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life Player RAW novel - Chapter 215
기프트 .
세계의 섭리를 거슬러, 세계 그 자체를 재구축한다고 알려진 기프트는 발현한 뒤에는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가령, 신서영은 인류를 지키겠다는 대의로 몰려드는 군세를 막아내는 대가로 플레이어의 인생을 바쳐야 했다.
가령, 이리야는 수많은 사람들을 치료한 대가로 그들이 안고 있던 고통을 제 한 몸에 받아들이고 죽어야 했다.
가령, 신도림은 죽은 자들을 되살리는 대가로, 기억을 잃고 망자들의 왕이 되었다.
이와 같이 의 기프트를 발현하고 무사히 살아남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망가지거나, 죽거나, 미치거나.
은하가 알기로, 의 기프트를 사용하고 무사한 사람은 은아밖에 없었다.
누나가 그때 선보인 건, 완전한 이라고 할 수 없었지만.
은아가 체내 마나를 소모한 것으로 의 대가를 치른 것은 그만큼 그녀가 재구축했던 세계가 협소했기 때문이었다.
기실 그것은 세계를 재구축했다고 보기도 힘들었다.
그녀는 섭리에 간섭했을 뿐이었다.
소유자가 간절한 상황에서 발하는 은 그녀가 보여주었던 것을 상회할 정도로 경이로운 힘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은아는 을 발현했다고 볼 수 없었다.
그리고 그는 그녀가 앞으로도 발현하게 할 생각이 없었다.
이번 삶에서 을 발현했던 신서영을 구할 수 있던 것도 운이 좋았을 뿐.
다시 한 번 그런 일이 일어났다간 막을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그렇다면 이유정은 어떠한 대가를 치렀을 것인가.
“…….”
회귀를 하고,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필시 이유정도 의 대가를 치렀으리라.
그녀는 그야말로 세계를 재구축한 마법을 전개했으니.
대가를 치르지 않았을 리 없었다.
하지만 그건….
이전 삶에서 치렀을 거라 생각해서 생각하지 않기로 했는데.
이전 삶과 이번 삶은 별개였다.
그녀가 을 사용한 대가를 이번 삶에서 치렀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싶었다.
이번 삶에서 그녀가 무사히 있어만 달라고.
마음속 어딘가에서 이리 될 것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이번 삶에…, 유정이는 없는 건가.
마음속 한구석에 꽁꽁 감추고 있던 상자를 꺼낼 수밖에 없었다.
외면하고 싶었던 가정을.
이게…, 네 대가라고?
의 기프트 소유자는 세계를 재구축한 현상에 합당하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렇다면 그녀는?
세계를 재구축해서 시간을 되돌린 그녀에게 합당한 대가는 무엇이었단 말인가.
지금 처한 상황이었다.
그녀가 없는 현실.
시간을 되돌렸을지라도, 그녀는 두 번째 삶에서 존재할 수 있는 자격을 받지 못한 것은 아닌가.
“너, 정말….”
만약 그런 것이라면, 그런 거라면 바보가 따로 없다.
자신을 위해 써야할 마땅한 힘을 겨우 자신을 회귀시키는데 써버린 것이니까.
다음 삶에서 자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대가를 지불하고서라도.
대단한 희생정신이 따로 없었다.
…너는 늘 그랬어.
이유정은 늘 그랬다.
자신보다 타인을 생각했고, 끝없이 희생하는 삶을 살았다.
특히 그를 위해.
그녀는 그가 가는 길에 죽음밖에 없는 걸 알고 있었을 텐데도 묵묵히 따라왔다.
죽어가는 동료들을 치료하면서도, 자신과 그들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 갈구하던 바를 이뤄주려 노력했다.
그렇기에 그녀는 플레이어들에게 죽음의 천사라는 이명으로 조롱당해 라고 불렸다.
그녀는 한 번도 자신을 위한 삶을 산 적이 없었다.
