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life Player RAW novel - Chapter 152
의정부역.
역 앞에 모인 플레이어들은 불안한 얼굴로 가능동 방면에서 다가오는 군세를 바라보았다.
저 멀리서부터 다가오는 먹구름 아래에는 제3위계 몬스터 이시미를 비롯한 몬스터들이 있을 터였다.
한편 역 서쪽에서는 죽은 자의 군세를 막는데 여념이 없었고, 동쪽에서는 평균 제5위계에 이르는 무리를 상대하는 중이었다.
“신서
영 서브로드. 퇴각하는 부대는….”
구연수는 바람을 계단처럼 밟고 내려온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명령을 어기고 퇴각한 부대는 어떻게 되었는지 물어보려던 그는 고개를 젓는 그녀를 보고 한숨을 쉬었다.
“…회룡역 방면에서 나타난 편재를 처리하고, 회룡역에서 전열을 가다듬는 대로 원군을 파견하겠다고 해요. 죄송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오지도 않을 원군이 올 때까지 막고 있으라는 소린가?”
도완준이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
신서영은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아니요.”
이 상황에서 그녀에게 책임을 물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책임을 물어야 할 대상은 명령을 어기고 회룡역으로 퇴각한 부대였다.
자신의 실책을 깨달은 그가 사과했다.
“전황은 어떤가요?”
“최악. 현재 전력으로 의정부역을 지키는 건 불가능합니다.” “할 수 있는 건…, 분하지만 퇴각한 부대가 회룡역에 도착할 수 있도록 시간을 벌어주는 것뿐이네요.” “…그래요.”
남아 있는 부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군세를 최대한으로 줄여내며 퇴각하는 부대를 위해 시간을 버는 것밖에 없었다.
물론, 남아 있는 부대 역시 퇴각할 수도 있다.
모든 부대가 퇴각하는 순간, 군세는 등을 보이고 도망치는 사람들을 덮치겠지만.
그랬다가는 전멸을 피할 수 없으리라.
의정부역에 남아 결사항전을 펼치는 것 역시 마찬가지.
“…싸울 사람은 남고, 퇴각할 사람은 퇴각하기로 해요. 제가, 퇴각할 시간을 만들겠습니다.”
침묵이 내려앉았다.
최선의 수였지만, 반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미 반쯤 체념한 그녀는 클랜로드들의 반응을 살폈다.
그러다 신라 클랜로드 김유진과 눈이 맞았다.
“신라 클랜로드.” “네, 창해클랜 서브로드.”
“이도진 플레이어는 어디에 있나요? 사이렌 글라이더, 이도진 플레이어가 물리친 거죠?”
“네, 이도진 플레이어는 사이렌 글라이더를 토벌하고 마나탈진을 겪고 있습니다. 복귀는…, 어려울 겁니다.”
“그러면…, 신라 클랜로드가 퇴각하는 부대를 이끌어주세요. 이도진 플레이어를 데리고.”
의정부역에 남아 있는 십이좌는 그녀를 포함해 모두 셋.
이도진과 박혜림을 여기에 둘 수는 없었다.
그들은 자신보다 젊었다.
이런 곳에서 죽게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그녀는 레귤러스 클랜로드 구연수에게도 같은 제안을 했다.
“하…, 남겠습니다. 혜림이는 신라 클랜로드한테 맡길게요.”
“…고마워요.”
생각에 잠겨 있던 구연수가 한숨을 쉬었다.
신서영은 감사의 뜻을 전했다.
의정부역에 남기를 선택한 이는 구연수만이 아니었다.
“저도 남겠습니다. 김유진 클랜로드, 제 부대원들을 부탁합니다.”
“저희도 남겠습니다.”
“마지막까지 싸우지 뭐.”
“저희도 남겠습니다.”
도완준을 시작으로 몇몇 클랜로드들이 남기를 선택했다.
그들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하면서도, 어딘가 후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반면에 퇴각하기를 선택한 이들은 미안함과 죄책감을 어쩌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저희는, 퇴각하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퇴각하기를 선택한 이들.
이 자리에서 그들을 원망할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남기를 자처한 사람들은 그들에게 괜찮다는 말을 건넸다.
