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life Player RAW novel - Chapter 198
선녀 임가을의 정권이 하백련에게 이양되려 하던 과도기.
신인류를 위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국내 각지에서 활개를 치던 구마가 몰락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너희가 여기까지 왔다는 이야기는 아가레스(Agares)는 이미 이 세상에 없다는 뜻이겠구나.
바보 같은 년…. 그년이 마음만 먹었더라면 이 나라를 멸망시키는 게 이리도 어렵지 않았을 텐데….’
구마 릴리스.
서울과 인천에서 몇 번에 달하는 테러를 일으킨 후, 동대구로 내려간 그녀는 자신의 던전을 만들어 플레이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 구마가 그러지 않았겠냐마는, 편재에 휩싸여 마인으로 변모해버린 그녀는 단신으로 재난재해에 준하는 힘을 일으킬 수 있었다.
‘그런데 이거 어떡하지? 나는 벨제뷔트나 아가레스처럼 너희에게 죽어줄 의향이 없는데….
너희는 동대구로 내려올 게 아니라 내가 둥지를 빠져나왔을 때를 기다려야 했어. 그랬으면…, 거봐, 벌써 발정나기 시작한 애들이 있잖아.’
구마 벨제뷔트는 역병을 일으키고, 생물을 몬스터로 감염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구마 아가레스는 가볍게 손을 휘두른 것만으로도 주변 일대를 날려버리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구마 릴리스는 존재만으로 살아있는 모든 존재를 격정적인 정욕에 휩싸이게 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는 내 둥지야. 너희가 아무리 마나 저항력을 끌어올려도, 여기에 있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제정신을 유지하기 힘들 정도로 성욕에 허덕이게 될 거야.’
릴리스가 서울과 인천에서 일으킨 테러도 그녀의 특성과 관련되어 있었다.
그녀는 새벽백화점과 YH백화점을 비롯한 문화시설을 점거하여 그곳에 있던 사람들에게 정욕이 솟구치게 하는 마법을 전개했다.
플레이어들이 테러가 일어난 장소를 찾았을 때에는 옷을 훌러덩 벗은 사람들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잊은 채, 돼지처럼 관계를 맺고 있던 장면이었다.
그녀의 마법에 당한 이들은 최소 3일에서 최대 7일, 심한 경우에는 1달가량이나 정욕에 휩싸여 불꽃이 꺼질 때까지 욕구를 해소해야 했다.
‘뭘 그렇게 놀라고 그러니? 너희는 안 그럴 것 같아? 이게 너희 미래가 될 거야.
그러니 자리 잘 잡아두는 게 좋을 거야. 며칠이나 허리를 흔들어야 할 텐데, 이왕이면 무릎이 아프지 않는 장소를 잡아두는 게 좋잖니?’
살아남은 사람들의 말로는 최악이었다.
원치 않는 아이를 가진 여성들이 속출했다. 그들 중에는 남편이 있던 사람들도 있었다.
차마 생명을 죽이지 못하겠다던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출산한 아이는 아인이었다.
릴리스의 마법에 당했다는 이야기는 편재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렇게 해서 태어난 아인들은 거의 버림을 받았고, 여성들은 대다수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세상에 희망이 없었으니까.
여성들은 억제할 수 없는 정욕에 휩싸여 발정난 개처럼 관계를 맺던 자신을 경멸해야 했다.
더군다나 배우자와 가족, 사회는 부적절한 관계를 맺은 그녀들을 마치 오물을 보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마지막으로 태어나는 생명에는 죄가 없다며 사회의 모진 시선을 견뎌가며 출산한 아이는 아인이었다.
‘남자들은 마음에 드는 여자 옆에 있는 게 좋을 거야. 다른 남자에게 빼앗기고 싶지는 않을 거 아니니? 나한테 감사해. 난교를 벌이더라도 범죄로 처벌받지 않을 거 아니야?’
여자들만이 아니다.
남자들에게도 좋지 않은 말로가 기다리고 있었다.
몇날며칠을 허리를 흔들어야 했던 그들은 적게는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일로 끝났지만, 신체가 불구가 되거나 복상사를 당하는 등 절명하는 일도 흔했다.
