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life Player RAW novel - Chapter 166
4월 중순.
도안초등학교 학생들은 덕수궁으로 나들이를 나왔다.
이병인의 테러는 초등학교 학생들이 관할구역을 벗어난 교외 활동을 금지하게 만들었다.
수련회를 가야 하는 아이들이 덕수궁으로 소풍을 나온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절대 덕수궁 바깥으로 나가지 말고, 12시까지 덕수궁미술관 정문 앞으로 와야 한다!”
임도훈은 매표소를 우르르 통과한 아이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적당히 대답한 아이들이 제각기 조를 이루어 흩어졌다.
“야, 야, 야! 얼른 가자!”
“…은하가 쳐다봤어.” “그런 거 신경 쓰지 마! 우리 저기 가보자!”
은하와 눈을 마주친 아이들은 화들짝 놀라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어갔다.
“누가 잡아먹는 줄 아나….”
대한문을 지난 은하는 자신을 보고 달아나는 아이들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그날 이후로 은하는 고립되었다.
5학년 아이들은 그를 무서워하며 피해 다니기 일쑤였고, 몬스터에 대한 공포와 트라우마를 겪었던 아이들은 눈이라도 마주쳤다가는 눈물을 터뜨리기 일쑤였다.
반 분위기는 최악이었다. 아이들은 대화를 할 때에도 말소리를 죽였으며, 쉬는 시간에도 왁자지껄 떠들지도 않았다.
자리를 불편해하던 아이들 대다수가 복도로 나가거나, 다른 반 아이들에게 놀러가거나 했다.
“얘들아, 우리 어디부터 갈까?” “하양아, 제일 가까이에 있는 함녕전부터 둘러보는 건 어때?”
“음…, 그럴까? 민지 너는?”
“…마음대로 해.”
친구들은 반 분위기를 원래대로 되돌리기 위해 노력했다.
은하가 고립된 적이 처음도 아니었다.
하지만 민지나 은혁의 노력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은하의 힘을 가까이에서 목격한 아이들의 공포는 쉽사리 떨쳐낼 수가 없었다.
부회장 조연아가 여자아이들을 주도하고, 회장 염재진이 남자아이들을 주도하고 있기도 했다.
민지와 은혁의 인지도는 은하로 인해 크게 위축된 상태였다.
하양과 서나도 별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다섯 명이서 몰려다니는 일이 많았다.
“먹민지 너는 아침부터 왜 이리 기운이 없어? 배고파서 그래?”
“내가 지금 누구 때문에 이러는데….”
민지가 짜증을 내며 투덜댔다.
요즘 들어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는 민지는 침울해하는 일이 잦았다.
은하가 일부러 장난을 걸어도 신경질을 부릴 뿐, 제대로 받아치지도 않았다.
“은하야, 민지 너무 건드리지 마. 민지가 네 걱정을 얼마나 하는데….”
“나도 알아, 아는데….”
서나가 넌지시 말하며 함녕전으로 향하는 민지를 따랐다.
은하는 앞서 나가는 아이들을 보고 중얼거리던 말을 삼켰다.
괜한 걱정이야.
나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니까.
은하는 아이들에게 고립을 당하더라도 상관이 없었다.
친구들은 자신을 걱정하는 눈치였지만, 은하는 반대로 친구들이 걱정이 되었다.
괜히 자신을 챙기려다 친구들까지 따돌려지는 건 아닐지.
“내가 말해도 안 들을 테고….”
가슴이 참 답답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일어난 문제는 마나로 해결할 수 없었다.
공포는 더더욱.
자신을 두려워하는 아이들에게 공포를 휘두른다고 상황이 나아지지도 않을 터였다.
“이런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모르겠다.”
검을 휘두르고,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를 죽이기만 할 줄 알았던 그는 인간관계에 서툴렀다.
회귀 전에도 이유정이나 하백련이 그의 인간관계를 도맡았을 정도로.
자신을 향한 악의에는 대항할 수 있어도, 자신에 대한 공포에는 어찌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모두 동작 그만─!!”
바로 그때였다.
은혁이 함녕전 돌담길을 걸어가던 여자아이들에게 소리쳤다.
“정말 뭐야!” “은혁아, 왜 그래?” “여기 우리만 있는 데가 아니잖아. 꼭 큰 소리로 말해야 되겠어?”
민지가 신경질을 부렸다.
민지를 껴안은 하양은 고개를 갸웃거렸고, 서나는 점잖은 어조로 은혁을 타일렀다.
그럼에도 은혁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지도를 보니까 이 근방에 매점이 있다는데, 우리 뭐 먹으러 가자!” “여기 들어온 지 얼마나 됐다고?”
“야, 김민지. 네가 5학년이 됐으면서도 아직 뭘 모르나 본데….”
혀를 쯧쯧 차며 집게손가락을 좌우로 까닥이는 최은혁.
“소풍을 왔으면 먹으면서 구경해야 하는 거 아니겠어? 꽃도 예쁘게 피었겠다, 덕수궁도 볼 만하겠다, 여기에 딱! 뭐라도 먹으면서 돌아다녀야지! 안 그래, 대장?”
