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life Player RAW novel - Chapter 280
정하양이 펼친 하트여왕의 선언은 몬스터의 접근을 차단하는 동시에 놈들의 공격 중 일부를 되돌려주는 마법이었다.
그러나 몬스터들은 굴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수가 늘어만 나는 놈들은 제 목숨을 아끼지 않으면서 방벽에 몸을 부딪쳐댔다.
그만큼 놈들에게 방벽 안에 있는 학생들의 마나는 매우 먹음직스러운 것이었다.
“서나야, 교관님들은 어떻게 됐대? 아직도 오고 있는 중이래?” “조금만 더 기다려 달래. 이쪽으로 오고 있다는 텔레파시스트 언니가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해.” “…그래.”
상황은 절망적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희망적인 건 아니었지만.
교관들과 플레이어들이 올 때까지 하트여왕의 선언을 부수려고 하는 몬스터들을 상대하고 있어야 했다.
하양의 마나는 무한하지 않았으며, 조금이라도 그녀의 부담을 덜어줘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은혁은 하양이 가져온 포션을 들이켰다.
다음 전투를 준비하기 위해서.
“괜찮냐?” “나는 괜찮아. 민호 너는?” “아직은 할 만해.”
“할 만하기는…. 가만히 좀 있어. 이러면 치료를 못하잖아.”
한편에서는 민호가 은우의 부축을 받으며 걸어오고 있었다.
현재 학생들은 방벽 바깥에 있는 몬스터들을 견제하는 중이었다.
그들 중에서 은혁과 민호의 역할은 학생들이 어찌하지 못하는 몬스터를 상대하는 것이었다.
그러다 민호는 조금 전 전투에서 어깨를 다치고 말았다.
다행히 크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안정을 취해 몸을 회복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몸을 돌보지 않았다. 차은우가 뚱한 표정을 지었음에도, 그는 손에서 검을 놓지 않았다.
“진짜 내 말은 하나도 안 듣고…. 다치면 안 돼? 민호 너 또 다치면 내가 화낼 거야. 알았어?”
“알았어. 너 화나게 안 할게.”
그의 팔을 붙잡으며 간절한 얼굴로 올려다보는 차은우.
민호는 그녀의 손을 잡아 내리며 약속했다.
서나의 역할이 텔레파시스트라면, 현재 은우의 역할은 서포터였다.
그녀는 방벽 안에서 부상을 당한 학생들을 치료하고, 학생들을 다독이는 역할을 해야 했다.
“서나야, 이제 나도 갈게.” “은혁아.” “응. 왜?” “너도 다치지 말구.”
“…응, 너도 조심해.”
그렇게 민호가 다가오고 있었다.
서나에게 손을 흔든 은혁은 이내 그와 나란히 걸으면서 정면을 주시했다.
조금 전, 민호의 어깨를 다치게 한 몬스터는 아직도 방벽 밖에서 행패를 부리고 있었다.
놈은 아주 영악했다.
놈은 몸으로 방벽을 들이박는 몬스터들과 달리, 눈에 보이는 모든 걸 방벽에 집어던졌다.
게다가 하트여왕의 선언의 효과가 미치지 않는, 멀리 떨어진 거리에서.
그러다 보니 물리적인 충격을 받은 방벽이 흔들리고 있었다.
하양의 부담이 증가한 것은 물론, 학생들이 다시 불안해했다.
더군다나 놈은 조금 전부터 슬레이어들의 사체를 집어던지면서 학생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있었다.
“최은혁, 저 놈…, 몇 위계일 것 같냐?”
“나도 모르겠어. 최소 제8위계…, 어쩌면 제6위계가 아닐까.”
흙으로 빗은 듯한 거인.
바위도 거뜬히 짊어지는 공격력과 검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방어력을 자랑하는 놈이 이죽거리고 있었다.
조금 전에 도망친 두 사람을 어서 죽이고 싶다는 듯이.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지만 놈에게 내 공격은 통하지 않았어. 반대로 네 공격은 통했고. 그러니까 최은혁 네가 놈을 죽여야 해.”