어찌어찌 살아남는다고 하더라도 마법의 영향이 정신을 오염시켜버려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완전히 버린 존재가 되는 일도 있었다.
그러니 마나관리기구로서는 릴리스를 토벌하기 위해 플레이어 선별에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야 했다.
그렇게 해서 선별된 플레이어들은 제3위계 몬스터를 토벌할만한 힘을 가지고 있고, 마나 저항력이 높으며, 될 수 있으면 유혹계 마법에 대항할 수 있고, 여성의 경우에는 배란기가 아닌 플레이어들이었다.
‘…신기하네. 내 마법이 아예 통하지 않는 사람은 처음 보는데….’
안개꽃 파티에서 차출된 파티원은 은하와 유정뿐이었다.
은하는 기프트 의 능력으로 릴리스의 마법에 대항할 수 있었고, 마침 배란기가 아니었던 유정은 서포터로서 그녀의 마법을 막아내는데 능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플레이어들은 피해를 최소화하여 동대구에 둥지를 튼 릴리스를 토벌할 수 있었다.
문제는 유정이었다.
‘오지…, 마. 제발 오지 마. 네가 오면…, 나는…, 나는…!’
격렬한 전투는 아니었으나, 정신이 지칠 정도로 힘든 전투였다.
가까이에서 릴리스를 상대하는 은하를 보조해야 했던 유정이 그녀의 마법에 노출되었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유정은 릴리스가 죽기 직전에 영창했던 마법에 당하고 말았다.
‘오지 마. 제발제발제발 오지 마.’
험한 일을 겪은 플레이어들조차도 정욕에 휩싸인 자신의 모습에 괴리감을 느끼고 절망하기 일쑤였다.
유정 역시 그러했다.
그녀는 어떻게든 자신을 억제하려하면서도, 그에게만은 자신이 성욕에 헐떡이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았다.
‘오지…, 말라니까아….’
하지만 릴리스의 마법에 노출된 사람들은 어떻게든 솥뚜껑을 열고 폭발한 성욕을 풀어야 했다.
그러지 않았다가는 몸속에서 들끓는 정욕을 참지 못하고 끝끝내 자결을 선택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마법의 효력이 다할 때까지 반강제적으로 속박했더니 정신이 처참히 부서진 일도 있었다.
‘안…되…는데….‘
눈물을 흘리며 오지 말라 애원하던 유정은 그가 입술을 맞추는 순간, 이성을 잃어버렸다.
숨을 쉴 시간도 주지 못할 정도로 격정적으로 입안을 탐하는 키스는 도저히 끝이 나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이성이 돌아올 때까지 사흘밤낮 동안 그녀의 곁을 지켰다.
‘미안, 나 때문에….’
‘뭐가 미안한데?’
‘나 때문에…, 네가, 네가….’
‘나는 후회 안 해.’
친구 이상, 연인 미만이었던 관계.
어쩌면 그것으로도 규정할 수 없던 관계.
그럼에도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마음을 결단코 고백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그럴 만한 기회를 만들지 않았다고 할 수 있었다.
무서웠으니까.
그는 희망 없는 세계에서 희망을 찾을까, 살아야 할 이유를 찾을까 무서웠다.
변하지 않는 관계에 만족하고 있기도 했다.
친구이자, 동료이자, 파트너이자, 대등한 동반자라 할 수 있는 관계에 금이 가는 일을 바라지 않았다.
상대에게 무언가를 기대하다 보면 자신이 죽인 감정이 되살아나 그릇된 선택을 내리게 하지 않을까 두렵기도 했고.
많은 이들을 사지로 내몬 그로서는 이제 와서 멈출 수도, 선회할 수도 없었다.
그러니 간간히 들끓는 성욕은 돈을 주고 사면 될 뿐이었다.
다른 플레이어들이 여타 그러했듯.
‘지금…, 뭐라고 했어?’
‘후회 안 한다고.’
은하는 마법에서 깨어난 유정에게 다시금 키스를 하며 답했다.
