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life Player RAW novel - Chapter 188
해가 바뀌고 2월.
은애의 수료식이 있는 날이었다.
아직 방학 중인 은하는 어머니의 손을 붙잡고 도안유치원을 찾았다.
유치원에는 단순히 수료식에 불과할지라도 학부모들이 상당수 모여 있었다.
그중에서도 단아한 원피스를 입은 어머니는 눈에 띠는 외모를 자랑했다.
역시 우리 엄마야.
올해로 40대에 들어서는 어머니는 은아와 길을 가다 언니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동안이었다.
학부모들이 어머니가 들어서자마자 목소리를 낮춰 수군거리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은하는 괜스레 자신을 향한 칭찬이 아닌 데에도 우쭐해하며 가슴을 폈다.
“은하야.” “왜?”
“지금 은아한테 문자 왔어. 은애 수료식 하는 거 영상으로 찍어서 보내 달래.”
“누나도 참…. 응, 알았어.”
은아는 플레이어 중등아카데미 졸업식 연습으로 참석하지 못했다.
그래서 은애의 수료식을 보고 싶어 하던 눈치였다.
전날 밤에도 은애의 유치원 생활이 보고 싶다고 투덜거릴 정도였으니.
지금도 얼마나 아쉬워하고 있을지 눈에 선했다.
“형아. 누나 어딨어?”
“늘푸른솔반에 있지. 은애 어디 있을지 찾아볼래?”
“응!”
은애의 수료식에 오지 못한 은아와 아버지를 대신해서 참석한 이들은 줄리에타 일가였다.
대여섯 살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무럭무럭 자란 어베니어가 신발을 아무 짝에나 벗어던졌다.
또래 아이들이 보이느라 제법 신난 눈치였다.
“어디 있지? 저기다!”
“어베니어! 엄마랑 같이 가야지!”
복도 좌우를 두리번거리다 계단을 가리키는 어베니어.
어베니어가 깔깔거리며 계단을 뛰어 올라가자, 신발을 정리하고 있던 줄리에타가 황급히 그 뒤를 따랐다.
줄리에타는 갑작스레 등장한 외국인을 보고 신기해하는 학부모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어베니어를 쫓았다.
“줄리에타 누나도 신났네요.”
“은애 수료식이니까. 또 내년이면 어베니어도 여기 다닐 테니…, 유치원을 둘러보고 싶은 마음이 있기도 할 테고.”
브루노가 계단 위로 사라진 아내와 아들을 바라보며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외국인을 신기해하던 학부모들은 브루노가 들어서자마자 덩치에 압도 되어 고개를 돌려버렸다.
무례하기 짝이 없다는 생각이 드는 시선이었다.
한껏 그들을 흘겨본 은하는 늘푸른솔반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이제 곧 수료식이 시작될 예정이오니, 학부모님들께서는 자리에 앉아주시기 바랍니다.]사람들로 북적이는 교실에서 은애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수료식을 위해 임시적으로 제작된 간이 무대 위.
키가 비슷한 아이들이 유치원복을 입고 옹기종기 모여 있는 가운데, 은애만 유독 빛나고 있었다.
어둡고 칙칙한 세상에서 은애 홀로 색에 물든 것처럼.
오빠!
눈이 마주쳤다.
미예와 대화를 나누던 그녀는 그를 발견하고 밝은 미소를 터뜨렸다.
은하는 절로 올라가려는 입꼬리에 힘을 주며, 그녀에게 손을 흔들었다.
“브루노 아저씨.”
“음.”
“잠깐 어디 좀 다녀올게요.”
“내 도움은 필요 없나?”
“괜찮아요. 브루노 아저씨는 혹시 모르니까 은애랑 미예 좀 잘 지켜봐 주세요.”
오늘은 선기준이 제 딸을 죽이는 날이다.
은하와 브루노는 학부모들을 따라 박수를 치는 채로 입을 움직였다.
“알았다.”
수료식이 시작되었다.
은하는 슬그머니 뒤로 물러났다.
“수료식이 끝나기 전까지는 돌아올게요.”
“무운을 비마.”
플레이어 디바이스는 갤럭시에서 제작된 베레타였다.
브루노에게서 은밀히 디바이스를 건네받은 은하는 그대로 교실을 나섰다.
감지망을 전개했다.
