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life Player RAW novel - Chapter 278
결계가 흔들렸다.
처음에는 근처를 지나던 몬스터가 운이 나쁘게 결계 속에서 길을 잃고 난동을 부리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한 번 거세게 요동치더니, 쩌적 소리를 내면서 유리조각처럼 와장창 부서지기 시작한 것이다.
느낌이 안 좋아…!
권지나의 직감이 울리고 있었다.
오랜 시간, 플레이어로서 활동한 그녀는 이 감각이 무엇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일이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감각.
그렇다면 어디에서 잘못되었다는 것인가.
그러나 지금은 그것을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캐스터들은 어서 결계를 복구해! 레인저는 경계부근을 순찰한다!”
그녀가 그 말을 내뱉기도 전, 이미 캐스터들은 부서지기 시작한 결계를 복구하려 하고 있었다.
구멍이 난 장독을 메운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캐스터들은 피를 쿨럭쿨럭 토하며 체내 마나를 발현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힘을 합치는 데에도 무너지는 결계의 추세를 돌릴 수가 없었다.
단순히 시간을 벌 뿐이었다.
차라리 결계를 해제하고 새로 구축하는 편이 나았다.
그들이 자신들의 위치를 노출당할 위험을 감수한다면야.
도대체 누구지?
누가 결계를 부순 거야?
이것은 몬스터의 소행이 아니었다.
플레이어의, 그것도 상당히 무식한 사람의 소행일 터.
“하루만 버티면 됐는데….”
권지나는 혀를 찼다.
당초 그녀의 계획은 아카데미 학생들 전원을 납치하고, 그들을 좋게 회유하여 식량만 빼앗고 돌려보낼 예정이었다.
그런데 몇몇 슬레이어들로 인하여 일이 꼬여버렸다.
그래서 그녀는 100여명의 학생을 억압해두고 있다가 풀어줄 계획으로 바꿨다.
아카데미 학생들이 산을 내려가는 시기를 노리며.
그때 슬레이어들은 학생들을 풀고, 자신들은 잠시 설악산 깊은 곳에서 잠적하고 있을 생각이었다.
그때까지 하루만 참으면 되었건만.
결국 결계가 무너지고 말았다.
…온다!
은신처의 위치가 노출되었다.
필시 오랜 시간도 흐르지 않아서 플레이어들이 몰려들 것이다.
그렇게 되면 양측의 충돌은 피할 수 없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슬레이어들만 피해를 입을 것이다.
권지나의 판단은 즉각적이었다.
“지금부터 장소를 이탈한다! 텔레파시스트!”
그녀는 텔레파시스트를 불렀다.
때마침 그녀가 걸어가던 방향에는 심수지가 있었다.
한창 여우 아인을 패던 심수지는 이름이 불리자마자 토끼귀를 퍼뜩 세웠다.
“다른 애들에게도 전달해줘.” “응, 알았어. 근데 얘네는 어떻게 할 거야?” “…플레이어들이 올 테니 여기에다 버리고 간다. 시간은 벌 수 있겠지.”
“응, 알았어.”
이내 심수지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여우 아인을 향해 무릎을 굽혔다.
여우 아인이 몸을 부들부들 떨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언니가 불쌍해서 말해주는 건데.] […….] [우리 같은 아인은 희망을 품으면 안 돼. 괜히 기대하게 되거든.]그녀는 여우 아인을 쓰다듬으며, 까르르 웃었다.
마치 여우 아인을 비웃듯.
마치 자조하듯.
[사람들이 너한테 잘해주는 것은 다 너한테 바라는 게 있어서란다.] [마음을 믿고 맡길 수 있는 동료도 죽음 앞에서는 등을 돌리는 법이야. 때로는 자신의 이득을 위해 친구를 팔기도 하는 법이고….] […네가 아직 몰라서 그런 거야. 그러니 너무 사람을 믿지 마렴, 얘. 우리랑 그들은 다른 존재니까.]제1차 의정부 탈환전.
잠을 자던 동료들을 죽이고 달아난 그녀는 인생을 돌아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앞에서 슬레이어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그녀는 자신이 살 수 있는 세상을 찾은 것이다.
