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life Player RAW novel - Chapter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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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뒤에서 크라켄은 잡히는 모든 것들을 집어던졌고, 닥치는 대로 파괴했다.
다리를 빠져나가려면 고철더미의 산을 올라야 했다. 그 역시 빈 공간에 숨은 몬스터들이 눈을 빛내며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나 더 도망쳐야 하는가.
사람들의 얼굴에 드리운 낭패감이 짙어졌다.
“가만히 있지 말고 도망쳐─! 어떻게든 산을 올라! 살고 싶으면 산을 오르라고!”
“지원은 대체 언제 오는 거야!”
“틀렸어! 다 끝났다고!”
시간은 잔혹했다. 몇 천의 목숨이 오가는 상황에서도 시간은 너무나 천천히 흘러만 갔다. 크라켄의 출몰이 보고된 시점으로부터 기껏해야 10분이 지난 것이다.
이대로는 안 돼.
플레이어들의 보고를 들은 은하는 바닥에 있던 잔해를 발로 찼다. 팔등으로 얼굴에 묻은 그을음을 닦아낸 그는 얼마나 더 시간을 벌어야 하는지 가늠했다.
회귀 전, 십이좌는 크라켄의 출몰로부터 30분이 지나서야 현장에 파견되었다.
남은 시간은 이제 약 20분.
지금까지 도망치던 시간의 두 배에 달하는 시간을 버텨야 했다.
이대로 버틸 수 있을까.
고개를 저었다.
퇴로가 완전히 막혔다. 플레이어들이 남아 있는 힘을 쥐어짠다고 하더라도 제한시간까지 사람들을 지켜낼 수는 없었다.
이들이 어찌어찌 몬스터들을 막아낸다고 하더라도 거기까지였다. 아무도 크라켄을 상대하지 못해서야, 녀석으로부터 도망치는 일 역시 만만하지 않았다.
그래, 누군가가 크라켄의 발목을 붙잡지 않으면.
죽는다, 무조건.
살아남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죽음을 무릅써야 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죽음을 무릅쓸 수 있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었다.
“후우….”
처음부터 각오한 일이었다.
이 목숨을 바쳐서라도 가족을 지키겠다고.
은하는 숨을 길게 들이마신 뒤, 천천히 숨을 내뱉었다. 호흡을 침착하게 반복해서는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긴장을 풀었다.
“…후우.”
이어서 메고 있던 가방에서 가위와 커터칼을 꺼냈다.
부모님의 눈을 피해 날이 예리한지를 확인한 뒤, 자신과 크라켄 사이의 거리를 가늠했다.
“아빠. 엄마.”
천천히. 아주 천천히.
마나를 발현하더라도 몸이 적응할 수 있도록.
은하는 체내에 녹아든 마나를 조금씩 밖으로 꺼냈다. 가느다란 실처럼 흘러나온 마나가 아지랑이가 되어 뱀처럼 휘감겼다.
“20분, 20분만 참아줘.”
“은하 너 무슨 소리를….”
아버지가 마나에 감싸인 은하를 보고는 말을 잇지 못했다.
아들이 보이는 기백에 순간 주춤하고 말았다.
“그때까지 플레이어들한테 꼭 붙어 있어야 해. 저 산을 오를 생각도, 되돌아갈 생각도 하지 말고. 여기서 버티고 있으면 돼.”
“은하 너 지금 무슨….”
“은하야?”
아버지에게 매달려 흐느끼고 있던 은아가 고개를 들었다.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이 무언가를 직감했는지,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누나가 지켜줘. 할 수 있지?”
은하가 살며시 미소 지었다.
자신이 사라지면 믿을 사람은 그녀밖에 없었다. 마나를 다룰 줄 아는 그녀라면 플레이어들의 도움을 바랄 수 없는 상황에서도 가족들을 지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제발,
“20분이야.”
제발 살아줘.
“은하야! 어디 가게!”
은하는 그녀가 뻗는 손길을 무시하고 등을 돌렸다.
무의미하게 떠돌던 마나에 이미지를 주입했다. 살아있는 생물처럼 꿈틀거리던 마나가 전신에 스며들었다.
한 걸음이 두 걸음으로.
두 걸음이 네 걸음으로.
