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life Player RAW novel - Chapter 14
어둠이었다.
발치에는 비릿한 내를 풍기는 선혈이.
고일대로 고인 웅덩이에 빠진 신발은 형체를 알아보기도 힘들었다.
손은 검붉은 피로 얼룩져 있었다. 손가락 끝에서는 굳지 않은 핏방울이 웅덩이 위로 뚝뚝 떨어졌다.
그 순간 은하는 깨달았다.
이것은 업보라고. 두 번째 삶을 맞이한 자신이 앞으로 지나쳐갈 수많은 목숨들이라고.
그래서 발을 내딛기가 선뜻 망설여졌다.
수로를 따라 이어지는 길 끝에 무엇이 있을지 알 것 같았기 때문에.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수로가 끝나는 지점에서부터 하나 둘 떠오르는 송장들.
앞으로 나아갈수록 웅덩이는 얕아지고, 시체는 수가 점점 늘어만 갔다.
걸음을 멈춘 곳에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릴 것 같은 처참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불에 태우기 위해 하늘 높이 쌓아올린 송장의 탑.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탑을 오르며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는 사내.
그것은 자신이었다. 그를 따르던 사람들에게 희생을 강요해서, 죽는 그날까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죽이던 자신이었다.
살려줘
구해줘
도와줘
눈도 없는 망자들의 얼굴에서 간절함이 전해져왔다.
치사해.
왜 너만 다시 할 수 있는 거야.
우리도 도와줘!
너만 살려 하지 말라고!
웅덩이를 둥둥 떠다니던 시체들이 하나 둘 몸을 일으켰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녹아내린 그들은 서로 얽히고설키며 다가오고 있었다.
비록 망해가 됐더라도, 그가 함께 사선을 넘나든 사람들을 모를 리가 없었다.
닥쳐. 좀 꺼지라고.
그는 망해들이 내미는 손을 쳐내며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자 망해들의 시선에 노기가 띄었다.
어째서.
왜 너만?
우리는 뭐였던 거야?
왜 너만 행복해지려 그래?
이런 새끼였니.
너 혼자 잘 살 수 있을 것 같아?
질타어린 소리. 신경질적인 어조.
시끄러워. 닥쳐, 조용히 해.
제발 꺼지라고!
너무해.
이런 애였니.
어떻게 우리한테 이럴 수가 있어?
그거 하나도 못해줘?
많은 걸 바라는 게 아니잖아.
우리가 어려운 걸 부탁하는 게 아니잖아.
딱 하나만.
그래, 딱 하나.
구해줘
도와줘
살려줘
시끄러! 시끄럽다고!
그는 다가오는 망자들로부터 거리를 두며 있는 힘껏 소리쳤다.
나는 뭐 이러고 싶겠냐고.
나도 너희들을 구해주고 싶어. 도와주고 싶어. 살려주고 싶다고!
하지만 너희도 알잖아! 나보고 뭘 어쩌라고! 고작 6살밖에 되지 않는 어린아이 몸뚱이로 뭘 더 하라고!
나는 내 가족들을 지키는 것만으로 벅차! 빠듯하다고!
너희들을 지켜줄 힘 같은 건 없단 말이야!
그건 지금만이잖아.
넌 더 강해질 거잖아.
많은 걸 바라는 게 아니야.
그때 우리 좀 도와줘.
살려줘, 제발.
구해줘, 너밖에 없어.
간절히 바라는 목소리. 의무를 다하라며 책망하는 어조.
숨이 탁 하고 막혔다. 죽는 것보다도 괴로운 감각이 숨통을 죄었다.
무거웠다. 몸이. 너무 무거워서, 앞을 바라볼 수도 없었다.
뭐가 무거운데.
넌 이것보다도 더 무거운 짐을 지고 있었잖아.
이제 와서 앓는 소리야?
왜 너만 힘들다고 생각해?
우리도 힘들어!
그리고 우리는 널 위해 목숨까지 바쳤어.
근데 그거 하나도 못해줘?
너희는, 나보고 한 번 더 플레이어로서 살아달라는 거잖아.
나보고 그 힘든 길을 다시 걸으라고 하는 거잖아!
얘 뭐라니?