아니─.
[─그래도 전 친구들을 믿어요.]─도망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이 굴하지 않은 여우 아인이 반짝반짝 빛나 보였다.
고개를 돌린 심수지는 심지가 굳은 그녀를 돌아보았다.
호기심과 부러움이 들었다.
저 여우 아인은 어떤 몬스터를 베이스로 삼고 있는 것인지.
저 아이가 굳게 믿는 친구들이란 대체 어떤 사람들인지.
그러나 심수지는 떠오르는 생각을 마음속에서 지워버렸다.
대신 이 말을 전했다.
[─그래, 그럼 그렇게 살아보든지. 후회해도 나는 몰라.]그리고 이 말도.
[안녕─, 진서나.]☆
진파랑이 의식을 찾으면서 수색은 탄력을 더했다.
은하가 자신의 기억과 대조하면서 설악산 일대를 뒤지면, 하양은 결계에 작은 구멍을 뚫었다.
그리고 파랑은 작은 구멍 안으로 서나에게 텔레파시를 보냈다.
만약에 텔레파시가 닿지 않았다면 그들은 얼른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진서나!]그러던 중, 파랑은 서나의 위치를 파악해냈다.
그리고 은하의 판단은 즉각적으로 이루어졌다.
“─하양아, 그냥 결계를 부숴버려.”
“응!”
하양은 그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그동안 모아두고 있던 체내 마나를 끄집어냈다.
대기가 진동했다.
그녀 역시 이토록 막대한 마나를 발현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당황하지 않으면서 손바닥 위로 집결시킨 체내 마나를 결계를 향해 내리쳤다.
일순 결계가 흔들리고, 그녀의 공격을 직격당한 부분이 와장창 깨져나갔다.
이윽고 거대한 틈이 벌어진 결계는 삐걱거리면서 붕괴를 시작했다.
…진짜 대단하네.
도대체 얼마나 많은 마나를 체내에 담아두고 있는 거야?
은하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그녀는 분명 자신이 바라던 결과를 충분히 만들어내기는 했지만, 직접 눈으로 목격하니 놀라움밖에 나오지 않았다.
체내 마나가 은아에 비견할 만한 양을 품고 있었다.
물론, 은아가 그보다 더 많은 양을 품고 있겠지만.
그럼에도 탐이 나는 재능이었다.
정하양은 반드시 끌어들여야 하는 인물이었다.
“일단 하양이 너는 포션을 마시며 마나를 회복하고 있어.”
“응. 그런데 은하야 정말 괜찮아? 결계를 이렇게 손상시켜버리면…, 위험하지 않을까?” “위험? 뭐가?”
한편, 포션을 두 손에 쥔 하양은 불안해하며 부서져 내리는 결계를 가리켰다.
“이러면 안에 있는 슬레이어들이 눈치 챌 것 같은데….” “눈치 채라고 한 건데?” “응?”
하양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래도 그녀는 녀석들의 부락에 몰래 잠입해 학생들을 데려올 것을 생각한 모양이었다.
크나큰 오산이었다.
그는 겨우 그런 선에서 끝을 낼 생각이 없었다.
100여명의 학생들을 빼돌리겠다는 것 자체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고.
“이참에 다 쓸어버려야지.”
“…우리가 할 수 있을까?” “나 못 믿어?” “…아니, 믿어.”
주저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는 정하양.
그녀는 다른 의문을 표했다.
“하지만 어떻게?” “쪽수에는 쪽수로 상대해야지.”
은하는 결계 안으로 발을 들이며 그녀의 물음에 대답했다.
대놓고 결계를 부수는 것으로 인해 이들이 얻을 수 있는 이점은 모두 두 가지였다.
하나는 아카데미 교관과 플레이어들이 학생들의 위치를 추적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
머지않아 상황을 파악한 사람들이 슬레이어들을 습격하러 올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몬스터를 불러들이는 거야.” “…뭐?”
하양은 그가 입꼬리를 씩 올리며 말하는 모습에 흠칫했다.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몬스터를 불러들인다.
