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life Player RAW novel - Chapter 147
죽은 자들이 쇄도했다.
도망치는 플레이어들은 죽었던 동료들한테 당하고, 죽은 자가 되어 다시 동료들을 덮쳤다.
몬스터는 늘어만 나는데, 플레이어는 줄어들고 있었다.
이 녀석들을 쓰러뜨리려면…, 저 놈을 쓰러뜨릴 수밖에 없는 건가!
도완준은 달리는 동시에 집게손가락 끝에 맺힌 마나를 뒤로 쏘았다.
서로 마주한 벽들이 합장을 하듯 길을 막았다.
쫓아오던 몬스터들이 눈앞에서 길이 막히자 멈칫한 시간도 잠시.
몬스터에게는 환상이 통할지 모를지언정, 몬스터도 사람도 아닌 죽은 자들에게 통할 리 없었다.
죽은 자들은 녀석이 조종하는 인형에 불과했다.
그러니 죽은 자들을 쓰러뜨리더라도 녀석이 존재하는 이상 다시금 일어날 뿐이다.
군세를 무너뜨리려면 저 멀리서 앞발을 핥고 있는 놈을 쓰러뜨려야 했다.
“블레이즈 클랜로드! 날 엄호해주게!”
“오케이!”
두 손으로 베레타를 쥔 도완준이 저만치 떨어져 있는 놈을 겨냥했다.
군세로부터 보호를 받는 놈을 쏘기란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는 할 수 있었다.
환상이란 존재하지 않는 현상.
존재하지 않는 현상을 존재하게 만드는 섭리 바깥의 힘이 바로 마법이자, 그것이 가능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게 하는 일이야말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이었다.
아지랑이 스위치
상대가 마법에 걸린 대상을 시선과 반대방향에서 보이게 하는 마법.
놈에게는 자신이 별안간 등 뒤에서 나타난 것처럼 보이리라.
냐아아아
물론 놈은 믿지 않는 눈치였다.
군세를 제치고 바로 뒤에서 나타날 리가 없을 테니까.
도완준은 거드름을 피우는 놈을 보며 웃었다.
방아쇠를 당겼다.
탄환이 총구를 빠져나갔음에도 녀석은 거들떠 보이지 않았다.
바로 근처에서 폭발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냐아
공격이 통했다.
하품을 하던 놈이 눈빛을 달리했다. 두 갈래로 나뉜 꼬리를 흔들며 그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공상전환 – 붐(Boom)
첫 번째 탄환이 소리가 요란한 폭발에 지나지 않았다면, 두 번째 탄환은 정말 놈에게 날아가 강렬한 화력을 선사했다.
냐아아
물론 화력은 녀석에게 큰 타격을 주지 못했다.
거대한 외날개로 공격을 방어한 놈은 죽은 자들을 조종해 그를 공격하도록 지시했다.
그 순간, 연기처럼 일렁이며 사라지는 도완준.
환상이었다.
모든 것이.
“그걸 믿냐.”
“오, 신기한데.”
“말할 시간에 달려.”
도완준은 군세를 뒤돌아보지 않고 상직교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환상마법이란 상대를 얼마나 속이는지에 따라 판가름 나는 마법.
처음 방아쇠를 당길 때 발사한 탄환은 폭음탄이었다.
놈에게 자신이 정말 군세 뒤에서 공격하고 있다는 의심을 주기 위해.
조금이라도 의심을 품었던 녀석은 결국 그가 전개한 환상을 현실로 인지하고 타격을 받고 말았다.
그래도 문제야.
도완준은 의정부역 방면에서 폭발이 일어나는 모습을 보면서 안도할 수가 없었다.
감지망을 전개해보니 E부대에서도 난리가 난 모양이었다.
의정부역으로 후퇴해 놈을 막으려 생각했던 그로서는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이대로 놈의 군세를 끌고 의정부역까지 갔다가는 혼란만 가중시킬 뿐이었다.
그러니 죽은 자들의 추격을 따돌리고, 역 방면에서 일어난 문제부터 해결해야 했다.
마음 같아서는 유인하고 싶지만.
도완준은 쓴웃음을 지었다.
A부대 내에 몬스터를 홀리는 능력이나 마법을 지닌 플레이어라도 있다면 군세를 유인할 수 있을 터였다.
홀린 몬스터에게 환상을 덧씌우기란 아주 간단한 일이니.
