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life Player RAW novel - Chapter 160
“하아….”
결재서류에 서명을 하려던 임가을은 눈가를 문질렀다.
어깨가 쑤시고, 허리가 아팠다.
의자에 장시간 앉아 있던 탓이다.
연초부터 3월 중순이 돼가는 지금까지 일거리에 치여 살고 있었다.
어쩔 수 없었다.
작년이 워낙에 다사다난했으니.
상반기에는 이병인의 테러를 처리하느라 바빴고, 하반기에는 의정부 탈환의 실패를 규탄하는 여론을 수습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특히 하반기에 발생한 문제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이었다.
당장 급한 불은 꺼트렸을지라도, 큼지막한 불씨가 몇 개 남아 있었다.
그중에서 테이블 위로 올라온 서류는 가장 커다란 불씨에 해당했다.
『─선력 7년─
제2기 십이좌 후보 선별 및
선발방침에 대하여』
“머리 아프게….”
리클라이너 의자에 몸을 묻었다.
거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발 받침대를 펼치고, 등받이를 기울였다.
거의 침대처럼 변형된 의자에 누운 그녀는 손등으로 눈을 가렸다.
“…뽑기는 뽑아야지.”
피곤한 어조로 중얼거리는 임가을.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기득권이란 기득권들이 공석이 된 여섯 개의 좌에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는 플레이어를 앉히려 할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녀는 그들을 견제하는 한편, 선녀를 지키는 검이 될 플레이어를 선발해야 했다.
“후보자는….”
손을 뻗어 서류를 팔랑거렸다.
선녀라기 무색한 행색이었다.
임가을은 왜건 안에 드러누워 대본을 들여다보는 여배우처럼 서류를 한 장, 한 장 넘겼다.
후보로 올라온 플레이어는 마나관리기구 기준등급이 A이상, 클랜 혹은 파티등급이 A이상인 자들이었다.
서류 최하단에는 그들의 가족관계, 그들이 지닌 영향력, 그들 혹은 그들이 소속된 집단의 재산 등이 대략적으로 기재돼 있었다.
“…나쁘지 않네.”
후보자들을 훑어본 감상이었다.
서류를 배 위에 얹고 눈을 감았다.
아침부터 결재만 하느라 피곤했다.
그녀가 조금만 눈을 붙이려는데─.
“─주무실 시간이 아닙니다. 결재하실 서류가 거기 있는 게 전부가 아닙니다, 선녀님.”
발소리도 들리지 않게 다가온 박상진이 담담히 내뱉는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와 케이크를 가져온 그가 흐트러져 있던 서류를 말끔히 정리했다.
“오빠는 나이를 하나 더 먹어도 변하질 않는구나.” “박상진 호위사입니다. 선녀님, 여기는 집무실입니다. 잊으셨습니까?”
한때는 여배우 임가을의 매니저였던 남자가 의자를 원래대로 되돌린 그녀에게 말했다.
그녀는 일부러 들으라는 식으로 코웃음을 쳤다.
조그마한 포크로 케이크를 자를 생각은 하지 않고, 접시에 짓누르기 시작했다.
“요즘 바쁘신 건 압니다만, 조금만 참아주셨으면 합니다. 어떻게든 쉴 수 있는 날을 만들어볼 테니….”
“언제?”
“…당장은 어렵습니다.”
그녀가 심기가 불편한 얼굴로 입술을 삐죽 내밀었지만, 박상진은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백기를 든 사람은 그녀였다.
어쩔 수 없이 접시에 짓눌린 케이크로 지친 피로를 달래기로 했다.
박상진이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왜 웃어?”
“아닙니다. 스트레스가 쌓일 때마다 케이크를 먹는 모습이 나이를 하나 더 먹어도 변하지 않….”
“박상진 호위사. 지금 나보고 나이는 먹었는데 하는 행동은 어린애 같다고 비꼬는 거야 지금?”
“아닙니다. 그런 의도는 전혀 없었습니다만, 마음이 상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됐어, 나가서 카페라떼나 타와.” “카페라떼 말입니까?”
“이왕이면 라떼 아트도 해오고. 이딴 싸구려 원두로 우린 커피에 타지 말고. 우유는 내가 좋아하는 비율로….”
박상진은 그녀가 줄줄이 늘어놓는 주문을 듣고는 눈을 깜빡거렸다.
