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life Player RAW novel - Chapter 144
편재 속에서 태어나, 마석을 품은 존재를 몬스터라 지칭한다.
그러면 매개체가 되는 무언가가 편재에 휘말리면 어떻게 되는가.
매개체가 생물체라면 생물의 규격을 벗어난 몬스터가 태어난다.
설령 그것이 인간이든 동물이든.
매개체가 물질이라면 섭리를 거스르는 힘을 지닌 아티펙트가 만들어진다.
매개체가 장소라면 기존세계와 격리된, 섭리가 틀어진 던전으로 변모한다.
던전은 침식한다.
보스 몬스터를 쓰러뜨리지 않는 이상, 주변일대를 야금야금 제 색으로 물들인다.
황색던전이라면 황색으로.
적색던전이라면 적색으로.
흑색던전이라면 흑색으로.
“클랜로드. 엘리베이터에 트랩이 설치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해제할 수는 없는 건가?” “레인저들이 노력하고 있지만…, 계단으로 올라가는 게 더 빠를 겁니다.”
“알았다. 그렇게 하지.”
경기북부청사는 적색던전이었다.
던전 내부는 기존세계와는 격리된 채 사방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기묘한 기류가 흐르는 공간.
몇 시간에 걸쳐 1층 지대를 정리한 D부대는 신명환이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시간이 많이 지체됐다. 위층으로 올라가는 길만을 정리하고 빠르게 보스 몬스터를 공략한다.”
탐사대는 1층에서 발견되지 않았다.
1층을 정리하고 위층으로 올라갔단 뜻이었다.
어쩌면 그들이 보스 몬스터와 조우하고, 전투를 벌이고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D부대는 던전을 정석대로 공략하기를 포기하고 보스 몬스터와 전투를 벌이고 있을지 모를 탐사대를 구하는 일을 우선순위로 삼기로 했다.
어차피 던전의 핵심인 보스 몬스터를 쓰러뜨리면 던전은 불안정해진다.
불안정해진 던전은 몸집을 줄이고, 몬스터들로부터 마나를 수거하는 형태로 기능을 유지하려 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몬스터들은 약체화를 피하지 못한다.
“클랜로드. 첫 번째 탐사대를 발견했습니다.”
3층에 도달했을 때였다.
위층으로 올라가는 통로를 막고 있던 몬스터를 멸한 강예희가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보고했다.
첫 번째 탐사대로 보냈던 플레이어 두 명이 4층으로 올라가는 길목에서 꼬챙이에 찔려 쓰러져 있었다.
트랩에 걸린 것이다.
신명환은 차분한 시선으로 4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살폈다.
던전은 섭리가 비틀린 공간이다.
4층으로 올라가는 길목이 위아래가 반전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았다.
“트랩은?”
“현재 레인저와 네비게이터들이 분석하고 있습니다. 특정 계단을 건드리는 순간, 꼬챙이가 날아드는 마법인 것 같습니다.”
“당장 해제할 수는 없는 건가?”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비켜, 내가 해제할 테니.”
신명환은 한숨을 쉬었다.
그가 트랩을 일일이 해제할 수는 없는 입장이었지만, 4층 계단에 설치된 트랩은 만만치 않아 보였다.
그는 부대원들의 시선을 느끼는 가운데 복잡한 구조로 이루어진 트랩을 해제해나갔다.
트랩도 트랩이지만, 몬스터들의 위계도 상당히 높은 편이야.
1층에서 출몰했던 몬스터는 제7위계였다.
2층에서 출몰했던 몬스터는 제6위계 그리고 3층에서 제5위계 몬스터가 출몰했다.
“…4층으로 올라간다. 모두 계단을 조심하도록.”
이대로 속행하느냐 마느냐.
고개를 든 신명환이 Go 사인을 보냈다.
역시나.
4층에서는 제4위계 몬스터가 기다리고 있었다.
“…얼른 가디언이랑 딜러 올라오라 그래.” “네.”
입술을 질근 깨문 신명환.
그는 G-GLOCK17+의 슬라이드를 당겼다.