어떤 이는 살아서 다시 만나자는 이야기를 꺼냈고, 어떤 이는 밖에서 보자는 이야기를 건넸다.
남기를 자처한 이들도 퇴각하기를 선택한 이들도 재회를 약속했다.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하리라는 것을 직감하면서도.
“신서영 플레이어.”
만날 수 없는 재회를 약속하는 플레이어들을 바라보고 있던 신서영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신라 클랜로드 김유진이었다.
“언제 우리, 술이나 마시죠. 나이도 같은데 격 없이 편하게.”
“…네, 신라 클…, 김유진 플레이어.”
창해클랜과 신라클랜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그녀는 김유진과 대화를 나눈 적이 거의 없었다.
사이가 좋지 않다고 말하기는 애매했지만, 서로가 서로를 피하려 하던 사이였다.
“밖에서 봅시다.”
“나중에 만나요.”
전장이란 서로 스칠 일이 없던 두 사람이 손을 맞잡게 했다.
신서영은 퇴각하기를 선택한 이들을 데리고 의정부역을 등진 김유진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모습이 건물 사이에 가려 사라졌을 무렵, 신서영은 남기를 자처한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날이 빠진 병장기를 쥔 그들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지막 전투라고는 말 안 할게요. 살아요, 우리.”
“”””─────!!!!””””
죽음을 무릅쓴 이들의 소리로 뒤섞인 함성.
왁자지껄한 소리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없었다.
단지 하나가 된 함성이 마지막 남은 사기를 북돋았을 뿐.
플레이어들은 뒤를 생각하지 않고 체내 마나를 발현하며 군세를 향해 뛰어들었다.
” 강철 나가신다!”
방패를 블레이드로 변형한 강철이 가능동에서 내려오는 몬스터들을 상대했다.
쇄도하는 공격을 블레이드로 막아내며 마치 불도저처럼 몬스터들을 밀어냈다.
헌터들이 블레이드 옆으로 넘어온 몬스터들을 공격했다.
구연수는 메인 딜러가 되어 블레이드를 뛰어넘었다. 칼집에서 꺼낸 검에 마나를 불어넣어, 다수를 상대하는 마법을 구사했다.
냐아 냐아
고양이가 우는 소리.
녀석을 기다리고 있던 도완준은 레인저와 캐스터에게 명령을 내리고 직접 전위로 나섰다.
한 명도 빠짐없이 남기를 자처한 명왕 클랜원들이 그를 엄호하는 형태로 검을 휘두르고, 보조마법을 날렸다.
“누님! 다 밀어버렸소!”
“신서영 플레이어! 바람을!”
“신서영 플레이어!”
강철과 구연수가 그녀를 불렀다.
어느새 전장에 있던 사람들은 서로를 직책으로 부르지 않고, 서로가 대등한 플레이어로 부르고 있었다.
이름이 불린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부채에 실린 마나를 힘껏 휘둘러, 한 곳으로 밀려난 몬스터들을 찢어발겼다.
[신서영 플레이어! 파발 교차로에서 가면을 쓴 몬스터가 출몰했습니다!]그녀는 텔레파시를 듣자마자 하늘로 날아올랐다.
역 동쪽 방면에서 새하얀 점액질로 이루어진 몬스터가 움직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
또 만났네.
그녀는 백면상이 반응하기도 전에 공명접선을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녀석을 향해 날아든 그녀가 여러 가닥의 바람을 날렸다.
백면상을 포위하던 바람이 일제히 하나로 합쳐져서는 녀석을 압축시켰다.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진 가면.
깜짝 놀란 백면상이 발버둥을 쳤지만, 그녀는 힘을 풀지 않았다.
바로 그때, 머리 위로 간판이 떨어져 내렸다.
혀를 찬 신서영이 몸을 돌렸다.
백면상은 빈틈이 생기자마자 여러 가면으로 분열해서 흩어졌다.
“제가 쫓겠습니다!”
“맡길게요.”
구연수는 몇몇 플레이어들을 데리고 도망치는 백면상을 쫓았다.
그에게 백면상을 일임한 그녀는 의정부를 내다볼 수 있는 높이까지 솟아올랐다.
옥상 위에 올라간 스나이퍼들이 간판을 떨어뜨린 몬스터들을 저격하고 있었다.