그럼? 넌 네가 이제 좀 남들처럼 편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어?
웃기는 소리. 개소리.
꿈 깨. 꿈도 꾸지 마.
남들은 다 그래도 너만은 절대 안 돼.
넌 니까.
몬스터를 죽여야만 존재하는 네 본성이 가만 있을 것 같아?
넌 사람도 아니야.
넌 괴물이야.
그래, 괴물.
괴물.
괴물.
시간을 되돌아가도 그건 변하지 않아.
네가 우리를 희생해서, 죽는 순간까지 몬스터를 죽이는데 미친 괴물이라는 사실은.
…난, 더 이상 플레이어가 될 생각이 없어. 난 가족들이랑 행복하게….
아니. 넌 못해.
못해, 못해. 절대 못해.
왜냐하면 넌 니까.
그러니 부탁이야.
좋아해준 우리를 도와줘
이해해준
우리를 구해줘
희생해준 우리를 살려줘
그만! 제발 그만. 미안해. 정말 미안해.
그래도 힘들어. 나도 이제 그만 쉬고 싶어.
나도…,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행복하게 살고 싶어.
지랄하네.
개소리하지 마.
털썩
보이지 않는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
쿵
보이지 않는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머리를 박았다.
이기적인 새끼.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억지로 머리를 잡아끌었다.
그리고───.
쿵
너만 잘 먹고 잘 살면 다란 말이지?
쿵
쿵
쿵
쿵
쿠─
─압력이 사라졌다.
은하야.
…어?
익숙한 목소리.
고개를 들었다. 몸이 반쯤 빠진 웅덩이로부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곳에는 등을 맡겼던 파트너가,
이유…정?
움푹 파인 눈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서 있었다.
아직도 네가 과거로 돌아온 이유를 모르겠니?
맞아요, 오빠.
그리고 그가 생환하기를 기다리던 그녀가 서 있었다. 이루말할 수 없을 정도로 찢어진 천을 걸치고서.
…하백련?
오빠만이 할 수 있는 일이잖아요.
너희들….
제발,
제발,
하나로 겹치는 목소리.
그만 고개를 돌리고 싶었다. 귀를 막고 싶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강제력이 마지막까지 고개를 돌리지 못하게 했다.
─우리를 구해줘.
☆
“─헉!”
악몽이었다. 눈을 뜨자마자 은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무의식적으로 가슴께에 손을 가져다댄 그는 들이시지 못했던 만큼 숨을 헐떡였다.
꿈이었나.
두 번 다시 꾸고 싶지 않은 꿈이었다. 눈살을 찌푸린 그는 방 안을 둘러보았다.
“괜찮니? 가위에 눌린 것 같던데.”
“괜찮아. 깨워줘서 고마워 엄마.”
“얘도 참.”
침대 끄트머리에 앉아 있던 어머니가 손을 뻗어 식은땀을 닦아주었다.
그제야 그는 잠옷이 흠뻑 젖어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족인데 당연하지. 땀도 많이 흘렸네. 정말 괜찮니? 어디 아픈 건 아니고?”
“아니야. 난 괜찮아. 아픈 데도 없어.”
“어디 아프면 엄마한테 말해줘야 해. 응?”
“응, 알았어.”
꾀병을 부리면 어머니는 할머니를 만나러가는 걸 포기하실까.
아니. 그러지는 않으실 거다. 두 분 중 한 분이 남아서 간호하려 하겠지.
은하는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고개를 저었다.
단추를 풀고 잠옷을 벗은 그는 벽에 걸린 달력을 찾았다.
5월 4일.
그날이었다. 가족들이 목숨을 잃은 그날. 자신만이 홀로 살아남은 그날.
나는 이 사람들을 지킬 수 있을까.
“아프면 꼭 말해야 해?”
어머니가 두 번이나 언질을 주었다. 은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대신했다.
이 사람들만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지키고 싶다.
설사 운명을 거스르는 한이 있더라도.
설사 이 한 몸 바치는 한이 있더라도.
“엄마는 마저 준비하러 갈게. 얼른 씻고 준비하렴.”
“응, 알았어.”
은하네 가족은 점심때쯤에 출발하기로 했다.