GLOCK17을 모델로 만들어진 디바이스가 제4위계 몬스터를 향해 첫 공격을 날렸다.
한 발을 시작으로 아래층에서 올라온 헌터들의 사격이 이어졌다.
죽음을 피하는 용장의 가호
전위로 뛰어든 가디언이 거대한 방패를 뻗으며 마법을 전개했다.
바로 그 순간, 쌍검을 꺼내든 강예희가 가디언의 어깨를 밟고 앞으로 뛰쳐나갔다.
뒤에서 쏟아지는 총탄도, 제4위계 몬스터가 전개하는 마법이 그녀를 꿰뚫는 일은 없었다.
신체를 감싼 뜨거운 바람이 공격을 흘려보냈기 때문이다.
십자베기
사이드 스텝(Side Step)
별 따기
녀석의 지척까지 당도한 그녀가 등 뒤로 뻗었던 손을 당겨 종(縱) 자로 베었다. 이어서 반대쪽 손을 움직여 횡(橫) 자로 베었다.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공격이 얕게 들어갔다고 생각한 그녀는 오른쪽 발에 힘을 주어 측면으로 돌아서, 오망성을 그리듯 쌍검을 휘둘렀다.
끄륵
강예희는 위에서부터 떨어지는 공격을 보고도 당황하지 않았다.
후위에 있던 서포터들이 보호마법을 발동하고, 레인저가 던진 작살을 잡아채 진형으로 돌아갔다.
그 사이에도 플레이어들의 연계공격이 계속됐다.
장시간에 걸친 전투를 마무리지은 사람은 신명환이었다.
플레이어들이 녀석을 붙드는 사이, 그가 심장부를 향해 섬광을 쏘아낸 것이다.
“클랜로드. 어떻게 하실 겁니까.”
D부대는 제4위계 몬스터를 쓰러뜨린 후, 두 번째 탐사대의 사체를 발견했다.
살아남은 이들은 없는 것 같았다.
“…후….”
신명환은 마지막 남은 담배를 피우다 강예희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격한 전투였음에도 불구하고 지친 기색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이대로 속행한다. 보스 몬스터는 위층에 있을 거야. 각별히 주의하도록.”
지시를 받은 플레이어들이 병장기를 챙겨들었다.
계단을 오르던 중, 위층에서 뛰어내린 몬스터들에게 습격을 당했다.
그럼에도 D부대는 나아가기를 멈추지 않았다.
“이, 건….”
5층은 청사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복도가 석순과 석주로 뒤덮여 있었다.
종유석 끝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바닥을 적셨다.
복도, 아니 동굴 끝에서 흉흉한 기운이 몰아쳤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마치 지뢰밭을 지나는 기분이었다.
이윽고 좁고 긴 길을 지나, 주변이 탁 트인 장소에 당도했다.
“”””…….””””
이건 잘못됐다.
잘못돼도 심각하게 잘못됐다.
D부대는 웅크리고 있던 마나가 공간을 가득 메우기 시작하는 광경에 제대로 숨도 쉬지 못했다.
푸르른 암석으로 둘러싸인 수면.
종유석 끝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파문을 그리는 가운데─.
“──퇴가아아악─!!”
가까스로 죽음의 공포를 떨쳐낸 신명환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외쳤다.
…….
수면 중심부에서 몸을 말고 있던 백여우가 눈을 뜬 것은 동시였다.
☆
F부대는 뒤를 돌아보는 일 없이 의정부역을 떠났다.
창해 클랜로드 길성준의 갑작스런 결정 때문이었다.
신서영은 몬스터를 솎아낼 방법을 찾아야 한다며 그를 말렸지만, 길성준은 완고했다.
오빠가 왜 그랬던 거지.
신서영은 전날 밤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창해클랜이 옥에 갇힌 촌장들을 심문할 때였다.
별안간 의자에서 미끄러진 그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옥을 나간 것이다.
‘서영아. 우리는 우리 임무를 해야지. 언제까지 나오지도 않는 몬스터나 찾고 있을래?’
‘오빠도 알잖아. 여기서 몬스터를 찾아내지 못하면, 언젠가 녀석한테 당할지도 모른다는 거.’