한때 여배우 임가을의 매니저였던 남자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히스테리를 부리는 그녀를 어찌하지 못했다.
경험상 히스테리를 부릴 때에는 받아주는 게 나았다.
“…네, 알겠습니다. 말씀하신 내용을 비서실에 전달하겠습니다.”
“박상진 호위사가 직접 해올 것.”
“저는 선녀님의 호위사입니다. 선녀님을 혼자 두고 갈 수는….”
“그럼 이정현 호위사를 부르면 될 것 같은데?”
“이정현 호위사는 오늘 휴가를 나가서….”
“…휴가?”
임가을의 눈빛이 변했다.
싸늘한 시선이 박상진을 쪼았다.
“호위사의 임무는 선녀를 지키는 거 아니었나? 그런데 누구는 지금 아침부터 일하느라 바쁜데…, 누구는 지금 휴·가·를 갔다고?”
“전부터 정해져 있던 일이라….”
“좋겠네. 누구는 휴가를 미루지 않아도 되고, 누구는 일 때문에 쉬지도 못하는 판이라니….”
“지금 당장 이정현 호위사를 불러들이겠습니다.”
“지금 당장 내 눈앞으로 튀어오라 그래. 안 튀어오면, 휴가 몰수한다는 말도 전하고.” “…네, 알겠습니다.”
박상진은 심각한 얼굴을 하고 집무실을 나섰다.
그로부터 휴가를 나갔던 이정현이 부리나케 돌아오는 데에는 3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선녀님.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아무리 상진이 형이 미울지 몰라도, 괜히 저까지 걸고넘어지다니요.”
“휴가는 잘 다녀왔니?” “이게 잘 다녀오게 생겼어요? 네?” “오늘 휴가, 반환한 게 아니라 사용한 걸로 해줄까?” “무엇이든 말씀해주십시오. 저 이정현, 선녀님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명령이든 받들겠습니다!”
이정현의 태세전환은 재빨랐다.
임가을은 그제야 만족해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개인 캐비닛의 잠금장치를 풀었다.
개인이 사용하기에 널찍한 캐비닛 안에는 잡다한 옷들이 질서정연하게 걸려 있었다.
“…선녀님?”
“이정현 호위사. 내 말만 들어주면 휴가 하루 더 줄게. 포상휴가, 받고 싶지 않아?”
“저는 선녀님의 신변을 지키는 호위사로서! 선녀님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뿐입니다!”
“그 대답, 마음에 드네. 이 일은 박상진한테 비밀로 해야 해.”
“네! 알겠습니다!”
“지금부터 휴가를 나갈 거야.”
“…네?”
이정현은 마지막 말을 듣고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임가을은 어안이 벙벙한 이정현을 돌아보는 일 없이 옷들을 찬찬히 훑었다.
“내가 부를 때까지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어.”
“저기요, 선녀님. 지금 이게 무슨 일인지 알려주시면….”
“혹시 내가 옷 갈아입는 걸 지켜볼 생각이니?”
임가을이 치맛단 단추를 풀었다.
한순간 시선이 이동했던 이정현은 심장에 맺힌 마나가 편산하는 기분을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알겠습니다!”하고 크게 외치자마자 집무실을 도망치듯 뛰쳐나갔다.
잠시 후─.
“─가을이 얘가 또….”
박상진이 집무실을 찾았을 때에는 아무도 없었다.
테이블 위에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을 뿐.
『오늘 안으로
돌아갈 거니까
나 찾지 마.』
한때 여배우 임가을의 매니저였던 남자는 이번 일이 처음이 아닌지 한숨만 푹푹 쉬었다.
☆
“”와아! YH월드다!””
“…누나랑 여동생이랑 똑같네.”
은하는 잠실 YH월드에 입장하자마자 벌써 저만치를 뛰어가는 은아와 은애를 보고 혀를 내둘렀다.
오랜만에 놀이공원을 온 것이 그리도 좋은지 두 팔을 비행기처럼 펼치고 빙글빙글 도는 자매였다.
“근데 아빠가 오랜만에 휴가도 쓰고 웬일이래?”
“회장님이 제발 가지 말라고 바짓가랑이를 붙잡았지만, 정해진 휴가일수는 채워야지. 지금쯤 다들 고생하고 있을 거야, 암.”
은하는 어머니와 손깍지를 끼고 있던 아버지를 돌아보았다.