은하가 어차피 일찍 출발하더라도 교통이 정체될 거라며 고집을 피웠기 때문이다. 이면에는 가족들이 크라켄과 조우하는 시간을 최대한 늦추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다.
정확히 크라켄이 출몰하는 시간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확실하게 기억하는 것이라고는 떨어지는 해가 철교에 걸려 그라데이션을 연출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세계가 거품으로 뒤덮이기 직전의 광경은 욕이 나올 정도로 아름다웠으니까.
그래서 그는 해가 완전히 떨어지는 시기를 노려 출발시간을 미룬 것이다.
“우우, 졸려….”
“누나, 눈 감고 밥 먹지 마.”
“웅….”
“…누나.”
아침에 약한 은아는 졸면서 아침을 먹고 있었다. 눈을 감고 있으니 포크는 애꿎은 접시 바닥만 찍는 판이었다.
그래도 아버지처럼 젓가락으로 허공을 짚는 것보다는 나았다.
아침을 먹은 은하는 방에서 커터 칼을 비롯한 날붙이를 찾았다. 그 외에도 컴퍼스와 가위를 은밀히 가방에 넣었다.
몬스터를 토벌하기 위해서는 그에 달하는 물리적인 데미지를 가하거나, 마나를 함유한 금속으로 만들어진 무기를 사용해야 했다.
둘 중 어느 하나도 준비할 수 없던 그는 차선책으로 누군가를 상처 입힐 수 있는 날붙이를 고른 것이다. 적어도 마나로 코팅한다면 몬스터에게 조금이라도 데미지를 줄 수 있을 거라고 판단하며.
마음 같아서는 식칼도 가지가고 싶었지만 은하는 어머니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부엌에 접근조차 하지 않았다.
괜찮아. 크라켄을 쓰러뜨릴 생각은 처음부터 하지 않았으니까.
죽기 직전에도 혼자 쓰러뜨리기 힘들었던 몬스터를 어린아이의 몸으로 쓰러뜨린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목적은 오로지 하나. 크라켄과 조우하는 시간을 늦추는 것뿐이다. 회귀 전처럼 십이좌가 나타나 크라켄을 쓰러뜨리기 전까지 최대한 시간을 버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죽어 나갈지는 알 바가 아니었다.
구해줘
악몽의 편린이 귓가를 스쳐지나갔다.
은하는 등골이 스며드는 소리를 잊기 위해 머리를 털었다.
크라켄의 출현은 미래에 크나큰 영향을 미친다. 인류는 몬스터로부터 자유로울 없다는 현실을 다시금 깨닫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몬스터에 대한 증오를 불태우며 플레이어가 되기를 선택하기 때문이다.
플레이어의 수가 질적으로 늘어나는 시기도 바로 이때부터였다.
라 불렸던 그 역시.
그리고 그와 사선을 넘나들었던 사람들도.
그럼에도 그는 그들이 플레이어가 되기까지 얼마나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낼지 알고 있으면서도 눈길을 돌렸다.
그러니 제발 내 머릿속에서 사라져줘.
용서는 바라지 않을게. 지옥에 가서 얼마든지 죽어 줄 테니까 나 좀 내버려둬.
“얘들아 이제 그만 가자~!”
아버지가 짐정리를 끝낸 모양이었다.
어느새 시간은 흘러 오후 1시. 지금 출발하면 5시쯤에는 성산대교 중반부에 들어갈 것이다.
조금만, 조금만 더.
이상하게 불안했다. 부정적인 생각만 들었다.
이대로 도망칠까. 날 찾느라 부모님은 출발도 하지 못할 거야.
가족들의 눈을 피해 은하는 베란다에서 뛰어내렸다. 2층이기는 했어도 마나로 강화한 신체는 조금도 충격을 받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끌어야 해.
괜히 멀리 도망쳤다가는 생각보다 크게 일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그래서 그는 적당히 구석진 곳에 몸을 숨겼다.
제발. 조금이라도 더.
“은하야~!!”
“노은하~!!”
그를 찾는 부모님의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은하는 눈을 감고 두 귀를 틀어막았다.
괴롭다. 현실로부터 눈을 감아야 하는 지금이.
누구보다도 어둠에 익숙했던 자신이 이제는 눈을 감으면 보이는 어둠조차 싫어질 줄 몰랐다.
