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life Player RAW novel - Chapter 272
11월, 2학기 종합능력평가 시기가 찾아왔다.
이에 중등아카데미 1학년 학생들은 설악산에서 5일에 걸쳐 산악행군을 하게 됐다.
연화에게 듣자하니, 중등아카데미 1학년 학생들의 설악산 산악행군은 매년 연례행사처럼 진행된다고 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설악산에서 진행될 시험은 매년 다를 것이라고.
“그래도 설악산이면 꽤나 멀리까지 이동하는 거네요?”
“버스로 가는데 아마도 넉넉잡아서 이틀은 걸릴 거야.” “…어? 이틀이요?”
아카데미 내 단군 플레이어조합.
사전에 톡으로 연락을 하고 만난 은하와 연화는 쇼핑을 하고 있었다.
오늘 두 사람이 만나게 된 계기는 다음 주에 있을 은하의 산악행군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평상시처럼 톡을 주고받던 은하는 1학년 때 산악행군을 겪어보았다는 연화가 준비를 도와주겠다는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다.
“도로 곳곳에서 출몰하는 몬스터를 토벌하느라 대기 시간도 길어지고, 길도 굉장히 복잡하거든.”
“하긴…, 그렇죠.”
꽤나 늦은 시간이었다.
연화의 수업이 늦은 시간이 돼서야 끝났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플레이어조합 내에는 사람들이 얼마 보이지 않았다.
덕분에 두 사람은 편안하게 매장을 돌아다닐 수 있었다.
그건 그렇고 이틀이라….
회귀 전에는 하루면 충분했는데.
한편, 그는 그녀의 이야기를 통해 아직 이 시기에 고속도로가 원활히 정비되어 있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이전 삶에서는 하루만으로 충분히 설악산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틀이나 걸린다는 소리는 그만큼 여정이 고달플 것이라는 뜻이었다.
“…수면안대는 꼭 챙겨놔야겠네.” “수면안대?” “버스 안에서 자두려고요. 그리고 몇 번이나 야영을 하게 될 테니까 편안히 잘 수 있는 도구는 준비해놔야죠.” “…수면안대보다는 보온도구부터 챙겨야 하지 않을까?”
연화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마치 푸르른 수국을 연상케 하는 긴 머리칼이 한쪽으로 기울었다.
“연화 누나.” “응.” “최상의 컨디션은 편히 잠을 자야 유지할 수 있는 거예요. 수면안대는 그래서 반드시 필요한 거고요.”
“음…, 그러니?”
은하는 다른 코너를 제쳐두고서는 수면안대를 고르기 위해 쇼핑카트를 움직였다.
어깨에 하얀 천으로 둘러싸인 창을 짊어진 연화는 그의 말을 곱씹었다.
이내 그녀는 생각하기를 포기하며 그의 뒤를 따라갔다.
그러고는 진진한 표정으로 안대를 고르던 그에게 말을 걸었다.
“정말 은아랑 닮았구나?” “당연히 우리 누나 동생이니까요. 그런데 어떤 점이 닮았는데요?”
“가끔씩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거.”
깍지를 낀 두 손을 등 뒤로 돌려, 창을 껴안고 대답하는 류연화.
고개를 돌린 은하는 뚱한 얼굴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늘 같은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정도 그녀를 알게 된 은하는 그녀의 감정을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현재 그녀는 웃음을 참는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 누나가 왜 이런데….
은하는 신경을 끄기로 했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류연화에게 웃음을 참는 이유를 묻는다고 하더라도, 그녀는 저번처럼 시치미를 뗄 것이다.
차라리 좋은 수면안대를 고르는 게 나았다.
“누나도 하나는 골라두는 게 낫지 않아요?”
“나도?”
“누나도 종평이 있다고 했잖아요. 가는 길도 힘들고, 밖에서 자는 일도 많을 텐데 하나 사두세요.”
“음…, 그럴까?”
이 시기에 설악산은 다소 쌀쌀한 기온을 유지하고 있을 터였다.
수면안대 외에도 보온도구를 사둘 필요가 있었다.
은하는 머릿속으로 핫팩과 내복도 챙기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설악산이라니….
