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life Player RAW novel - Chapter 141
필요 없는 애.
내가 왜 널 낳았는지 원.
어머니는 툭하면 그런 말을 내뱉고는 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사랑을 갈망했던 사람이었다.
아버지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나를 낳았다고 말했을 정도로.
하지만 아버지가 어머니를 받아들이는 일은 없었다.
아버지의 생일날.
한껏 예쁘게 차려입은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아버지가 사는 저택을 찾았다.
거기서 아버지가 우리에게 드러낸 감정은 경멸이었다.
예쁜 아내와 귀여운 아이들에게 둘러싸인 채, 바퀴벌레를 보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던 아버지.
그 일이 있은 뒤로 어머니가 집에 돌아오지 않는 날이 늘어났고, 술에 취해 들어올 때면 나에게 욕지거리를 날리고는 했다.
받아 처먹기만 하는 개만도 못한 애라고.
대체 왜 태어났냐고.
너 같은 애는 필요 없다고.
잘못했어요. 제가 더 잘할게요.
엄마 말 잘 듣고, 편식도 안 할게요.
그러니 제발 버리지 말아주세요.
눈물 나는 신파극이었다.
내가 잘못한 건 하나도 없었는데.
그저 어머니가, 그 여자가 나를 두고 떠나버리는 건 아닐까 무서웠다.
내게 있어 세상은 그 여자가 전부였으니까.
하지만 내 눈물 나는 부탁에도 불구하고, 그 여자는 언젠가부터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그 여자에 대한 소식은 눈이 몹시 심하게 내리던 어느 날, 몬스터에게 죽음을 당했다는 통보가 전부였다.
운 좋게 고아원에 들어가지 않았더라면, 홀로 남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으리라.
서영이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니?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저 플레이어가 되고 싶어요.
고아원에 들어온 나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몬스터와 싸우는 플레이어는 내 동경이었다.
플레이어가 되고 싶었다.
사람들을 구하는 영웅이.
이것이 마치 운명이라는 듯이, 내게는 누구보다 강한 힘이 있었다.
누군가를 지킬 수 있는 힘이.
누군가를 구할 수 있는 힘이.
하지만 현실과 이상은 달랐다.
아카데미는 약육강식의 세계였다. 사람들은 저보다 잘난 사람들을 시기하고, 약한 사람들을 제멋대로 부리고, 착한 사람들을 이용했다.
비단 어느 세계가 그러지 않겠느냐마는, 언제나 죽음을 가까이에 둔 그들의 세계는 욕망과 악의를 감추지 않았다.
몬스터로부터 사람들을 지키겠다는 이상을 품은 사람들이 살아가기에는 힘든 세계였다.
모든 플레이어가 인류의 수호자라는 사명의식을 가진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결국 내 의지는 날이 갈수록 꺾여만 갔다.
주위에서는 사람들을 지키는 플레이어가 되겠다는 나를 손가락질하고 비아냥거렸다.
괴롭힘은 물론이거니와 이용도 많이 당했다.
그런데도 뜻을 완전히 굽히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오빠 때문이었다.
내가 노력하면, 다른 애들도 언젠가 바뀌지 않을까.
아카데미에 나쁜 사람만 있는 건 아니야. 착한 사람도 얼마나 많은데.
누군가를 구하는 영웅이 되고 싶었던 사람.
악의에도 굴하지 않고, 옳다고 생각한 길을 망설임 없이 나아가던 사람.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느낄 때에는 잘못됐다고, 부조리하다고 느낄 때에는 부조리하다고 말할 수 있었던 사람.
오빠는 내 동경이자,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세상으로 나가는 오빠를 응원했다.
오빠가 수많은 사람들을 구할 수 있기를 바라며.
어느덧 나 역시 아카데미를 졸업했다.
세상은 생각했던 이상으로 가혹했다.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누군가를 죽여야 했던 일도 있었고,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누군가를 져버려야 했던 일도 있었다.
도움을 받은 사람들이 나를 원망하고 질타하기도 했다.
왜 좀 더 빨리 나타나서 구해주지 않았냐며.
내가 조금만 더 빨리 도착했으면 가족이 죽지 않았을 거라며.
정녕 구할 수 있는 방법이 그것밖에 없었냐며.
이상과 현실은 달랐다.
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피폐해졌다. 무기력해졌다.
그때 오빠를 다시 만나지 않았었더라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성준…오빠…?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오빠가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2년.