소수인원으로 구성한 파티만으로도 시간을 끌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부대에 몬스터를 유인하는 능력을 지닌 자는 없었다.
문제야, 문제로군.
포션은 이미 바닥을 드러낸 지 오래였다.
전열도 무의미해졌다.
죽은 자들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가디언들이 이제는 적이 되어 저편에 서 있었다.
“……제8위계 시체쥐입니다!”
“너희는 모두 나한테 붙어!”
“”””네!!!!””””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흥선광장 교차로에서 시체쥐들이 바글대고 있었다.
블레이즈클랜원들을 이끌고 전위로 나선 강현철이 불길을 날렸지만, 체내 마나가 얼마 남지 않아 힘에 부치는 모양이었다.
시체쥐들을 얼른 해치우고, 추격해오는 놈들의 발을 묶어야 해.
도완준은 고민에 빠졌다.
살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그러다 나란히 달리고 있던 방연지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미소 짓고 있었다.
순간 그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살 수 있는 방법은, 있었다.
“방연지….”
그녀를 부르며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는 도완준.
“네, 클랜로드. 말씀하세요.”
그녀는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알고 있다.
살 수 있는 방법을.
그녀는 알고 있다.
살릴 수 있는 방법을.
두 사람은 오랜 시간을 함께해온 사이였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눈빛만으로도 감정을 교환할 수 있는.
“…뒤를 맡기겠다.”
“무운을 빌게요.”
둘 사이에 오간 대화는 그게 전부였다.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그녀가 방향을 틀었다.
이를 악문 도완준은 쥐 떼들을 향해 다리를 움직였다.
환상이란 결국 허상이다.
잡고 싶어도 잡을 수 없는 존재.
그것을 알기에 환상과 허상을 다루는 그는 일어날 수 없는 희망을 꿈꾸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는 일어날 수 없는 희망을 단념하는 자신에 대한 혐오감을 삼켰다.
☆
이도진.
20대 초반에 십이좌가 된 그는 이명에 걸맞게 번개를 자유로이 다루는 플레이어였다.
그의 기프트는 .
강현철의 가 체외로 발현되는 모든 마나를 불꽃으로 변환시키는 기프트라면, 그의 는 마나를 전기로 변환시키는 기프트였다.
지금까지 그는 를 사용해서 넘어서지 못한 역경이 없었다.
역경이 없었는데.
“…어째서…?”
그는 자신이 떨어뜨린 벼락을 맞고도 일체의 손상 없이 존재하는 몬스터를 보고 당황함을 감추지 못했다.
제3위계 몬스터 이시미.
군세를 이끌고 중랑천에서 내려온 녀석이 퇴각하는 C부대를 향해 날아왔다.
“…큭…!”
가슴 앞으로 검을 세운 이도진은 5m에 육박하는 덩치를 뱀처럼 구불거리며 날아오는 녀석을 막기 위해 방벽을 전개했다.
혼자 힘으로는 버틸 수 없는 충격이 방벽을 덮쳤다.
그가 방벽을 유지하기 위해 두 다리에 힘을 주었지만, 방벽에 차츰 균열이 가고 있었다.
“이도진!”
클랜로드 김유진이 마법을 캐스팅하는 시간이 한 발 늦었다.
그녀가 그를 도우러 가는 사이, 급기야 방벽을 깨부순 이시미가 길쭉하게 튀어나온 입으로 이도진을 쳐올린 것이다.
당장이라도 비가 올 것 같은 하늘 위로 솟구친 이도진.
곧이어 추락하기 시작한 그는 무사히 착지하기 위해 자세를 고쳐야 했다.
바로 그때.
“……!”
고개를 하늘로 쳐든 녀석이 불길을 수직으로 쏘아냈다.
거인의 오른팔
숨도 쉬기 힘든 열기가 그를 집어삼키기 직전, 김유진이 주먹 쥔 오른손 팔꿈치를 살며시 내렸다.
지면에서 솟구쳐 오른 벽.
오른팔처럼 생긴 벽이 이도진을 보호하는 형태로 불길을 막아냈다.
“…이거나 먹어라.”
그녀가 오른손을 내리쳤다.
불길을 막아낸 거인의 팔이 이시미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지축을 흔드는 소리가 일대를 지배하고, 녀석이 무너진 건물에 깔렸다.
“…상처는?” “…괜찮습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클랜로드.” “당황하지 말고. 그러지 않으면 되던 것도 안 돼.”
