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life Player RAW novel - Chapter 167
프리시스 메모리는 한국인이 아니다.
허리까지 흘러내리는 금발과 푸른 눈, 유독 흰 피부는 그녀가 이 나라 태생이 아님을 의미했다.
그녀가 십이좌로서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했던 이유는 바로 여기에서 기인한다.
혹자는 정체도 알 수 없는 외국인에게 열두 개의 좌 중 하나를 내주는 일은 매국과도 같은 일이라며 비난했고, 혹자는 그녀의 국적과 신분을 철저히 규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녀만이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의 유용성을 무시할 수 없었다.
마치 시간을 되돌리는 것과 같은 마법을 구사하는 그녀를 타국으로 추방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결국 그녀는 십이좌이되, 그만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플레이어로 자리하게 된 것이다.
‘야, 마녀! 너희 잘할 수 있지? 너희가 저놈들 못 막으면 전선을 회룡역으로 물려야 한다고.
그랬다가는 다 끝이야. 마녀 네가 처럼 을 발현할 것도 아니면 잘 막으란 말이야! 알았어?’
안개꽃 파티는 제2차 의정부 탈환전에서 잠시 동안이기는 하더라도 그녀와 임무를 수행한 적이 있었다.
그때 촉새는 그녀를 비웃고 깔보다 돌아가던 곽우혁을 주시하다 물었다.
이렇게 당하고만 살고 싶냐고.
그녀는 자신의 일처럼 화를 내는 그를 보고도 담담했다.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칼을 넘기며 차분한 어조로 답했을 뿐이다.
‘그래도 상관없어요. 저한테는 익숙한 일인걸요.’
그때 마녀는 말했다.
내게는 있을 곳만 있으면 된다고.
나를 필요해주기만 하면 된다고.
‘왜지?’
은하는 들이닥치기 시작한 몬스터들에게 검을 겨누며 물었다.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고작 그런 이유로 살아가는 그녀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영원과도 같은 시간을 살아가는 저에게는 무의미한 기억에 불과하니까요.’
스스로도 얼마나 오랜 시간을 보냈는지 모르겠다며 자조하던 마녀.
‘그래서 가끔은 남겨보고 싶어요.’
온몸에 마나를 휘감고 발걸음을 떼기 시작한 그녀.
‘방대한 시간대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순간을.
나는 여기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는, 아주 소중한 추억을요.’
프리시스 메모리.
그녀는 와 달리 스스로를 마녀라고 자칭하던 사람이었다.
마법에 조예가 깊었던 그녀는 하백련이 존경하는 스승이자, 2대 선녀의 자리에 오르는 그녀를 지탱하는 힘이 되어주었다.
언젠가 말도 없이 모습을 감추기 전까지.
지금 이 순간 존재하고 있으면서도 저 홀로 다른 시간 속에 존재하는 듯한 분위기를 자아내던 그녀는 언젠가 홀연히 사라졌다.
☆
“누나는 몇 살이에요?”
“그게 왜 궁금해?”
“어? 그냥 궁금해서….” “궁금하면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최은혁 너는 이유도 없는데 물어보니?” “아니, 뭐, 그럴 수도 있지….”
은혁은 서나가 톡 쏘아붙이자 난처해했다.
내심 억울하기도 했다.
왜 자신이 잘못한 사람처럼 서나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지.
이유가 없어도! 궁금할 수 있지!
안 그래, 대장!?
은혁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은하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물론 은하는 구원의 손길을 내밀지 않았다.
민지와 하양을 배려해서 의자 끄트머리에 엉덩이만 붙이고 앉은 마녀만 바라보았을 뿐이다.
“너희는 내가 몇 살로 보이니?”
“20대 후반!”
“저도 민지 말대로 20대 후반일 것 같아요.” “어머, 그래? 고마워.”
할로윈 때나 쓸 법한 모자를 기울인 그녀는 옆자리에 앉은 아이들에게 눈웃음을 지었다.
