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life Player RAW novel - Chapter 181
긴 것처럼 느껴졌던 1학기가 끝이 났다.
여름방학을 맞이한 은하는 집에서 빈둥거리는 게 일과였다.
오늘도 오후 느지막하게야 일어난 그는 온종일 잠옷 바람으로 지내고 있었다.
“은하야, 메로나 먹을래?”
“나 하나만.”
“언니! 나도 줘!”
저녁을 먹고 냉장고를 뒤지는 은아 역시 잠옷 바람이었다.
다음 학기가 시작될 때까지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오히려 더했다.
느지막하게 일어나는 건 기본이고, 걸핏하면 바닥에 누워 스마트폰을 하염없이 들여다보거나, 밤이 되면 친구들과 전화하기 바빴다.
은하로서는 매일 밤마다 긴 전화를 이어나가는 누나가 신기할 따름이었다.
“은아야, 내년에 고등학생이 되는 나이이면 잠옷 차림으로 돌아다니는 건 그만 해야 하지 않을까?
은하랑 은애가 따라하잖아.”
“엄마, 고등학생이 아니라 내년에 고등 아카데미에 입학하는 거야.
그리고 이런 차림으로 돌아다니면 뭐 어때서. 엄마가 몰라서 그렇지 이게 얼마나 편하고 좋은데….”
은아는 올해로 16세에 접어들었다.
부모의 품으로부터 벗어나 조금씩 자립을 하게 되는 나이였다.
어머니에게도 아이스크림을 건넨 그녀가 입술이 삐죽 튀어나온 채로 툴툴거렸다.
“은하랑 은애도 그렇게 생각하지?”
“그치이?”
“…어…, 음….”
은애는 은아가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려준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서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 은하는 바로 옆에서 빨래를 개고 있던 어머니의 눈치를 살펴야 했다.
“은하도 그렇게 생각하니?” “어어….”
“은하야?”
“…….”
멍하니 있다 어머니와 누나 사이에 끼이고 말았다.
누구의 편을 들어주더라도 무사히 살아남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빠, 나 좀 살려줘…!
…은하야, 미안하다.
은하는 아버지에게 구원의 눈길을 보냈지만, 아버지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고개를 돌려버렸다.
아버지에게 버림받았다.
“은하야, 이리 와.”
그때, 은아가 비장의 수를 꺼냈다.
소파에 누워 있던 그녀가 바닥으로 내려와서 긴 다리를 뻗은 것이다. 메로나를 쥐지 않은 손으로 반바지 아래로 훤히 드러나는 다리를 톡톡 때렸다.
“오늘은 누나 다리 안 벨 거야?”
“…미안. 내가 엄마 엄청 사랑하는 거 알지?”
은하는 굳게 결심했다.
어머니에게 사랑을 고백한 은하는 은아의 허벅지 위로 머리를 베었다.
보드레한 살결이 누그러지는 마음이 들게 하고, 서늘한 기운이 한밤의 열기를 식히는 기분이었다.
얼굴을 옆으로 기운 채, 메로나를 먹었다.
“은아 베개는 은하가 차지했으니, 마누라 베개는 내가 차지…어어…, 당신?”
“당신은 수염이 아파서 싫어요.”
“맞아, 아빠 수염은 따가워.”
“아빠 수염 따가워!”
어머니가 삐졌다.
그동안 잠자코 있던 아버지는 어머니의 기분을 풀어주려다가 집안에 있던 여자들로부터 봉변을 맞았다.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어머니와 은하를 두고 다투던 은아마저 아버지를 꼬집었다.
은애는 특히나 심했다.
매일 아침마다 아버지의 턱수염에 당하고 살았던 여동생이 격하게 동의한 것이다.
“하…, 마누라랑 자식들 키워봤자 소용없다더니…. 내가 수염 때문에 이런 소리를 들어야 해?”