“…어, 그렇기는 하지.”
은하는 은혁이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말을 듣다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먹을 게 없어서는 보는 맛도 떨어진다.
그리고 먹민지는 배가 고프면 성깔이 장난이 아니고, 나는 당이 떨어지면 피곤해지고….
“야, 노은하! 너 지금 무슨 생각했어?”
“왜? 나 아무 생각 안 했는데?” “거짓말! 너 지금 나보고 웃었잖아! 내가 너 속으로 먹민지라고 생각한 걸 모를 줄 알고?”
“…야, 너 되는 대로 막 찍지 마. 그러다 언젠가 손모가지 날아간다.”
“이거 왜 이래? 나 몰라? 나 도안초등학교 김민지야! 내가 너 먹민지라고 생각했다는데 손모가지 건다!”
“김민지 네 이놈! 너야말로 내가 누군지 알고 하는 말이야!?”
덕수궁 한복판에서 말다툼을 벌이는 민지와 은하.
서나는 이마를 부딪치며 이를 가는 두 사람을 두고 꼬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얘들아, 그만 싸우고. 사람들 다 지나가는데 그러고 있을 거야?”
“나 은혁이 말 들으니까 소프트아이스크림 먹고 싶어졌어!
우리 아이스크림 먹으러 가자! 엄마가 너희하고 같이 먹으라고 용돈 줬으니까 내가 살게!”
하양이 목에 건 토끼지갑을 들어 올리며 외쳤다.
그 순간, 눈싸움을 벌이고 있던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콜.””
☆
소프트아이스크림은 성난 몬스터도 잠재우는 마법이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말다툼을 벌이던 은하와 민지는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소프트아이스크림에 푹 빠져 있었다.
“거봐! 내 말 맞지? 이왕 구경하는 김에 먹으면서 구경하면 얼마나 좋아!”
“그래, 인정.”
“나도 인정.”
아이스크림 측면을 혀로 핥으며 동의하는 민지와 은하.
아이들은 석조전으로 향하는 길을 걷고 있었다.
혀끝에서부터 전면부로 퍼지는 달콤함을 맛보는 동시에 길가에 핀 꽃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누그러지는 기분이었다.
“벚꽃도 활짝 피었으면 더 예뻤을 텐데….”
“그러게. 벚꽃이 거의 다 져서 아쉽다.”
하양은 꽃잎이 거의 떨어진 벚꽃나무를 아쉬운 눈치로 올려다보았다.
서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입가에 소프트크림을 묻힌 것도 모르고 가만히 서 있었다.
“야, 진서나.” “어? 왜? …뭐야.”
“어린애도 아니고 입에 아이스크림이나 묻히고 다니냐?”
“…고마워.”
은혁이 멍하니 벚꽃나무를 올려다보던 서나의 입가를 휴지로 훔쳤다.
불쑥 들어온 손길에 깜짝 놀란 서나가 삼각 귀를 쫑긋거렸다.
그녀가 당황하든 말든 은혁은 손을 멈추지 않았다.
“너희 어린애 맞아. 최은혁 네가 유치원에서 애들한테 행패나 부리고 다니던 모습이 엊그제 같구만….”
“그치. 은혁이가 어리기는 하지.” “정하양 너도 마찬가지야. 은혁이한테 리본 빼앗겼다고 엉엉 울던 모습이 엊그제 같은데 뭘.” “치이. 은하 너는 어떻고.”
“내가 너희보다 얼마나 많이 살았는지 알면 놀…이것 좀 가지고 있어봐.” “어? 어어?”
은하는 먹고 있던 소프트아이스크림을 하양에게 건넸다.
양손에 아이스크림을 쥔 하양이 어리둥절해했다.
“너도 참 칠칠치 못하게….”
은하는 무릎을 꿇었다.
운동화 끈이 풀려 있었다.
하양은 신발 끈을 묶는데 서툴렀다. 평소에는 그녀의 아버지나 어머니가 묶어준 신발을 신고 다니고는 했다.
그러다 신발 끈이 풀렸다가는, 은하나 서나에게 끈을 묶어달라고 부탁했다.
거의 습관이 된 은하는 하양의 신발 끈이 풀려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 무릎을 꿇은 것이다.
“…고마워.”
“너는 몇 살이 돼야 혼자 묶고 다닐래?”
“…우리 엄마가 말했는데, 신발 끈 묶을 줄 몰라도 사는데 아무런 지장 없대.”
“그게 재벌 마인드야? 신발 끈 묶어주는 사람이라도 고용해서?”
“엄마가 신발 끈 묶어주는 사람 만나면 된다던데? 그래서 우리 엄마는 아빠한테 묶어달라고 하잖아.”
“그런 사람 찾기도 힘들겠다.”
“글쎄…, 그렇게 힘들진 않을 것 같은데….”
“다음부터는 혼자 묶어.”
“치이.”