우리는 폐허 속에서 다시 만났다.
다시 만난 오빠는 추레한 몰골이었다.
필시 오빠에게도, 만나지 못했던 사이에 많은 일이 있었으리라.
2년이라는 시간은 짧으면서도 길었다.
만나지 못한 사이에 우리는 세상이 생각처럼 아름답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배웠다.
그 동안 어떻게 지냈어?
고생한 게 눈에 보이네.
무슨 일이 있었니?
나한테 말해줄래?
그럼에도 오빠는 아직 신념을 포기하지 않았다.
잿더미를 뒤집어쓴 얼굴이 옛날과 다를 바 없는 미소를 짓고 있었으니까.
그때 나는 오빠가 여전히 자신은 잘못되지 않았노라는 마음을 져버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울지 마. 왜 울고 그래.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있어.
해야 할 일이 좀 많아.
네가 나 좀 도와주지 않을래?
왈칵 눈물이 흘렀다.
현실에 굴복해버린 내가 너무 부끄러운 동시에, 그런 나를 필요로 해줘서 기뻤다.
내가 겪은 시간을 이해해주는 것 같아, 나는 잘못되지 않았노라고 위로받는 기분이 들었다.
무슨 소리야?
너 하나도 안 변했어.
네가 잘못한 게 뭐가 있는데.
잘했어. 수고했어. 힘들었지? 이제부터는, 내가 옆에 있어줄게.
그리고 나는, 사랑에 빠졌다.
☆
회의는 최악의 분위기로 끝이 났다.
한참을 눈물을 흘리다 복귀한 신서영은 클랜원들의 제지를 뿌리치고 길성준의 막사를 찾았다.
“꺄악!”
천막을 걷히자마자 여자의 비명이 울렸다.
웬 여자 한 명이 옷을 주섬주섬 챙기더니, 고개를 숙인 채 그녀를 지나쳤다.
상황을 파악한 신서영이 안 그래도 빨개진 눈시울로 입술을 깨물었다.
막사 내부에 한바탕 거센 바람이 불었다. 온갖 물건이 바람에 휩쓸려 날아다녔다.
바람은 팬티바람으로 있던 길성준마저 집어삼켰다.
“신서영!”
바람에 휘말려 이리저리 날아다니던 그가 뱃속에서부터 끌어올린 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그러자 바람이 멎었다.
바닥에 무릎을 꿇은 길성준이 고개를 들어올렸다.
“너 이게 뭐하는 짓이야. 요즘 왜 이리 다혈질로 나오는 거야!?” “…내가 누누이 얘기했지. 나 참는 데에도 한계가 있다고.
근데, 그딴 짓이나 벌이다 하는 말이 겨우 그거야?”
“…미안해. 그건 잘못했어.
근데 아무리 그래도 클랜로드로서 체통이 있지, 밖에 있을 사람들이 들었을지 모른다고는 생각도 못해?”
“체통을 지킨다는 사람이, 의정부 한복판에서 클랜원을 침대로 끌어들여?”
“그건 정말 미안하다니까. 내가 잘못했다니까.
서영아, 내가 너밖에 없는 거 잘 알잖아. 내가 앞으로 더 잘할게.”
언제나 이런 식이다.
길성준이 바람을 피운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때마다 그는 잘못했다고 매달리며, 앞으로 더 잘하겠다는 말만 늘어놓았다.
이 반복이 이제는 지겨웠다.
지겨웠지만, 내칠 수 없었다.
다음부터는 달라지겠지.
다음부터는 그러지 않을 거야.
그가 무릎을 꿇다시피 사과하면, 다음이라는 말을 기대해보고 싶어졌다.
그가 자신에게 잘해주었던 기억이 떠오르면서, 그를 내칠 수가 없었다.
“하, 근데 서영아. 네가 조금만 이해해줬으면 좋겠다.” “뭐가.”
“솔직히 내가 그렇게까지 잘못한 건 아니잖아?” “뭐?”
때로는 그가 자존심을 긁고, 자존감을 깎아내리기까지 했다.
“법률적으로는 몰라도, 사실상 일부일처제가 사라진 지 얼마나 지났는데. 내가 잠깐 다른 여자도 만나고 다닐 수 있는 거 아니야?”
“오빠 지금 그게 나한테 할 소리야? 어떻게 그딴 개소리를 당당하게….”
