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life Player RAW novel - Chapter 191
지나칠 수 없는 소리가 있다.
일상이라는 행복에 젖으려 할 때마다 산통을 깨듯 들려오는 소리.
살려줘
구해줘
도와줘
정신이 바짝 들게 하는 소리는 물속에서 머리채를 끄집어낸 것처럼 여운마저 토하게 한다.
찬물을 뒤집어쓴 감각과 참아왔던 숨을 거칠게 몰아쉬는 감각이 들면, 그곳은 일상과 동떨어진 전장이었다.
발치에는 이제 막 흘린 듯한 피가 지도를 그리며 대지를 검붉게 물들이고 있었고, 쥐었던 손을 펴면 손가락 사이사이로 걸쭉한 피가 흘러내렸다.
주위를 둘러보면 당장이라도 비명을 지를 것만 같은 시체들이 수북이 쌓여 있고, 어딘가에서 누군가 병장기를 움직이는 금속음과 몸통 제일 아래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몬스터의 울림이 들려왔다.
그것은 모두 자신이 죽음을 강요한 사람들의 시체이며, 자신을 위해 희생된 사람들의 외침이었다.
시키는 대로 했어.
원하는 대로 했어.
까르르 거리는 조롱.
그게 이 꼴이야.
모두 다 죽었어.
너만 빼고.
너를 위해.
시퍼런 칼날처럼 냉랭한 질타.
그런데 너만 혼자 살 거니?
어쩜 그렇게 이기적일 수 있어?
너만은 그래서는 안 돼.
가슴을 후벼내는 추궁.
심장을 도려내는 강요.
귀를 막고, 눈을 돌리고 싶은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저 앞을 내다보면 일상이 거기에 있었다.
저만치에서 행복을 가져다준
사람들이 걸어가고 있었다.
그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손을 뻗고 걸음을 옮긴….
이제 우리는 안중에도 없다?
우리는 안 중요해?
너만 행복해지려고?
고개를 돌리면 발목을 붙잡는 죽은 이들의 손길이.
그리고 일상을 가려버리려 하는, 죽음에서 일어난 이들.
좋아해준 우리를 도와줘
이해해준 우리를 구해줘
희생해준 우리를 살려줘
안다.
알고 있다.
죽음이 득실거리는 어둠은, 귓가를 떠나지 않고 머리를 울리는 소리는 모두 자신이 만들어낸 것이다.
이것은 죄책감이되, 채무감이다.
죽은 자들의 소리 따위가 아니다.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까.
그럼에도 자신이 만들어낸 환상을 무시하지 못하는 이유는─.
─내가 나약하니까.
필시 자신이 닥치는 대로 죽이고 죽여 대던 라는 것을 아는 동료들이라면 지옥에서 까무러칠 개소리.
그래, 개소리.
하지만 이번 삶에서는 다르다.
걷지도, 말하지도 못할 나이부터 기억을 가지고 있는 자신은 이전 삶에서는 기억도 나지 않았던 가족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어린 나이에 가족을 잃었던 그는 가족에 대한 소중함이 무엇인지를 몰랐다.
그것을 이번 삶에서 알게 되었다.
가족들의 사랑은 감정이 마모된 채 죽지 못해 살아가던 노은하를 보듬어주었다.
가족을 잃고 26년.
인생의 태반을 오로지 죽기 위해, 그러기 위해 무언가를 죽이기 위해 살아온 그에게 두 번째 삶은 너무나 달콤한 안식과도 같았다.
그렇기에 이대로 쭉 살고 싶었다.
이대로 즐기고 싶었다.
이대로 행복해지고 싶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이대로.
다만 이대로.
너는 미래를 알잖아
그런데도 노력하지 않을 거야?
왜? 어째서?
가끔 그런 소리가 들렸다.
아무것도 하지 않기를 결심한 자신을 채찍질하는 소리.
그때마다 반대로 묻고 싶었다.
왜? 어째서?
미래를 아는 게 뭐가 대단하다고?
어디 바꾸는 게 쉬울 것 같나.
말로는 누구나 다하지.
그러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내가 왜 노력해야 하는데?
회귀 전에 숱하게 고생했는데?
미래를 바꿔서 뭐하게?
성공해서 뭐하게?
그냥 살면 안 돼?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
그냥 이대로가 좋아.
평범한 게…, 제일 좋아.
살고 싶지 않은 인생이었다.
차라리 죽고 싶은 인생이었다.
그럼에도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고 꾸역꾸역 살아갔던 이유는 누군가를 희생해 살아온 인생을 헛되이 하고 싶지 않았기에.
그리고 어쩌면…, 아주 어쩌면…, 살아야 할 이유를 찾고 싶어서.
그래서 내가 나약하다는 거야.
겁쟁이가 따로 없다.
삶의 이유를 잃고 죽기를 작정했던 자신은 우습게도 마음 한편에서는 새 삶의 이유를 찾고 있었다.
절망이 가득한 길을 가기를 자처하면서도 얄팍하게도 속으로는 희망이 찾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새 삶의 이유를 찾을까 두려워했다.