유독 심상치 않은 반응을 보이는 마나가 하나 있었다.
편재가 진행 중이었다.
은하는 기운이 느껴지는 대로 냅다 달렸다.
‘내 손으로 죽였어. 내 딸을, 미예를 내 손으로 목 졸라 죽였다고!
너희들 같으면 그걸 잊을 수 있을 것 같아!?’
복도를 달리면서 떠오르는 소리는 회귀 전, 선기준이 술에 취해 잠이 들기 직전에 꺼내던 넋두리였다.
‘나는 못 잊어. 그 조그마한 아이가 나를 올려다본 채 숨을 꺽꺽거리며 발버둥 치던 걸.
내 손에서 점점 그 아이의 생명이 사라져가는 걸.
마지막에는 몸이 축 늘어지고, 눈물을 흘리는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던 순간을 말이야.’
선기준.
몬스터에게 감염된 딸을 제 손으로 죽인 그는 평생을 죄책감에 휩싸여 살았다.
술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제 딸을 죽인 기억을 잊을 수가 없다던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술에 취하고 나서야 그때 느낀 감정을 절절히 토로했다.
‘야, 노은하. 내가 그것보다 더 괴로운 게 뭔지 아냐?’
안다.
은하는 지금도 그가 눈물 콧물을 흘리며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괴로운 건, 몬스터에게 감염된 내 딸이 나를 죽이려 했을 때…! 그때 내가 간절하게 살고 싶다고 빌었다는 거라고!
내 딸은 몬스터가 되지 않으려고 폭주를 억누르려 하고 있었는데!
아빠라는 놈이 제 목숨부터 챙기려 했다는 거다!’
하나뿐인 딸을 잃은 선기준이 그럼에도 죽지 못해 살았던 이유는 그것이었다.
‘나라는 새끼는 내 손 안에서 숨이 끊어져가는 딸아이를 내려다보면서, 가슴 한편으로는 나는 죽지 않아도 된다고 안도했다고.
웃기지? 병신 같지?
뭐 이런 새끼가 다 있나 싶지?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제 아이를 죽인 새끼가 왜 사나.
그냥 죽어버려야지.
근데 못하겠더라.
죽기가 너무 무섭더라고!’
죽음이 두려웠으니까.
선기준은 스스로 제 목숨을 끊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런 자신이 한심해서 허구한 날 술이나 쳐마셨다.
딸아이에 대한 죄책감과 자신에 대한 증오가 곪을 대로 곪을 때까지.
‘사람들이 조롱하는 대로, 나라는 새끼는 가 따로 없지.
나는 야. 라고!
그러니 은하야…, 부탁한다.’
술에 전 선기준은 마지막에는 거칠고 투박한 손으로, 제 딸을 죽인 손으로 은하의 손을 부여잡았다.
마치 구명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나 좀 죽게 해줘라.’
웃기지도 않는 소리였다.
구명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는 소리가 결국에는 자신을 죽게 해달라는 소리였으니.
죽음이 무서워 인생을 패배자처럼 살았던 그는 가장 비참하고 잔혹한 죽음을 당하기 위해 방패를 들었다.
‘…미…예야─.’
결국 끝자락.
선기준은 공략대에게 길을 열어주는 과정에서 목숨을 잃었다.
달려드는 몬스터들에게 사지를 물어뜯기면서도 방패를 들고 서 있던 그는 죽는 순간에도 딸아이에 대한 죄책감을 벗어던지지 못했다.
‘─아빠가 미안해.’
과연 선기준은 죽은 뒤에야 그토록 보고 싶어 하던 딸아이를 만날 수 있었을까.
아니.
은하는 곧장 부정했다.
선기준은 죽은 다음에도 딸아이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안개꽃 파티의 단원들이 언제부터인가 입버릇처럼 달고 다니던 말이 하나 있었다.
지옥에서 보자.
죽지 못해 살았던 사람들은 자신의 죽음이 편치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애도는 없었다.
그들의 죽음은 가장 혹독하고, 비참할 것이기에.
그리고 먼저 죽은 이를 따라 죽을 결말밖에 남아 있지 않기에.
그러니 선기준은 죽음 저편에서도 그토록 사랑해하던 딸아이를 만나지 못했으리라.
그러니까─.