“당당하게 말하는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 말하는 거야.
나만 바람피우는 것도 아니고, 버젓이 바람을 피우고 다니는 남자들도 있는데 내가 왜 욕 먹어야 해?” “오빠, 미쳤어?”
“서영아. 솔직히 말해서, 너 십이좌 된 이후로 바쁘지 않았던 적이 없잖아. 내가 밤마다 널 귀찮게 할 수도 없고, 이건 널 위해서 하는 일이기도 하다고.” “책임 떠넘기지 마. 날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오빠 하고 싶어서 그러는 거잖아!”
“너 왜 내 마음을 몰라주니. 내가 널 얼마나 생각하고 배려하는데, 내가 왜 너한테 그런 소리를 들어야 하는데!” “오빠, 내 말은….”
“야. 너 정말 왜 그래. 왜 내 말을 못 믿어? 너, 내가 여자나 홀리고 다니는 놈팡이로 보여?” “그럼 오빠가 행동으로 보여줬어야지. 매번 그런 식으로….”
“하, 이딴 대화, 진짜 지긋지긋하다. 너 그거 병이야. 내가 아주, 여자만 보면 사족을 못 쓰는 놈으로 보이지? 너 그게 사람을 얼마나 피곤하게 만드는지 알아?”
“…지긋지긋하다고? 피곤하다고?”
“너 같이 피곤한 여자랑 10년째 연애하는 남자도 나밖에 없을 거다.”
지긋지긋하다. 피곤하다.
그 말이 눈물을 흘리게 했다.
그녀는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화장이 번지는 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얼굴을 훔쳤다.
내가 지긋지긋해? 내가 그렇게 매력이 없어?
내가 오빠를 피곤하게 만들어? 내가 이상한 거야?
“하…. 서영아, 왜 또 울고 그래. 내가 잘못했어. 응?”
그녀는, 그가 생각 없이 내뱉는 말을 들을 때마다 자존감이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때로는 자신이 정말 못난 사람인지는 아닌가 하는 불안에 사로잡혔다.
그때마다 그는 진심이 아니었다며 그녀를 다독이고 위로했다
“내가 사랑해.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거 알지?”
“…거짓말.” “정말이야. 너 없으면 난 못 살아. 그러니까 울지 마, 응?”
눈물을 보일 때마다 그는 사랑한다는 말을 입에 담는다.
평소에는 좋아한다는 말조차 해주지 않던 남자가.
그럼에도 그녀는 그가 자신이 좋아하는 미소로 사랑을 고백할 때에는 마음이 누그러졌다.
“너 힘든 거 다 이해해.”
“뭘…, 이해하는데.”
“다 말해줘?” “…아니.”
이 말이 참 좋았다.
그는 마치, 정말 자신을 이해해주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하니까.
그와 연인이 된 이후, 이것만은 변하지 않았다.
자신이 걸어왔던 길을, 자신의 뜻을 이해해주는 사람은 그밖에 없었다.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 “안 그럴게.”
“또 그럴 거면서.” “안 그럴 거야.”
그녀는 그에게서 진심을 느꼈다.
번번이 약속을 그르치는 사람이었지만, 약속을 할 때에는 이상하게 믿음이 가는 사람.
사실 알고 있다.
그가 믿음이 가는 게 아니라, 자신이 믿고 싶은 것뿐이라는 걸.
나는 오빠밖에 없어.
제발 나를 봐줘.
날 버리지 말아줘.
신서영.
플레이어로서는 강자인 그녀는 연애에서는 한없이 약자에 불과했다.
십년에 이르는 시간이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다.
☆
의정부시청 최상층.
모든 것이 잿더미였다.
층 전체가 검게 그을린 흔적만이 격렬한 전투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끈질긴 놈.”
남아 있던 불씨를 꺼트린 강현철이 바닥에 드러누웠다.
제4위계 라이거 스왈로워.
A급 이상 플레이어 10명이 모여 전투를 벌인 끝에, 녀석을 소멸시킬 수 있었다.
그들이 제각기 맡은 역할을 다해주어서 사망자는 한 명도 없었다.
“여기 들것 좀 가져와!”
“어이, 정신 차려! 다 끝났다고!” “마나가 고갈됐어요. 포션 좀 가져다주세요.” “방연지 서브로드! 여기입니다!”
“알로에를 만들어야겠네요. 수분이 충분한 식물도.”