‘그러면 어떻게 찾으려고.’
‘그건….’
‘내 말대로 하자. 어서 여기를 떠나야 해. 아니, 우리 임무를 해야지.’
결국 그녀는 길성준에게 떠밀리다시피 날이 밝는 대로 F부대의 임무를 수행해야 했다.
걱정이 가시지 않았다.
의정부역에 제2보급기지를 설치한 레귤러스클랜과 단군클랜이 주민들을 감시하겠지만,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에 지나지 않았다.
백면상을 찾아내지 못하는 한, 위험은 여전히 남아 있다.
걱정은 경기북부청사에도 있었다.
D부대는 어떻게 되었을까.
은하가 말했다.
경기북부청사에는 제2위계 몬스터가 존재한다고.
그녀는 제2위계 몬스터가 적색던전에 출몰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제2위계 몬스터였다.
한 나라를 멸망시킬 위험을 지닌.
그녀는 그런 몬스터가 경기북부청사에 있다는 이야기가 믿기지 않았다.
믿기지 않았지만, 은하의 조언은 지금까지 틀리지 않았다.
믿어야 했다.
그러니 은하의 조언대로라면….
‘누나가 경기북부청사에 도착하면, 던전에 진입했던 템페스트클랜이 나오고 있을 거예요.
그때 템페스트클랜이 지원을 요청하더라도 절대로 응해서는 안 돼요.
강예희 그 년…, 강예희 플레이어가 뭐라 하든 절대로 들어주지 마세요.
그때 누나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수는…, 남아 있는 사람들을 데리고 퇴각하는 거예요.’
☆
녀석은, 재앙이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혼을 빼앗길 것처럼 영롱한 푸른 눈.
마치 겨울이 도래한 것처럼 눈처럼 새하얀 여우.
어딘가 성스럽고, 어째서인지 무릎을 꿇고 경배해야 할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히게 하는 존재였다.
하지만 녀석은 재앙이었다.
집체만한 몸을 가뿐히 움직인 녀석은 스쳐 지나간 것만으로 플레이어들의 사지를 갈라버렸다.
전열이 무너졌다.
정신을 놓은 플레이어들이 단지 살기 위해 도망쳤다.
길을 가로막는 석순과 석주를 지나, 뒤따라오는 동료들이 죽든 말든 사력을 다해 뛰었다.
“강예희! 전열을 흐트러뜨리지 마!”
“네! 클랜로드!”
몸이 제때 반응하지 않았다.
운 좋게 공격을 피한 강예희는 근처에 있던 플레이어들에게 소리치며 전열을 유지하도록 했다.
“퇴각한다! 전위는 녀석을 막고, 중위와 후위는 전위를 보조하며 물러난다!”
제대로 지시를 따르는 플레이어들이 없었다.
이곳에 모인 플레이어들은 저마다 명망 있는 실력을 지닌 자들이었다.
그럼에도 피가 마르는 공포에 저항하는 이는 소수에 불과했다.
“─칫!”
가까스로 5층을 내려왔다.
하지만 녀석은 그들을 가만히 보내지 않았다.
던전이 곧 녀석의 영토였다.
4층으로 뛰어내린 녀석이 다시금 공포를 흩뿌리며 도망치는 플레이어들을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입가에 피를 묻힌 여우는 신명환이 부대를 이끌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그에게 달려들었다.
“클랜로드!”
“오지 말고, 어서 가!”
팔이 날아갔다.
얼굴을 구긴 신명환은 남아 있는 팔로 상처부위를 지탱하며, 아래층으로 내려가던 강예희에게 소리쳤다.
“클랜로드! 클랜로드! 어서 뛰어내리세요!”
“…먼저 가라.”
녀석은 자신을 장난감으로 삼았다.
자신이 내려갔다가는 녀석도 같이 아래층으로 내려가고 말리라.
“강예희! 부대를 이끌고 먼저 퇴각해!”
“클랜로드!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강예희가 목이 가시도록 소리를 질렀지만, 점점 클랜원들의 소리에 파묻혔다.
클랜원들이 길길이 날뛰기 시작한 그녀의 입을 틀어막은 것이다.