정상적인 사람이면 생각하지 않을 발상이었다.
“설악산 곳곳에는 몬스터들이 서식하고 있어. 그런데 놈들은 느닷없이 거대한 마나가 감지됐을 때, 어떻게 반응할 것 같아?” “…….” “놈들은 마나를 탐하는 몬스터야. 놈들이 이만한 마나를 감지하고도 조용히 숨만 죽이고 있을 리 없지.”
마치 그의 말에 호응하듯.
바람이 거세게 불고, 어둠 저편이 시끌벅적해졌다.
짐승의 울음소리가 아니었다.
몬스터가 내는 소리였다.
숨을 내쉬는 소리도, 지면을 차는 박자도 다른 몬스터들이 곳곳에서 자신의 기척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수는 수십을 넘었다.
어느새 숲속은 적의와 살의 그리고 악의로 가득 차 있었다.
마나를 통해 정보를 읽어낸 하양이 무심코 겁을 먹을 정도로.
“─괜찮아.”
그때 은하가 그녀의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하양은 안심이 됐다.
그러다가 다시금 무서워졌다.
은하는 저 멀리에서부터 달려오는 몬스터들과 분간이 되지 않을 만큼, 악의를 몸에 두르고 있었기에.
“저놈들의 먹잇감은 하양이 네가 아니야. 이제 곧 몬스터에게 반응해 체내 마나를 발현할 놈들이지. 너는 체내 마나를 잘 갈무리하고 있어.”
“…….”
“이만큼 난장판으로 만들어놨어. 아마 지금쯤 피가 말리는 심정으로 우왕좌왕하고 있을걸?”
어둠 속을 노려보면서 낄낄거리는 노은하.
하양은 그런 그가 낯설었다.
그러다가 살기를 머금은 눈동자가 자신을 향할 때에는 자신도 모르게 흠칫 떨고 말았다.
“그러니 하양이 넌 애들을 지키는 보호마법을 전개하고 있어줘. 지금 네 실력이라면 플레이어들이 지원을 와줄 때까지 버틸 수 있을 거야.”
“…은하 넌 어떻게 하려고?”
이상하게 은하가 멀게 느껴졌다.
하양은 마음을 굳게 먹으며 그에게 물었다.
그는 대답이 없었다.
그의 침묵은 무언가를 의미했다.
하지만 하양은 그 의미를 알아서는 안 될 것 같다고 직감했다.
“…응, 아니야. 나한테 맡겨!”
그래서 그녀는 최대한 밝은 얼굴로 그에게 말했다.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인 그는 “응, 그럼 부탁할게.”하고 말하며 고개를 돌렸다.
“파랑 형, 망토 내놔.” “뭐? 야, 이 망토를 주면 난 대체 뭘 입으라고!”
“잔말 말고 내놔.”
“…젠장….”
조금 전, 의식을 되찾은 진파랑은 자신이 알몸인 것에 깜짝 놀랐다.
처음에는 은하가 벗긴 게 아니냐며 대차게 의심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은하에게 한 번 얻어터진 그는 그 이후로 망토를 몸에 꽁꽁 두르고 잠자코 있었다.
그런데 망토를 빼앗겠다고 하니, 진파랑이 주변이 떠나가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이 역시 은하의 눈빛을 읽어내고는 몸에 두르고 있던 망토를 건넸지만.
“놈들은 몬스터를 상대해야 해서 네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할 거야. 그래도 불안하니까…, 이것도 같이 가져가.”
은하는 망토를 하양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일순 동그란 눈망울이 흔들렸다.
그녀는 한순간 은하의 소맷자락을 붙잡았다.
이대로 보내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러나 자신이 모르는 얼굴을 한 그를 보고 있자니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생뚱맞은 소리를 했다.
“이거…, 파랑 오빠가 알몸으로 입고 있던 망토인데…, 냄새 나.”
“뭐!? 나한테 냄새가 뭐가 난다고! 나한테 얼마나 좋은 냄새가 나는데! 나 페브리즈 진파랑이야, 진파랑!”
문맥을 알 수 없는 말.