이제 와서 희망을 찾을까, 관계가 변하지는 않을까 덜컥 겁이 나기도 했다.
하지만 손으로 이불을 꼭 쥔 채로 부끄러워하던 그녀가 사랑스럽기도 했다.
두 사람은 마법에서 깨어난 아침에 다시금 관계를 맺었다.
‘은하야.’
‘왜?’
‘…아니야, 고마워.’
그럼에도 두 사람은 끝끝내 서로에 대한 마음을 고백하지 않았다.
그날 이래 암묵적으로 사랑을 나누기만 했을 뿐.
하백련이 여론을 무시하지 못하고 2대 선녀에 오르는 시기였고, 그녀의 입지가 나날이 공격받던 시기이기도 했다.
두 사람은 여전히 친구 이상이자, 연인 미만에 해당하는 어정쩡한 관계였다.
‘앞으로 나 말고 다른 여자 만나면 안 된다?’
‘…….’
‘눈알 굴리지 마. 어서 말 안 해?’
‘…알았어.’
어쩌면.
아주 어쩌면.
그녀는 기다리고 있었는지 모른다.
자신이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때를.
자신이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때를.
자신이 인생의 의미를 찾는 때를.
‘좋아해, 아주 많이. 널 위해서라면 내 목숨도 바칠 수 있을 정도로.’
‘그건 좀 부담스러운데….’
‘그러니까 죽지 마, 이 바보야.’
그것은 이번 생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이야기.
그럼에도 그는 지금도 생생히 떠오르는 기억 속의 그녀를 침대로 자빠뜨렸다.
☆
꿈을 꿨다.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이야기.
절로 입꼬리가 올라가고 마는.
“…어라?”
꿈이 너무 생생했다.
여운이 남을 정도로.
기억에 박힐 정도로.
그리고 감각도.
“에이, 설마….”
말도 안 된다는 식으로 웃어버린 은하는 잠옷바지 속으로 손을 뻗었다.
“…….”
망했다.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다.
저번 생을 통틀어서도.
바지에서 손을 뺀 그가 침대시트를 더듬었다.
이거 하나는 다행이었다.
이어서 불을 키고, 잠옷바지를 확인했다.
“…세이프.”
티도 나지 않았다.
문제는 속옷이지.
“허, 참….”
본의 아닌 현자타임이었다.
야밤에 불을 켠 방 한중간에 선 그는 꽤나 오랫동안 멍을 때렸다.
이래서는 안 된다.
한참 생각에 잠겼던 그가 팬티를 갈아입고, 방문을 열었다.
복도는 어두웠다.
빛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문을 닫은 그는 살금살금 복도를 밟았다.
목적지는 화장실이었다.
불을 끈 채로 조용히 문을 닫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체내 마나를 끌어올려 어느 정도 시야를 확보해서는 세면대에 물을 틀었다.
“…좋아.”
속전속결이 중요했다.
세면대에 팬티를 집어넣은 은하는 손에 힘을 주었다.
작업을 최대한 빨리 마친 다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세탁바구니에 집어넣어야 했다.
“내가 진짜 나이가 몇인데…. 이 나이에 이 짓을 해야 하는 거냐고….”
입 밖으로 욕지거리를 중얼거리며 팬티를 빨았다.
이제 슬슬 세면대에서 끄집어내면 될 것 같았다.
바로 그때.
“…어?”
화장실 불이 켜졌다.
“…은하야?”
“…….”
세면대에 손을 집어넣은 채로 굳어버린 은하는 문을 열고 들어온 어머니를 맞닥뜨리고 말았다.
“화장실에서 불도 안 켜고 뭐하고 있었니?”
어머니가 졸린 듯이 눈을 비비며 물었다.
제대로 잠에서 깨지 않은 기색이었다.
문기둥에 기대고 있는 것만으로도 틀림없었다.
“어, 엄마는…, 뭐하고 있었어?”
은하는 어머니의 등장에 너무 놀라 말을 더듬었다.
다행히 어머니는 신경을 쓰지 않은 모양이었다.
어머니가 하품을 하며 답했다.
