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life Player RAW novel - Chapter 271
아카데미 문화제의 꽃이라고 하면 밤하늘을 환하게 밝힌 불꽃이 이내 형형색색의 꽃잎이 되어 흩날리는 광경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와…, 정말 예쁘다. 그치?’
‘그래봤자 꽃잎일 뿐인데.’
‘그래서 더 예쁜 거야. 이름이 없는 꽃을 두고 무슨 마음이 담겨 있는지 고민하지 않아도 되잖아?’
‘…….’
‘…꽃은 꽃이라서 예쁜 거야. 꽃에 이름이 있어서 예쁜 것이 아니라, 이름을 모르니까 예쁜 거라고.’
‘…그러면 넌 꽃에 이름이 있으면, 예쁘지 않다고 생각하나 보지?’
은하가 고등아카데미 3학년으로서 맞이한 문화제 세 번째 날.
그때 그는 이유정과 떨어져 내리는 꽃잎을 보며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미 그의 대답은 정해져 있었고, 그녀는 유력 클랜들의 권유를 두고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예쁘지 않은 건 아니야. 근데 나는 무심코 이름을 알게 된 꽃의 꽃말이 무엇일지 생각해버리고 말거든.
그래서 꽃을 보는 재미가 반감되는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꽃은 꽃이지, 뭘. 아무 의지 없는 꽃에 그렇게 의미부여를 할 필요가 있나?’
‘얘는…, 은하야, 한 번 생각해봐. 네가 만약 파티를 창설했다고 치자. 그런데 네 지인들이 축하한다면서 화환을 선물한 거야.’
‘나한테 지인 같은 건 없어.’
‘…나랑 도준이는 지인도 아니니? 그리고 도준이는 몰라도 3년 동안 네 뒷바라지를 해준 나한테 지인이 아니라고 하는 거야, 지금?’
‘…그래서 하고 싶은 얘기가 뭔데?’
‘말 돌리기는…. 지인들이 가져온 화환이 하얀 국화꽃이었어. 그래도 너는 하얀 국화가 예쁘다고 잠자코 받아들일 거야?’
‘다 죽여 버려야지.’
‘그치. 그리고 걔네들에게 국화꽃을 뿌려…, 어쨌든! 네 말대로 꽃에는 아무 의지도 없고, 의미도 없어.
꽃에 의미를 부여하는 건 사람일 뿐이지. 그래서 의미를 알아야 하는 거야.’
‘…….’
‘우리가 상대하는 건 꽃이 아니라, 사람이잖아?’
‘…내가 상대하는 건 몬스터야.’
‘에휴, 애가 이렇게 답답해서야…. 사람도 때에 따라서는 몬스터보다 더 잔인해질 수 있다는 걸 아직도 모르겠니? 안 되겠다. 결정했어!’
그때 두 사람은 남자기숙사 옥상에 있었다.
그녀가 어디에서 들은 정보라면서 남자기숙사 옥상이 한적하게 꽃잎을 감상할 수 있는 자리라고 말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 사람은 그곳에 있었다.
모든 학생들이 대운동장에서 꽃을 올려다보고 있었을 그 시기에.
‘네가 못미더워서 내가 따라가야지 어떡하겠니. 감사히 여기도록 해.’
이유정은 그렇게 말했다.
내로라하는 클랜의 권유를 두고서, 굳이 죽음이라는 결말만이 존재하는 사지로 발을 담그겠다고.
‘은하 너, 나한테 빚진 거다?’
그때 그녀는 어떤 마음으로 그런 결단을 내린 것일까.
은하는 지금도 알 수 없었다.
단지.
그날, 그녀와 올려다본 밤하늘이 불현듯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별빛이 반짝이는 밤하늘 아래에서 흩날리는 꽃잎은 이름을 알지 못해 너무나 예쁘게 느껴졌다.
“─네 말대로 정말 예쁜 곳이네.”
“그렇지?”
이 아름다운 밤하늘 아래에.
이전 삶에는 이유정이 있었다면, 이번 삶에는 한서현이 있었다.
☆
“─오늘은 정말 즐거웠어.”
난간에 팔을 걸치고 있던 서현이 나직이 운을 뗐다.
그녀의 말은 바닥에 떨어지기 직전 마나가 되어 사라져가는 꽃잎처럼 덧없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아마 이런 식으로…, 두 번 다시 즐길 수 있는 날은 오지 않겠지.”
체념이 묻어나는 어조.