머리 위에는 원을 그리며 배회하는 비행형 몬스터들이 있었다.
바람을 일으켜 그들의 날개를 잘라냈다.
지면으로 떨어지는 몬스터에게는 시선을 주지 않고 정면을 향했다.
문화 교차로에 들어선 이시미가 입에 불꽃을 머금고 있었다.
녀석이 불길을 내뱉는 순간, 그녀는 불길이 플레이어에게 닿지 못하도록 소용돌이를 만들어냈다.
불꽃을 휘감고 솟구쳐 오른 소용돌이가 불씨를 흩뿌리며 사라졌다.
녀석을 노려본 것도 잠시.
정면에서 이시미를 상대하기를 포기한 그녀는 거리를 벌려 바람의 칼날을 던져댔다.
양 옆으로 소용돌이를 만들어 도로를 달려오던 군세를 상대했다.
주먹 쥔 왼손을 활짝 펼쳐 몬스터들의 마법을 바람에 날려 보냈다.
“…큭…!”
지면에서부터 사선으로 날아오른 이시미.
황급히 방벽을 전개한 그녀가 용의 눈을 응시했다.
화륵 하고 피어오른 불씨가 덮쳐들었다.
방벽 외부를 가득 메우는 불길.
불길은 방벽이 녹아내릴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듯이 시간이 지나도 꺼지지 않았다.
그녀는 부채 끝에 마나를 집중했다. 한 점에 압축된 소용돌이를 위에서 아래로 내려치자, 제어를 벗어난 소용돌이가 불꽃을 떨쳐내며 녀석을 떨어뜨렸다.
일대를 흔드는 소리가 울리고, 건물 위까지 먼지구름이 들어찼다.
재빨리 바람을 일으킨 그녀가 먼지를 몰아내고, 고함을 지르며 싸우는 사람들이 무사한지 확인했다.
사람들이 피를 흘리며 싸우고 있었다. 마나 폭주를 일으켜가며 달려드는 몬스터들을 막고 있었다.
괜찮아!
할 수 있어.
그녀는 자신을 채찍질했다.
마나는 아직 바닥을 드러내지 않았다.
아직 할 수 있었다.
이 마나가 바닥을 드러낼 때까지, 설령 바닥을 드러낸다고 하더라도.
그녀는 자신에게 몰려드는 군세를 상대로 돌풍을 일으켰다. 바람을 휘둘러 녀석들을 베어내고, 찢어발기고, 내리찍었다.
순간 정신이 아찔했다.
그러던 중에야 숨도 쉬지 않고 마법을 사용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격하게 숨을 몰아쉰 그녀는 연기 속에서 튀어나온 이시미에게 부딪쳐 균형을 잃었다.
몸이 이리저리 회전했다.
얼른 중심을 잡아야했다.
“…저리…, 안 꺼져…!”
공중에서 날아다니던 놈들이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하강했다.
이리저리 치인 그녀가 녀석들을 조준하기 위해 몸을 틀었다.
등 뒤에서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방벽이 녹아내리자마자 황급히 바람을 불러들였다.
튀어 오른 불똥이 머리칼을 태우고, 등짝에 화상을 남겼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지상에서부터 수직상승하는 마법을 쳐냈다.
머리 위로 들어 올린 두 손을 아래로 내치며, 거대한 풍압을 도시 전면부에 내리쳤다.
바람이 만들어낸 압력에 짓눌린 건물이 산산조각이 났다.
몬스터들 역시 마찬가지.
건물 잔해에 파묻힌 이시미가 불길을 뿜어내며 포효했다.
지반이 붕괴하고, 도로가 불바다에 잠겼다.
“하아, 하아….”
불바다 속에서 들려오는 비명.
그녀는 공명접선을 휘둘렀다. 일대를 잠식한 불길을 꺼트리는 게 우선이었다.
그렇게 두지 않겠다는 듯이 사방에서 몬스터들이 달라붙었다.
피부 표면에서부터 전개한 방벽을 구형으로 전개해 밀어냈다.
바람을 움직여 성가신 녀석들을 떨쳐내고, 도로를 뒤덮은 불꽃을 꺼트렸다.