“…알겠어. 그럼 엄호를 부탁할게.”
“부탁한다.”
두 사람은 서로 역할을 분배했다.
민호가 움직임이 둔한 녀석을 견제하고, 은혁이 녀석을 죽이는 것으로.
두 사람은 체내 마나를 발현했다.
쿵쿵 뛰는 심장에서 솟구쳐 오른 마나가 팔과 다리를 휘감으며 신체능력을 끌어올렸다.
동시에 놈이 알 수 없는 소리를 질러댔다.
어디 한 번 와보라는 듯이.
구멍이 숭숭 뚫린 고목과도 같은 이목구비를 히죽인 놈이 달려드는 민호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큭…!”
거센 바람이 이마를 때리기 직전.
민호는 이를 악물고 슬라이딩하며 주먹을 피해냈다.
두 번은 속지 않아.
그는 조금 전에도 녀석의 공격에 당한 적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뛰어오르지 않고, 위험을 감수하며 녀석의 품 안으로 뛰어드는 짓을 저지른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놈은 다른 주먹을 허공에 휘두르고 있었다.
필시 그가 허공으로 뛰어올랐다면 주먹을 피하다 다른 주먹에 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마나 크래셔
그리고 바로 그때.
녀석이 주먹을 휘두르고 난 뒤에는 잠시 무방비한 상태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던 은혁이 달려들었다.
마나를 품은 검격이 몬스터의 목을 베었다.
깜짝 놀란 놈이 두 손을 휘둘렀다.
그것이 더욱 놈의 허점을 드러내고 말았다.
주먹의 위력은 결단코 무시할 수 없었지만, 맞지만 않으면 그만이었다.
두 사람은 뒤로 물러나며 우왕좌왕 주먹을 휘두르는 놈을 몰아세웠다.
민호가 녀석의 시야를 끄는 사이, 은혁은 끝없이 검을 휘둘렀다.
마나 크래셔
마나 크래셔
불현듯 은혁은 검을 휘두를 때마다 신기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머릿속으로 생각할 필요 없이.
이미지를 상상할 필요도 없이.
마나 크래셔라는 섭리가 어느 순간 딱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녹아들고 있었다.
조금만 더 하면….
아니야, 이렇게 하면….
온몸이, 감각이 말해오고 있었다.
검은 이렇게 휘두르는 것이라고.
이럴 때에는 이렇게 움직이라고.
굉장히 기묘한 감각이었다.
감각이 이끄는 대로 몸을 맡기자, 몸은 마치 처음부터 익숙했다는 듯 그동안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던 동작을 펼쳤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어렸을 적부터 훈련해온 동작의 연장선에 지나지 않았다.
단편적이었던 움직임이 선을 이어 하나의 스타일을 만들어나갔다.
머리로는 생각하지 못했던 동작을, 몇 년에 걸쳐 기억한 몸이 무망중 펼치고 있는 것이었다.
어라?
저런 게 있었던가?
그러다 그는 놈의 옆구리를 맴도는 빛무리를 발견했다.
하늘은 이렇게도 어둡건만.
저 빛을 왜 이제야 발견한 것일까.
알 수 없었음에도 알 수 있었다.
이해할 수 없었음에도 이해할 수 있었다.
빛무리가 맴도는 곳이야말로 놈의 약점이었다.
빛무리를 발견한 신체는 주저 없이 녀석의 품을 향해 뛰어들었다.
몸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마치 잊고 있던 것을 떠올린 듯이.
마나 크래셔
은혁은 검으로 빛무리를 그었다.
빛무리가 정확하게 절반으로 나뉘었다.
그 즉시 놈이 거구를 무너뜨리면서 소멸했다.
어느새 바닥에 마석이 떨어져 있었을 뿐.
“최은혁 너….”
“…어, 어라?”
신발 끝에 툭 부딪친 마석.
그것을 내려다보던 은혁은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민호를 발견했다.
곧 무망중에 저질렀던 일을 떠올린 은혁도 얼떨떨해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몸에 익은 감각을 필사적으로 기억해내려 했다.
