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life Player RAW novel - Chapter 28
세상은 내 마음대로 움직인다.
불과 1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은혁은 자신이야말로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했다.
부모님은 그가 바라는 건 무엇이든 이루어주었다.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그 이상을, 가지고 싶은 것이 있으면 그 이상을,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그 이상을 들어주었다.
이웃 사람들은 그가 말썽을 일으키더라도 혼내지 않았다. 오히려 군것질거리를 내밀어주고는 했다.
동네 아이들은 그만 졸졸 따라다녔다. 아이들 사이에서는 그와 놀지 않으면 유행에 뒤떨어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은혁은 매번 유행하는 놀이를 선도하며 아이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생각하는 대로 이루어지고, 바라는 대로 실현되니 세상의 중심은 나일 수밖에.
은혁은 자신이 눈을 감거나 잠이 들면 세상도 불을 끈 것처럼 깜깜한 어둠에 빠져든다고 생각했다.
유치원생이 되어도 그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확고해졌다.
아이들은 자신감에 차 있는 그가 특별하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운동신경이 뛰어난 데다, 산술이나 글자도 스펀지처럼 흡수하니 그는 아이들의 우상이었다.
그가 점점 아이들이 되고 싶은 우상이 될수록 늘푸른솔반에는 보이지 않는 카스트가 생겨났다.
이 나이의 아이들은 거의 본능적으로 사람과 사람 사이, 인간관계에서 더 나은 입지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누구와 친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러면 그 누구는 어떤 사람인가. 아이들은 다른 아이들이 고개를 끄덕일 정도로 인지도를 가진 사람과 친할수록 인간관계에서 더 나은 입지를 차지하고 발언권을 가지는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조건에 들어맞는 아이는 늘푸른솔반에서 최은혁이었다.
유치원에 들어오기 전부터 그를 알고 있던 아이들은 그 점을 이용해 입지를 공고히 했다. 이 아이들은 은혁이 다른 아이들에게도 대단하게 보이도록 치켜세워주고, 그러는 한편 자신이 얼마나 그와 친한지를 과시했다.
그렇게 은혁의 이름을 등에 업은 아이들은 활개를 치고다녔다. 은혁을 위시한 아이들이 늘푸른솔반의 분위기를 주도할수록 이들의 인지도는 더 올라가고, 다른 아이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늘푸른솔반은 그야말로 은혁의 작은 왕국이었다. 처음부터 그와 대등하게 비견될 아이가 없었으니 기름진 토지에 깃발을 꽂은 격이요, 무혈입성이었다.
남자아이들은 모두 은혁이 말하는 대로 들어야 했다. 그와 어울리지 못하는 아이들은 늘푸른솔반의 카스트에서 하위에 놓이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심기를 거스른 아이는 최하위에 놓이며, 다른 아이들이 상대해주지 않는 취급을 당해야 했다.
여자아이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민지가 여자아이들의 중심이 되었을지라도, 여자아이들의 호감마저 어찌할 수는 없었다.
은혁은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늘푸른솔반에서 가장 많은 인지도와 가장 높은 발언권을 가진 남자아이였으니까. 그에게 대적할 남자아이는 아무도 없었으니까.
여자아이들에게 다른 아이들보다 월등한 힘을 가진 은혁은 관심과 호감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남자아이들이 자신의 발언권을 높이기 위해 그를 따랐다면, 여자아이들은 자신에 대한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그와 친해지려 했다.
그러니 늘푸른솔반은 은혁이 다스리는 굳건한 왕국이었다.
집에서도, 밖에서도, 유치원에서도. 모든 일이 그에게 유리하게 흘러가니 자신감은 끝을 모를 정도로 치솟았다.
나야말로 이 세계의 주인공이다.
자신은 특별하다는 생각은 점점 강해졌다.
하지만 그가 만든 왕국에 점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저 작은 균열이었다.
은하는 안 이러는데.
은하는 엄청 착해.
너희 은하 모르지?
노은하.
언젠가부터 노은하라는 아이의 이름이 들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은하라는 이름을 꺼낸 아이들은 민지의 집 근처에 살고 있었다. 은혁의 집 근처에 살고 있지 않아 높은 입지를 차지하지 못했던 아이들이었다. 번번이 은혁이 주도하는 놀이에서 큰 역할을 맡지 못하거나 소외되곤 했던 아이들이었다.
언젠가부터 이들은 은혁이 무언가를 주도할 때마다 은하의 존재를 언급하며 불만을 늘어놓고 있었다.
은하는 엄청 어른스러워.
정말?
응. 그거 모르니? 은하가 은아 언니 동생이잖아.
은아 언니라면 나도 알지! 우리 언니 친구잖아!
나 저번에 은아 언니 봤어. 엄청 예쁘더라.
