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life Player RAW novel - Chapter 161
선녀 임가을은 천의 가면을 지닌 여인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아역배우로서 활동했던 그녀는 여러 가지 얼굴을 연기하는 일이 능했다.
그러니 선녀 임가을이라는 일면만을 본 사람은 그녀가 얼마나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인지 모른다.
은하도 그랬다.
멀찍이서 보기만 했던 선녀를 처음 대면했을 때는 어머니를 여읜 하백련을 주었을 때.
그때 그녀는 의 기프트를 발현한 백련을 그에게 일임했다.
‘내가 참 어이가 없어서….’
자신은 몬스터를 죽이는 플레이어라고 반발하던 그에게 코웃음 치며.
‘네가 싼 똥은 네가 치워야지. 어떻게 네가 주운 애를, 모르는 사람한테 맡길 수가 있니?’
호위사들과 전투를 벌이기 직전까지 살기를 발한 그를 두려워하기는커녕 면박을 주며.
그때 선녀 임가을에 대한 인상은 최악이었다.
그때는 그것이 그녀의 본질인 줄만 알았다.
‘이것도 못해서는 나중에 커서 밑에 있는 애들한테 잡아먹힐 거야. 다시 해. 내 말 똑바로 듣고.’
하백련에게 선녀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가르치던 임가을은 냉정하고 엄격했다.
‘…울지 말고. 이 정도 일로 울면 안 돼. 힘든 건 알지만, 우리 조금만 참자, 응?’
때로는 눈물을 흘리는 하백련을 끌어안고 자상한 미소를 보여주기도 했다.
‘오늘 생일이지? 가 생일 축하한다고 해줬니? 뭐? 모르고 있었다고?
하여간…. 쟤는 왜 주변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니? 내가 오늘 불러서 망정이지…. 나랑 점심이나 먹자. 쟤는 빼고.’
때로는 백련의 어머니가 되어주기도 했다.
그 외에도 임가을은 좀처럼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언젠가부터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생각하기 포기했을 정도로.
그래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어느 쪽이냐고 하면 싫은 쪽이지.
물론 그는 여전히 그녀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녀가 그를 모질게 대한 이유도 있지만, 백련에게 많은 짐을 떠넘기고 선녀의 자리에서 내려왔기 때문이다.
“어디 아프니?”
그 선녀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은하는 플로
핏햇을 쓴 여성을 멍하니 바라보다 정신을 차렸다.
“…괜찮아요. 누나야말로 괜찮아요?”
“나는 괜찮지. 네 누나 덕분에…, 아참, 이름을 물어보지 않았네. 너희 이름이 뭐니?”
“은애는 은애에요! 노! 은! 애!”
그녀의 원피스를 붙잡은 은애.
임가을은 초롱초롱 눈을 빛내는 은애의 손을 붙잡고 흔들었다.
만인이 아는 선녀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저는 노은아라고 해요.”
“그래, 은아구나? 도와줘서 고마워. 혹시 플레이어 아카데미에 다니니?”
“아! 방금 본 건 못 본 척 해주세요! 교관님이 알면 저 혼나요!”
아카데미 학생은 민간인에게 힘을 행사할 수 없다.
힘을 행사할 수 없는 범위가 굉장히 애매하기는 했지만, 문제가 되는 소지 자체를 만들지 않는 편이 나았다.
남자들을 쓰러뜨린 기억을 떠올린 은아는 두 손을 마주치며 사정했다.
누나는 모르나 본데….
누나 지금 아카데미에서 가장 높은 권한을 가진 사람 앞에서 힘을 행사한 거야.
은아는 플로핏햇을 쓴 여성의 정체를 모르는 눈치였다.
은하 역시 회귀 전에 선녀 임가을을 마주한 적이 없었더라면 몰랐을 정도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런데 은아, 노은아…. 어디서 잠깐 들어본 것 같은데….”
임가을이 중얼거렸다.
이윽고 그녀의 눈에 이채가 스쳐지나갔다.
“…네가 가 로 삼았다는 애구나?” “어떻게 아셨어요?” “유명한 이야기인데 왜 모르겠니?”
누나, 그 사람 선녀야.
근데 임가을 저거, 아무렇지 않게 거짓말을 하네.
선녀인 그녀가 십이좌가 로 삼은 유망주들을 살피지 않았을 리 없었다.
한 번쯤 이름을 보았을 것이다.