그녀는 헝클어진 머리칼을 쓸어 올려서는, 먼지구름을 내다보았다.
이시미는 죽지 않았다.
“저걸 이대로 의정부역까지 데려갈 수도 없고….”
눈살을 찌푸린 그녀가 부대원들을 돌아보았다.
모두 지쳐 있었다.
이시미의 군세를 쓰러뜨리지 못하지는 않겠지만, 현재 상태로는 피해가 얼마나 될지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군세를 의정부역까지 데려갈 수도 없었다.
감지망을 전개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기운이 온몸을 찌르고 있었다.
A부대 측에서도 이시미의 군세에 버금가는 일이 터진 것이리라.
후방도 불안했다.
너무 멀어서 정확히 감지할 수는 없어도 의정부역 방향에서 상당수의 편재가 느껴지고 있었다.
이대로 군세를 이끌고 내려갔다가는 혼란만 가중시킬 것이다.
“…보아하니, A부대도 비슷한 생각을 한 모양이로군.”
그러던 차에 입을 연 이는 클랜 내에서 연장자에 해당하는 성인호였다.
“할아버지.”
“허허, 나도 어디 오랜만에 힘 좀 발휘해볼까.”
무언가를 직감한 그녀가 가볍게 몸을 풀며 이시미
에게 향하는 그를 불러 세웠다.
걸음을 멈춘 그가 뒤를 돌아보았다. 굵직한 눈썹을 들어 올려서는 걱정 말라는 미소로 화답했다.
뇌전(雷電)
저 앞에서 서포터들의 강화마법을 받은 이도진이 이시미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그는 바로 조금 전에 녀석에게 공격을 당했음에도, 두려워하는 일 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그가 한 손에 맺힌 마나를 풀어헤치자 하늘에서 떨어진 벼락이 녀석을 감전시켰다.
효과가 없었다.
입술을 깨문 그가 검을 고쳐 잡았다. 멈췄던 발걸음을 다시 움직이며, 칼날에 마나를 덧씌웠다.
녀석을 덮친 벼락이 사라지기 전에 갑옷 사이에 검을 찔러 넣었다.
뇌전
녀석의 뒤에서 튀어나온 몬스터들이 덮쳐들었다.
재빨리 뒤로 물러난 그가 다시금 벼락을 떨어뜨렸다.
하늘에서 떨어진 빛줄기가 검신을 매개로 이시미의 체내를 지졌다.
…이것도 통하지 않는다고?
헌터들과 전위를 교대한 이도진은 참고 있었던 숨을 한 번에 몰아쉬었다.
마나가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시미는 꿈쩍하지 않았다.
비단 어느 플레이어도 녀석을 상처 입히는 일이 불가능했다.
그들의 얼굴에 낭패감이 짙어진 가운데─,
“─예끼, 이놈아. 마나를 들입다 붓는다고 다가 아니란 말이다.”
어느새 나타난 성인호가 그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할아…버지…?”
성인호가 씩 하고 웃었다.
전위에 있던 플레이어들은 그가 전선으로 나오자 놀란 눈치였다.
그들의 의문에 답하지 않은 노인은 불길을 머금은 이시미를 주시했다.
“잘 봐라, 애송아. 네가 가진 힘이 어떠한 건지.”
몸소 을 겪은 노인은 몇 년 간이나 억눌러왔던 마나를 단숨에 끌어올렸다.
흘러나온 마나가 근육을 부풀리고, 육체를 강화시켰다.
그 순간, 이시미가 불길을 토했다.
“저리 꺼져.”
거인의 오른팔
노인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후위에 있던 김유진이 거대한 벽을 만들어내 불길을 막아냈을 뿐.
소매를 걷어붙인 그는 왼손바닥이 하늘을 향하도록 내밀고, 오른손으로 쥔 주먹을 머리 위까지 치켜 올렸다.
“애송이 네가 가진 힘은 단순히 빠르게 떨어뜨리고, 전류의 세기를 높이는 힘이 아니야.”
마법이란, 믿어 의심치 않는 일을 현실에 구현화하는 일.
예부터 번개는 하늘을 관장하는 신의 힘으로서, 천벌의 상징체가 되기도 했다.
만인이 신 앞에 무릎을 꿇게 하는 절대적인 힘이었다.