그녀의 시선은 오로지 밤하늘에서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은하는 그 모습이 마치 달나라로 돌아가려 하는 사람처럼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 모습이 꼭 회귀 전의 자신과 억압당해 살아야만 했던 하백련을 떠올리게 했다.
“다음에도 즐기면 되지. 내가 또 안내해줄 테니까 기대하고 있어.”
그렇기에 붙잡았다.
나무꾼이 선녀의 날개옷을 감춰, 선녀가 하늘나라로 돌아가지 못하게 했듯이.
그녀가 다시 세상사에 초연해지지 못하도록.
“있잖아─.”
하지만 은하는 그녀가 꺼낸 말에 순간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건 내가 시리우스의 직계라서 그런 거니, 그냥 내가 한서현이라서 그런 거니?”
의표를 찌르는 질문.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던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세상에 관심이 없어 보이던 그녀가 자신을 직시하고 있었다.
“내가 만약에…,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더라면…, 너를 이런 식으로 만날 수 있었을까?”
“…….”
“그때도 너는 나한테 이런 식으로 권유해주고, 배려해줄 수 있었겠니? 정말로?”
그녀가 자조하듯 물었다.
마치 답을 다 안다는 듯이.
그러나 은하는 부정해야 했다.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당연히 그녀도 그 대답을 듣기를 바라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은하는 망설이지 않고,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당연하지, 너라서 만나는 거야.”
그녀가 듣고 싶어 했을 대답.
답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말하는데 어렵지 않았다.
“─거짓말.”
“…….”
그러나 그녀는 그가 꺼낸 대답을 너무나 쉽게 거짓말로 치부했다.
꽃잎을 쫓던 눈동자가 오로지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하늘색.”
“…뭐가?” “내 눈에 보이는 네가.”
“…….”
“은하 너는 내가 불쌍해서 그렇게 말한 거지? 내가 한서현이라서…, 날 만나고 있는 거라고 말이야.”
그녀가 난간에 걸치고 있던 팔에 턱을 괬다.
별빛처럼 반짝이던 눈동자는 이내 어둠에 잠겼다.
그는 그녀의 눈을 바라보는 것밖에 하지 못했다.
뭐라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녀의 말이 맞았으니까.
“나도 알아. 네가 날 만나는 건…, 내가 시리우스그룹의 직계라서 그런 거라는 걸.”
“…….”
“내가 만약 평범한 한서현이었다면 우리 둘은 결코 만나는 일이 없었을 거야. 그렇지 않니?”
그녀의 말이 맞았다.
어디까지나 자신과 그녀의 만남은 시리우스의 이름이 걸린 파티에서 시작되었으니까.
그녀가 평범한 한서현이었더라면, 필시 한서현을 만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설사 만났다고 하더라도─.
“─거기서 끝이었겠지. 왜냐하면 너는 가족들 외에는 주변에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잖니.”
“…….”
“그건 나도 마찬가지고.”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은하는 단순히 한서현이란 사람이 잠시 스쳐지나가는 인연일 뿐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우리가 계속 만날 수 있었던 건 내가 시리우스그룹의 한서현이었고, 네 아버지가 내 아버지의 부하였기 때문이야.”
“…맞아.”
이제는 은하도 순순히 인정했다.
자신과 그녀의 만남은 어디까지나 서로가 가지고 있는 것을 전제하여 이어진 것에 불과했다.
사람을 보고 만난 것이 아니다.
그녀의 배경을 보고 만난 것이다.
그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게 뭐가 어때서?”
“…뭐?” “네 배경을 보면 안 되는 거야?”
그러나 은하는 어째 짜증이 났다.
그녀의 배경을 보고 만나왔던 건 두말할 여지없이 인정하는 바였지만 이상하게 자존심이 상했다.
첫 만남으로 그녀를 알게 된 지, 어언 6년이 흘렀다.
과연 그 시간이 단순히 배경만으로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이란 말인가.
“넌 너무 까다로워.”
“…….”
한서현의 얼굴표정이 바뀌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손가락으로 그녀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걸핏하면 짜증이나 내고.”
“사람 속을 벅벅 긁어놓기나 하고.”
“가끔은 날 하인처럼 부리지 않나.”
“네가 한가할 때면 놀아줘야 하고.” “네 장단에 맞춰주는 건 기본이고.”
“틈틈이 안부 문자나 전화통화는 물론인 데다.”
“네 눈치까지 살펴야 하잖아?”
한서현이 미간을 모았다.
그럼에도 은하는 그동안 품고 있던 불만을 모조리 쏟아냈다.
본인도 말하면서 이렇게 많을 줄은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이게 다 네가 시리우스의 직계라 참고 만난 거야.” “…너 정말….”