아직 할 수 있어.
조금만 더!
할 수 있다.
체내 마나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러니 움직여다오, 몸아.
군세는 아직도 날뛰고 있었다.
그들을 막아야 했다.
그러니 힘이 필요했다.
사람들을 구하고 싶었다.
그러니 힘이 필요했다.
그저 힘이 필요했다.
힘이 필요하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니 움직여─.
─힘을 원하는가?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 없는 소리.
그럼에도 익숙한 느낌이 드는 기분을 배제할 수 없었다.
바라는 것은?
백색으로 물든 세상.
깨달았을 때에는 낯설면서도 익숙한 감각이 전신을 지배하고 있었다.
☆
깨달았을 때에는 서울 전역에서 바람이 사라진 뒤였다.
바람이 멈췄다.
마치 우지 않는 것처럼.
남산타워 꼭대기에 앉아 있던 은하는 하늘로 솟구치는 빛의 기둥을 바라보았다.
그는 구름을 꿰뚫고 솟구친 섬광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
의 기프트가 발하는 현상.
결국 신서영은 자신이 했던 말을 듣지 않고, 의 기프트를 발현한 것이다.
“사용하지 않기를 바랐는데….”
세계를 재구축하는 힘을 지닌 은 대가를 피할 수 없다.
이전에 은아가 발현했던 은 체내 마나를 소모하는 선에서 세계를 재구축했지만, 신서영이 발동한 은 격이 다르다.
그녀는 의정부역으로 몰려드는 군세를 단신으로 상대하며 라 불리기 손색이 없는 힘을 발휘하지만, 그에 합당한 대가를 치르고 만다.
마나 회로에 장애를 입은 그녀는 플레이어로서 재기불능 상태에 빠진다.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플레이어가 되었을 그녀는 플레이어로서 두 번 다시 회생할 수 없게 된다.
“그게 다가 아니지.”
.
그 역시 그녀의 또 다른 이명이다.
을 발현하고 의식불명 상태가 되어버린 그녀는 클랜원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짓을 당하고 사망한다.
당시 길성준 클랜로드는 그녀를 살해한 클랜원을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부르짖고, 그녀의 죽음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매스컴에 라는 말을 입에 담는다.
그녀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의정부역을 지키려 나섰다는 일화를 꺼내며.
제1차 의정부 탈환전의 영웅이나 다름없던 는 비참한 죽음 끝에 가 되어 길이길이 회자된다.
“결국 정에 살고, 정에 죽는 사람인 거지.”
그래서 은하는 신서영을 정에 살고, 정에 죽는 여자라 평했다.
사실 그는 두 번째 삶을 살기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녀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녀의 영웅적인 면모는 인정할지라도, 스스로를 희생해가면서까지 자신과 하등 관계없는 사람들을 살리려했던 의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대단한 인류애가 따로 없다.
그야말로 정에 살고 정에 죽는 여자다.
그 생각은 그녀를 알아가면서부터 바뀌었다.
그가 보기에 그녀는 플레이어들이 칭송했던 도 아니었거니와,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희생했던 도 아니었다.
그가 보기에 그녀는 그저, 인류애를 연기하고 있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정에 의지하고 있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그녀가 행복의 범주에 들어온 것이다.
어딘가 비뚤어져 있었으니까.
살기 위한 이유를 찾지 못하고, 말도 안 되는 이상에 매달려 사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자신과 닮아 있었다.
살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하고, 죽지 못해 살았던 자신과.
“─안배할 수 있는 건 모두 했어.”
할 수 있는 건 모두 했다.
나머지는 결과를 기다리는 것뿐.
어린아이의 몸으로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럼에도 무력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행복은 갈수록 커져만 가는데, 이 손은 너무나 작았다.
앞으로도 이러겠지.
은하는 희미해져가는 빛줄기를 바라보며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꼈다.
선택해야 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일생을 플레이어로서 살았던 그가 행복을 지키기 위해 할 수 있는 선택은 단 하나밖에 없다.
결국 나는─.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지금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할 뿐이다.
그러니─,
“─부탁해요, 브루노 아저씨.”
은하는 자신의 바람이 틀리지 않기를 빌었다.
리라이프 플레이어 1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