바즈라(Vajra)
노인이 주먹을 손바닥에 내리치자, 마치 수면 속에서 끄집어낸 것처럼 허공에 나타난 금강저.
성인 장정만한 금강저가 강렬한 전류를 튀기며 이시미에게 날아들었다.
쐐기처럼 생긴 촉이 녀석의 갑옷을 꿰뚫고 파헤치며, 푸른 전류가 녀석을 태우고 지지기를 멈추지 않았다.
끼이이이이이이
녀석이 처음으로 괴성을 질렀다.
금강저는 녀석만을 노리지 않았다. 황금색으로 이루어진 전신은 스파크를 튀기며 가까이 있던 몬스터들을 소멸시켰다.
“어떻…게….”
“마법이란 이런 거다, 애송이.
스스로 한계를 정하지 마. 나는 이 경지까지밖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태어날 때부터 전기를 다룰 수 있었던 너는 다르지 않겠냐.”
캐스터 성인호.
그가 전개한 마법은 어디까지나 불완전한 힘에 지나지 않았다.
오랜 시간에 걸쳐 신화를 받아들이고 이해했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몸뚱이를 지닌 그는 진정으로 신의 힘이란 것을 재연할 수 없었다.
“어디서 하늘에도 오르지 못한 뱀 따위가 나대려 들어?”
오랜만에 사용하는 마법이었다.
그는 전류 속에서 튀어나오는 이시미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포션을 마셨다.
어차피 전투는 혼자 하는 게 아니었다.
그가 전위로 나왔을 때부터 결정된 일이었다.
클랜을 창단했던 단원들이 병장기를 챙겨들고 빠짐없이 앞으로 나와 있었다.
“우리가 클랜에 몸을 오래 담고 있기는 했지.”
“퇴물한테도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구만.”
“아따, 날씨 참 좋네. 몬스터랑 싸우기 좋은 날씨여.”
거대한 방패를 들어 올린 노인이 뱃속에서부터 끌어올린 고함을 지르고, 또 다른 노인이 소총을 들고 가디언의 옆을 가로질렀다.
“애송이.”
손등으로 입가를 훔친 성인호가 두 번째 마법을 준비하며 이도진을 불렀다.
“너는 라고 불리기에는 아직 멀었어.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특출해서 뭐하려고.” “…네.”
“진정으로 제왕의 힘을 휘두를 거라면, 그 누구도 범치 못할 존재가 되라고. 이딴 뱀새끼한테 당하고 있지나 말고.”
그동안 성인호는 이도진을 탐탁치 않아했다.
그가 이른 나이에 십이좌로 발탁된 나머지, 힘에 대한 이해는 전무하고, 스스로 한계를 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애송아.”
볼 때마다 안타까웠다.
갈고 닦기만 하면 최강이라 불릴 힘을 지닐 수 있는 데에도, 그 힘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모습이.
그동안 말하고 싶었다.
그때가 지금 왔다.
“─클랜을 부탁한다.”
늙은이는 죽기 전에 말이 많다.
노인은 설마 자신이 그런 부류일 줄은 몰랐다.
어깨를 들썩인 그는 두 번째 번개를 내리꽂으며, 클랜원들에게 소리쳤다.
“여기는 우리가 맡겠다!! 움직일 수 있는 자는 부상자들을 데리고 후퇴하라─!!”
죽기 참 좋은 날씨다.
노인은 오래 전, 자신과 세상의 멸망을 겪었던 문준과 남궁성운을 떠올리며 오른손을 내리쳤다.
☆
무섭다.
무섭지 않을 리 없다.
마음 같아서는 버리고 가지 말라며 울고불고 소리치고 싶었다.
예전이라면 그랬겠지.
자라라, 무한히
자라라, 드높이
자라라, 드넓게
자라고, 또 자라라
자리는 사람을 만든다.
방연지.
그녀는 십이좌로서, 명왕클랜의 서브로드로서 부대원들을 지킬 책임이 있었다.
무엇보다 그가 살기를 바랐다.
예쁜 산세비에리아
부끄럼쟁이 담쟁이덩굴
굳세고 당찬 박꽃
그녀는 몰려드는 몬스터들을 상대로 가지고 있던 씨앗을 모조리 뿌렸다.
바로 옆을 흐르는 개천에서 물을 끌어다 씨앗으로는 만들 수 없는 식물을 성장시키고, 민들레 홀씨를 이용해 몬스터들의 발을 묶었다.