한서현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녀가 분노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렇기 때문에 은하는 다음 말을 어느 때보다 재빨리 덧붙였다.
“내가 왜 이렇게 까다로운 사람을 계속 만났을 거라고 생각해?”
“…….”
“단순히 배경을 보고 만난 거라면, 너보다 네 언니가 더 편했겠지.”
은하는 이 자리에는 없는 한서연을 들먹였다.
그녀는 좋은 거래 상대였다.
맺고 끊는 게 어느 재벌 3세보다 깔끔했다.
그녀는 적어도 결과만 보여준다면 그에 합당한 보상을 주었다.
그렇기에 일부러 한서연의 심기를 맞추려 노력하지 않아도 됐다.
그럼에도 은하는 한서연이 아니라 한서현과 만남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래도 네가 한서현이었으니까.”
어언 6년이었다.
목적을 지닌 만남은 이제 그에게 나름의 의미가 되어 있었다.
그녀 역시 자신의 울타리의 범주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가 단순히 배경만을 이유로 이 관계를 단정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마음이 전해진 것일까.
“…말 하나는 잘하는 구나.”
“너도 내가 능력이 있어서 그동안 만나왔으면서 무슨….”
“아니거든.” “거짓말이네.”
“아니야.”
단칼에 부정하는 한서현.
은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하다 순식간에 진지한 어조로 대꾸하는 그녀의 심기를 파악하고 이쯤에서 뒤로 물러나기로 했다.
꽃잎은 여전히 휘날리고 있었다.
어느새 두 사람은 서로의 어깨를 맞댄 채로 전경을 내다보고 있었다.
“있지.”
“응.”
“너도 이제 알겠지만…, 나중에 난 YH그룹의 최예장 오빠랑 결혼하게 될 거야.”
“알고 있어.”
무거운 한숨을 쉬며 하는 넋두리.
은하는 그녀가 체념한 것처럼 읊조리는 이야기를 가만히 들었다.
“그게 직계의 의무거든. YH그룹을 이어받을 최예장 오빠와 결혼한다면 시리우스는 YH라는 든든한 사위를 얻는 셈이니까.”
“그리고 갤럭시의 힘을 약화시키고 갤럭시를 넘어설 수 있다는 거고.”
“…응, 맞아.”
갤럭시와 YH.
두 그룹의 관계는 참 기묘했다.
YH그룹은 갤럭시그룹에서 분리된 그룹이었다.
YH그룹의 회장 최윤혜는 갤럭시그룹의 회장 최윤한의 여동생이었다.
과거, 두 사람은 힘을 합쳐 갤럭시그룹을 대한민국에서 제일가는 그룹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최윤한은 회장이 되었고, 자신의 직계들로 그룹의 권력구도를 재편성했다.
이에 분노한 최윤혜는 가지고 있던 계열사를 그룹으로부터 분리시켜, YH그룹을 만들었다.
그러다 보니 서로가 가진 지분이 복잡한 관계로 얽혀 있었다.
국내에서 두 번째로 영향을 끼치는 시리우스그룹은 이것을 노리고 있는 것이다.
갤럭시그룹과 YH그룹의 불화를 조금 더 부채질하고, YH그룹과 사돈관계를 맺어 시리우스가 국내에서 제일가는 그룹으로 거듭나기 위해.
혈연으로 맺어지는 관계만큼 확실한 것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시리우스그룹이 염원하던 청사진은 철저히 부서진다.
이전 삶에서는 그랬다.
“너는 그래도 좋아?”
“직계의 의무야. 내 마음이 끼어들 여지는 전혀 없어.” “그래서 좋아, 싫어?”
“…싫어. 싫지만 어쩔 수 없어.”
이전 삶에서 은하가 죽기 전까지, 시리우스그룹은 만년 2등을 했다.
갤럭시와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 YH하고는 그보다 더 좋지 않았다.
시리우스그룹의 3대 회장 한서연은 YH그룹의 3대 회장 최예장을 죽일 듯이 싫어했다.
한서연이 그를 바라보던 눈빛에는 경멸과 혐오만이 담겨 있었다.
어쩌면 그보다 더 진득한 감정이.
시리우스그룹은 기회만 있다 하면 YH그룹을 집요하게 공격해댔다.
YH그룹이 갤럭시그룹에게 힘을 빌려달라고 요청했을 정도로.
필시 창해클랜 클랜로드 길성준이 단군그룹과 새벽그룹을 끌어들이지 않았더라면, 시리우스그룹은 그대로 몰락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때는 몰랐지만….
