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life Player RAW novel - Chapter 216
“뭐야? 왜 너희만 왔어? 노은하는 안 온대?”
“대장은 피곤해서 자러 가겠대.”
저녁을 먹고, 목욕을 마친 은혁과 파랑은 가벼운 차림으로 여자기숙사 1층 다목적실을 찾았다.
야심한 시간이었기에 경비실에서 두 사람을 수상한 눈으로 쳐다보기는 했지만, 때마침 민지가 두 사람을 맞이해 의심의 눈초리를 피할 수 있었다.
“노은하 걔는 왜 그러는지….”
한숨을 쉬며 혀를 쯧쯧 차는 민지.
그녀는 두 사람을 사전에 잡아둔 테이블로 안내했다.
대여섯 명이 모여 앉을 수 있는 원형테이블에는 서나와 하양이 먼저 앉아 있었다.
민지를 비롯해, 여자아이들 모두가 가벼운 차림을 하고 있었다.
“어서 와.”
“은하는? 안 왔어?”
똑같은 질문.
은혁은 말없이 어깨를 으쓱였고, 파랑은 탐탁지 않은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서나와 하양은 그것만으로 은하의 상태를 파악한 눈치였다.
“아직도 그래? 대체 무슨 일인데 말도 안 하고 기운이 없는 거지?”
“그러게 말이다. 노은하 그 자식, 입학식 전까지만 하더라도 우리한테 뭐뭐 하지 말라고 잔소리를 그렇게 해댔으면서…. 정작 지가 그래서는 어쩌자는 거야?”
서나의 한탄에 파랑이 투덜거렸다.
아카데미 입학식을 치른 지 이틀.
아카데미 1학년들은 이번 주까지만 중등교육과 다를 바 없이 일반교양을 배우고, 다음 주부터 아카데미 전용교양을 추가로 받는 게 예정되어 있었다.
필시 다음주 월요일에는 아카데미 학생들 사이에서 수강신청 대란이 일어나리라.
그러니 수강하려는 교과목을 대략적으로나마 정해 놓아야 했다.
비록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한 그들에게는 우선적으로 수강할 수 있는 포인트가 주어졌다고 하더라도.
‘그렇다고 포인트 막 쓰려 하지 마. 올해 받은 포인트가 다음 학년도로 이월은 되지 않아도, 아카데미 생활에 여러 모로 도움이 될 테니까.’
입학식 전, 은하는 그렇게 말했다.
필요최소한의 포인트로 교과목을 우선수강하고, 나머지를 다른 곳에 사용할 수 있도록 하라고.
가령 수련장을 우선 예약할 때나, 무기를 대여할 때나, 공방을 이용할 때나 기타 등등.
그래서 아이들은 다 같이 시간표를 짜기로 했던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우리한테는 말도 안 해주고….”
하양은 걱정이 담긴 어조로 중얼거렸다.
정작 은하는 같이 시간표를 짜자고 제의했으면서 오지도 않았다.
입학식을 치른 다음부터 이상했다.
마음이 붕 떠 있는 것처럼.
…이곳에 없는 것 같아.
그런 기분이었다.
요즘 들어 그에게 말을 거는 것이 꼭 잡을 수 없는 아지랑이에 손을 뻗으려 하는 것 같았다.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은하가 말로만 괜찮다고 했어도, 하나도 괜찮지 않다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단지 그가 말을 하지 않으니, 묵묵히 지켜보는 것밖에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너희도 봤지? 발대식 준비할 때.”
“헹, 내가 그걸 못 봤을 리가 없지. 뭐라 말하는지도 까먹어서 교관에게 대차게 까이더만….”
시간표를 짜는데 집중할 수 없었다.
볼펜 누름단추를 연신 눌러대던 민지가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을 꺼냈다.
그러자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대꾸하는 진파랑.
오늘 아침에는 발대식이 있었다.
은하는 정식으로 플레이어가 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는 발대식에서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수석으로 입학한 하양과 선서문을 읊조려야 했는데에도.