아버지가 한숨을 푹푹 쉬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은아와 어머니는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딱 달라붙어 스마트폰을 만지고 있었다.
“엄마, 손으로 여기를 가려야 해.” “여기?” “두통이 온 것처럼!”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나는 늘 하던 대로 오리입술로 찍을래.”
“나도! 나도 사진 찍어줘어~”
은애를 포함한 세 사람은 뭐가 그리 불만인지 똑같은 포즈로 사진을 몇 장이나 찍어댔다.
셀카를 찍는 데에는 관심이 없었던 은하는 한쪽 팔로 은아의 허벅지를 끌어안고 눈을 붙였다.
그사이 은아가 남몰래 그의 사진을 찍었다.
가족들이 그런 식으로 시간을 보낼 때였다.
“은하 엄마! 나 민지 엄마야! 문 좀 열어줘!”
별안간 현관문을 쾅쾅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소리를 듣고 화들짝 놀란 가족들이 거실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지?”
밖에서 부르는 소리가 예사롭지 않았다.
밤늦은 시간임을 확인한 아버지가 눈살을 찌푸렸다.
“제가 나가볼게요. 민지 엄마한테 무슨 큰일이라도 난 것 같아요.”
“나도 같이 나가.”
자리에서 일어난 부모님.
복도에 불을 켠 두 사람이 현관문으로 걸어 나갔다.
민지 어머니는 문을 열자마자 안쪽으로 허겁지겁 들어왔다.
“왜 그러세요?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예요?” “은하 엄마, 은하 아빠. 밤늦은 시간에 불쑥 찾아와서 미안해요. 다름이 아니라…, 여기 혹시 우리 민지 있어?”
민지 어머니가 불안해하는 기색으로 집안을 둘러보았다.
아버지로부터 없다는 말을 듣고는 얼굴에 실망감이 스쳐지나갔다.
그러다 무슨 일인지 파악하러 복도로 고개를 내밀고 있던 은하와 눈이 마주쳤다.
“은하야! 혹시 민지한테 연락 온 거 없니?”
“연락이요? 저는 그런 거 하나도 못 받았는데요.”
“그, 그럼…. 요즘 민지가 어딘가 이상해 보이지 않았니? 어디로 떠나고 싶다고 하거나 그런….”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그걸 왜 나한테 물어보는 거야?
나보다 아주머니가 더 잘 알아야 하는 거 아닌가.
은하는 미간을 모았다.
민지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은 분명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민지 어머니가 이런 식으로 느닷없이 찾아와서 물을 이유가 없었다.
“…아뇨, 그런 건 없었는데요. 민지 걔, 평소랑 다름없었어요.”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하고 말했다.
최근 민지에게서 별달리 이상한 점을 찾을 수 없었다.
때때로 무언가 생각에 잠겨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그녀는 늘 그랬다.
친구들 중에서 미래를 가장 진지하게 생각하는 아이가 바로 민지였다.
그녀가 갑자기 말없이 생각에 빠지는 일이야 익숙했다.
그녀에게서 이상한 점이라고는 찾을 수 없었다.
“얘가 그럼 어디 간 거야….”
민지 어머니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가슴 앞에 모은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대체 무슨 일이에요? 설마 민지가 말도 없이 사라진 거예요?”
이쯤이면 누구나 추론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어머니는 그녀의 어깨를 껴안으며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물었다.
한참을 떨고 있던 민지 어머니는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얘가…, 나랑 싸우고 나간 뒤에 돌아오지 않아.”
☆
은하는 밤하늘을 밝히는 달이다.
바로 곁에 존재하는 것 같으면서도 알고 보면 지구에서부터 38만Km나 멀리 떨어져 있는 달과 같은 존재.
민지는 자신과 그 사이에는 닿으려 해도 결단코 닿을 수 없는 거리감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른 아이들은 어렴풋이 자각하고 있을지 모른다고 하더라도, 어렸을 적부터 소꿉친구인 자신은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노은하 걔는 지금은 덜하지만…, 이전에는 다른 사람에게는 관심도 보이지 않았으니까.