여자아이들 사이에서도 은하의 이름이 거론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은하를 알고 있던 여자아이들은 그를 은혁에 비견되는 유일한 남자아이라고 망설임 없이 생각하고 있었다.
은하가 도대체 누군데!
반대로 은하를 모르는 아이들은 이들이 절로 가슴을 펴며 그를 칭찬하는 모습을 이해할 수 없었다.
노은하?
응. 민지 너는 어렸을 때부터 은하랑 친구라며.
친구 아니야. 집이 옆집인 것뿐이지.
그래서? 은하라는 애는 어때?
뭐, 최은혁보다는 낫지.
이윽고 늘푸른솔반의 모든 아이들이 은하의 이름을 듣게 되었을 때, 민지가 그때를 노려 쐐기를 박았다. 여자아이들 사이에서 최상위 카스트에 앉아 있던 그녀가 은하를 높이 사니 그에 대해 모르는 여자아이들도 조금씩 흥미를 가지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은혁의 짓궂은 장난이 여자아이들 사이에서 거론되던 상황이었다.
은혁의 입지는 확연하게 줄어들고 있었다.
그래도 그는 불안해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자신이야말로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은하가 올 때까지는.
‘…이름은 노은하고, 6살이야. 앞으로 잘 지내자.’
은하는 늘푸른솔반에 들어오는 순간, 아이들로부터의 인기는 예정된 것이었다.
흥, 저런 애가 어디가 멋지다고.
은혁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은하는 성격이 명랑할 것 같지도 않았고, 운동을 잘할 것 같지도 않았다. 하물며 질문에 답하는 모습에는 지루하다는 감정이 묻어나오고 있는 판이었다.
실제로 그에 대해 궁금해 하던 아이들은 그의 성의 없는 태도를 보고는 금세 태세를 전환했다.
그런데도 그를 알고 있던 아이들은 자신 있게 어깨를 펴고 다녔다.
마음에 안 들어.
자신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홀로 놀려 하니 더더욱.
그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심기가 상한 은혁은 그를 따돌리고 다른 아이들을 데리고 놀려 했다. 이 반에서 누가 왕인지를 알려주기 위해 그를 외톨이로 만들 생각이었다.
그러다 툭하면 울음을 터뜨리는 하양을 놀리게 되었고.
‘유치하다, 유치해.’
은하가 위에서 내려다보는 태도로 한심하다는 말을 내뱉으니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오르는 은혁이었다.
이게 유치하다고?
어이가 없었다.
은혁이 사과하라는 식으로 노려보았는데에도 은하는 요지부동이었다. 오히려 은하는 시니컬한 웃음을 지으며 같은 말을 내뱉었다.
‘유치해 죽겠다, 진짜. 그게 재미있냐.’
‘…죽고 싶어?’
은혁이 으레 이런 말을 내뱉으면 아이들은 꼬리를 내리기 일쑤였다.
그런데 은하에게는 그의 위협이 통하지 않았다. 해볼 테라면 해보라는 얼굴을 보니 되레 주춤할 정도였다.
그때부터였다.
그때부터 은하는 여자아이들 사이에서 하양을 구해낸 동화 속의 왕자님과 같은 모습으로 비추어졌다. 그 동안 은혁의 편을 들던 여자아이들은 빠른 태세 전환을 보이며 은하에게 몰려들었다.
남자아이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은혁이 그와 놀지 말라고 엄포를 내렸음에도 동네에서 은하와 놀던 아이들을 시작으로 그에게 몰려들었다.
그때마다 은하는 귀찮다는 식으로 아이들을 물렸지만, 그래도 그는 떨어지지 않는 인지도를 가지게 되었다.
더군다나 은하가 간혹 생각해낸 놀이는 은혁이 고안해낸 놀이보다도 재미있었다.
어느덧 아이들 사이에서 은하는 운동신경이 뛰어난데다, 머리도 좋고, 시크하지만 자신에게만 잘해주고, 무엇보다 굉장히 어른스러운 아이로 통했다.
아이들이 진정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어른이 되고 싶다는 것이다.
어른스러운 이미지를 가진 은하에게는 아이들의 바람을 실현해줄 인지도가 있었다. 어느새 늘푸른솔반에서는 은하와 어울려야만 최전선에서 유행을 받아들이고, 어른스러운 이미지를 구축할 수 있다는 인식이 생겨났다.
말도 안 돼.
은혁은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던 세상은 마치 거짓말이었다는 것처럼 무너진 것이다.
그는 점점 은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상을 멀리서나마 지켜보면서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자신감이 떨어졌다.
그때 그를 붙잡아준 것은 어느 TV프로그램이었다.
채널을 돌리다 우연히 접한 그는 유명 플레이어에 대해 다루는 프로그램 방송에 눈을 빼앗겨버렸다.
좋아하는 만화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붉게 물들인 머리.