결국 그는 교관에게 기합을 받아야 했다.
그때 학생들 모두가 차석으로 입학한 그를 얼마나 비웃었던가.
파랑은 지금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열이 올랐다.
“진짜 그 자식 정신을 어디다 팔아 가지고….”
“됐어, 빙구 오빠. 노은하 욕은 그만하자. 내버려두면 지가 알아서 정신 차리겠지. 우리는 우리 할 일이나 하자.”
“…정말 그럴까?”
“하양이 너도 알잖아. 이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일이 걔 걱정하는 일이라는 걸. 됐고, 시간표나 짜자.”
민지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언짢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는 은하가 말을 해주지 않으니 무엇을 해주면 좋을지 알 수 없어서 답답한 심정이었다.
그런 식으로 대화는 흐지부지하게 끝났다.
아이들은 머리를 맞대고 시간표를 짜는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정작 마음은 다른 곳에 있으면서.
“이 수업은 은아 언니가 그랬는데 굉장히 재미있댔어.”
“‘체술 I’? 이거 아는 사람 있어?”
“그거 창진이 형이 핵노잼이라고 듣지 말라더라. 교관도 깐깐해서 성적받기 힘들대.”
“아, 나 이거 알아. ‘신화와 민담’. 연화 언니가 상상력을 키우는데 도움이 될 거라고 했어.”
“어? 그거 은아 언니가 과제가 많아서 드롭했다고 했는데….”
“””””…….”””””
아이들이 모은 정보의 출처는 죄다 그들이 알고 있던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었다.
논의를 해도 소용이 없었다.
애당초 그들은 재미있고, 성적을 따기 쉬운 수업을 받기 위해 아카데미에 입학한 게 아니었다.
자신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그것을 보강하기 위해 아카데미에 입학한 것이었다.
그래서 입학시험에서 상위권에 들어가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 아닌가.
이럴 때 은하가 있었다면….
노은하 걔는 왜 갑자기….
침묵이 찾아들었다.
조용히 시간표를 내려다보고 있던 아이들은 모두 비슷한 생각을 했다.
은하가 있었다면.
그들이 나아가는 길을 제시해주는 그가 있었더라면 이런 식으로 헤매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전반적으로 분위기도 침울해지지 않았는가.
겨우 한 명 이 자리에 없다고.
“…이대로 두면 안 돼.”
더 이상 침묵을 견디지 못한 하양이 입을 열었다.
손에 쥐고 있던 펜을 놓은 그녀가 아이들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다 같이 아카데미에 입학했으면서 이렇게 꿀꿀하게 있으면 안 되잖아? 은하도 지금 이상하고.”
“그래서?”
삼각 귀를 쫑긋거린 서나.
하양은 잠시간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좋은 생각이라도 났다는 듯 손뼉을 쳤다.
“생각해보니 아카데미에 왔으면서 제대로 축하파티도 하지 않았잖아! 우리 이참에 파티를 여는 건 어때?”
“파티? 웬 파티?”
“…나는 찬성. 듣고 보니 하양이 말이 맞아. 그렇게 고생하면서까지 아카데미에 들어왔는데 조금은 즐겨야지.”
“맞아! 나도 찬성이야! 대장도 신나게 놀다 보면 우울한 기분도 다 잊어버리겠지!”
“그런데 은하를 어떻게 불러내게? 지금 기숙사에 틀어박혀 있을 거 아니야.”
“괜찮아. 나한테 좋은 수가 있어.”
목소리를 낮춘 하양이 손짓으로 아이들을 가까이 오도록 불러모았다.
다목적실이라 주변 사람들을 신경 써야 했다.
그녀는 친구들이 원형테이블 위로 몸을 내밀었을 때에야 소곤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은하는 납치하면 되지.”
☆
생각해보면 이유정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었다.
그녀는 언제나 다가오기만 했었고, 그는 언제나 그녀가 다가오기만을 기다렸다.
‘아직 저녁 안 먹었지? 심심하니까 나랑 같이 먹어.’