죽은 자는 핵이 되는 마석이 없다.
고로 죽지 않는다.
그래서 그녀는 죽은 자들의 몸에 꽃씨를 심었다. 꽃씨에서 자라난 줄기가 그들의 움직임을 봉쇄하고 포박했다.
담쟁이덩굴이 담벼락을 타고 기어올라 시야를 가렸다.
담쟁이덩굴을 따라 자라난 박꽃은 꽃잎을 떨어뜨리며 몬스터들을 약체화시켰다.
냐아아아
고양이의 형상을 본뜬 몬스터는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이 신기한 모양새였다.
공중을 떠다니던 민들레 홀씨를 후 하고 불어낸 녀석이 날개 끝에 매달린 마나를 흩뿌렸다.
기체가 되어 증발한 마나가 독기를 머금고 담쟁이덩굴 사이사이 침투하려는 찰나, 산세비에리아가 독기를 정화시켰다.
“식물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강인하단다.”
그녀는 쉼 없이 지휘봉을 휘둘렀다.
온 힘을 다해 군세를 막아냈다.
위치가 절묘했다.
도로 하나밖에 없었으니까.
그녀 혼자서도 충분히 막아낼 수 있는 범위였다.
물론 몇몇 몬스터들이 개천으로 내려가서는 A부대를 추격하러 뛰어가기는 했다.
그들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군세를 이끄는 놈을 막는 걸 우선시하기로 했다.
자라라, 무한히
자라라, 드높이
어느덧 마나가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너무 무섭다. 아프다.
그럼에도 지휘봉을 흔들었다.
숨을 쉬기가 괴로워지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몸이 멈추라고 호소하고 있었다.
이 이상 했다가는 무서운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며.
─안 돼.
그녀는 영창을 멈추지 않았다.
중단된 영창을 억지로 이어나갔다.
예쁘게 자라렴
무럭무럭, 끝없이
마나 회로가 꼬였다.
피를 토한 그녀는 몸에서 새어나온 마나가 요동치는 데에도 집중력을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안 보낼 거란다.”
방연지는 식물이 자라나는 형상을 신기하게 쳐다보는 놈을 향해 미소 지었다.
이미 그녀의 피부는 식물처럼 초록색으로 변질되고, 머리칼이 나무줄기가 되어 등나무 꽃이 자라나고 있었다.
냐아냐아
지키고 싶다.
누구를?
누구를 지키고 싶었더라.
기억이 나지 않는다.
마음이 시키는 대로 움직일 뿐.
더, 더, 더.
아직 끝나지 않았어.
안 보낼 거야.
의식이 희미해져가면서도 군세를 막으려 사력을 다했다.
안 보낼 거어─…
등허리에 외날개가 달린 고양이는 드높이 치솟은 등나무를 올려다보았다.
냐아 냐아
등나무는 반응이 없었다.
☆
“…잘 하고 있으려나.”
날이 저물고 있었다.
은하는 철골만 남은 타워 꼭대기에서 석양이 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오늘은 금요일이었다.
은하는 가족들에게 은혁의 집에서 자고 오겠다는 거짓말을 둘러대고 여기서 하루를 보낼 생각이었다.
탈환대의 붕괴는 내일까지 이어질 테니까.
지금쯤 탈환대는 끊임없이 쏟아지는 군세를 상대하느라 지쳐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잠도 자지 못하고 싸워야 할 텐데, 그래도 내가 서울 침공 때 몇날며칠이나 자지 못했던 거에 비하면 조족지혈이지 뭐.”
밤은 몬스터를 강하게 만든다.
그리고 인간을 약하게 만든다.
탈환대는 제대로 잠도 자지 못하고 군세를 상대하게 될 터였다.
“지금쯤이면…, 강현철이 기절해 있을 때려나.”
은하는 제1차 의정부 탈환전의 전황을 떠올렸다.
강현철은 도완준과 오연정이 괴시니의 군세를 유인할 때, 부대원들을 이끌고 의정부역으로 후퇴한다.
전략이라고는 써본 적이 없던 그는 블레이즈클랜을 주축으로 시체쥐들을 보이는 족족 불태운다.
그때 그는 시체쥐들의 디버프 마법을 불꽃으로 태우는 힘을 개화하고, 마나탈진으로 정신을 잃고 만다.
“아주 꿀 빨고 있겠네.