“…마나가….”
“멍청아.”
그러다 체내 마나가 바닥을 드러냈다는 것을 깨달았다.
조금 전에 녀석을 물리치기 위해서 남아 있던 마나를 거의 쏟아 부은 것이다.
민호가 재빨리 달려오지 않았다면 그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으리라.
“…몸이 말을…안 듣네….”
“쉬고 있어. 교관님들도 오셨으니 걱정 말고.”
은혁은 정신을 잃고 잠에 들었다.
어깨가 호소하는 고통을 참은 민호는 그를 들쳐 업었다.
때마침 교관들과 플레이어들이 도착하고 있었다.
저 멀리서 학생들이 환호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놈…, 의식은 잃었어도 검에서 끝까지 손을 놓지 않네.”
민호는 손에서 검을 떼놓지 않는 은혁을 돌아보고는 피식 웃었다.
독종이었다.
책임감이 강한.
그리고 그는 그런 사람을 싫어하지 않았다.
☆
교관들과 플레이어들이 도착했다.
상황이 반전했다.
플레이어들은 도망치는 슬레이어들을 추적하고, 몰려드는 몬스터들을 도륙했다.
“다들 이쪽으로 오렴!”
“지금부터 숲을 벗어난다!”
그럼에도 편재는 멈추지 않았으며, 몬스터는 끝도 없이 몰려들었다.
마치 설악산에 서식하는 몬스터가 전부 몰려드는 것처럼.
슬레이어들이 도망친 방향에서는 괴성과 비명이 끊이지 않았다.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거리에도 몬스터들이 바글거리고 있었다.
슬레이어들을 노리고 있는 놈들이 당장 학생들을 공격하지는 않겠지만 머지않아 학생들에게도 저들과 같은 재앙이 떨어질 터였다.
그래서 그동안 길을 정비하고 있던 교관들은 서둘러 학생들을 데리고 자리를 떠나려고 했다.
“정하양, 지시 위반을 했다는 건 잘 알고 있겠지?” “…죄송합니다.” “돌아가는 대로 혼날 줄 알아라.”
한편, 교관들은 정하양을 꾸중했다.
그녀가 몬스터들로부터 학생들을 지켜내기는 했지만, 그녀는 엄연히 교관의 지시를 받고 행동해야 하는 학생이었다.
특히나 그녀의 담당교관은 상당히 화가 나 있는 상태였다.
공은 공이었되, 벌은 벌이었다.
만약 그것을 구분하지 못한다면, 아카데미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기관으로서의 의미를 잃을 것이다.
“…그래도 잘했다.”
그러나 5반 담당교관은 그녀에게 그 말 또한 전하고는 등을 돌렸다.
비록 그녀의 행동은 무모하였으나 그녀를 가르치는 교관으로서 제자가 자랑스러웠던 것이다.
“…네.”
“그런데 정말 너만 온 거냐? 혹시 다른 아이들은 더 안 왔고?”
“…네, 안 왔어요.”
“흠….”
그러다 훅 치고 들어오는 질문.
한순간 긴장을 풀었던 하양은 퍼뜩 고개를 들어 올리고는 말을 흐렸다.
그 이후로 5반 담당교관은 별다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다만 파랑이 무사하다는 이야기에 안심했다는 것뿐.
은하야, 너는 괜찮은 거지?
어느새 몬스터의 기운이 멀어지고 있었다.
학생들이 슬레이어들의 부락에서 거의 빠져나온 것이다.
달빛을 가리는 숲속을 걷고 있던 하양은 이내 뒤를 돌아보며 은하를 걱정했다.
몬스터들의 기운이 흉흉한 나머지 은하의 기운을 감지할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거리가 멀기도 했다.
그래서 그녀는 빌 수밖에 없었다.
은하가 다치지 않았기를.
☆
[…줘.]그 시각.
발밑이 잘 보이지 않는 길을 걷던 수빈은 불현듯 머릿속에서 울리는 소리에 발걸음을 멈췄다.
내가 잘못 들었나?