‘너 옷이 그게 뭐야? 안 되겠다. 오늘은 모든 일정 다 취소해버리고 나랑 같이 옷이나 보러 가자!’
아카데미에서부터 시작된 인연.
그는 누구보다도 그녀를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정말로?
이제는 확신이 없었다.
돌이켜보면 그녀가 아카데미에 들어오기 전에는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 아는 바가 없었다.
당시 그는 타인에게 관심을 두려 하지 않았다.
섣불리 관심을 가졌다가는 그만 이 세상에 정이 들 것만 같아서.
그래서 의도적으로 멀리했다.
그녀가 태어나고 자란 배경에 대해 묻지 않았고, 플레이어가 된 이유를 묻지 않았다.
정말 이 세상에 없는 걸까?
미래가 바뀌어서 그런 걸까?
모르겠다.
되도록 후자라고 믿고 싶다.
그녀가 이 세상 어디선가 무사히 살아있다는 희망을 꿈꾸고 싶었다.
꿈도 희망도 없는 세계에서.
…….
잠이 오지 않았다.
침대 위에서 뒤척이던 은하는 창밖에서 들어오는 달빛도 짜증이 나서 신경질적으로 커튼을 쳐버렸다.
“…술이라도 마시고 싶네.”
바닥에 주저앉은 채, 침대에 몸을 반쯤 기댄 그는 깊이 탄식했다.
술이라도 있다면 벌컥벌컥 들이켜고 싶을 따름이었다.
지금이라면 소주로 병나발을 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직 성년이 되지 못한 몸이 너무 안타까울 뿐이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첫 단추부터 잘못 꼈어.
첫 단추부터 잘못 꼈다.
그 말이 딱 맞았다.
아카데미에서 미래에 일어날 일을 대비하려던 그는 제일 먼저 유정을 끌어들이는 것을 계획하고 있었다.
십이좌 박혜림을 뛰어넘는 능력을 갖춘 그녀는 반드시 필요한 인재였다.
그런데 첫 번째부터 꼬였다.
마음이 심란해진 것은 물론이고, 움직일 힘마저 나오지 않았다.
이유정, 그녀는 그가 미래를 바꾸기 위해 다짐한 사람 중 한 명이기도 했으니.
…만사가 귀찮아.
짜증만 일었다.
오늘은 기합을 주려는 교관들에게 반발하고 싶은 마음까지 치솟았다.
단지 그러지 않았던 이유는 자신이 잘못했던 것도 있었으며, 주변에 누를 끼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마음 같아서는 이전 삶에서 그랬듯 성질을 끄집어내고 싶었지만.
부스럭 부스럭
그때였다.
나무가 요란하게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손으로 두 눈을 가리고 있던 그는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드는 소리에 혀를 찼다.
가뜩이나 잠도 오지 않는데 사람을 성가시게 만들었다.
그런데 소리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톡
무언가가 창가를 쳤다.
처음에는 바람에 날아온 무언가가 창가를 친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똑똑
똑똑
이제는 연신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고 있으니.
“…대체 누구야?”
아카데미에서 간혹 있는 일이었다.
아카데미에서 생활하는 학생들이 심심해서 하는 장난.
나가서 혼을 내줄까, 말까.
잠깐 고민하던 은하는 그대로 내버려두기로 했다.
자신이 반응해주지 않으면 저들도 흥미가 떨어져서 사라질 것이다.
“똑똑.”
참으로 한가한 사람이 따로 없다.
이제는 직접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입으로 내고 있으니.
어처구니가 없어진 은하는 베란다에 있을 사람의 낯짝이 어떤지 몸소 확인해주기로 했다.
기분은 최악이었다.
죗값을 똑똑히 치르게 해주리라.
“…….”
거칠게 커튼을 홱 잡아챈 은하는 베란다에 서 있는 사람을 보고 흠칫했다.
한 손으로 커튼을 잡고 있는 채로, 싱글벙글 미소를 짓고 있는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하.”