그동안 일에 치여 살았던 아버지였다.
시리우스그룹의 2대 회장 한도영의 최측근이 된 아버지는 그룹개편과 인사정리를 하느라 연초부터 정신이 없는 나날을 보내기만 했다.
세상에 우리 아버지가 시리우스그룹 비서실장이라니….
은하는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집에서 가면을 쓰고 악의 간부를 연기하며 은애랑 놀던 아버지가 시리우스그룹에서 비서실장이 되었다는 사실이.
“회장님도 당신 없느라 힘든 거 아니에요?” “그냥 힘든 정도가 아닐까? 마지막에는 울고불고 난리가 아니었다니까.”
“그래요?”
아버지가 너스레를 떠는 말도 거짓말이 아닐 수 있었다.
시리우스그룹은 현재 내부 개편을 진행하느라 한창 바쁜 시기일 테니.
시리우스그룹만이 아니지.
정재계만 아니라 클랜까지 개혁을 부르짖고 있었다.
작년 한 해는 다사다난했다.
시리우스그룹이 비리에 휩싸이고, 새벽그룹이 개편되고, 창해클랜이 단군클랜에게 흡수당했다.
더군다나 의정부 탈환에 참전했던 클랜과 후원그룹이 막심한 피해를 입기도 했다.
한국마나관리기구에서는 올해에는 클랜과 플레이어의 등급을 조정하지 않겠다고 발표했을 정도였다.
플레이어 업계는 올해 연말에 있을 등급심사를 준비하기 위해서라도 쉬고 있을 틈이 없을 것이다.
“어? 은아은애 어디 갔지?”
“애들이 또 사라졌나 보네요. 은아가 있어서 괜찮겠지만…, 얘는 어디로 사라진 거지?”
“전화는? 안 받아?” “은아 스마트폰이 저한테 있어요. 아까 은애가 맡겼거든요.”
은하는 부모님의 대화를 듣고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은아와 은애가 보이지 않았다.
잠시 한 눈을 파느라 천방지축 자매의 패시브 스킬을 고려하지 않았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엄마, 아빠. 누나랑 은애는 내가 데리고 올게.”
“혼자 돌아다닐 수 있어? 너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지?” “아빠, 나를 뭐로 보고.” “그럼 은하야. 엄마랑 아빠는 저기 카페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은아은애 찾는 대로 바로 돌아와야 해? 스마트폰도 가지고 가고.”
은하는 은아의 스마트폰을 받았다.
그가 은아의 스마트폰 비밀번호를 모를 리가 없었다.
이럴 줄 알았어.
또 나랑 은애 생일로 저장했네.
괜스레 흡족해진 은하는 스마트폰으로 어머니가 가리킨 카페를 찍었다.
“누나랑 은애는 어디 있으려나….”
부모님과 헤어진 은하는 어트랙션 주변을 기웃거렸다.
자매가 아무리 말괄량이라도 실외로는 나가지 않았을 것이다.
보나마나 이 근처에 있을 텐데….
누나 성격상 무슨 문제라도 생겨서 돌아오는 게 늦는 건가?
은아은애 센서에 불을 켰다.
누나와 여동생을 찾기 위한 감은 지금까지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바이킹 근처에서 두 사람을 발견했다.
“어라? 지금 누구 누나 손을 잡으려 하는 거야?”
바이킹 대기행렬에서 떨어진 위치.
은아는 20대로 보이는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실랑이를 벌이는지 은아와 대치한 남자들의 분위기가 흉흉했다.
은아는 그들로부터 어느 여성을 지키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플로핏햇을 쓴 여성은 다가오려 하는 남자들을 내치려 했다.
하지만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 한 명이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저것 봐라?”
플로핏햇을 쓴 여성이 남자에게 붙잡히든 말든 알 바가 아니었다.
문제는 남자 한 명이 은아를 위협하려 하고, 또 다른 남자가 “우리 언니 괴롭히지 마~!”하고 매달리는 은애를 넘어뜨렸다는 것이다.
“너희들 아주 다 죽….”
“지금 애한테 무슨 짓이에요!”
플로핏햇을 쓰고 있던 여성이 낭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붙잡힌 손목을 뿌리친 그녀가 엉덩방아를 찧은 은애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은아는─,
“─왜 내 동생 넘어뜨려요?”