가족을 잃고, 마음의 문을 닫고, 무언가를 죽이는 것으로 상실감을 채우던 자신이 중간에 멈춰버릴 것 같아서.
자신이 밟아온 죽음이 무용지물이 될 것 같아서.
이 빌어먹을 세상에 그만 희망을 품을 것 같아서.
너 되게 답답하구나?
살기 힘든 세상이었다.
숨이 막힐 것만 같던 인생이었다.
그냥 죽고 싶을 것만 같은.
거기서 삶의 의미를 새로 발견한다 한들, 힘든 세상이 펼쳐져 있으리라 생각할수록 부질없게 느껴졌다.
그래봤자 고된 인생 속에서 단비 한 모금에 불과할 것을.
살아봤자 힘들다.
그러니 죽자.
이유를 찾아서는 안 된다.
그러니 죽어야 한다.
정말? 정말로?
정말 살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어?
조롱과 비웃음이 싹 끊겼다.
익숙하고 부드러운 음성이 온갖 잡음을 떨쳐냈다.
‘꼭…, 돌아와야 해요.’
‘죽고 싶지 않아. 살고 싶어. 행복하게.’
노은하는 흑색던전 중 하나인 최심부에서 죽음을 맞이하면서 몬스터에 대한 증오를 풀었다.
악착 같이 살아왔던 인생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었으니까.
그 대신 미련이 남았다.
죽기 직전에야 깨달았을 정도로.
살고 싶다고.
죽는 순간에서야 모른 척, 일부러 눈길을 돌렸던 염원을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너희랑 행복하게 살고 싶었어.
그것은 이루어지지 못했던 과거의 염원.
이번 삶에서는 전혀 관계가 없는.
전혀 관계가 없을 것만 같았다.
이번 삶에서는 가족들과, 친구들과 행복하게 살아가기로 다짐했으니까.
그럼에도 눈에 밟혔다.
자신이 행복하다고 느낄수록, 이전 삶에서의 염원이라 치부했을 감정이 가슴 속 어딘가에서 똬리를 틀었다.
자신이 등을 돌린 사람들의 행복이 불행이라는 추가 되어 발을 끌었다.
그러면 도와주면 되잖아.
구해주면 되잖아.
챙겨주면 되잖아.
뭘 그렇게 어렵게 생각해?
그게 어려우니까, 힘드니까.
말로는 누구나 못해.
온갖 고생을 해야 하니까.
회귀 전처럼 고생만 하다 죽는 건 아닐까 해서.
다른 사람의 행복을 우선시하다, 정작 자신의 행복을 챙기지 못하지 않을까.
이기적이라면 이기적인 이야기.
체내 마나도 일반 플레이어의 평균보다 조금 나은 수준일 뿐인 자신은 누구보다 악착 같이 나아갈 수밖에 없다.
저 홀로.
묵묵히.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길을.
누구에게도 말 못하고.
그러니 이대로 조용히 살고 싶다.
이대로 평범하게 살고 싶다.
살고 싶은데….
자꾸 눈에 밟힌다.
이전 삶에서 두고 와야 했을 미련이 자꾸 눈에 아른거린다.
그리고 이번 삶에서 얻은 행복이.
알아, 나도 안다고.
어리광에 불과하다는 걸.
시간은 멈추지 않는다.
기쁠 때나, 힘들 때나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변함없이 흘러간다.
이대로 평화로이 안주하고 싶다고 생각해도, 세상은 움직인다.
세상만이 아니다.
주변 사람들도 한 걸음 나아간다.
변하는 세상에서 변하려 하지 않는 것은 자신뿐이다.
어리광을 부리고 있는 것은.
억지를 피우고 있는 것은.
그럼에도 시간은 떼를 쓸 수 있는 유예기간을 야금야금 갉아먹는다.
선택을 거부할 수 없는 때가 점점 다가온다.
‘나 이야. 대한민국 최고의 캐스터 신서영.
그런 내가 죽을 것 같아? 천만에.
나 안 죽어. 은하 네가 걱정하는 것도 무색하게, 의정부를 탈환할 거야.’
제1차 의정부 탈환전은 선택의 때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려주었다.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고 망설이고 있다가는 기껏 손에 넣은 행복을 빼앗기고 말 거라고.
이번에는 어리다는 이유로, 자신이 관여할 수 있는 미래라는 이유로 넘어갈 수 있었지만 다음에는 어떻게 될지 모를 거라고.
‘난…, 너희한테 폐를…끼칠 지도 몰라…, 언젠가, 언젠가…나를…싫어…하게 될 지…도 몰라…! 너희하고 같이 있을 자격…, 같은 게 없을지 몰라! 그래도 너희랑…!’
작년, 서나에게 일어난 사건은 선택의 때가 바로 가까이까지 다가왔음을 알려주었다.
더 이상 지체해서는 안 된다고.
저 홀로 변하지 않고 안주해 있다가는 소중히 여기는 행복을 지키지 못하게 될 거라고.
끌어안고 싶은 행복이 늘어날수록 그것을 지키기 위한 힘을 계속해서 갖추어 나가야 한다고.