머지않아 그들이 이탈하는 소리가 들렸다.
“…하.”
지혈할 필요도 없었다.
신명환은 상처부위에서 손을 뗐다. 걸쭉한 피가 기괴한 형태로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가 홀스터에서 G-GLOCK17+을 꺼냈다.
녀석은 입으로 슬라이드를 당기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무슨 기행을 벌일지 기대하는 것처럼.
“…딱이군.”
딱이다.
녀석은 자신만을 주시하고 있다.
그러니 자신이 녀석을 상대한다면, 부대가 퇴각할 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이다.
사람 목숨 하나로 시간을 버는 셈이니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었다.
그러니─.
“─얌전히 당하지는 않을 거다.”
온몸을 잡아 뜯는 것 같은 고통.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해야 할 일을 명확히 알고 있었다.
머리가 아니라 몸이.
오랜 시간에 걸쳐 퇴적된 경험이 직감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플래시 라이트(Flash L
ight)
섬광을 흩뿌린 탄환이 시야를 하얗게 물들이는 가운데, 입가를 끌어올린 그는 달려들기를 멈추지 않았다.
눈이 멀었지만 볼 수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죽음을 앞둔 몸은 바로 지척까지 다가온 존재를 한 치의 오차 없이 포착했다.
블레이즈 불릿(Blaze bullet)
사이드 체인(Side Chain)
불길을 머금은 탄환을 발사했다.
한순간 눈이 먼 녀석이 불길에 닿자 몸부림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를 노린 신명환이 총을 쥔 손을 3시 방향에서 사선으로 휘둘렀다.
바로 가까이에 있던 벽에서 생성된 쇠사슬이 화염을 떨쳐내려 몸을 터는 녀석을 붙잡았다.
불과 1초도 안 됐을 시간.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방아쇠를 당기는 데에는 1초도 걸리지 않으니까.
자이언트 캐논(Giant Cannon)
지근거리에서 일어난 폭발이 녀석뿐만 아니라 그까지 덮쳤다.
불길이 그를 집어삼켰다.
“으아아아아아─!!”
그는 전신이 불에 타는 고통과 살이 녹아내리는 고통 속에서도 디바이스를 놓지 않았다.
자이언트 캐논
한 발 더.
두 번째 폭발이 일어나고, 몸이 균형을 잃고 무너졌다.
귀가 멀었다.
다리에 감각이 없었다.
다리가 녹아내린 것인지, 날아간 것인지 모르겠다.
그저 몸이 움직이는 대로 방아쇠를 당겼다.
블레이즈 불릿
블레이즈 불릿
블레이즈 불릿
탄환이 떨어진 지는 오래였다.
뒤를 생각하지 않고 마나를 소모하며 마법을 갈겼다.
그런데도 녀석은 죽지 않았다.
……끝?
녀석이 폭발 속에서 전한 의사.
신명환은 씩 하고 웃었다.
아직 안 끝났어, 이 새끼야.
크리미널 바인드(Criminal Bind)
그는 탄환을 쏘는 동시에 극소량의 마나를 일대에 뿌려두고 있었다.
일대에 흩어진 마나가 튼튼한 쇠사슬이 되어 녀석을 붙들어맸을 터.
“…….”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입이 붙었다.
눈이 떠지지 않았다.
눈이 부신 게 아니라 눈꺼풀이 달라붙었다.
상관없었다.
직감이 여우가 교묘하게 깔아둔 함정에 걸렸다고 알렸으니까.
녀석은 이 마법조차 금세 풀고 말리라.
그래도 충분하다.
방아쇠를 당길 손만 있다면,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는 총신에 남아 있던 모든 마나를 불어넣었다.
총신이 덜덜 떨렸다.
아니, 총에 달라붙은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죽음이 바로 코앞에 있었다.
남아 있는 시간이 얼마 없었다.
어쩌라고.
신명환.
그는 국내에서 S등급을 받은 일곱 개의 클랜 중 하나인 템페스트클랜의 수장.
국내에서 최고의 레인저로 인정받는 십이좌─,
끝이 뭔지 보여주마.