사람들의 이목을 느낀 남자들이 무언가 말하려던 틈도 주지 않고 돌려차기를 날렸다.
올해로 중등아카데미 3학년이 되는 그녀에게 일반인을 쓰러뜨리는 일이야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한 번에 세 명을.
“우리 언니 최고!”
플로핏햇을 쓴 여성이 은애의 엉덩이를 털어주었다.
은애는 군더더기 없이 착지한 은아에게 새된 소리를 질렀다.
우리 누나는 자기 일에는 무관심한데, 나나 은애 일이 되면 앞뒤 가리지 않는다니까.
무언가 뿌듯하면서도 김이 빠진 은하는 쓰러진 남자들을 주시했다.
사람들의 시선을 받은 남자들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주섬주섬 일어난 남자들이 무언가 욕지거리를 씨부렁거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하필이면 은하가 있는 방향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나한테 안 왔으면 봐주려 했는데….”
은하는 눈에 마나를 모았다.
달려오는 남자들의 눈을 일일이 주시하며.
스티지안 아이(Stygian Eye)
“─억!?”
“뭐, 뭐야!”
간단한 환상마법이었다.
남자들은 지금 한 줄기 빛만 보이는 터널을 달리는 기분이리라.
터널을 빠져나가기만 하면 마법이 풀리겠지만, 그때까지 새까맣게 물든 세계를 뛰어가는 공포를 느껴야 할 것이다.
스티지아이 글룸이 남긴 스킬석은 그가 보는 이로 하여금 공포를 심을 수 있게 하는 마법을 제공했다.
마음만 먹으면 정신이 붕괴할 만한 공포를 각인시킬 수도 있었다.
대상자의 마나 저항을 파훼했을 때를 가정한 경우지만.
일반인을 상대로 위험한 마법을 사용할 수는 없었다.
저 정도로 충분했다.
“누나. 왜 멋대로 사라지고 그래?”
“…미안, 오랜만에 놀이공원에 오니까 기분이 좋아서….”
“오빠, 언니 괴롭히지 마아.”
“은애 너도 똑같아.” “…잘못했습니다.”
은하는 짐짓 엄한 표정으로 움츠러든 은아를 혼냈다.
은아는 동생의 눈치를 살피느라 시무룩한 얼굴을 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은하는 플로핏햇을 쓴 여성을 흘겨보며 물었다.
여성의 얼굴은 모자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여기 언니가 같이 놀기 싫다고 말했는데, 아까 그 사람들이 떨어지려 하지 않아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겠다.
은하는 한숨을 쉬었다.
결국 자매는 곤경에 처한 여성을 무시하지 못하고 도우러 나섰다는 뜻이다.
“누나, 엄마가 누누이 말했잖아. 다른 사람 생각하기 전에 먼저 내 몸부터 생각하라고.”
“…미안.”
“…잘못했어요.”
은아은애가 다시금 고개를 숙였다.
이 정도 혼냈으면 됐다.
은하는 천방지축 자매를 부모님에게 데리고 가기로 했다.
그러던 차,
“사이가 참 신기한 남매구나? 남동생이 누나를 혼내고….”
내내 입을 다물고 있던 여성이 말을 걸었다.
“도와줘서 고마워. 멋진 발차기였어.”
“…네? 아, 아뇨….”
여성은 은아에게 고맙다고 말한 뒤, 무릎을 굽혀 은애와 시선을 맞췄다.
“정말 어디 다치지는 않았고?”
“은애 괜찮아!”
여성은 은애를 면밀히 살폈다.
그러다 은하와 눈이 마주쳤다.
…어디서 본 것 같단 말이야.
눈을 마주친 은하는 플로핏햇 아래로 드러난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어디서 본 여성이었다.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
은하는 여성의 얼굴을 다시금 확인하고 짧은 탄성을 터뜨렸다.
눈 화장 하나만으로 인상이 이리도 달라 보이나 싶었다.
게다가 땋은 머리나, 입고 있는 원피스로 청순가련한 분위기까지 조성하고 있었으니.
회귀 전에 그녀를 직접 만난 적이 없었더라면 알아차리지 못했으리라.
“왜 그러니?”
은하는 답을 하는 것도 잊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녀를 쳐다보기만 했다.
왜 여기에 있는 거야?
은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녀가 선녀 임가을이었으니까.
리라이프 플레이어 1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