그는 퉁명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고양이의 얼굴이 그려진 수면안대를 주물럭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설악산은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된 영역이었다.
설악산 일대 곳곳에는 크고 작은, 색이 다른 던전이 분포하고 있었으니까.
더군다나 던전이 아닌 지역에서도 몬스터가 자주 출몰하기도 했다.
그만큼 상당히 위험한 곳이었다. 아카데미도 학생들의 안전을 위해 종평 동안 플레이어를 고용하겠다고 발표하였으니.
게다가─.
─응?
은하가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였다.
어느새 연화가 자신의 머리 위에서 코를 킁킁거리고 있었다.
그러다 눈이 마주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는 머리에서 코를 떼지 않았다.
은하는 얼음처럼 차갑게 보이는 얼굴을 올려다보며 눈을 깜빡거렸다.
이내 그녀는 살얼음이 녹는 것처럼 따스한 미소를 지었다.
“미안, 은아랑 같은 향기가 나서 무심코….”
“아, 네….”
과연 무심코 그런 것일까.
눈을 마주쳤는데에도 냄새를 맡지 않았던가.
은하는 떨떠름해하면서도 그러려니 받아들이기로 했다.
류연화란 이미지가 이제는 누나 친구 류연화란 이미지로 친근하게 변해 있었다.
그녀도 별다른 의미는 없었으리라.
“안대는 골랐어요?”
“음…, 이걸로 할게.”
수면안대를 고르느라 시간을 너무 지체해버리고 말았다.
은하는 다음 코너로 이동하기 위해 그녀에게 안대를 골랐는지 물었다.
그녀는 때마침 손을 뻗으면 닿는 위치에 있던 수면안대를 집었다.
퉁명스러운 얼굴의 고양이.
은하와 같은 수면안대였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그가 고른 안대는 검은색이었고, 그녀가 고른 안대는 하얀색이었다는 것.
“색만 다르지 같은 거네요?” “…응, 그러게.”
준비할 게 많았다.
은하는 쇼핑을 계속하기로 했다.
☆
설악산의 형세는 험악하다.
한반도의 척추라 할 수 있는 백두대간 중 하나에 속해 있는 설악산은 귀문일대의 마나가 기승을 부리는 지역이었다.
게다가 이후, 설악산 일대에는 규모가 크고 작은 던전이 여럿 존재하고 있었다.
따라서 선녀정부는 설악산 일대에 일반인의 출입을 금지했다.
오로지 정부의 허락을 받은 경우나 일반인이 아닌 플레이어일 경우에만 출입을 허용했다.
그러나 플레이어들도 웬만해서는 설악산 일대에 발을 들이지 않았다.
설악산 자체가 하나의 던전인 것과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노련한 플레이어들조차 아주 간혹 조난을 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물론 그렇게 해서 발견된 그들은 몬스터에게 사체가 헤집어지거나, 때로는 뼈만 남아 있거나, 불행히도 흔적만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더군다나 설악산은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도 않은가.
그러다 보니 설악산은 몬스터들의 마궁으로 통했다.
“…뭐야? 겨우 이것밖에 없어?”
“가, 가진 건 그게 전부입니다….”
“이놈 봐라?”
그러나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곳을 제 영역으로 삼는 사람들도 의외로 있는 법이었다.
서울에서 설악산으로 통하는 길은 굉장히 복잡했고, 강원도 주민들은 설악산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게다가 설악산은 한쪽 면이 동해를 마주하고 있었다.
어떤 면으로는 외부의 침입을 막는 폐쇄적인 지형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야. 정신 똑바로 차려, 임마.”
“…네, 네….” “너희 파티가 몇 명이었는데, 어?”
“…….”
“콱 씨, 대답 안 하냐?”
“…여, 여섯 명이었습니다….”
범죄자들은 그러한 곳으로 모이기 마련이었다.
그중에서도 지명수배를 당하거나, 사회에서 떳떳하게 살아가지 못하는 플레이어들이 설악산 일대를 찾고는 했다.
그리고 전국 각지에서 모인 그들은 언제부터인가 집단을 이루어 다시금 범죄를 저질렀다.
이처럼.
“근데 먹을 게 이것밖에 없냐고.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저, 저희가 가진 건 그게 전부입…컥…커억…!”