은하는 한서연이 그랬던 이유를 이제는 알 수 있었다.
십중팔구 한서현에게 어떤 문제가 생긴 것이리라.
그리고 그 문제는 아마도 자신이 어찌하지 못하는 문제일 것이다.
“─중학교를 졸업하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기로 했어.”
그러던 때였다.
한서현이 다시금 뜬금없는 소리를 꺼냈다.
은하는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일본으로 가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그것도 직계의 의무니까.” “…….”
“아버지도, 어머니도, 언니도 모두 시리우스그룹이 일본에 진출하는 걸 염원하고 있거든.”
“…….”
“언니는 시리우스그룹을 이어받을 사람이야. 그리고 나는 언니를 도와 YH그룹과 정략결혼을 하고, 일본에 연줄을 만들기 위한 역할인 거지. 그래서 유학을 떠나게 됐어.”
금시초문이었다.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애써 쓴웃음을 짓고 말하는 모습에는 거짓이 없었다.
“…실패할 거야.” “그건 모르는 일 아니니?”
“아니, 실패해.”
은하는 그러는 그녀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이전 삶에서 시리우스그룹은, 아니, 어떠한 재계그룹도 해외로 진출하지 못했다.
만약 그녀의 유학이 이전 삶에서도 정해진 일이었더라면, 그녀는 아무 결과도 남기지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그곳에서─.
─그런 거구나.
그제야 은하는 한 번 삶을 삶았던 자신이 한서현에 대해 모르고 있던 이유를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그녀는 일본으로 유학을 가고 나서 그대로 세상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국내에 있었더라면 시리우스그룹과 YH그룹 사이에서 맺은 약혼이 어떤 식으로 결말을 맞이했을지 소식이 퍼졌을 것이다.
그럼에도 소식이 퍼지지 않은 것은 상대적으로 소문이 퍼지기 어려운 해외에서 일어났다는 뜻일 터.
“…내가 가지 말라고 하면, 안 갈 거야?”
일본은 사면이 바다로 뒤덮여 있는 열도였다.
코쿤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데에도 편재가 시시각각 발생했다.
가끔 바다에서는 강력한 몬스터가 출몰하기도 했다.
그만큼 위험한 나라였다.
그렇기 때문에 은하는 진심을 담아 그녀에게 물었다.
“…할 수 있겠니?” “뭐가?”
한순간이었지만 그녀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러나 감정의 동요를 보이던 그녀는 이내 파도가 가라앉은 바다처럼 무감정적으로 물었다.
“모든 걸 다 버리게 된다고 해도, 나한테 그런 말을 할 수 있겠니?”
“…….”
“시리우스그룹은 뜻을 굽히지 않을 거야. 이건 할아버지의 염원이기도 했으니까.”
“…….”
“그런데 어떻게 할 거니? 세상을, 시리우스를 적으로 돌리는 것까지 각오하고, 나한테 그런 말을 할 수 있겠니?”
못한다.
은하는 입을 다물었다.
한서현은 분명 자신의 울타리 안에 들어와 있었다.
그러나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지킬 수는 없었다.
만약에 한서현을 지킨다면.
그는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들을 거의 모두 포기해야 했다.
무엇보다 두 번째 삶의 목적이 된 하백련을 버려야 했다.
“…미안.” “아니야, 괜찮아.”
한서현은 그것을 알고 있었으리라.
그렇기에 모든 것을 버리고서라도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각오가 있는지 물은 것이다.
은하의 답은 정해져 있었다.
저울 위에 한서현과 하백련을 두고 저울질하라고 한다면, 그는 당연히 망설이는 일 없이 하백련을 선택할 것이다.
“…유학은 언제 돌아오는 거야?”
그렇기 때문에 은하는 냉큼 화제를 돌렸다.
쓴웃음을 지으며 꽃잎을 바라보던 그녀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답했다.
“나도 몰라. 거기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돌아올 수도 있고, 어쩌면 계속 거기에 있을지도 몰라. 그래서 오늘 너한테 말하러 왔어.”
기약이 없는 말이었다.
그렇기에 한서현은 오늘 은하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러 온 것이다.
작별 인사를.
“내가 내년에 일본으로 가게 되면, 여러 그룹에서 너를 끌어들이려고 접근해올 거야.”
“…그래?”
“네가 너무 많은 걸 보여줬으니까. 이제부터 물밑작업이 시작될 거야. 최가인이 너를 꼬드기려 하는 것도 내년부터는 더 심해질 테고….”