은하는 그녀가 은아의 이름을 알고 있더라도 그리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다음이었다.
“그리고 네가….”
“…은하. 노은하에요.”
흥미로운 시선으로 보는 임가을.
은하는 그녀가 대놓고 드러낸 반응을 보고 속으로 혀를 찼다.
예전에 브루노가 선녀가 주시하고 있다는 경고를 알리기는 했지만, 그녀가 바로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피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선녀가 YH월드에 있는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알고 싶지도 않았다.
괜히 선녀와 엮였다가는 귀찮은 일이 생길 수 있었다.
은하는 이대로 은아와 은애를 데리고 부모님에게 돌아갈 생각이었다.
“누나, 은애야. 엄마 아빠가 기다릴 테니 슬슬….”
“늦어서 죄송합니다! 말씀하신 젤라토를 찾아 반대편까지 다녀오느라 …!”
은하가 슬그머니 물러나려던 때였다.
우스꽝스러운 안경을 쓴 남자가 다섯 단이 넘는 아이스크림을 들고 뛰어왔다.
아이스크림이 쓰러지지 않도록 달려온 남자는 진을 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우와! 아이스크림 엄청 크다!”
“은애 먹어볼래?” “먹어도 돼?” “당연하지.” “언니, 오빠! 먹어도 돼?”
은애가 임가을이 받은 아이스크림을 보고 눈을 빛냈다.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은아은하에게 허락을 구하려 했다.
“언니, 정말 먹어도 될까요?”
“은아 너도 먹어. 어차피 혼자서 다 못 먹으니까.” “선…, 아니, 그럴 거면 왜 사오라고…네, 지퍼 닫겠습니다.”
임가을은 무릎을 굽혀 은애에게 아이스크림을 건넸다.
은애는 머리보다 높게 쌓은 아이스크림을 올려다보며 탄성을 터뜨렸다.
은아가 “우리 꺼 아니니까, 조금만 먹어야 해? 이따 아빠한테 말해서 언니가 사올게.”하는 말도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한편 은하는 입술에 지퍼를 닫는 시늉을 하는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그 역시 알고 있었다.
선녀가 호위사도 대동하지 않고 혼자 왔을 리 없지.
임가을이야 내가 아는 모습이랑 크게 다르지 않지만, 이정현이 젊은 모습은 익숙지가 않네.
호위사 이정현.
선녀 임가을을 지키는 호위사이자, 남궁성운의 문파에 속한 플레이어였다.
물론 한매류의 극의에 도달한 이는 류연화였지만.
“꼬마야, 너는 아이스크림 안 먹어도 돼?”
“…전 괜찮아요.”
도수 없는 안경을 고쳐 올린 이정현을 올려다보던 은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에 대한 기억 역시 좋지 않았다.
은하는 감정에 충실하고, 선녀에 대한 충정심이 깊었던 이정현과 대립하는 일이 잦았다.
그가 선녀에게 살기를 발했을 때, 전투를 벌이기 직전까지 치달았던 플레이어가 바로 이정현이었다.
물론 그가 박상진에 비해 격이 없고, 성격이 서글서글하기는 했지만.
또한 그는 백련의 놀이상대이기도 했다.
마지막은…, 허무했지.
이정현의 죽음은 너무나 허무했다.
백련이 2대 선녀의 자리에 오르는 시기, 이정현은 임가을을 끌어내린 세력에게 누명을 쓰고 참수 당했다.
그때 은하는 그의 목이 광화문 한복판에서 떨어져나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때로는 대립하고, 때로는 협력했던 플레이어가 그런 식으로 목숨을 잃는 모습이란 참 더러운 기분이었다.
억지로 눈물을 삼키던 백련을 지켜보는 것밖에 할 수 없기까지 해서.
이번 생에는 그러지 말라고.
선녀 임가을을 끌어내리던 세력 중 하나였던 창해클랜은 해체됐고, 새벽그룹은 회장이 바뀌었다.
중립을 지지하던 앨리스그룹은 미래보다 빠르게 힘을 키워나가고 있었다.
선녀 임가을의 파벌이 회귀 전처럼 비참한 결말을 맞이하는 미래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누나, 은애야. 얼른 가자. 엄마랑 아빠가 기다리고 있을 거야.”
은하는 두 사람을 뒤로 하기로 했다.
정체를 숨기고 있는 저들도 이 이상 아이들을 상대하는 일은 피하고 싶을 터였다.