어떤 역경에도 굴하지 않을 것만 같은 자신감에 찬 얼굴.
그리고 온몸에 불꽃을 두르고 검을 휘두르는 모습.
[X도 안 되는 게.] [그만 꺼져.]강현철.
한강에 나타난 크라켄을 쓰러뜨리는 그의 모습은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나도 저런 사람이 되고 싶다. 아니 되고 싶어!
그래서 은혁은 장난감 칼을 사달라고 부모님에게 졸랐다. 부모님은 플레이어가 되겠다고 소리치는 그에게 당황하면서도 그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때부터 은혁은 유치원에 장난감 칼을 가지고 다니기 시작했다. 마침 남자아이들 사이에서도 그 방송을 본 아이들이 많았는지, 유치원에서는 어느덧 칼싸움을 벌이는 일이 늘어났다.
그의 인지도가 떨어지기는 했어도 운동신경이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다시 그가 남자아이들 사이에서 두각을 드러내게 된 것은 불가능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물론, 은하가 나타나 그의 자리를 차지하기는 했어도 은혁은 조금도 실망하지 않았다.
주인공은 역경에 처할수록 강해지는 법이니까.
더, 더, 더. 더 강해져야 해.
나는 주인공이니까. 용사가, 플레이어가 되고 싶으니까.
신기하게도 검을 휘두를수록 마음은 차분해졌다. 언제부터는 아이들 사이에서 골목대장을 하는 일이 얼마나 유치하고 부질없는 짓인가를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니 아이들이 그에게서 멀어지더라도 은혁은 묵묵히 검을 휘둘렀다.
“또 칼싸움 연습하는 거야?”
“칼싸움 아니야. 검술 훈련이야.”
“…그래?”
“어.”
이날도 은혁은 화단에 나와 장난감 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치는 동작을 100회 채우기 전에는 쉬지 않겠다는 의지로 검을 휘두르는 중이었다.
그런 그에게 하양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녀는 그가 휘두르는 검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는 고개만 갸웃거렸다.
그러다 하는 말이라고는,
“은하가 더 멋지게 휘두르던데.”
“머, 멋지다고 좋은 게 아니거든!”
준비도 없이 훅 치고 들어온 말에 은혁은 휘두르던 검을 놓치고 말았다.
분하지만 그도 은하가 검을 멋지게 휘두른다는 걸 알고 있었다. 말로 표현할 수는 없어도 생각없이 휘두르는 아이들과는 다르게 검이 지나가는 궤적이 유려하고 다음 동작으로 이어가는 모습이 부드럽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른 사람에게 말은 하지 않았어도 은혁은 은하가 검을 휘두르는 자세를 떠올리며 연습을 하던 중이었다.
“여기는 왜 온 거야? 딴 데 가서 놀아.”
“아이스크림 주러 왔어. 빠삐코 먹을래?”
한 손으로는 탱크보이를 빨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빠삐코를 내미는 정하양. 그녀가 내미는 아이스크림을 보고 은혁은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덥기는 했다.
아니 더웠다. 무진장.
검을 몇 번 휘두르지도 않았는데 은혁의 얼굴에서는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중간에 몇 번 휘두르는 것도 까먹었으니 그만 쉬지 뭐.
손등으로 땀을 닦아낸 은혁은 하양이 내민 아이스크림을 받으려 했다.
그때 또 훅 치고 들어오는 하양이,
“은하는 하던 일은 끝내고 먹는데….”
아직 어리네.
어째서인지 하양이 말을 끄는 뒤에는 그런 말이 들리는 것 같았다.
아니, 확실했다. 그녀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안 그래도 마저 휘두르고 먹으려고 했어!”
“더운데 아이스크림 먹고 해. 아빠가 더위 먹을 수도 있다 했어.”
이게 먹으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눈살을 찌푸리던 그는 하양이 말없이 내미는 아이스크림을 마지못해 받았다.
얘도 변했네.
은하와 어울리는 아이들은 어딘가 어른스러워진 것 같았다.
정하양도 그랬다. 조금만 건드려도 울상을 짓는 아이였던 그녀가 1년 사이에 변한 것이다.
“이제 잘할 것 같아? 칼싸움.”
“칼싸움 아니라니까. 검술 훈련이라고.”
“어차피 은하도 못 이길 거면서.”
“큭…!”
그리고 짓궂어졌다. 이제는 은혁을 놀릴 정도로 강해진 그녀였다.
“그런데 조금 시끄럽지 않아?”
“뭐가?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데?”
“애들이 막 소리 지르는 것 같은데?”
시끄럽다고?
아이스크림을 물고 있던 은혁은 귀를 기울였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매미가 우는 소리만─.
어?
매미가 우는 소리에 섞인 아이들의 비명.
무언가 자신이 모르는 일이 일어난 것만 같았다.
리라이프 플레이어 0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