지금까지 은하는 시리우스그룹의, 그중에서도 한서현의 비호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비호가 사라진다.
은하는 그녀를 대신하여 한서연의 비호를 받게 될 테지만, 한서연은 서현이 그랬던 것처럼 전력을 다해 그를 지켜주려 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그녀는 그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판단되면, 비호를 걷어갈 터였다.
완벽한 비호가 사라지는 셈이다.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언니보다는 하양이를 의지하렴. 하양이한테는 내가 이미 말을 해놨어.”
인수인계를 해놓았다는 소리였다.
만약 재계그룹의 직계와 부딪치면 상황을 지켜보다 마지막에 등장하는 한서연보다 정하양을 의지하라고.
그녀는 앞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정하양을 파벌로 끌어들여, 자신이 아는 모든 기술을 그녀에게 전수한 것이다.
“…알았어, 걱정해줘서 고마워.”
“걱정해준 게 아니야.”
“그러면 뭔데.”
“나는 내꺼에 손대는 사람을 절대 용납 못해. 단지 그뿐이야.”
“솔직하지 못하기는….”
“혼날래?”
“이제 애 취급은 그만하지 그래? 내 나이가 몇인데….”
“그래봤자 이제 중학생이 된 애가 말이 많구나?”
서현이 난간에서 몸을 뗐다.
그러고는 똑같이 난간에서 몸을 뗀 그에게 다가가서는 눈대중으로 키를 재보았다.
“아직 내가 더 크기도 하고.”
“뭐래. 얼마 차이 안 나거든?”
은하가 툭 내뱉었다.
자신과 그녀의 키 차이는 이제는 얼마 나지 않았다.
그래봤자 한 뼘 차이 정도.
단지 그녀가 구두를 신고 있었기에 키 차이가 확연히 나는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다음에 만날 때에는 이것보다 더 커져 있을걸?”
그녀의 성장은 슬슬 끝났을 터.
은하는 태연하게 대꾸했다.
그 모습을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던 한서현은 이내 희미한 미소를 짓고 대답했다.
“─그래, 기대할게.”
재회를 기약할 수 없는 약속.
그도 알고, 그녀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더 잘 알고 있었다.
이 만남이 마지막 만남이 될 것을.
그렇기에 그는 주머니를 뒤적거려 팔찌를 꺼냈다.
“이게 뭐니?”
“아까 부문대회에서 우승하면서 딴 팔찌야. 아티펙트의 이름은…, 맞아, 사운드 오브 마인드(Sound of Mind)였어.”
은하는 오늘 하루 종일 잡고 있던 그녀의 손을 익숙한 듯이 잡았다.
그러고는 오른쪽 손목에 친절하게 팔찌를 끼워주었다.
부적 같은 것이었다.
이 아티펙트는 겨우 그런 용도에 불과했다.
“마음의 소리…, 라는 뜻이구나.”
“응.”
“무슨 효과인데?”
“때때로 마나의 흐름을 감지하는 효과.”
“…때때로?” “이게 원래 그래.”
은하는 그녀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이것밖에 없어서 안타까웠다.
필시 한서현은 이런 아티펙트로는 어찌할 수 없는 일을 겪게 되리라.
그렇기에 부적이었다.
“간혹…, 사용자가 간절히 바라면 딱 한 번만 간절히 떠오른 상대에게 마음의 소리를 전달한다는 미신이 있는 정도?” “…미신인 거구나.”
“이건 그냥…, 여자들이 장신구로 사용하는 아티펙트니까.”
“나한테 싸구려를 주는 거니?”
“…미안하게 됐다.”
“그래도…, 됐어. 너한테 처음 받은 선물이니까.”
그는 미래를 알고 있다.
하지만 모든 미래를 알고 있는 건 아니다.
자신이 아는 미래만을.
자신이 접한 미래만을.
자신이 들은 미래만을.
겨우 그것만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은하는 한서현의 미래를 전혀 알지 못했다.
그녀가 언제 비극을 맞이하는지.
그것을 어디서 맞이하는 것인지.
알지 못했기에 막을 수 없었다.
“네가 가면 외로워지겠네.”
“…거짓말.”
“거짓말 아닌데.”
“…그래, 반쯤은 아니구나.”
“진짜라니까?”
“…자주 연락해. 일본에서 전파가 제대로 잡힐지는 모르겠지만….”
지키고 싶은 게 너무 많다.
그만큼 지키지 못하는 게 너무나도 많다.
은하는 다시금 그것을 자각하면서, 지키지 못하는 약속을 나눴다.
─나중에 또 만나자.
부디, 다시 만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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