부상자가 없지는 않았지만.
그는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에게서 시선을 뗐다.
시선을 돌린 방향에는 네비게이터들이 라이거 스왈로워의 데이터를 수집하고 있었다.
“블레이즈 클랜로드. 덥지 않나.” “뭔 소리입니까? 하나도 안 더운데.”
“다음부터는 조심하란 소리네.”
“네? 무슨 말을….”
그때 다가온 명왕 클랜로드 도완준.
목덜미에 흐르는 땀을 닦아낸 그가 근처에 있던 사람들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모두 전위에서 싸웠던 이들이었다.
그들 모두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고 있었다.
“자네 클랜원들은 몰라도, 날 포함해서 다른 사람들은 자네가 발하는 기운 때문에 찜통 속에 있던 기분이었을걸?”
“아….”
서포터들이 열기를 차단하는 마법을 전개하기는 했다.
하지만 전투가 격해지다 보니 그들의 보호마법으로도 열기를 모두 막아내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와 합을 맞춰왔던 클랜원들이야 열기에 익숙했지만, 다른 이들은 열기와 몬스터를 동시에 상대하는 기분이었으리라.
“근데 이것도 못 견딘답니까.” “자네 힘을 감당할 수 있는 서포터가 국내에서 얼마 없을 거라 생각하는데.”
“에이, 무슨 소리를. 여기 방연지 플레이어도 있는데….”
“자네랑 방연지는 상성이 안 좋아. 식물이 불에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강현철은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도완준의 말대로 그와 방연지는 마법이 상극인 사이였다.
게다가 그녀는 식물을 이용한 보조마법에야 능하지, 박혜림처럼 지원계 마법에 다재다능하게 능한 사람이 아니었다.
“방연지마저 없었다면…, 열기 때문에 죽는 사람도 나왔을 거다.”
도완준이 들것에 실려 가는 플레이어를 가리키며 말했다.
더위를 먹고 정신을 잃었다는 모양이다.
“뭐, 자네 마법이 전보다 더 강해진 탓도 있겠지만.” “…그건 인정.”
강현철.
그는 상대가 강하면 강할수록 불타오르는 사내였다.
이번에도 그랬다. 라이거 스왈로워를 상대하다 실력이 부쩍 강해졌다는 실감이 들었다.
“강해지는 건 좋지. 강해지는 건 좋은데…, 제발 이도진 플레이어처럼 차분하게 상황을 둘러볼 수는 없는지….”
“여기서 왜 그 녀석 이름이 나오는 겁니까!”
강현철이 발끈했다.
이도진.
그와 같은 나이에 십이좌가 된 친구이자 경쟁자였다.
“아무튼, 수고했어.”
“뭐, 수고하셨습니다.”
의정부시청의 지배자였던 몬스터를 토벌했다.
이제 남은 일은 시청 주변에 존재하는 몬스터들을 소탕하고, C부대의 보급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C부대가 도착하기 전에 돈이 될 수 있는 것들은 싹 털어버릴 거지만.
승자의 권리였다.
생각이 일치한 두 사람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때였다.
냐아
웬 고양이 한 마리가 창가에 앉아 있었다.
다리를 가지런히 모은 고양이가 앞발을 핥으며.
“의정부라고 몬스터만 있지는 않은 모양이네. 고양이도 다 있다니.”
강현철이 새삼 신기한 기분으로 고양이를 쳐다보았다.
꼬리를 흔들던 고양이와 눈이 마주쳤다.
보석처럼 반짝이는 코발트블루.
신비로운 기분이 드는 고양이였다.
냐아 냐아
고양이가 울었다.
그를 비롯한 플레이어들이 피식 웃었다. 먹을거리라도 주려는지 주머니를 뒤적이는 이들도 있었다.
“근데…, 별일이군.” “뭡니까.”
고양이에게 이리 오라고 손짓하던 그가 콧잔등을 문지르던 도완준에게 물었다.
“고양이가 어떻게 여기까지 올라온 거지?” “계단으로 올라왔나 보죠 뭐.”
“그럴 수도 있지. 그럴 수도 있는데…, 이 열기 속에서 어떻게 살아있는 거지?”
“아, 그러고 보니.”
그 말을 들은 강현철이 눈을 번쩍 떴다.
냐아
고양이는 창문 밖으로 몸을 던졌다.
리라이프 플레이어 1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