“은하 너는?”
“나?”
하양이 그늘 아래에서 물었다.
이름이 불린 은하는 관심 없다는 투로 대꾸했다.
“하양이 네 말이 맞겠지 뭐.” “응, 그렇지?”
플레이어 업계에 그런 말이 있다.
에게 나이를 묻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도 없다고.
그녀는 마치 시간의 흐름에서 벗어난 것처럼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회귀 전 그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녀나 지금 이 자리에서 마주하고 있는 그녀는 시간상에서 떼었다 붙여놓은 것처럼 판박이였다.
저 사람이 몇 살인지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을걸?
혹자는 말했다.
그녀는 조선시대 때부터 이 나라에 있었던 이방인이라고.
혹자는 말했다.
그녀는 16세기 유럽에서 일어난 마녀사냥을 피해 이 나라로 도망친 마녀라고.
그만큼 그녀의 나이를 논하는 일은 무의미했다.
“나도 몰라.”
“에이, 거짓말. 어떻게 자기 나이를 모를 수가 있어요?” “최은혁 조용히 해! 내가 몇 살인지 말하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는 법이야!”
민지가 은혁을 타박했다.
프리시스 메모리는 은은한 미소를 걸치기만 했다.
‘시간을 세는 건 무의미해. 내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가 가장 중요한 거니까.’
‘내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요?’
‘내가 지금 몇 살인지, 훈련을 몇 년 동안 했는지…. 자신의 존재를 시간으로 규정하려 하지 마렴.’
‘…….’
‘너를 강하게 만드는 건 시간이 아니란다. 네가 어디에서 무엇을 했는지 쌓아올린 기억이지.
그중에서 너에게 소중한 가치를 지니는 기억은 추억이 되고, 추억은 네 존재의 일부가 될 거란다.’
은하는 그녀가 백련에게 마법을 가르치던 때를 떠올렸다.
그녀의 수업은 모호했다.
특히 시간으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때 그는 자신의 존재를 몬스터에게 증오를 품은 시간으로 증명하고 있었으니까.
유정이가 얼마나 답답했겠어.
트라우마에 틀어박혀 있던 나랑 걔네들 데리고 다니느라.
두 번째 삶에서야 알 수 있었다.
지금까지 엮어온 추억이 하나가 되어 자신을 이루고 있는 것이라고.
“그런데 언니는 여기 혼자 온 거예요?”
민지가 머리를 반쯤 먹고 있던 마녀 모자를 두 손으로 들어 올리며 물었다.
모자를 돌려받은 프리시스 메모리는 함녕전을 올려다보았다.
“혼자 왔어. 마나관리기구에 가는 길에 시간이 남아서 오랜만에 덕수궁 좀 둘러보다 가려고….”
“여기 처음 온 게 아니에요?”
“가장 마지막으로 왔을 때가…, 개똥이가 눈을 감았을 때구나.”
“네? 그게 언제에요?”
무언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하양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프리시스 메모리는 말없이 함녕전을 바라보기만 했다.
하양아, 저 사람한테 과거를 물어봤자 소용없어.
백련은 저 사람한테 파리 시민들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고 들은 뒤로 과거를 묻는 걸 포기했다고.
은하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그녀의 과거는 모르는 게 나았다.
괜히 물었다가 머리만 아파진다.
그는 저 혼자 세상에 빠진 하양을 내버려두고, 마나관리기구 청사가 보이는 방향을 가리켰다.
“저기 가는 거죠?”
“맞아. 이제 슬슬 가야겠다.”
마나관리기구 청사는 덕수궁 바로 옆에 있었다.
은하는 그녀가 조금 전 답했던 말을 듣고서야 오늘이 제2기 십이좌를 선발하는 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늦지 않게 가세요.”
프리시스 메모리는 제2기 십이좌로 선발되는 플레이어다.