어렸을 적에는 은하가 무섭다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자신과 같은 나이이면서도 행동이 어른스럽고, 세상에서 동 떨어진 것 같은 분위기를 자아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대할 때에는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던 얼굴이 가족들을 대할 때마다 웃음을 보이는 모습에 소름이 끼쳤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단지 기억은 그의 미소가 어딘가 부자연스러웠다고 전하고 있었다.
“참…, 알 수 없는 애야.”
그럼에도 그녀는 그의 소꿉친구라는 자리를 버리지 않았다.
어떠한 일에도 무관심해하던 그가 자신에게 흥미를 가졌기 때문이다.
‘야, 먹민지. 너 또 먹냐?’
‘먹민지라고 부르지 말라니까!’
이유는 모르겠다.
정말 이유를 모르겠다.
다만 그는 자신을 바라볼 때에는 무관심에 흥미 한 스푼을 집어넣은 시선을 하고 있었다.
타인에 관심이 없어 보일 것 같던 그가 자신에게 관심을 보였다는 사실은 굉장히 오묘한 감각이었다.
마치 자신은 특별하다고 인정받는 감각.
그리고 그를 알아 가면 알아갈수록 은하가 얼마나 특별한 사람인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달이 참 밝네.”
민지는 공원 미끄럼틀 위에 앉아 별빛을 두른 달을 올려다보았다.
은하는 달이었다.
밤하늘을 은은하게 비추는.
친구들은 별이었다.
달빛에 감싸여 제 빛을 내는.
은하의 관심을 가져간 이들이었다.
자신을 포함해서.
“뭐야. 오늘따라 별이 많네.”
달빛에 싸인 별들을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세다 포기했다.
밤하늘이 이리도 맑았던가 싶었다.
“아니면 오늘은 다른 때보다 더 어두운 건가?”
이래서는 어느 별이 어떤 식으로 빛을 발하고 있는지 구분하기 쉽지 않았다.
마치 별빛이 별빛에 먹힌 것 같다.
“…….”
누군가에게 특별한 사람으로 여겨지는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자신의 특별함을 보다 갈고닦아서 보석처럼 화려하고 아름다운 빛을 발하고 싶어진다.
별빛 중에서 가장 빛나는 일등성이 되고 싶고, 나아가 밤하늘을 밝히는 달이 되고 싶어진다.
그렇다.
은하처럼 되고 싶다.
그와 나란히 서고 싶다.
이 감정을 과연 뭐라 설명하면 좋을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평범해.”
민지는 다리를 모으며 중얼거렸다.
평범하다.
한때에는 달에게 특별한 존재로서 인정받았던 별은 시간이 지나면서 새로이 나타나는 별들에게 입지를 빼앗기고 있었다.
그의 매력을 알게 된 사람들이 모일수록 자신이라는 존재는 보잘 것 없을 정도로 평범한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거짓말. 은하랑 애들이 서나랑 노니까, 너도 따라하는 건 아니고?’
언젠가 어머니는 그렇게 말했다.
그때 민지는 반사적으로 대답하면서도 자신의 대답에 확신할 수가 없었다.
‘김민지. 그만 울고, 소리만 치지 말고 엄마 좀 봐. 정말이야? 애들이 서나랑 노니까 네가 어쩔 수 없이 같이 노는 건 아니고?’
빛나는 별이 되고 싶다.
그냥 빛나는 별이 아니라 달빛에 감싸이는 별이.
평범한 사람들과 달리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달빛으로부터 떨어지지 않으려고 황새를 따라가려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부탁이야! 이름 좀 적어줘!’
이번 일도 그랬다.
서나를 도운 이유는 친구에 대한 미안함도 있었지만,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어서는 그들 곁에 서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강박관념이 없지 않아 있었다.