“장난하냐? 겨우 이 정도 양으로 설악산에서 며칠 동안이나 머무를 생각이었냐?”
슬레이어(Slayer)들은 저희들끼리 바닥에 무릎을 꿇고 벌벌 떨고 있는 플레이어를 보고 낄낄거렸다.
플레이어는, 모든 장비를 빼앗긴 남자는 제대로 고개도 들지 못하고 있었다.
손을 짚고 있는 지면에는 검붉은 피가 흥건히 고여 있었다.
남자의 피는 아니었다.
남자의 동료였던 이들의 피였다.
저들은 레인저가 정찰을 나간 사이 파티를 기습해 남자만 남겨버리고 모두 죽여 버렸다.
아니, 모두 죽여 버리지는 않았다.
“제, 제발, 그만….”
“아씨, 저 쌍놈들…. 저것들은 꼭 여자만 보면 눈이 돌아간다니까.”
“왜. 그럼 네가 한 번만….”
“아가리 다물렴. 뒈지고 싶니?”
남자는 눈을 질끈 감았다.
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눈에 담고 싶지가 않아서.
마음 같아서는 자신의 눈을 찌르고 귀를 잘라버리고 싶었다.
그야말로 지옥과도 같은 시간.
남자는 십 수 명의 슬레이어들을 상대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가디언이 제일 먼저 죽어버린 이상 서포터인 남자로서는 어찌할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하나…, 아직 방법이 있어…!
다만 아직 희망은 꺼지지 않았다.
남자는 흙이 손톱 밑으로 들어가는 것도 개의치 않고 주먹을 쥐었다.
정찰을 나간 레인저는 마나관리기구로부터 S등급으로 판정받았으며, 클랜 내에서 A등급으로 분류되었던 플레이어였다.
그라면 기척을 죽이고 잠입하여, 슬레이어들의 방심을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그때까지 참아야 한다.
남자는 이를 악물며 수모를 당하는 캐스터에게 조금만 더 버텨달라고 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그러나 희망은 부질없는 법이고, 그렇기에 누군가가 훅 불면 그대로 꺼지는 법이었다.
“─누가 네 속을 모를 줄 알고?”
“어머, 어떡하죠? 지금 텔레파시를 받았는데─.”
[─애타게 기다리고 있던 레인저는 저희를 만나자마자 그 자리에서 자결을 선택했다는데요?]까르르 거리며 웃는 텔레파시스트.
남자는 토끼 귀 사이로 스파크를 튀기며, 텔레파시로 말을 걸어오는 여성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었다.
[어쩜…, 불쌍해라.] [그래서 식량은 어디 있는데요?] [말 안 할 거예요?]듣고 싶지 않은 데에도 결국에는 들을 수밖에 없는 텔레파시.
남자의 정신이 천천히 무너져갔다.
무너진 건 남자만이 아니었다.
언제부터인가 캐스터는 흐리멍덩한 눈으로 새파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쳇…, 야, 죽여.”
그때 이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던 슬레이어가 혀를 쯧쯧 찼다.
더 이상 얻을 것도 없었다.
아무래도 식량은 이것이 전부였던 모양이다.
그녀는 슬레이어들에게 엄지로 목을 긋는 시늉을 보여주었다.
그녀의 지시를 받은 슬레이어들이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남자의 목에 칼을 그었으며, 삶을 포기한 여자의 숨을 끊었다.
“정말 짜증나네…, 먹을 게 없어. 몬스터만 득실거리는 산에서 어떻게 먹을 걸 구하란 말이야?”
여성 헌터가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씨부렁거렸다.
그녀는 요즘 들어 툭하면 히스테리를 부리고는 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국가로부터 도망친 슬레이어들은 설악산 일대에서 저희들끼리 부락을 만들어 생활하고 있었다.
때때로 설악산 일대를 찾는 플레이어들로부터 물품을 갈취하면서.
그런데 3년 전부터 슬레이어들의 수가 급증하기 시작하면서 식량을 구하기가 어려워진 것이다.
“썩을 놈들….”
여성 헌터는 사체를 처리하고 있는 슬레이어들에게 욕지기를 내뱉었다.
저들 대다수가 창해클랜과 단군클랜 출신이었다.