발을 움직일 때마다 나아가는 거리가 늘어났다.
천보(天步).
하늘을 주름잡는 것처럼 앞으로 나아가는 축지법이었다.
회귀 후, 오랜만에 천보를 사용한 그는 이를 악물며 몸에 가해지는 고통을 참았다.
회귀 전보다 미치지 못하는 마나.
아직 섭리를 이기지 못하는 신체.
조금이라도 집중이 흐트러졌다가는 녹아든 마나가 실타래처럼 꼬여, 사지가 틀어질 수도 있었다.
그 위험을 알면서도 천보를 감행했다.
사지가 꼬이는 정도라면 죽는 것보다 나았다.
“은하야─!!”
“노은하!!”
“노─은─하─!!”
이제는 가족들이 부르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몇 걸음만에 다리 중반부에 도달한 그는 기척을 눈치 채고 달려드는 몬스터들을 뛰어넘었다.
“꼬마야 어디가!!”
“저 꼬마 뭐야!”
다리 끝에 남아 있던 플레이어들을 지나치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들을 무시하며 은하는 길을 가로막는 몬스터의 눈에 오른손에 쥐고 있던 가위를 찔러 넣었다.
키에엑!
마나로 코팅한 날이 가장 연약한 안구를 헤집었다.
일말의 자비도 베풀지 말 것.
플레이어로서의 격언을 상기한 그는 몬스터가 몸부림치기도 전에 숨통을 끊어놓았다.
그 순간부터였다.
몬스터란 몬스터는 닥치는 대로 죽이는 가 재림한 것이.
잠시도 손을 멈추지 않았다.
손에 스며드는 감촉을 잊지 않기 위해 눈에 보이는 대로 날붙이를 휘둘렀다.
어린아이의 몸으로는 거리감이 맞지 않았다. 혀를 차고서는 최대한 깊숙이 달려들어 회귀 전과 후에 섞이는 이질감을 차례차례 맞춰 나갔다.
하늘 높이 드리운 철골을 뛰어오른 직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낙법을 취해 최대한 데미지를 줄인 은하는 직감이 소리치는 대로 땅을 밟았다.
날아드는 작살을 몸을 숙여 지그재그로 달려 나가 피한 다음, 왼손에 쥐고 있던 커터칼을 찔러 넣고 체중을 실었다.
키, 에엑
몬스터를 바닥에 때려눕혀서는 아래에서부터 위로 커터칼을 그으며 뛰어갔다.
전면부가 반으로 갈린 사체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걸린 것일까.
불과 몇 분이 채 되지 않는 시간이었다.
가족들을 두고 떠난 자리는 이제 보이지도 않았다.
어느새 그는 크라켄과 마주하고 있었다.
크라켄이 흥미를 보인 것은 당연지사.
녀석은 위에서부터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그를 훑고 있었다.
어디 얼마나 재롱을 떠나 지켜보자는 눈빛.
그것을 모를 리가 없는 은하였다. 힘껏 코웃음을 친 그가 천보로 남아 있던 거리를 모두 좁혔다.
크라켄이 눈앞으로 뛰어드는 그를 향해 다리를 휘둘렀다.
“큭…!”
공중에서부터 날아드는 일격.
최대한 몸을 흔들어 공격을 스친 그는 팔을 뒤로 돌려 커터칼을 꽂아 넣었다. 그대로 커터칼을 부여잡고 하늘 위로 날아올라서는, 녀석의 시선이 닿지 않는 머리 위로 착지했다.
여기까지 오면서 이미 너덜너덜해진 가위였다. 힘으로 가위를 반으로 나눈 그는 녀석의 머리에 가위를 박았다.
체중을 더해 매달리자 가위는 아래로 선을 그으며 떨어졌다.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몸이 흔들리는 반동을 이용해 반대쪽 가위 날을 꽂았다. 암벽을 등반하는 것처럼 양 손을 번갈아가며 움직이며 녀석의 머리를 공격했다.
크라켄이 이리저리 몸을 흔들었다. 다리로 자신의 머리를 치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날붙이가 피부를 찌르는 감각에 소스라치게 놀란 모양이었다.
“시~발~!”
이대로 더 버티고 싶었지만 문구용 가위로는 한계가 있었다.
