력시험을 치르는 데까지는 계획대로였다.
남은 것은 단 둘이 어둠 속에 남은 상황에서 지켜주고 싶은 모습을 연출하고, 은근슬쩍 그에게 달라붙는 것이었다.
그런데 뜻대로 되지 않았다.
민영은 이름 모를 절로 이어지는 길을 걷던 중에 비명을 지르거나, 넘어지거나, 심지어 눈물을 흘릴 뻔했다.
연기가 아니었다.
그녀는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어둠이 무서웠고, 강사들이 설치한 함정에 걸리는 것만으로도 절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래서 은하에게 의지하려 했다.
의지하려 했건만, 은하는 일말의 여지도 주지 않았다.
가령 그녀가 무섭다고 손을 잡으려 하면,
“정신 사납게 굴지 말고 떨어진 손전등이나 들어.”
하며 혀를 차는 것이었다.
또 가령 너무 놀라서 그에게 달라붙으려 하면,
“하, 얼른 끝내고 싶다. 무슨 애 돌보기도 아니고….”
하며 저 혼자 저만치 나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민영은 점점 불안해졌다.
길을 같이 걷고 있으면서도, 어둠 속에 혼자 남겨진 기분이었다.
“으, 은하야. 나 무서워…. 조금만 더 천천히 가면 안 될까?”
정말 무서웠다.
민영은 몸을 부들부들 떨며 계단을 오르던 은하를 불렀다.
그가 고개를 돌려서는,
“하.”
성가셔하는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그가 한숨을 쉰 것만으로도 몸을 흠칫했다.
이제는 알 수 있었다.
한숨에 짜증이 섞여 있는 것을.
“알았어, 천천히 갈게. 빨리 끝내고 돌아가자.”
“으, 응.”
그래도 다행이야.
내 말을 들어줘서.
가슴을 쓸어내린 민영이
계단을 올랐다.
계단이 끝나는 곳에는 다 쓰러져가는 절간이 있었고, 본전 앞에는 방울이 들어 있는 상자가 있었다.
“끝났다. 이제 이걸 가지고 돌아가면 되는 거지?” “어.”
이제 절반은 끝났다.
민영은 방울을 얻었다는 기쁨에 미소를 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은하는 이미 반대편 길로 내려가려 하고 있었다.
잠시 쉬어도 좋으련만.
민영이 허겁지겁 그를 따라나섰다.
“으, 은하야!”
“왜?”
계단을 내려가기 전, 민영은 은하를 불렀다.
먼저 계단을 내려간 그는 그녀를 올려다보는 위치에 있었다.
“저기, 나는….”
민영은 가슴께에 손을 모았다.
지금이었다.
자신의 마음을 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녀는 이곳에서 그에게 고백할 생각이었다.
생각이었는데,
“난….”
“근데 있잖아.” “응?”
은하가 갑작스레 불렀다.
그가 먼저 말을 건 것은 처음이었다.
민영은 화들짝 놀라면서도, 행복한 심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너, 이름이 뭐였더라?”
“…어어…?”
지금 뭐라고 말한 거지?
신민영은 은하가 건넨 말을 몇 번이고 곱씹었다.
“…아….”
몇 번이고 곱씹은 끝에 나온 것은 작은 탄식이었다.
나한테 관심조차 없구나.
자신을 한없이 초라하고, 한심하게 만드는 시선.
민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너무했다. 해도 해도 너무했다.
민영은 그저 제자리에 붙박인 채, 다시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한 은하를 눈으로만 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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