─레일건(Railgun)
세계가 하얗게 불타올랐다.
빛이 세계를 먹어치운 것이다.
강예희.
새하얀 세계가 그 역시 먹어치우는 가운데, 템페스트클랜의 유일한 서브로드를 불렀다.
뒤를 부탁한다.
시간은 충분히 벌었으리라.
설마 이런 식으로 뒤를 물려주게 될 줄은 몰랐다.
그녀가 과연 클랜로드에 어울리는 모습을 보여줄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만 있는 게 아니다.
남아 있는 클랜원들이 그녀를 지탱해주리라.
그러니, 그러니 뒤─.
……재미없어.
를─부──….
☆
경기북부청사의 지배자는 천기를 자유자재로 부리는 몬스터이다.
끝을 모르는 힘을 지닌 탓에 유희거리를 갈망하는 녀석이 던전의 보스 몬스터만 아니었다면, 대한민국은 진작 멸망의 길을 걷고 말았을 것이다.
“여기도 오랜만에 오네. 내가 아는 기억이랑 하나도 변하지 않았구나.”
제1차 의정부 탈환전이 끝난 뒤, 윤성진은 템페스트클랜의 보고를 토대로, 녀석을 매구라 명명했다.
제2위계 몬스터 매구.
당시 템페스트클랜은 신명환이 제2위계 오버랭크 레비아탄을 상대하다 마나회로에 장애를 입어, 침체기를 겪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새로이 클랜로드가 된 강예희는 제1차 의정부 탈환전에서 무리한 공략을 감행했고, 경기북부청사에서 태반의 전력을 잃고 만다.
태반의 전력 속에는 신명환도 포함되어 있었다.
스승처럼 따랐던 그를 잃은 그녀는 그대로 미쳐버리고 만다.
“도대체가…, 이 형은 왜 툭하면 이딴 데를 찾은 건지 원….”
강예희는 F부대를 끌어들여 경기북부청사를 재공략할 계획을 세운다.
당시에는 매구의 위계가 확인되지 않았던 때였다.
그래서 매구에 대한 정보를 알지 못했던 F부대는 궤멸직전까지 몰리고 만다.
F부대는 녀석에게서 살아남은 끝에야 경기북부청사를 공략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형태만 남은 D부대를 규합해 의정부역으로 후퇴한다.
그때는 이미 의정부 전역에서 피의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을 때지만.
“…겨우 올랐네.”
은하는 철골만 남은 남산타워를 올랐다.
꼭대기에 도달한 그는 의정부가 있는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형은 뭐가 좋아서 여기에 오른 건지, 나는 지금도 모르겠다.”
남산타워는 벽해수가 영감이 떠오르지 않을 때마다 오르던 장소였다.
지금 생각해도 한 손으로 잘도 오를 생각을 했네, 이 형.
벽해수.
은하는 명성을 알리기 전에 세상을 떠났던 마에스트로를 떠올렸다.
벽해수는 뚱한 표정을 짓고 다니던 그를 챙겨주고, 때로는 조언을 해주기도 했다.
그래서 그를 잃은 실의가 컸다.
이용할 수 있는 건 뭐든 이용하겠다던 자신이, 그를 매몰차게 대했던 크레스터들과 담을 쌓았을 정도로.
“그냥 형 생각났어.”
그래, 그냥.
그는 때로는 말동무가 되어주었고, 때로는 고민상대가 되어주었다.
정말, 형 같은 존재였다.
파랑 형이 들으면 어이없어 하겠지만. 근데 형은 나잇값 좀 해야지.
오늘 남산을 오른 이유는 며칠째 가슴에 낀 응어리가 있어서였다.
은하는 누구에게 토로해야 할지 몰랐던 끝에, 생전 툭하면 벽해수가 오르고는 했던 남산을 찾은 것이다.
“정말 오랜만이야 형.”
지금 이 시대에 벽해수는 살아있다.
그럼에도 가슴을 조이는 답답함을 이런 식으로라도 해소하고 싶었다.
오늘이 바로,
탈환대가 붕괴하는 날이니까.
리라이프 플레이어 145(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