한때 국내에서 두 번째로 손꼽히던 클랜과 현재 국내에서 S등급을 받은 클랜 중 하나에 속해 있던 이들.
그런데 저들이 왜 이곳에 있냐하면 제1차 의정부 탈환전의 실패 그리고 길성준의 몰락 때문이었다.
그들은 제1차 의정부 탈환전에서 상관의 지시를 어긴 플레이어들과 길성준의 아래에서 비리를 저지른 이들이었다.
당시에 선녀정부는 그들 모두에게 중징계를 가했는데, 사전에 눈치가 빠른 이들이나 연줄이 있던 이들이 국가로부터 도망친 것이다.
설악산으로.
그러다 보니 슬레이어들의 규모는 제1차 의정부 탈환전이 끝나고 나서 급격히 늘어났다.
“레인저들은 설악산에 들어와 있는 플레이어들을 추적한다. 나머지는 나를 따라 부락으로 돌아가겠다!”
한숨을 쉰 여성 헌터가 외쳤다.
부락에 들어온 슬레이어는 저마다 무리의 수장을 따라야 했다.
슬레이어들의 규모가 늘어났으니, 규율은 중요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규율에서 도망친 그들은 슬레이어가 되어서도 결국 규율에 얽매여 있었다.
혼자 사는 데에는 한계가 있기에.
그래서 슬레이어들은 부락을 짓고 플레이어들을 사냥했다.
식량을 구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이윽고 여성 헌터는 무리를 이끌고 부락으로 돌아갔다.
그녀가 품은 고민은 슬레이어들이 품고 있는 고민이기도 했다.
☆
설악산에는 슬레이어가 존재한다.
사실 은하는 처음 종합능력평가를 설악산에서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슬레이어의 존재를 떠올렸다.
놈들은 범법자들이었다.
설악산은 그런 놈들의 소굴이었다.
…괜찮으려나.
마나관리기구도 슬레이어의 존재는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슬레이어들은 결계를 치고, 설악산 일대 여기저기에 거주지를 두고 있었다.
슬레이어들을 처리하려 했다가는, 자칫 잘못하면 크나큰 희생을 볼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마나관리기구는 슬레이어들의 거주지를 찾을 때까지 놈들을 토벌하지 않았다.
그렇게 강한 놈들은 아니었지.
상대하기 까다로운 놈들이었지만.
그로부터 설악산 작전이 떨어진 건 제2차 의정부 탈환전 이후였다.
선녀정부는 군대를 동원한 실책을 만회하기 위해 슬레이어 소탕작전을 진행했다.
그때 강현철은 설악산에 불을 붙이는 만행을 저질렀다.
슬레이어들은 불을 피해 달아나고, 숨을 쉬기 위해 산을 빠져나오다가 플레이어들에게 붙잡혔다.
당시 작전에 참전했던 은하는 그때 일을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놈들이 날뛸 리가 없겠지.”
은하는 침대에 드러누웠다.
슬레이어들은 수가 많지 않았다.
그러니 그들이 300명에 이르는 학생들을 습격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더군다나 중등아카데미는 이번에 베테랑 플레이어들을 고용하기까지 했으니.
교관들도 설악산이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 알고 있기 때문에 만전을 기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러니 슬레이어에 대한 걱정보다 설악산에 출몰하는 제6위계 몬스터나 신경 쓰기로 했다.
“…마침 잘됐어.”
설악산에는 마나 드레인을 사용하는 몬스터가 출몰했다.
마나 드레인.
상대의 마나를 취해 체내 마나를 일부 회복하는 마법은 체내 마나가 적은 자신에게 필수적인 마법 중 하나였다.
이전 삶에서도 그는 슬레이어들을 퇴치하는 한편, 마나 드레인의 스킬석을 얻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다.
이번에도 나오면 좋겠는데.
자리에서 일어난 은하는 다시금 배낭에 검은 가시나무와 포션을 넣었는지 확인했다.
“…아, 애들한테도 말해놔야겠다.”
혹시 모를 경우에 대비해서.
은하는 친구들에게 톡을 보냈다.
특히 블루클로를 가지고 있는 파랑에게는 필히 가지고 오라고.
리라이프 플레이어 2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