만에 하나라도 그녀가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했다가는 백련을 지지하는 힘 하나를 잃을 수 있었다.
당신은 꼭 십이좌가 되어야 하는 사람이니까.
제2기 십이좌로 선발되는 지용현이나 유수진, 도완준은 크게 알 바가 아니다.
지용현이야 제3기 십이좌가 될 류연화에게 자리를 넘겨주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와 는 다르다.
두 사람은 이번 생에도 십이좌가 되어야 했다.
“이제 가야겠다. 얘들아, 안녕.”
“”””안녕히 가세요!!!!””””
프리시스 메모리는 헤어지는 순간까지 아이들에게 이름을 묻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흘려보내는 시간 중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은하는 아이들처럼 손을 흔들며 그녀를 보낼 생각이었는데─.
“─너는 이름이 뭐니? 어쩐지…, 언젠가 또 만날 것 같은 기분이야.”
“…노은하에요.”
은하는 순간 멈칫했다.
가 자신의 정체를 꿰뚫어본 것은 아닌지 생각했다.
기우에 불과했지만.
“…은하, 노은하. 그래, 언제 또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녀는 은하의 이름을 읊조리고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은하는 멀어지는 그녀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곽우혁 그 새끼가 될 일은 없겠지.
제2기 십이좌로 선발되는 플레이어 중에는 주의를 요하는 이가 한 명 있었다.
곽우혁.
일전에 임가을에게 말하기도 했고, 신서영에게도 말해놓았으니 그가 십이좌가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이번 생에는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가리라.
☆
마나관리기구 청사 대강당.
선녀 임가을은 무대 위로 올라온 플레이어들의 기예를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다섯 명의 십이좌들은 좌우로 그녀를 지키는 형태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윤성진은 오늘도 청사 최상층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스탠드 전면부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마나관리기구의 고위관료 외 정계에서 영향력을 지닌 관료들이었다.
“…용현이가 나왔구만.”
노인은 한쪽이 축 늘어진 소매를 펄럭이며 껄껄 웃었다.
남궁
성운.
요양을 위해 청주로 내려갔던 노인은 십이좌로서 마지막 역할을 다하기 위해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만이 아니었다.
신서영 역시 후보자들을 평가하고 있었다.
“다음은…, 템페스트클랜이네요.”
신서영은 아카데미를 졸업한 지 1년밖에 되지 않은 스나이퍼를 확인하고 눈길을 돌렸다.
맞은편 스탠드에 앉아 있던 템페스트 클랜로드 강예희와 눈이 마주쳤다.
강예희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신서영도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무대 위로 올라온 스나이퍼는 손지희의 자리를 대신할 후보 중 한 명이었다.
“저거, 저거…, 저거 봐라? 이 상황에서 하품을 하네?”
“꼭 당신 같은 사람이네요.”
강현철이 헤드밴드형 청력보호구를 쓴 여성을 가리키며 키득거렸다.
한쪽 겨드랑이로 자신보다 커다란 라이플을 끼고 있던 여성은 졸린 눈을 비비며 하품을 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21살밖에 안 됐는데 십이좌 후보라니….”
“박혜림 플레이어가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요?”
“하하하…, 그러네요.”
임가을이 생긋 미소를 지으며 강현철과 박혜림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박혜림은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그녀나 강현철이나 이도진이나 20대 초반에 십이좌가 된 유형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두 사람보다 한 살 어리기도 했다.
22세의 나이로 최연소 십이좌라고 불렸던 사람이 바로 그녀였다.
세간에서는 라고 불리지만.
“나이가 무슨 상관이야? 실력이 중요한 거지.”
백서진이 어깨를 으쓱였다.
십이좌들은 문준과 남궁성운과 함께 을 경험한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좌중은 템페스트클랜에서 내보낸 유수진의 능력을 지켜보았다.
처음에는 시큰둥한 표정을 짓고 있던 사람들의 얼굴에 놀라움이 스쳐 지나갔다.