분명 언젠가, 자신의 힘으로는 지키지 못하는 때가 오게 될 거라고.
그래서?
은하 너는 어떻게 할 건데?
그만 기대고 싶어지는 목소리가 재촉했다.
어떻게 하기는.
첫 번째 삶에서 흘러 보낸 인생이, 두 번째 삶에서 흘러 보내고 있는 시간이 알려주었다.
자신은 나약한 겁쟁이인 데다, 욕심이 아주 많은 사람이라고.
미련을 떨쳐내지 못할 정도로.
“─기다리게 했지?”
빼앗길 생각은 추호도 없다.
지키지 못할 일은 절대로 없다.
등을 돌릴 일은 결단코 없다.
힘들어도 꿋꿋하게.
버티기 힘들어도 악착 같이.
어떻게든 꾸역꾸역 앞으로 나아가겠다.
설령 그것이 고되고 모진 길이라 해도.
설령 그것이 저 홀로 묵묵히 걸어가야만 하는 길이라 해도.
그래도 괜찮아?
“괜찮아.”
후회하지 않을 거야?
“후회할 리 없어.”
후회할 리 없다.
결심한 순간, 가슴이 이리도 시원해졌으니까.
지키고 싶은 것들을 떠올릴수록, 이루 말할 수 없는 충만감이 차올랐으니까.
“그러니 기다려. 내가 만나러 갈 테니까.”
응, 기다릴게.
이유정이라면 그렇게 말하리라.
그 말을 끝으로 머릿속에서 울리던 소리가 사라졌다.
죽음이 도사리던 세상 역시 사라졌다.
강바람이 소리도 세상도 몰아냈다.
“오랜만이네.”
은하는 오늘 한강에 왔다.
다리 난간에 기댄 그는 드넓게 펼쳐진 강물을 바라보았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강물이 고요히 흐르고 있었다.
“세상에 나온 걸 축하해.”
그날이 왔다.
선택의 때가.
3월 7일.
오늘은 하백련이 태어나는 날이다.
자신보다 열두 살이나 어린 아이는 지금 이 시간 어딘가에서 세상으로 나왔을 것이다.
그 말은 더 이상 방관할 수 없다는 뜻이다.
머나먼 미래에 꼭두각시로 전락할 어리고 어린 선녀의 미래를.
그렇게 둘 수는 없지.
지난 삶에서 그는 하백련이 놈들의 말을 고분고분 따르고, 때로는 농락당하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했다.
누군가를 죽일 줄만 알았던 그는 정작 그녀에게 손을 뻗는 악의를 어찌할 수가 없었다.
일개 플레이어로서, 높게 치더라도 네임드 플레이어에 불과했던 그에게는 재력도, 권력도 그녀를 도울 수 있는 힘이 하나도 없었다.
기껏해야 가진 힘은 사람들에게 공포를 사는 라는 이름의 무력.
그리고 라는 이름.
그렇기에 자신은 그녀에게 양날의 칼이나 다름없었다.
“이번에는 달라.”
하지만 이번 삶에는 다르다.
그는 난간 너머로 손을 뻗으며, 무언가를 움켜쥐는 동작을 취했다.
“권력도.”
그 누구도 네 앞에서 무릎을 꿇게 만들겠다.
“재력도.”
그 누구도 너를 업신여기지 못하게 해주겠다.
“무력도.”
그 누구도 감히 너에게 대적하지 못하도록 해주겠다.
이번에는 다르다.
더 이상 살아야 할 이유에서 눈을 돌리지 않을 거니까.
행복해지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주저하지 않을 거니까.
그러기 위해─.
“─플레이어가 될 거야.”
그것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수였다.
체내 마나는 이미 회귀 전에 도달했던 수준에 이르렀다.
아니, 그것보다 조금 더 많다.
그럼에도 체내 마나는 아직도 늘어나고 있는 중이었다.
마나를 담는 그릇이 넓어졌다고 할 수 있었다.
어렸을 적부터 마나를 다뤄왔던 탓인지.
“…그래봤자 얼마 안 늘겠지만.”
상관없다.
부족한 것은 다른 것으로 메꾸면 된다.
마나를 다루는 감각은 오히려 회귀 전보다 훨씬 좋아졌다.
이름 모를 기프트도 힘이 되어 주고 있고.
“괜찮아, 그러니까.”
혼자 강해질 필요도 없고, 혼자 강해져서도 안 된다.
인간이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혼자서는 재난과 재앙에 대항하지 못한다.
무엇보다 자신이 상대해야 할 것은 이 빌어먹을 세상이다.
그러니 그만한 힘을 갖춰야 할 뿐.
할 수 있어.
못할 거 없지.
지금까지 일어났던 세상사는 모두 자신이 얄팍하게 알고 있던 역사에 지나지 않았다.
몸소 겪지 않고, 말이나 글로 어렴풋이 지나친 적이 있던.
지금부터는 다르다.
특히 자신이 플레이어 아카데미를 졸업하는 시기부터는.
몸소 겪은 일들이 찾아올 테니까.
리라이프 플레이어 192(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