은하는 등 뒤에서 항의를 해대는 진파랑을 무시하며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망토가 벗겨지지 않게끔 단단히 조이고, 마지막으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머리 흐트러지잖아.”
“애들을 부탁할게, 조심해.”
“…응, 알았어. 은하 너도 조심해.”
하양은 위장마법과 어베니어즈 클로크의 마법을 동시에 전개했다.
어둠 속에 녹아든 그녀의 존재는 더 이상 감지할 수 없었다.
그렇게 숲속에는 은하와 진파랑, 둘만이 남았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할 건데?” “어떻게 하기는….”
진파랑은 이제는 알몸이 된 것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가랑이 사이를 대놓고 드러내며 물었다.
더러워서 시선을 피한 은하는 이내 머리 위를 올려다보았다.
체내 마나를 발현했다.
그동안 그는 하양이 있었기 때문에 기세를 억누르고 있었다.
모르는 척하고 있었다.
자신이 몬스터의 살기와 인간의 살기를 구분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모를 줄 알았어?”
“…큭…!”
단숨에 나무를 벽면보행한 은하는 보초를 서고 있던 헌터 슬레이어를 공격했다.
다급하게 공격을 막은 슬레이어는 나무에서 지면으로 떨어졌다.
그가 황급히 총기를 거머쥐면서, 나무 위에서 일직선으로 떨어지는 은하를 향해 겨냥하려고 했다.
스티지안 아이
슬레이어의 조준점이 틀어졌다.
은하는 뺨 옆을 스쳐지나간 탄환을 무시했다.
이 정도는 상처도 되지 않았다.
그는 어깨 뒤까지 끌어당긴 검에 마나를 실었다.
검은 가시나무가 마나효율을 증폭시켰다.
마나 크래셔
헌터 슬
레이어의 목이 떨어졌다.
슬레이어들에게 정보를 알리려던 그는 그대로 세상을 떠났다.
“와우….”
목이 떨어진 남자의 몸이 풀밭에 픽 쓰러졌다.
그것을 지켜본 진파랑은 감탄하며 박수를 쳤다.
그는 눈앞에서 사람이 죽었음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파랑이 형, 계속 그 꼴로 있으면 눈이 더러워지니까 옷이나 입어.”
“거, 새끼…, 말 진짜 더럽게 하네. 야, 그리고 내가 입을 옷이 여기에 어디 있다는 거야?”
“없기는 왜 없어? 여기 있잖아.”
은하는 시큰둥하게 머리가 날아가, 단면에서 피를 콸콸 쏟아내고 있는 남자의 사체를 가리켰다.
진파랑이 우웩 하며 비위가 상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투덜투덜 다가가, 사체에서 옷을 벗겨서는 피가 묻은 옷을 입었다.
기장이 긴 부분은 접어 올리면서.
그 행동이 너무 자연스러웠다.
한때 빈민가에서 살았던 파랑에게 사체를 뒤지는 일은 윤리에 반하는 행동이 아니었다.
“지금부터 우리도 놈들의 부락으로 진입할 거야.”
몬스터들이 울고 있었다.
저 너머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발 빠른 몬스터들이 먼저 난동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두 사람은 그 소리를 들으면서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나는 근처를 배회하면서 놈들을 해치울 거야. 형은 어떻게 할래?”
은하는 슬레이어들이 도망치게 내버려둘 생각이 없었다.
친구들의 안위를 확인하는 대로, 놈들을 사냥할 생각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진파랑은 거치적거렸다.
차라리 그가 친구들을 지키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은하야.”
그러나 진파랑의 대답은 달랐다.
“나도 죽여도 되냐?”
투지로 불타는 눈.
아니, 살의로 이글거리는 눈.
선의에는 선의로.
그리고 악의에는 악의로.
당한 만큼 갚아주는 진파랑이 바로 그곳에 있었다.
이윽고 흔들림 없는 진파랑의 눈을 직시한 은하는 입꼬리를 올렸다.
“─마음에 안 들면 다 죽여 버려.”
이 밤, 은 기지개를 폈다.
리라이프 플레이어 2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