“…다행이네.”
신서영은 총구에서 연기를 뿜는 라이플을 정리하는 스나이퍼를 보고 안도했다.
템페스트클랜은 신명환을 잃고도 완전히 몰락하지 않았다.
강예희는 클랜로드로서의 면모를 갖춰나가고 있었고, 신명환의 유수진이 두각을 드러내고 있었다.
더 이상 그녀가 템페스트클랜을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명왕클랜로드네요.”
유수진이 무대를 내려가고, 다음 사람이 올라왔다.
이도진을 비롯해 스탠드에 앉아 있던 플레이어들이 제각기 자세를 바로 했다.
신명환의 자리를 대신하는 후보로 올라온 도완준.
현재 제니스 클랜로드 지용현과 함께 가장 유력시되는 십이좌 후보였다.
“다음은….”
임가을은 환상을 풀어헤친 도완준에게서 눈을 떼며 다음 후보를 찾았다.
레인저와 스나이퍼 부문은 모두 끝이 났다.
다음 부문은 방연지를 대신하는 서포터 부문이었다.
“…외국인?”
관료들 중 몇몇이 눈살을 찌푸렸다.
임가을과 신서영은 그들의 반응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긴 치마폭을 움직이며 나아가는 여성을 주시했다.
프리시스 메모리.
“직접 보는 건 처음이네.”
신서영은 소문으로만 들었던 마법이 눈앞에서 일어나는 모습을 보고 감탄했다.
한때 세상의 섭리를 들여다보았던 그녀조차 결코 구사할 수 없는 마법이었다.
를 탐탁지 않게 여기던 관료들조차 그녀가 보여주는 마법의 유용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괜찮네, 픽.”
임가을은 스탠드석으로 시선도 주지 않고 대강당을 나서는 마녀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좌중은 다른 서포터들이 뒤이어 선보이는 마법을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마녀가 발현한 마법이 뇌리에 강하게 남았다.
그리하여 서포터 부문이 마무리되었다.
“이제 네비게이터 부문 하나만 남은 건가.”
누군가 중얼거렸다.
선발심사도 이제 마지막을 남겨두고 있었다.
오건후를 대신할 자리였다. 원래라면 텔레파시스트를 선발해야 했지만, 네비게이터를 선발하기로 했다.
텔레파시스트로서 두각을 드러내는 플레이어도 없던 데다, 플레이어 업계에서 아인의 영향력이 그리 세지 않았기 때문이다.
“언제 나오려나….”
신서영은 무대에 오르는 네비게이터들 중에서 단 한 사람을 찾고 있었다.
와 함께 후보선상에 올라온 마녀를.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그녀가 기다리던 마녀가 올라오는 일은 없었다.
“송윤서 플레이어는?”
무대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임가을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마나관리기구 관료에게 따졌다.
질문을 받은 관료가 무슨 일인지 알아보러 떠났다.
잠시 후, 관료는 당황한 얼굴을 감추지 못하고 돌아왔다.
“저…, 선녀님….” “왜? 뭐래요?”
“이걸….”
관료가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편지를 내밀었다.
임가을은 편지를 홱 잡아챘다.
그녀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신서영도 시선을 슬쩍 편지로 옮겼다.
“”…….””
두 사람은 편지에 적힌 내용을 읽고 거의 동시에 얼굴을 굳혔다.
「제가 없어도 될 것 같네요.
ヽ(〃’▽’〃)ノ
죄송하지만 사퇴하겠습니다.
─송윤서─」
☆
『…따라서 한국마나관리기구는 국가의 안녕과 인류의 수호를 위하여 다음과 같이 십이좌를 선발한다.
제니스클랜
지용현
템페스트클랜
유수진
명왕클랜
도완준
KK클랜
황산군
단군클랜
모라율
프리시스 메모리
』
리라이프 플레이어 1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