언제든 안개꽃파티를 떠날 수 있었으면서도.
그가 죽는 순간까지.
그 결과가 이거였다.
제 삶을 포기하고 을 치른 그녀는 이번 삶에 존재하지 않았다.
“야, 노은하. 너 왜 그래?”
“은하야, 무슨 일이야?”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겠다.
식장을 정처 없이 방황하던 그는 어깨를 붙잡는 손길에 몸을 돌렸다.
친구들이 있었다.
모두 심각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장 괜찮아? 얼굴이 지금….”
“무슨 일이…. 아니야, 됐어. 이건 나중에 얘기하자.”
“…정말 괜찮아?”
앞으로 나온 하양이 그의 손목을 꽉 붙잡았다.
마치 어딘가로 떠나지 못하도록 붙잡아두려는 듯이.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은하는 친구들의 얼굴을 보고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미안. 별 일 아니야.”
“별 일이 아니라는 애가 얼굴이 그래? 정말 괜찮은 거지?”
서나가 미간을 모으며 물었다.
은하는 애써 미소 지었다.
더 이상 묻지 말라는 듯이.
그는 친구들을 뒤로 하고 앞으로 발을 내딛었다.
“우리 지금 늦은 거 아니야?” “너 때문에 엄청 늦었거든?”
“맞아! 너 기다리느라 반으로 돌아가는 것도 늦게 생겼잖아!”
민지와 파랑이 황급히 따라나섰다.
남아 있던 아이들은 눈치를 살피다 한숨을 쉬고 그를 따랐다.
“오리엔테이션에 늦으면 내가 너 가만 안 둘 거야!” “…그래?”
“야…, 좀. 너 내가 그 얼굴로 웃지 말라 그랬지? 이게 못생긴 주제에!”
“파랑이 오빠가 더 못생겼는데….”
친구들이 억지로 분위기를 띄웠다.
하양이 파랑을 훅 치고 공격하자, 친구들은 일제히 깔깔 웃었다.
은하도 그들을 따라 웃었다.
속으로는 여전히 이유정에 대해 생각하면서도.
너는 이 세상에 있는 거야?
아니면 정말 없는 거야?
신이라도 있다면 묻고 싶다.
그녀는 어디에 있느냐고.
하지만 신이 죽은 세계에서, 그가 간절히 바라는 질문에 답하는 이는 어디에도 없었다.
☆
“이름.”
“…노은하입니다.” “하.”
지각이었다.
입학식을 치른 뒤에는 각 반 별로 오리엔테이션이 있었다.
은하는 오리엔테이션이 시작하는 시간이 지난 다음 6반에 들어섰다.
연단에 서 있던 교관은 마지막으로 문을 열고 들어온 그를 보고 대놓고 한숨을 쉬었다.
언짢은 감정을 드러내며.
“야.”
“네.”
“어쭈? 야.”
“네.”
“야!” “네.”
플레이어 아카데미는 일반적인 교육기관이 아니었다.
플레이어를 양성하는 기관이었다.
일반인의 상식으로 재단할 수 없는 곳이었으며, 교관의 권한이 월등히 높은 곳이기도 했다.
그에게 다가간 교관이 이를 갈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야, 큰 소리로 대답 안 해?”
“네.”
은하는 조금 전과 다를 바 없이 똑같은 톤으로 답했다.
큰 소리로 대답할 생각은 없다는 뜻이었다.
교관은 열이 받았다.
입학식에서부터 그가 보인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이러고 있으니.
“늦어서 죄송합니다. 다음부터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은하는 교관을 무시했다.
적당히 맞춰줄 마음도 없었다.
아예 관심 범위 밖이었다.
반면에 교관은 어이가 없었다.
제 할 말이 끝나자마자 자신을 지나치는 그가.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노은하 학생. 지금 네가 차석으로 입학했다고 눈에 뵈는 게 없는 모양인데…, 그딴 식으로 행동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
“여기서 무사히 졸업해서 플레이어가 되고 싶다면, 말 하나 행동 하나 신경 쓰는 게 좋을 거야.”