─이번 생에는 그렇게 둘 수 없다.
죽기 위해 살았으며, 죽지 못해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한 번으로 족하다.
감지망에 걸려든 반응이 점진적으로 몸집을 부풀리는 것을 확인하고 체내 마나를 끌어 모았다.
은하는 디바이스의 슬라이드를 당겼다.
키에에에엑
화단에서 발생한, 편재에서 태어난 제7위계 몬스터.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놈이 그저 본능에 따라 달려들었다.
은하는 망설이지 않고 녀석의 미간에 총탄을 쏘았다.
총구를 빠져나간 탄환이 일순 놈을 붙잡아 세웠다.
두 번째로 빠져나간 탄환이 녀석을 넘어뜨렸다.
키에에에 키에에에엑
은하는 배를 드러내고 쓰러진 몬스터의 위에 올라탔다.
녀석이 일어나려 몸부림을 쳐도 소용없었다.
마나가 실린 발은 무거운 추가 되어 녀석의 가슴을 짓눌렀다.
“거 참 시끄럽네. 좀 조용히 해라. 애들 수료식 하는 날에 분위기 망칠 일 있냐.”
바로 위에서 노랫소리가 들렸다.
은하는 아이들의 합창이 고조되는 순간을 노려 세 번째 탄환을 날렸다.
미간에 구멍이 난 녀석이 꾸역꾸역 숨을 쉬다가 몸부림을 멈췄다.
녀석은 그가 가슴을 짓누르던 발을 떼는 것과 동시에 잘게 나뉜 입자로 흩어져 사라졌다.
키에에에에엑!
한 놈이 더 있었다.
바닥에 떨어진 마석으로 손을 뻗으려던 그의 머리 위로 제7위계 몬스터가 떨어졌다.
스티지안 아이
날카로운 손톱을 피해 뒤로 물러난 그는 녀석과 눈을 마주치는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바닥에 착지한 녀석이 정신착란을 일으켜 바닥을 굴렀다.
“지랄 맞은 새끼…. 깜짝 놀랐잖아.
이것도 운명처럼 바꾸지 못하는 미래인가 하고─.”
녀석이 정신을 차렸다.
그때는 이미 무방비한 상태를 드러낸 뒤였다.
키에
녀석의 눈동자가 몹시 흔들렸다.
입 안에 총구가 들어 있었으니까.
“─근데 아니야.
바꾸지 못하는 건 없어.”
바꾸지 못하는 운명이 있다 해도, 이 손으로 죽여 버릴 뿐.
탄환에 마나를 실었다.
총신이 흉흉한 마나로 물들었다.
녀석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저 입을 벌린 채로 그를 바라보았다.
은하는 방아쇠를 당기는 동작에 망설임이 없었다.
1분도 걸리지 않은 시간.
독에 절은 놈이 몸을 대(大) 자로 뻗고 사라졌다.
☆
“오빠! 어디 갔다 이제 왔어!”
몸에 묻은 피는 없었다.
화장실에서 자신의 차림을 확인한 은하는 수료식이 끝난 반을 찾았다.
어머니에게 달라붙어 재잘거리던 은애가 재빨리 그를 발견했다.
황급히 디바이스를 브루노에게 던진 은하는 눈을 치켜세우며 볼을 부풀리는 여동생을 내려다보았다.
“수료식 보지 못해서 미안해. 잠깐 화장실 다녀오느라 늦었어.”
“거짓말.”
“거짓말?”
“나는 다 알아! 오빠 지금 거짓말 하고 있는 거야!”
평소라면 그가 하는 말이면 뭐든 넘어가주는 여동생이었다.
아무래도 화가 단단히 난 것처럼 보였다.
은하는 일부러 들으라는 듯이 흥 소리를 내며 고개를 젖히는 은애를 보고 난감해했다.
“맞아! 흥!”
바로 옆에서 어베니어까지 팔짱을 끼고 고개를 돌리니 그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오빠 지금 웃었어?”
“…아니야. 안 웃었어.”
“흥!”
그만 실수를 하고 말았다.
눈까지 감는 모습은 은애가 단단히 삐졌다는 증거였다.
“은하야.”
“어?” “이거 은애 줘야지.”
어머니가 옆에서 소곤거리지 않았으면 여동생의 화를 풀어주지 못했으리라.