“물 마시러 나왔다가…, 첨벙첨벙 하는 소리가 들려서 화장실에 누가 있나 했지.”
“아아아, 그렇구나.”
“근데 그 팬티는 뭐야?”
“이, 이거…?”
은하는 뜨끔했다.
어머니가 눈을 비비던 손으로 세면대 속에 있던 팬티를 가리킨 것이다.
그는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변명했다.
“아, 아까 오줌 싸다가 팬티에 지려서 그만….”
“그러면 세탁 바구니에 넣고 새로 갈아입지. 그거 세탁바구니에 넣고 얼른 들어가서 자렴.”
“어어어, 응, 알았어!”
간 떨어지는 줄 알았다.
십년감수한 은하는 최대한 어색하지 않게 물이 뚝뚝 떨어지는 팬티를 쥐고 화장실에서 나왔다.
어머니는 그가 나오자마자 화장실 불을 껐다.
“내일 빨래할게.”
“으, 응.”
“이따가 학교 가야지. 늦잠 자면 어떡하려고. 어서 들어가서 자.” “엄마도 잘 자.”
“그래, 은하 너도.”
팬티를 세탁바구니에 넣은 은하는 제대로 기억도 나지 않는 걸음으로 방으로 돌아갔다.
침대에 턱 하고 드러누운 그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엄마가 모르는 눈치였지?”
모르는 눈치였다.
은하는 속으로 자문자답했다.
“아씨, 내가 왜 회귀 전에는 하지도 않았던 걸 하냔 말이야!”
은하는 이불을 뻥뻥 찼다.
오늘 밤은 제대로 자기 글렀다.
“아씨….”
아침이 되면 샤워를 해야겠다.
팬티를 빠는 것만 생각했다.
은하는 찝찝한 기분으로 씨부렁거렸다.
☆
다음날 아침.
잠을 설친 은하는 하품을 하며 식탁에 앉았다.
“잘 잤니?”
“조금.”
아침 뉴스를 보고 있던 아버지가 말을 걸었다.
때마침 어머니가 토스트를 가지고 왔다.
두 사람은 동시에 토스트를 집었다. 잼을 바르는 손놀림이 완전히 부자지간이었다.
“어라, 은하 네가 웬일이야? 땅콩버터를 다 먹고. 그동안 뻑뻑하다고 안 먹으려 했잖아.” “그냥. 오늘은 이게 땡기네.”
은하는 아버지의 물음에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졸린 기색이 역력한 은애는 옆에서 요플레를 떠먹고 있었다.
“그래, 편식하면 안 되지. 은하 너도 이제 어린아이가 아니니까.”
“나는 편식 안 하는데? 땅콩버터를 잘 안 먹는 것뿐이지….”
“은하 너도 이제 어른이구나.” “어른이구나~”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눈살을 찌푸린 은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아버지가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새로 잼을 바른 토스트를 은애에게 물렸다.
은애가 눈을 감은 채로 토스트를 우물거리며, 아버지가 하는 말을 따라했다.
“네가 아기였을 때 나한테 오줌 쌌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은하 너도 이제 어른이….”
자꾸 어른, 어른이라는 말을 꺼내는 아버지.
뭐가 그리 웃긴지 어깨를 들썩이다 급기야 입안에 있던 토스트를 분출하기까지 했다.
“당신이 애예요? 왜 그래요, 정말.”
“…아니, 그게 아니라…, 우리 아들이 어른이 된 게 너무 기뻐…풋…! 근데 당신은 왜 웃고 있는 거야!”
“제, 제가요? 언제요?”
“…….”
고개를 숙이며 웃음을 참는 아버지.
손으로 입가를 가리는 어머니.
은하는 토스트를 우물거리던 입을 멈추고, 맞은편에 있는 부모님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우리 오빠 어른이구나! 멋지다! 나도 얼른 어른이 되고 싶어!”
잠에서 깬 은애가 만세를 펼쳤다.
그러자 부모님이 웃음을 참지 못하고 빵 터졌다.
“…죽고 싶다.”
은하는 이번 생에서 태어났을 때를 제외하고, 처음으로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리라이프 플레이어 199(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