“…….”
“이참에 너희 모두에게 말하겠다. 플레이어로서 오래 살아남고 싶다면 가능한 적은 만들지 않는 게 좋다.”
학생들이 교관이 발하는 기운에 압도되어 숨을 죽이는 가운데, 은하는 빈자리에 앉아 다른 생각에 잠겼다.
학생들이 이런 분위기를 만든 그를 원망스럽게 쳐다보고 있는 데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입학 첫날부터 담당교관과 학생들로부터 적의를 받았음에도.
현재 그에게는 하등 관심이 없는 사항이었다.
“…오늘은 입학 첫날이니 이렇게 넘어가겠지만, 다음부터 이런 일이 일어났다가는 너희 모두 가만두지 않을 거란 걸 기억해라.”
제법 시간이 지났다.
분위기를 환기시킨 교관이 학생들에게 자신에 대해 소개했다.
이윽고 소개를 마친 교관이 학생들에게 종이를 배부했다.
“간단한 진로조사서다. 앞으로 너희가 어떤 플레이어가 되고 싶은지, 가족사항이나 집안배경은 어떤지를 간략히 적어주면 된다.”
학생들은 종이에 글을 끼적였다. 초등학교를 갓 졸업한 그들은 아카데미에 입학해 부풀은 마음을 써내려갔다.
반대로 은하는 플레이어를 지망한 계기에 ‘몬스터를 죽이기 위해’라고 대충이나마 적었다.
다른 사항도 마찬가지였다.
“좋아, 시간 됐으니 제일 왼쪽에 있는 사람이 거둬서 앞으로 모아.”
학생들은 진로조사서를 모았다.
다음으로 교관은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종이를 돌렸다.
“다들 종이 받았겠지? 지금 내가 나눠준 종이가 뭔지 아는 사람?”
“”””…….””””
“그래, 너.”
담당교관에게 점수를 따야 좋다.
그렇게 생각한 학생들이 조용히 손을 들었다.
교관은 적당히 학생들을 지목했다.
“미래의 저를 그리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틀렸다. 여기가 아직도 초등학교인 줄 아나 보지?”
“…마인드맵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되고자 하는 플레이어가 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너희는 아카데미에 익숙해지려면 얼른 초등학교 물을 빼는 게 좋을 거다. 다음! 거기 너!”
“시간표를…, 짜는 게 아닐까요?”
“성실한 것은 좋지. 하지만 아니다. 다음! 거기 너!”
“…빙고?”
“…어이가 없군. 거기 학생은 어떻게 아카데미에 들어온 거야?”
교관이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었다.
빙고라고 답한 학생은 얼굴이 빨개지고, 학생들은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
반 분위기는 교관이 나누어준 종이로 생기가 가득했다.
그러던 때였다.
손을 든 학생들 모두가 답했음에도 답이 나오지 않았을 때, 교관은 턱을 괸 채로 창가를 바라보고 있던 은하를 발견했다.
“거기, 차석.”
“…….”
“차석.”
“…….” “차석!”
“…….”
“노은하!” “…네?”
“네? ‘네?’라고 했나 지금?”
교관이 얼굴을 구겼다.
이름이 불리자 정신이 든 은하는 얼굴에 노기를 띠운 교관을 보았다.
“…죄송합니다.”
“너희들에게 또 한 가지 조언하지. 아카데미에서 교관이 묻는 말에 의문으로 답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노은하, 오늘은 첫 날이니까 넘어가주마. 다음에 그랬다가는 기합이다.”
“네.”
어느 기수에도 있다.
자신의 실력을 자만하고 교관을 무시하는 녀석들이.
한숨을 쉰 교관은 은하를 곤란하게 만들기 위해 그에게 묻기로 했다.
“그럼 입학시험 차석 노은하 학생. 내가 지금 너희에게 나눠준 종이는 뭐라고 생각하지? 설마 차석이 모르는 건 아니겠지?” “…….”