그것은 은하의 생각에 불과했다.
“너희는 가족들이랑 같이 왔니?” “엄마랑 아빠도 같이 왔어요. 언니는…, 남자친구랑?”
“누가 남자…컥…!”
“맞아, 남친이랑 같이 왔어.”
벌레 씹은 얼굴로 부정하려던 이정현이 기계처럼 고개를 끄덕거렸다.
은하는 봤다.
임가을이 구두 굽으로 이정현의 발등을 내리찍는 모습을.
소리가 절로 들릴 정도였다.
은아나 은애는 바이킹에 탄 사람들이 지르는 소리에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괜찮으면 우리랑 같이 놀지 않을래? 우리 남친이 조금만 무서워도 타지를 못해서 혼자 타야 하거든…. 아, 놀이공원까지 와서 정말….”
“아….”
“언니, 울지 마아….”
별안간 한 줄기 눈물을 흘리는 임가을.
은아와 은애는 그녀가 눈물샘을 자유로이 조종하는 연기에 감정을 이입하고 말았다.
반대로 은하는 혀를 내둘렀다.
그녀에게 몇 번 당한 적이 있던 은하는 걸려들지 않았다.
이정현도 마찬가지.
깬다는 얼굴로 콘을 쥔 손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언니, 우리랑 같이 타요.”
“은애랑 타요!”
임가을의 손을 붙잡는 은아와 그녀의 원피스 자락을 꾹 쥐는 은애.
자매는 완전히 넘어가고 말았다.
“괜찮지, 은하야!?”
“오빠!?”
“그래도 될까? 은하도 괜찮니?”
은아와 은애를 앞세운 임가을이 헛웃음을 흘리던 은하를 찾았다.
그녀는 그에게도 긍정적인 답변을 받겠다는 듯이 울먹거리고 있었다.
진짜 배우네, 배우.
잘 얘기하고 있다가 갑자기 눈물을 흘리면 얼마나 당황하겠어.
그러나 자신은 아니다.
그는 눈물 어린 호소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가족들끼리 놀러온 거라서요. 부모님이 별로….”
“그러니? 그럼 은하 네 말대로 부모님한테 물어보러 가면 되겠네!”
그의 대답을 멋대로 훔친 임가을.
은하는 은아와 은애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 그녀를 어안이 벙벙해진 얼굴로 쳐다보았다.
이런 식으로 유치하게 나올 줄은 몰랐다.
“…미안하다. 우리 애가 나이에 비해 어려서….”
“나이에 비해 어린 사람은 난데….”
“어? 뭐라고?”
“아니에요. 일단 따라가야겠네요. 엄마랑 아빠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면서….”
은하는 한숨을 쉬었다.
결과가 눈에 선했다.
그가 아무리 뭐라 하더라도, 임가을은 어떻게든 부모님의 허락을 받아내고 말리라.
“미안, 진짜 미안. 이따가 형이 너 먹고 싶은 거 다 사줄게!”
“돈은 있고요?”
“이래 보여도 형이 돈이 얼마나 많은데!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다 말해!”
…그으래? 정말 먹고 싶은 거 다 사준다는 거지?
은하는 검은색 신용카드를 꺼내는 이정현 몰래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놀이공원에서 파는 음식이 얼마나 하겠냐마는 국가의 세금으로 한 통 챙기기로 마음먹었다.
“엄마! 아빠!” “엄마아빠!”
한편 카페에 들어선 은아와 은애는 창가 자리에 있던 부모님을 찾았다.
뒤따라간 임가을이 부모님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그녀가 부모님을 속이지 못할 리 없었다.
“그래요. 은애도 이리 좋아하는데 같이 놀아요. 그래도 되죠?”
“…뭐, 그래요. 그나저나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그래요? 제가 어디를 가도 볼 법한 흔한 얼굴이기는 하죠.”
임가을이 능청을 떨었다.
어머니는 아이들이 좋다면야 상관없다고 동의했고, 아버지는 무언가 이상해하면서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저, 그런데 이름이….”
카페를 나온 어머니가 나란히 걷다 물었다.
화제가 끊이는 일 없이 대화를 이어가던 임가을이 이정현의 팔짱을 끼며 답했다.
“봄여름이에요, 봄여름. 오빠는 김정현이고요.” “오…빠…? 제가 한…아니요, 김정현입니다. 제가 한 살 많아서요. 오늘 하루 잘 부탁드립니다!”