한쪽 날이 다시는 쓰지 못할 정도로 구부러져 있었다.
은하는 가위 한 짝을 버리고 뛰어내렸다.
손이 데이더라도 상관하지 않았다. 철교 기둥을 타고 착지한 그는 스스로 머리를 때리고 뒤로 넘어진 크라켄을 보며 실소했다.
아직인가…!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십이좌의 기척을 감지할 수가 없었다.
“하아, 하아…. 몸이 이리도 어려서야….”
마나가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서 있는 것만으로도 용했다.
그는 찰과상으로 뒤덮인 몸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 궁리를 했다.
그리고 바로 그때.
“미, 친….”
너무나 갑작스러운 순간이었다.
더 이상 충격을 견디지 못한 대교가 붕괴하기 시작했다.
다리 아래로 떨어진 그는 팔자에도 없는 뜀뛰기를 강요당해야 했다.
머리 위로 떨어지는 잔해를 피해가며, 침수하기 직전의 잔해를 발판 삼아 다리 위로 뛰어올라야 했다.
겨우겨우 지면에 발을 붙였을 때였다.
“하…!”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눈앞에 드리우는 차체.
피할 수 없었다.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남아 있는 마나는 거의 제로.
날아드는 차체를 막아낼 힘이 없었다.
그럼에도─.
“─작작 좀 해라 제발!!!!”
낯설면서도 익숙한 감각.
힘이 어디에서 남아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지금 당장 알 필요는 없었다.
중요한 것은 분명 바닥을 드러냈을 힘이 폭발적으로 들끓고 있다는 사실.
극소량에 불과했을 마나가 몸집을 부풀리며 새어나오고 있었다.
남아 있는 가위 날을 앞으로 내밀었다.
갈 곳 없이 휘날리던 마나가 한 점에 모이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아─!!”
한 번으로 족하다.
지옥과도 같았던 삶은 단 한 번으로 족했다.
“나는─!”
이 한 몸을 바쳐서라도.
“이번에야말로─!”
지켜내겠어!
마중물처럼.
극소량의 마나가 끌어올린 힘이 차체를 절단했다.
“하아하아….”
머리가 어지러웠다.
마나가 고갈된 것이다.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몸에서 힘이 사라졌다.
앞으로 쓰러지는 몸을 제어하지 못했다.
바닥에 이마를 박았다.
시야가 흔들릴 뿐, 충격이 전해지지 않았다.
몸에 감각이 없었다.
여기서 정신을 잃어선 안 돼!
정신을 잃었다가는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리라.
이대로 굴복하고 싶지 않았다. 더 이상 무력함을 맛보고 싶지 않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변모해 있을 세상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그러니 조금만.
조금만 더!
나는 . 몬스터란 몬스터는 닥치는 대로 죽이는, 죽기 위해 검을 휘두르는, 죽어도 죽지 않는 괴물.
사용할 수 있는 수는 모두 써서라도!
설령 누군가를 희생하는 한이 있더라도!
“…아직이야. 아직…!”
다리가 움직이지 않는다면 기어서라도.
무기가 없다면 물어뜯어서라도.
그것이 노은하가 아니던가.
“이대로…, 끝날까 보냐.”
다시 태어나면서 다짐했다.
이번에야말로 지키겠다고.
이번에야말로 손에 넣고 말겠다고.
그러니까, 그러니까─!
“이대로, 끝날까 보냐!”
채찍처럼 휘어진 다리가 머리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아직, 아직이야…!”
죽음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과거 그토록 바랐을 죽음이.
그 죽음을 부정하는 자신이 있었다.
지금 그는 누구보다도 삶을 갈망하고 있었다.
“나는, 나는…!”
살고 싶다. 가족들과.
행복하게 살고 싶다.
여기서 죽고 싶지 않아.
이대로 죽을 수 없어.
그러니, 그러니─.
죽음이 드리운 경계에서 기적을 갈구했다.
그토록 증오하던 기적을 갈구했다.
하지만 기적은──.
──결────코─────,
일────어────나────,
지─────────.
───…….
그래, 기적은──.
“───내 동생, 괴롭히지 마!!”
세상이.
“말도, 안… 돼.”
백색으로 물들었다.
리라이프 플레이어 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