새로이 힘도 개화하고, 누구는 잠도 자지 못하고 싸우는데 곯아떨어져 자고 있겠고 말이야.”
은하는 정신을 잃고 자고 있을 강현철을 떠올렸다.
그러다 괴시니의 군세를 떠올리고 눈빛을 바꿨다.
“…그때 죽이지 말걸 그랬나.”
오연정.
그녀는 도완준을 도와 괴시니의 군세를 유인해 잠시나마 탈환대의 숨통을 트이게 했던 플레이어였다.
은하는 내심 불안했다.
어쩌면 그녀를 죽인 결과, 강현철과 도완준의 부대가 괴시니의 군세를 막아내지 못한 건 아닐까 하고.
제3위계 오버랭크 괴시니.
녀석은 생김새와 달리 굉장히 위험한 힘을 지니고 있다.
죽은 자들을 조종하는 녀석이 의정부역에 들어섰다가는 탈환대는 살아남는 이 없이 전멸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신명환이랑 방연지가 건재하니까….”
조금이나마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원래대로라면 신명환은 마나 회로에 장애를 입고, 별다른 전적도 남기지 못하고 경기북부청사에서 사망한다.
방연지는 이탈리아에서 젠코 마이론에게 감금당해 비참한 삶을 보내고 있었을 터.
회귀 전에는 머릿수만 채웠던 신명환을 제외하고 7명이었던 십이좌가 이번 생에는 9명이 되었으니 좋은 결과를 기대해도 될 것이다.
“그래봤자 성공하지 못하겠지만.
오건후가 제 역할도 못하고 초반에 실종되었으니까.”
오건후는 의정부역과 회룡역의 텔레파시를 중계할 수 있는 아인이었다.
그런 그가 초반부터 탈락하고, 중계지점이 차례차례 습격을 당하니 의정부역과 회룡역 사이의 통신이 끊길 수밖에.
게다가 그는 아인 최초로 십이좌가 되었다는 업적 외에는 이렇다 할 업적이 없는 플레이어였다.
그러니 제2기 십이좌를 선발할 때에는 텔레파시스트 자체를 배제해버린 것이다.
이 흐름이 제3기 십이좌까지 이어지다 보니 은하가 죽기 전까지 아인의 몸으로 십이좌가 된 플레이어는 한 명도 없었다.
물론 진파랑이 제3기 십이좌 후보가 될 뻔한 일이 있기도 했다.
진파랑은 아인 중에서 손꼽히는 플레이어였고, 2대 선녀 하백련과 친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안 되기는 했지만.”
십이좌를 선발하는데 발언권을 가진 사람들이 진파랑이 십이좌가 되는 일을 반대했다.
“백련의 입지를 강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던 거겠지.”
그래서 은하도, 유정도 후보선상에서 제외됐다.
물론 니, 니 불렸던 그가 후보가 되었더라도 반대가 극심했겠지만.
“게다가 라이브러리에 등재되지 않은 몬스터가 연이어 출몰하니 라이브러리는 계속 로딩 중이지….”
이 시대의 플레이어 라이브러리는 데이터베이스에 등재된 데이터를 모두 저장하는 것이 불가능했고, 검색기능도 그리 좋지 않았다.
플레이어 라이브러리는 시리우스그룹과 파인그룹이 합작 사업을 벌인 후에야 개선된다.
그래도 네비게이터는 헬이지만.
아무리 플레이어 라이브러리의 기능이 개선되었다고 하더라도, 현장 정보를 발 빠르게 분석하는 능력은 결국 개인의 소양이었다.
“아직 이도진은 개화를 하지 않았겠고.”
이도진.
후에 대한민국 최강자 중 한 명으로 거듭나는 그는 제2차 의정부 탈환전에서 제3위계 몬스터 이시미를 단신으로 압도해버리는 힘을 선보인다.
“류연화도 여기 없는 데다.”
강현철.
이도진.
마지막으로 류연화.
세 사람 없이 의정부 공략을 논할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황금세대의 주역이라 할 수 있는 온태양을 더하지 않고서는 제2위계 몬스터 매구를 토벌하지 못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마음을 가진 사람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이유정도.”
제3위계 오버랭크 괴시니의 군세는 이유정이 없어서는 대항할 수 없었다.
“…얘는 잘 살고 있으려나 몰라.”
어느덧 밤이 되었다.
밤바람이 찼다.
리라이프 플레이어 148(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