그녀가 그렇게 생각한 것도 잠시.
[…살려줘.]삶을 희망하는 사람의 텔레파시가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녀는 처음 듣는 목소리가 마치 귓가에 속삭이는 것처럼 울렸기에 일순 소름이 돋았다.
가끔 서나나 파랑이 텔레파시를 보낼 때에도 깜짝깜짝 놀라고는 하던 그녀였다.
그런데 마음을 허락하지도 않은, 정체도 모르는 사람이 이런 식으로 텔레파시를 보내니 기분이 나빴다.
텔레파시의 내용은 차치하고.
어디지?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학생들은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아무래도 텔레파시를 들은 사람은 자신밖에 없는 것 같았다.
[내 목소리가 들리면….] [부탁이야….]간절한 호소.
그렇기에 그녀는 텔레파시를 마냥 무시할 수 없었다.
위험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토록 간절하고 절실히 구해달라고 부르짖고 있는 사람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느낌상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 있는 것 같았다.
다시금 감지망을 전개해보니 몬스터의 기척은 감지되지 않았다.
그녀는 텔레파시가 보다 선명하게 들려오는 방향으로 걸음을 돌렸다.
그리고 그녀가 마주한 것은─.
“─…….”
뜯겨나간 옆구리에서 피를 철철 흘리는, 바닥을 시뻘겋게 물들인 채 쓰러진 토끼형 텔레파시스트였다.
수빈은 그녀가 누구인지 알았다.
진파랑이 절벽으로 떨어지던 그때, 그것을 깔깔거리며 지켜보고 있던 텔레파시스트.
우리에 갇혀 있던 자신들을 끝없이 괴롭히던 슬레이어들 중 하나.
[…려줘.]강자와 약자의 위치가 바뀌었다.
한때 강자의 위치에 있던 그녀는 이제는 몸도 움직이지도 못하는 채 수빈에게 살려달라고 빌고 있었다.
“…살려달라고?”
어처구니가 없는 반문.
한때 약자의 위치에 있던 수빈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되물었다.
그녀는 대답이 없었다.
토끼 귀 사이에서 번번이 스파크가 흘렀지만, 길게 이어지지는 못했다.
“내가 왜…?”
수빈은 가슴속에서 격정적인 감정이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자신도 어찌하지 못할 것 같은 불길이 전신으로 퍼지고, 주먹을 불끈 쥐게 했다.
[…살려줘.]다시금 텔레파시가 들렸다.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은 목소리.
그러나 수빈은 그러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사람이라면, 필시 눈앞에서 죽어가는 사람을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사람이란 ‘자신의 손으로’ 죄를 짓고 싶어 하지 않는 생물이니까.
그러니 눈앞에서 죽어가는 원수를 구하고 싶지 않다면 그녀가 죽기를 가만히 지켜보거나 이대로 눈을 돌리고 사라지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아니면 죽어가는 그녀에게 욕을 해주거나.
“…내가 왜?”
그러나 수빈은 바닥에 떨어져 있던 칼을 주워들었다.
그녀는 자신보다 키가 큰 토끼형 아인의 배 위에 올라탔다.
그러고는 두 손으로 쥔 칼을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려줘.]토끼형 아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수빈은 죽음 앞에서 살기를 바라는 토끼를 내려다본 채로 굳었다.
그녀는 생물이었다.
그리고 인간이었다.
흔들리는 눈동자가 전하고 있었다.
제발 살려달라고.
죽기 싫다고.
그것을 마주하는 순간 자신이 지금 하나의 인생을 끝내려고 한다는 걸 자각했다.
그래서 뭐.
수빈은 충동적으로 손을 찍었다.
아카데미에서 몇 번이고 몬스터를 죽이는 연습을 해보았던 배수빈은 흔들림 없이 그녀의 가슴을 찔렀다.
꺽 하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검붉은 피가 튀어올랐다.
그 피가 수빈의 얼굴과 안경알에 튀었
다.
그녀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 믿기지 않는 듯 수빈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푸슉
가슴을 찌른 칼을 빼들었다.