은하는 볼을 부풀리는 하양에게서 소프트아이스크림을 받았다.
아이스크림이 얼마 남지 않았다.
흘러내리는 소프트크림을 한 입에 삼켰다.
“노은하!”
“왜?”
은하는 입 안에 집어넣은 아이스크림을 음미하며 답했다.
저만치 떨어진 거리에서 민지가 자신의 신발을 가리키고 있었다.
“나도!”
“너는 네가 묶을 수 있잖아.” “손에 아이스크림이 있는데 어떡하라고!”
“그럼 그거 나한테 줘. 내가 대신 먹어줄게.”
“치사하네 진짜…. 됐어!”
씩씩거린 민지가 조심스럽게 몸을 굽혔다.
소프트아이스크림을 떨어뜨리지 않고 신발 끈을 묶으려 했다.
“…아…!”
약지와 소지로 콘을 잡고 끈을 묶으려던 그녀는 짧은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손가락으로 지탱하지 못한 아이스크림이 지면에 떨어진 것이다.
“…오늘따라 왜 이리 우울하지.”
다시 침울해진 민지.
고개를 푹 숙인 그녀는 끈을 잡은 채로 한숨을 쉬었다.
“야, 김민지 쟤 또 저러는데…?” “그러게. 은하가 잘못했네.”
“댕댕아 너는 왜 나한테 시비 거는 거야?” “은하가 잘못했네, 잘못했어.”
서나가 손가락에 묻은 아이스크림을 핥으며 타박했다.
은혁과 하양도 은하를 쳐다보고 있었다.
어떻게 좀 해보라는 눈치였다.
“…왜 나한테 그래.”
은하가 눈살을 찌푸리며 항의했다.
친구들은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그래, 내가 졌다, 졌어.
두 손을 드는 시늉을 하는 은하.
어쩔 수 없이 침울해진 민지를 달래기로 했다.
그가 한숨만 푹푹 쉬며 바닥에 주저앉은 그녀에게 다가가려 했을 때였다.
“─무슨 일이니?”
석조전 방면에서 내려오던 여성이 할로윈에나 쓸 법한 모자 끝을 올리며 물었다.
저 사람은….
챙이 넓은 모자를 쓴 여성이 무릎을 굽혔다.
길고 가느다란 금발이 무릎 위로 흘러내렸다.
“아이스크림이 떨어져서 그러는 거니?”
“…네.”
“그렇구나.”
민지가 시무룩하게 답했다.
치맛단을 정리한 여성은 모자 아래로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푸른 시선이 민지를 바라보다, 이윽고 콘만 남은 아이스크림으로 이동했다.
“…오랜만에 보네. 저 사람은 이 시기에도 하나도 변한 게 없구나.” “누군지 알아?”
“…어.”
은하는 커다란 보석을 옭아맨 지팡이로 살며시 바닥을 짚은 여성을 바라보았다.
그녀를 모를 리가 없었다.
“…어? 내 아이스크림이….”
“자, 이제 괜찮지?”
민지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정신을 차렸을 때였다.
여성은 땅에 떨어지기 직전의 형태를 간직한 소프트크림을 손에 들고 있었다.
그녀가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양 콘을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또 떨어뜨리면 안 돼.”
부드러운 인상을 지닌 여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람에 날아가려는 모자 끝을 붙잡은 그녀의 머리칼이 꽃잎과 함께 나부꼈다.
“…대장, 내가 지금 뭘 본 거야? 저것도 마법이야?”
“지금 시간을 되돌린 거야?” “아니.”
새까만 모자에 대비되는 금발.
전신을 어두운 색조로 감싼 원피스를 입은 그녀는 흡사 마녀를 연상케 했다.
“떨어지기 직전의 상태로 되돌렸을 뿐이야.”
되돌렸다고 말하기에는 조금 어폐가 있지만.
여성은 시간을 되돌린 것이 아니다.
실제로 땅에 떨어진 아이스크림콘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녀는 단지 세상의 섭리에 간섭하여 아이스크림이 떨어지기 직전의 상태를 재연했을 뿐.
이미 지나간 기억을 끄집어낸 것에 불과하다.
저 사람밖에 못하는 마법이지.
마나를 통해 시간의 흐름을 읽는 그녀만이 가능한 기억 복원 마법이었다.
“저 사람도 플레이어니?”
“…마녀야.”
은하는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그녀는 플레이어였다.
다만 그녀는 자신을 마녀라고 소개했다.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니다.
그녀의 이명에는 마녀라는 단어가 들어 있으니까.
“…언니는 누구에요?”
“글쎄…, 나는 누굴까?”
장난스럽게 모자를 기울이는 여성.
그녀는 이름이 없었다.
사람들은 이름이 없는 마녀를 라 불렀다.
그리고 기억을 재연시킨다는 의미에서 프리시스 메모리라고.
프리시스 메모리.
그녀가 바로 방연지의 자리를 대신하는 십이좌이자, 후에 백련의 스승이 되는 사람이었다.
리라이프 플레이어 1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