정하양은 그가 한숨을 쉬는 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웃고 있었다.
그가 문을 열어주기를 기다리며.
“똑똑. 문 열어주세요.”
그녀를 상대할 마음은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베란다 바깥으로 던져버리고 싶었지만, 그나마 그녀라 참는 것이었다.
그녀도 그것을 알고 있을 텐데도 포기하지 않고 베란다에 서 있었다.
“똑똑. 플레이어 중등아카데미 입학시험 차석 노은하 학생? 어서 문 좀 열어주세요.”
“…….”
“안 열어주면 이 문 부숴버릴지도 몰라?”
“…뭐야. 왜 왔어?”
그는 어쩔 수 없이 창문을 열었다.
그녀가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처럼 체내 마나를 발현하고 있었기에.
“드디어 열어줬네.”
슬리퍼를 벗고 허락도 받지 않고 방으로 들어온 정하양.
리본으로 머리를 묶어올린 그녀가 방안을 둘러보았다.
“방 안에 아무것도 없네. 아, 이건 알겠다. 이거는 은아 언니가 가져온 거지?”
하양은 분명 은하의 기분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양, 필요한 것만 갖춰진 방을 구경하며 재잘재잘 떠들어댔다.
“여자는 출입금지라는 거 몰라? 기숙사장한테 걸리기 전에 어서 너희 기숙사로 돌아가.”
그녀가 근처를 지나가자 방금 목욕이라도 했는지 비누냄새가 났다.
그는 이제 여성의 체형이 드러나는 그녀에게 최대한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치, 싫어.”
하양은 무서워하지 않고 대꾸했다.
두 손을 등 뒤로 감춘 그녀가 맨발을 움직여 천천히 다가왔다.
동그란 눈동자가 오로지 그만을 담고 있었다.
“대체 왜 온 거야?”
어쩐지 그녀가 낯설었다.
그는 그녀가 이런 일을 서슴없이 저지르는 사람이었는지 생각했다.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조심성이 많은 성격이었다.
그런데 밤늦은 시간에 겁도 없이 남자기숙사를 찾아오다니.
더군다나 대놓고 위협을 하는데도 조금도 주춤하지 않고 있기까지.
“입학시험 차석 노은하 학생.”
“…….”
“지금 시간 되나요?” “…….”
“아이, 얼굴에 힘주지 말고.”
이제는 까치발을 들어 얼굴을 주무르는 정하양.
은하는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어처구니가 없어서 화를 낼 마음도 싹 사라졌다.
얘가 오늘 왜 이래?
그는 그녀가 뭐라도 잘못 먹었나 생각하며 눈을 깜빡거렸다.
그때─.
“─이제야 날 봤네?”
눈을 마주친 그녀가 기쁜 듯이 미소를 지었다. 달빛이 스며든 눈동자가 반짝이고 있었다.
“시간….”
“시간 없어도 나랑 같이 가야 해.”
반론은 허용치 않겠다는 듯.
하양이 그의 말을 잘랐다.
“화났어?”
은하는 한숨을 쉬었다.
화낼 마음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베란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은 그가 쏘아붙이는 어조로 물었다.
“어디 가게?”
“그건 비밀이야.”
뭐하자는 건지.
그는 검지를 입가에 댄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래, 좋아.
어디 너 하자는 대로 해줄게.
입을 다문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녀가 덥석 손을 잡았다.
“지금부터 은하 널 납치할 거야.”
“세상에 자기가 직접 납치한다고 말하는 납치범이 어디 있어?”
“치, 여기 있지 뭐.”
그를 데리고 베란다로 나선 하양.
그러다 퍼뜩 놀란 그녀가 방안을 가로질러서는 신발장에서 그의 신발을 꺼내왔다.
은하는 그녀가 헤헤 웃으며 내민 신발을 말없이 신었다.
그녀가 손을 잡아끌었다.
“우리─, 파티하자.”
감미로운 울림이었다.
두 사람은 베란다에서 뛰어내렸다.
리라이프 플레이어 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