상처 부위에서 피가 분수처럼 튀어 오르고 수빈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그러나 수빈은 다시금 있는 힘껏 그녀의 가슴께를 찔렀다.
무언가 묵직한 것을 찌르는 감각.
우두둑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귓가에서 울리는 것처럼 선명하게 들렸다.
어느새 칼을 쥔 손이 시뻘건 피로 물들어 있었다.
[…….]마치 칼날을 타고 전해지는 듯한, 그녀의 꿈틀거림.
한 손으로 쥐지 못할 것만 같은 지렁이를 수십 마리나 쥐는 것 같은 감각에 소름이 끼쳤다.
뭐 어쩌라고.
그러나 수빈은 손 안에서 꿈틀대는 지렁이들을 그대로 쥐어 죽였다.
그러자 마음이 진정되었다.
그녀는 이번에는 뽑아 올린 칼로 토끼형 아인의 심장을 찔렀다.
칼을 타고 전해지던 토끼형 아인이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감각이 점점 힘을 잃고 사라져갔다.
토끼형 아인이 절명했다.
자신들을 그렇게나 깔보던 사람이.
다른 사람의 죽음을 깔깔거리면서 지켜보던 사람이.
자신의 손에 의해.
너무나 쉽게 죽어버렸다.
“─뭐야. 별 거 아니잖아?”
그 순간, 그녀는 깨달았다.
제아무리 강한 사람이더라도 칼에 심장이 꿰뚫리면 결국에는 그것으로 끝이라는 것을.
당연하다면 당연한 사실.
하지만 머리로만 알고 있던 사실을 이제 몸이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그녀는 깨달았다.
한 사람이 공들여 쌓아올린 인생을 전지적인 신이 되어 무너뜨릴 때의 감각을.
그것은 희열이었다.
그것은 쾌감이었다.
손 안에 잡히던 생동감은 자신이 살아 있다는 듯한 보람을 일깨웠고, 생동감이 희미하게 사라지는 감각은 갈증을 불러왔다.
어째서 느끼지 못했던 것인가.
생명이란 이리도 쉽게 죽는 것을.
죽인다는 행위는 곧 자신이 몸소 살아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는 것을.
“…뭐야?”
그렇게 기쁨에 만취했다.
그리고 그녀는 뒤늦게 거리를 점점 좁혀오는 몬스터들을 발견했다.
무리를 짓고 있는 제8위계 몬스터.
얼굴에 피가 덕지덕지 묻어 있는 수빈은 침을 뚝뚝 흘려대는 놈들을 시큰둥하게 쳐다보았다.
이전이었다면 녀석들 앞에서 벌벌 떨었으리라.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그냥 콱 죽어버려.
그녀는 손 안에서 생명이 사라지는 감각을 몇 번이고 되새기고 있었다.
그 기억이 그녀의 이미지에 영향을 주었다.
단순하면서도 직관적인 말은 더욱 이미지에 살을 붙여주었다.
흥분한 나머지 풀풀 풍기고 있던 체내 마나는 그녀의 이미지에 적극적으로 반응했다.
그리고 마나와 결합한 이미지는 세상의 섭리에 간섭했다.
“히히….”
배수빈은 자신을 끌어안고 웃었다.
포식자의 위치에 있었을 몬스터는 이제야 자신들이 피식자의 위치에 있었음을 깨달았다.
수빈은 녀석들이 뒷걸음질을 치는 모습이 너무나 재미있었다.
거기에서 갈증을 느꼈다.
어서 저들이 일방적으로 학살당해 절규하는 소리가 듣고 싶었다.
그 강렬한 마음이 무의식적으로 전개된 마법을 움직였다.
그녀의 등에서 솟아오른 여덟 개의 칼날이 놈들을 꿰뚫었다.
놈들이 끊어져가는 소리로 울었다.
꼬챙이에 찔린 채 하늘에 떠 있는 놈들을 올려다본 배수빈은 입가를 끌어올렸다.
사악한 마녀처럼.
잔인한 학살자처럼.
리라이프 플레이어 2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