그리고 절감했다.
이러다 언젠가 그들의 곁에 서지 못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다른 별보다 밝게 빛날 수 있는 힘을 가져야 했다.
‘엄마. 나 중학교에는 가지 않고, 플레이어 아카데미에 들어가고 싶어.’
‘미쳤니!? 네가 거기를 왜 가려 그래! 엄마가 진학률이 좋은 중학교를 알아보고 있는 중이니까 플레이어 아카데미 같은 소리 하지 말고 시키는 대로 해!’
플레이어가 되기로 결정한 이유는 단순히 빛나고 싶기 때문이 아니다.
부모님의 그늘로부터 달아나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다.
‘민지 너는 엄마 말만 들으면 돼. 그러면 좋은 학교 가서, 좋은 직장 들어가고, 거기서 좋은 남자 만나서, 좋은 집에서 애들 낳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야.
네가 지금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지 몰라도, 나중에 가서 엄마한테 고마워하게 될 거야. 엄마 말 들어.’
물론 부모님이 설계하는 미래는 부모님 말대로 필시 안정적인 행복을 추구할 수 있으리라.
“근데…, 진짜 내가 없는 거잖아.”
하지만 부모님이 그리는 미래는 김민지가 아니면 안 되는 미래가 아니라, 다른 누구라도 할 수 있는 미래였다.
밤하늘에 떠 있는 어떠한 별에게도 가능한 일.
그녀는 자신의 빛으로 빛나다 죽는 별처럼 마지막까지 빛나는 별이고 싶었다.
이 세상에 단순히 김민지라는 이름을 남기고 싶은 것이 아니라, 김민지라는 존재를 남기고 싶었다.
‘나는 너 플레이어가 되는 건 절대 허락 못해! 내가 어떻게 해서 키웠는데…!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는 길을 가려 그러니!’
‘엄마,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고 싶어! 나중에 후회하더라도 하지 않고 후회하는 것보다, 하고 나서 후회하고 싶어!’
‘그건 네가 진짜 후회를 안 해 봐서 그런 거야! 네가 뛰어난 플레이어가 될 수 있는 재능이라도 가지고 있으면 몰라! 근데 너는 그런 재능 같은 건 하나도 없잖아!’
오늘 집을 나온 이유도 부모님과 미래를 두고 다퉜기 때문이다.
자신과 부모님의 논쟁은 서로가 엇갈리는 일 없이 나아가는 평행선처럼 끝이 없었다.
결국 홧김에 집을 나와 버렸다.
오밤중에.
“아씨…! 모기 물렸잖아.”
공원에는 모기떼가 참 많았다.
팔을 벅벅 긁다가 모기에 물렸다는 사실을 깨달은 민지는 뒤늦게 방벽을 전개했다.
모기도 방벽을 꿰뚫지 못하리라.
“어떡하지. 계속 여기 있을 수도 없고…, 엄마 아빠가 걱정하고 있겠지….”
집으로 돌아가기는 해야 했다.
부모님도 걱정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집으로 돌아갔다가는 꼴이 우스워질 것 같았다.
부모님은 거 보라면서,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면서 무슨 놈의 플레이어냐고 뭐라 할 게 분명했다.
…엄마 아빠가 잠든 뒤에 몰래 들어가자.
방벽을 전개했는데에도 근처에서 앵앵거리는 소리가 시끄러웠다.
뒷목이 가려웠다.
손으로 긁었더니 어느새 부풀어 있었다. 방벽을 만들기 전에 생긴 것인지, 방벽을 만든 후에 생긴 것인지 모르겠다.
퍽이나 슬퍼졌다.
민지는 무릎에 머리를 파묻었다.
오늘따라 유독 밝은 밤이 지나기를 바라며─.
“─집 안 들어가고 뭐하고 있어. 어때? 집 나오면 개고생이지?”
리라이프 플레이어 1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