적당히 지은 이름으로 둘러대는 임가을과 눈알을 굴리며 장단을 맞추는 이정현.
은하는 혀를 쯧쯧 찼다.
개그가 따로 없었다.
두 사람의 정체를 알고 있는 그로서는 진귀한 코미디를 보는 기분이었다.
어라?
문득 번뜩이는 생각이 떠올랐다.
임가을은 자신이 평범하지 않다는 사실을 아는 모양이지만, 자신이 그녀의 정체를 꿰뚫고 있는지 모른다.
절호의 기회였다.
어린아이의 순진함으로 그녀를 곯릴 수 있는─.
“─누나, 누나는 무슨 일 해요?”
은하는 어머니와 담소를 나누던 임가을에게 말을 걸었다.
그녀는 자신이 말을 걸 줄은 의외였는지 눈을 깜빡거렸다.
그러나 그녀가 대답하는 데에는 순식간이었다.
“나? 나는 일 안 해. 대학생이거든.” “그래요? 나이 많아 보이게 생겨서 직장인인 줄 알았는데….”
“…뭐?”
“에이, 뭐야. 그냥 노안이었던 거구나.”
“…….”
어머니가 등 뒤로 은하를 꼬집었다.
그는 짐짓 모르는 척 중얼거리며 임가을을 지나쳤다.
은하는 놓치지 않았다.
한순간이지만 임가을이 플로핏햇 아래로 금이 간 미소를 보인 것을.
“야, 꼬마야! 조심해! 저 누나 화나면 정말 무서운 사람이라고!”
“형이 오빠 아니었어요? 왜 누나에요?”
“…뭐? 아, 아니, 나한테 누나가 아니라 너한테 누나라서 그런 거지!”
이정현이 작은 소리로 주의했다.
은하는 어깨를 으쓱였다.
이것은 시작에 지나지 않았다.
이제부터 틈이 날 때마다 그녀를 놀릴 생각이었으니.
“어라? 누나 어디서 많이 봤다 했는데 선녀님이랑 닮은 것 같아!”
“어? 그러네?”
“그러네!”
이번에는 은아를 끌어들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은애는 은아를 따라했다.
“…많이 닮았니? 내가 선녀님이랑 닮았다는 소리도 가끔 듣기는 해.”
“정말 선녀님이랑 닮았네요. 그래도 뭐…, 누나가 선녀님보다 더 예쁜데요?”
“맞아요! 언니가 선녀님보다 더 예쁜 것 같아요.” “그래? 고마워 은아야, 은하야.”
“선녀님은 얼굴도 못생긴 데다 무섭게 생겨서….”
“…….”
은하는 보았다.
임가을이 한순간이지만 감정을 지운 얼굴을.
“선…, 여, 여름아? 너 아까 바이킹 타고 싶다고 하지 않았어? 우리 바이킹 타러 안 갈래요!?”
이정현이 그녀의 심기를 재빨리 알아차리고 바이킹을 가리켰다.
그제야 기분이 풀린 눈치였다.
은하는 양손에 은아와 은애를 쥐고 바이킹을 타러 가는 임가을을 쳐다보았다.
까르르 웃고 있었다.
그녀가 저토록 들떠 있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럴수록 그녀의 마지막과 대비되었다.
‘…웃으려면 웃어. 꼴좋다고.’
초대 선녀 임가을.
선녀의 자리에서 내려온 그녀는 전국을 쉼 없이 돌아다니며 코쿤을 수복하는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연이한테 이 말만은 전해줘. 이런 식으로…, 넘겨주게 돼서 미안하다고. 날 원망해도 좋다고.’
은하는 아직도 봉고트럭에 실려 대구로 내려가던 선녀의 말로를 기억하고 있었다.
“저 사람이…, 저렇게 신나게 노는 모습은 처음 보네.”
은하는 발걸음을 옮겼다.
이왕 놀 바에야 신나게 즐기기로 했다.
물론 이정현의 카드를 긁는 것도 잊지 않았다.
“…너 정말 다 먹을 수 있지?” “다 못 먹으면 다른 사람들한테 나눠주면 되죠. 골든벨 몰라요? 골든벨.”
이정현은 임가을이 뒤에서 뾰족하게 쳐다보는 시선을 느끼며 지갑을 열어야 했다.
점원에게 내민 카드는 부들부들 경련을 하고 있었다.
리라이프 플레이어 1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