“노~은~하~!!”
“은하야~!!”
“은하야, 놀자~!!”
무섭다. 어린 몸으로 감당해야 하는 현실이.
그를 부르는 소리가 멀어질수록 앞서 죽어갔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이 괴물이.
괴물 주제에.
원망 섞인 목소리가 책망하는 목소리가.
모든 것이 그를 짓눌렀다.
너희 말대로 나는 괴물이겠지.
나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괴물.
너희를 또다시 죽이기로 선택한 괴물.
망설여서는 안 됐다. 작은 손으로 구할 수 있는 사람은 제한적이었고, 작은 손으로 움켜쥘 수 있는 힘은 턱없이 부족했다.
자신은 영웅이 아니었다. 이기적인 죄인에 불과했다.
그러니 용서하지….
“왜 여기 있어? 한참 찾았잖아!”
원성이, 뚝 하고 그쳤다.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억지로 잡아 일으키는 목소리가 눈을 뜨게 했다.
바람이 불고 있었다. 기분 좋은 바람이.
어둠을 밝히는 햇살처럼 해맑은 미소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나.”
“여기서 뭐하고 있어. 엄마도 아빠도 찾고 있었잖아.”
누나다운 체를 하려는지 은아는 허리에 손을 얹고 그를 혼내려 했다.
그래봤자 그에게는 10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가 어른행세를 부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도 어째서인지 기대고 싶어졌다.
“응? 어디 아픈 거야?”
아침부터 몇 번이고 들었던 소리.
은하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럼 왜 울려고 그래?”
“나 안 우는데.”
“너는 모르지만 누나는 알아!”
나도 모르는 얼굴을 왜 누나가 안다는 거야.
그러면서도 이상하게도 반박할 수가 없었다. 입술을 오물거리던 그는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할머니 보러 가기 싫어?”
“아니, 싫지 않아. 싫지는 않지만….”
“않지만…?”
오늘 갔다가는 모두 죽어! 나 빼고 다 뒈진다고!
북받쳐 오르려는 감정을 그는 가까스로 참았다.
그런 그의 반응을 어떻게 생각한 것인지,
“괜찮아.”
“뭐가.”
“다 괜찮아.”
하나도 위안이 되지 않는 소리였다.
은아는 모른다. 오늘 일어날 비극을.
그런데도 그는 은아를 끌어안았다.
은아에 대한 기억은 지금도 희미했다. 그가 기억하는 그녀는 추락하는 차량 안에서도 그를 지키겠다며 필사적으로 끌어안았던 모습뿐이었다.
은아에 대한 기억은 그게 전부였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안심이 됐다.
“엄마도 아빠도 찾고 있어. 얼른 가자!”
“엄마아빠가 혼내시겠지?”
그러자 은아가 씩 하고 웃더니,
“그럼 같이 혼나면 되지 뭐.”
은아다운 대사였다.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린 은하는 그녀의 손을 잡고 부모님에게 사과하기로 했다.
어머니는 말없이 그를 보듬어주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말도 없이 없어져서 걱정했잖아!”
꿀밤을 때렸다.
회귀 전후를 통틀어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맞았다.
“…죄송합니다.”
“하여간…, 어디 갈 데는 꼭 말하고 가야 한다? 아빠도 엄마도 걱정했잖아.”
“네….”
“그럼 얼른 출발하자. 이대로 더 있다가는 오늘 중으로 못 가겠다.”
겸연쩍어진 아버지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은아는 은하가 머리를 다치지는 않았는지 유심히 살폈다. 이윽고 머리에 생긴 혹에 바람을 불어준 그녀는 그를 데리고 차에 올라탔다.
회귀 전에도 다르지 않았던 좌석배치.
그것이 그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지만─.
“에헤헤.”
은아가 손을 잡았다.
…됐어.
할 수 있는 건 전부했다.
설령 크라켄이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좋아, 출발하자! 인천으로 고고고~!”
“고고고~!!”
─죽는 한이 있더라도 가족들만은 반드시 구해내고 말 것이다.
그리고 운명은─.
☆
─운명은 회귀 전과 한 치도 다를 바 없을 정도로 잔혹했다.
리라이프 플레이어 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