교관은 은하를 자극했다.
은하는 흥미가 없다는 시선으로, 그제야 교관이 나눠준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종이.
그는 주변의 시선을 알아차렸다. 학생들이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네, 압니다.”
“…그래? 안다고?”
안다.
은하는 단언했다.
그는 의외의 대답을 듣고 당황한 교관을 무시하며 나직이 대답했다.
“유서입니다.” “”””…유서?””””
교관은 눈을 크게 떴고, 학생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도 은하는 태연했다.
교관이 나눠준 것은 유서였다.
그는 고등아카데미에 입학했던 날, 당시 담당교관에게 종이를 받았던 것을 기억했다.
그것은 유서였다.
그때뿐만이 아니었다.
아카데미 학생이나 플레이어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 대비해서 정기적으로 유서를 써야 했다.
외에도 플레이어는 위험한 임무를 수행할 때에는 반드시 그때 유서를 재작성해야 했다.
“…그래, 맞다. 이건 유서다.”
“”””…….””””
“이 나이에 왜 유서를 써야 하는지 아직 감이 오지 않는 사람들도 있을 거다.
하지만 너희는 플레이어가 되기 위해 아카데미에 입학했고, 그 말은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거라는 뜻이기도 하다
. 아카데미 학생이라도 죽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지. 아카데미는 그런 곳이다.
그리고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밖으로 나갈, 플레이어의 세계는 이보다 더 비참한 세계니까.”
학생들은 감독관이 설명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들은 자신 앞에 놓인 겨우 종이 한 장이 무겁게 보이기 시작했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다. 그렇게 마지막 말을 남기지도 못하고 죽는 사람이 수두룩하다, 우리 세계에선. 그러니 죽기 전에 하고 싶은 말을 적는 거야.”
“”””…….””””
플레이어의 삶은 고단하다.
아무도 알아주지 못하고 죽는 이들이 허다했다.
그들이 마지막에 남길 말이 세상에 기록되지 않는 경우는 더더욱.
그러니 유서를 적는 것이다.
자신이 몸소 이 세상에 있었다는 증거를 남기기 위해.
그리고─.
“─너희가 남겨두고 간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 말도 없이 떠나면, 남겨진 사람들이 얼마나 슬프겠냐.”
“”””…….””””
“설령 천애고아라 해도, 그 사람이 걸어간 길에는 그 사람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는 법이다. 너희는 그것을 알고 있어야 해.”
또한 유서는 플레이어들이 자신의 마음을 되잡기 위해 쓰는 것이기도 했다.
교관은 굳이 말하지 않았다.
나눠준 종이의 정체를 깨달은 학생들이 진지한 얼굴로 유서를 마주하고 있었기에.
“인류의 한 사람으로서 너희에게 바라는 바는 딱 하나다. 죽는 순간까지 더 많은 몬스터를 죽이고 세상을 지켜라.”
플레이어의 대의는 인류를 수호하기 위해 몬스터를 죽이는 것.
교관은 그 말 뒤에 ‘그러나’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러나 아카데미 교관으로서, 너희와 같은 플레이어로서 말하건대. 살아남아라. 웃는 얼굴로 살아남아 너희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품으로 돌아가라.”
“”””…….””””
“앞으로 아카데미에서는 학기마다 너희들에게 유서를 쓰게 할 것이다. 교관의 공증을 받은 유서는 해당 학기동안 엄중히 보관될 거야.”
교관은 그것으로 말을 마쳤다.
학생들은 유서를 바라보았다.
잠시 후, 몇몇이 펜을 들었다.
그러자 다른 학생들도 펜을 들고, 빈 종이에 무언가를 적어내려가기 시작했다.
“…….”
하지만 은하는 아무것도 적지 않은 종이를 제출했다.
여기서 죽지 않겠다고 맹세했기에.
리라이프 플레이어 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