은하는 어머니로부터 받은 꽃다발을 은애의 코앞까지 들이밀었다.
꽃향기를 맡은 은애가 눈을 떴다.
“은애야, 오빠가 은애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거 알지?”
“거….”
“이것도 거짓말이야?” “…짓말이 아니야. 오빠는 나를 참 좋아해.” “그치?” “…그치….”
“오빠 한 번만 용서해주라. 응?”
“음….”
은애의 표정이 한결 풀렸다.
여전히 고개를 젖히고 있었지만, 가늘게 뜬 눈으로 살며시 눈동자를 굴리는 모습이 이미 화가 풀렸다는 뜻이었다.
단지 쉽게 넘어갔다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하는 것일 뿐.
“은애야, 제발…. 응?”
“…한 번만이야? 한 번만 봐주는 거야. 다음에 또 그러면 나 정말 오빠 미워할 거야.”
“정말 오빠 미워할 거야?”
“…미워할 리가 없잖아! 그러니까 다음에 또 그러지 마!”
“그러지 마아!”
은애가 덥석 안겨들었다.
꽃을 든 여동생을 받은 은하는 그대로 바닥에 엎어졌다.
어베니어가 와락 달려들었으니까.
은애와 어베니어는 이 상황이 즐거운지 깔깔 웃었다.
어머니와 줄리에타가 들뜬 얼굴로 이 장면을 찍었다.
반면에 브루노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미예야! 사랑하는 내 딸! 아빠가 늦어서 미안해!”
“이놈아! 너는 금방 온다는 놈이 어떻게 제 시간에 오는 법이 없냐!” “할머니가 있으니까 괜찮아 아빠. 그러니까 아빠는 어서 일하러 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은하는 두 팔로 안기 힘든 아이들에게 눌린 채로 고개를 들었다.
어울리지 않는 정장을 입은 선기준이 숨을 헐떡이며 미예에게 사과하고 있었다.
토라진 딸아이를 달래는 선기준은 은하가 생전 한 번도 보지 못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바보 같이, 우스꽝스럽게.
그래도 나쁘지 않네.
걸핏하면 술이나 퍼마시고, 사는 의미를 찾지 못했던 얼굴보다 고개를 숙이며 쩔쩔매는 모습이 그에게 더 잘 어울렸다.
“미예야, 아빠가 우리 미예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거 알지? 한 번만 봐주면 안 될까? 응?”
“나도 아빠가 날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거 알아. 근데 이거랑 그거는 다른 거지.”
아무래도 선기준은 미예에게 잡혀 살 것 같다.
사랑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딸을 바라보고 있으니 상상이 갔다.
그러니 아저씨.
이번 생에는 잘 지키라고.
또 술에 절어 질질 짜지나 말고.
그때는 아저씨 이야기를 질리도록 들을 생각이 없으니까.
선기준의 미래는 바뀌었다.
이번 생에서 그가 사람들로부터 라며 조롱당할 일은 없다.
죽기 위해 살며, 죽지 못해 살았던 그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오빠? 왜 그래?”
“아니야. 그냥, 쓸쓸해서….”
자신이 아는 선기준은 이 세상에 없다.
그것이 다행이라 느끼면서도 못내 쓸쓸하다는 감정을 감출 수 없었다.
“괜찮아!”
은하는 미예와 행복하게 웃고 있던 선기준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은애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내가 있으니까!”
“형아! 나도!”
이전 삶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여동생이 당연하다는 것처럼 외쳤다.
“…그러네, 너희가 있으니까 쓸쓸할 틈이 없겠네.”
이전 삶에서 존재하지 않았던 만남이, 이번 삶에서 존재하는 이별을 대신한다.
추억 하나가 떨어져 나가는 자리에 새로운 추억 하나가 채워진다.
은하는 자신을 일으키는 어머니를 보고, 어베니어를 안아드는 줄리에타를 보고, 은애의 머리를 쓰다듬는 브루노를 보았다.
이번 삶에서 자신을 행복으로 이끌어주는 사람들.
이들을 만나, 이번 삶에서는 행복해지겠다고 다짐할 수 있었다.
그러니─.
“대신 아빠가 스테이크 쏠게! 콜?”
“스테이크? 콜!”
─아저씨도 행복하세요.
리라이프 플레이어 1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