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life Player RAW novel - Chapter 29
“무슨…, 일이지?”
어느 순간부터는 매미 우는 소리도 사라졌다.
바람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지면을 뜨겁게 달구는 햇볕만이 내리쬐고 있을 뿐.
“여기…, 있으면 안 돼.”
은혁의 소매를 붙잡은 하양은 조금 전과는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커다란 리본은 축 늘어져 있었고, 얼굴이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중이었다.
그녀의 얼굴에 담기는 감정은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함과 걱정, 당황, 슬픔, 위화감, 마지막으로 죽음에 대한 공포.
은혁은 그녀가 내비치는 다양한 감정을 무어라 표현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것 하나만은 알고 있었다.
그녀가 울기 직전이라는 것만.
“왜 이래. 내가 뭘 했다고!”
공포는 전염된다. 하양의 복잡한 심정을 모르는 은혁이었지만 무언가에 불안해하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덩달아 겁이 날 수밖에 없었다.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하양은 그의 소매를 더 잡아당겼다.
“나, 나도 몰라. 근데…, 여기 있으면 안 될 것 같아.”
“여기 뭐가 있다고. 아무것도 없잖아. 소리도 이제 안 들리잖아.”
그런데도 하양은 연신 고개를 흔들었다. 이리도 필사적으로 흔드니 그도 계속 화단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할 수가 없었다.
“알았어. 그럼 선생님한테 가자.”
“얼른 가자, 얼른.”
“알았어. 알았다니까!”
목표치는 채우지 못했지만 하양이 이리도 보채니 어쩔 수 없었다.
은혁은 나무 기둥에 세워둔 칼을 들고 늘푸른솔반으로 돌아가려 했다.
키륵
“─어?”
금속을 긁는 듯한 소리.
웃음과도 같은 소리가 들렸을 때에는 조그마한 형체가 지붕에서 머리 위로 떨어진 직후였다.
“으아아아아─!!”
“은혁아─!!”
눈앞을 가득 메우는 것은 햇볕에 그을린 듯한 녹색 피부. 눈과 코를 위로 잡아당긴 것 같은 얼굴을 한 괴물.
자신을 덮친 괴물의 붉은 눈을 마주하는 순간 그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괴상하게 생긴 괴물이 입을 크게 벌리지만 않았더라면 그대로 바닥에 누워 있을 뻔했다.
괴물이 벌린 입 속에 자리한 어둠을 보았을 때 정신이 들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잡아먹혔으리라.
거의 반사적으로 두 팔을 뻗은 그는 괴물의 어깨를 밀어내 벗어나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그의 힘으로 위에서 몸을 짓누르는 괴물을 밀어낼 수는 없었다.
아무리 힘을 주어도 괴물이 떨어지지 않고 입을 벌리며 다가오는 모습에 비명이 새어나왔다.
“으아아아아아─!!”
“하지 마! 하지 말라고!”
하양이 달려들어 괴물을 떼어내지 않았으면 어떻게 됐을지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자신이 아무리 힘을 써도 떼어놓을 수 없던 괴물을 하양이 어떻게 떼어냈는지는 지금 알 바가 아니었다.
은혁은 그녀의 부축을 받고 일어났다. 머리에 새겨진 괴물에 대한 공포 때문에 두 다리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키륵 크륵
괴물이 무어라 말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없었지만 자신들을 장난감처럼 여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괴물의 눈빛은 마치 좋아하는 반찬을 두고 먼저 먹을지 나중에 먹을지 간을 보던 자신과 닮았으니까.
천천히 다가오는 괴물을 바라보며 은혁은 자신이 식탁 위에 오른 반찬 중에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도, 도망쳐. 어, 얼른!”
포식자의 위치가 바뀌었다. 먹는 쪽에서 먹히는 쪽으로 바뀐 은혁은 이 상황에서 정상적인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단지 생각이 나는 대로 그렇게.
온갖 생각으로 뒤죽박죽이 되어버린 정신으로 소리친 그는 마찬가지로 우왕좌왕하던 하양의 손을 붙잡고 뛰었다.
다리가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자신의 다리가 아닌 것처럼. 다리가 말을 제대로 듣지 않았다.
그래도 달려야 한다. 괴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그런 생각으로 그는 조금이라도 잘못 놀렸다가는 넘어질 것만 같은 다리를 억지로 움직였다.
뒤돌아보지 마. 뒤돌아보면 안 돼!
돌아보는 순간 걸음을 멈출 것만 같았으니까.
“히익, 흑, 히익, 아, 아빠…!”
“울지 마! 얼른 뛰어!”
뒤따라 달려오는 하양이 눈물 섞인 소리를 흘렸다.
은혁도 절로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양이 우니 이를 악물며 참았을 뿐이었다. 자신까지 울었다가는 괴물로부터 도망치지 못하고 잡아먹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뭐, 뭐야! 왜 안 열려!”
유치원으로 들어가는 문이 열리지 않았을 때에는 눈앞이 캄캄했다. 패닉이었다. 문이 열리지 않으니, 그는 억지로 몸을 부딪치며 어떻게든 문을 열려고 발버둥을 쳤다. 다급함에 제대로 완성되지 않는 말로 문을 열라고 소리쳤다.
키륵
그리고 괴물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두 아이를 즐겁게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 도망칠 수 있으면 도망쳐보라는 듯이. 이번에는 어떤 모습을 보여줄 것인지.
“큭…!”
이쯤 되니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안간힘을 부려도 문은 열리지 않을 것이다. 이대로 괴물에게는 잡아먹히고 싶지 않다.
살고 싶다.
살고 싶으니까.
은혁은 자신의 손을 붙잡은 하양을 돌아보았다. 눈물로 젖은 얼굴로 그녀는 다가오는 괴물을 보고는 기겁하고 있었다.
한 명이라면.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면 그랬다. 은혁은 늘푸른솔반에서 운동신경이 제일 뛰어났고, 하양은 운동신경이 전혀 없는 아이였다.
그런 아이를 데리고 뛰었으니 괴물로부터 멀리 도망치지 못할 수밖에.
지금도 그렇다. 그녀를 버리고 도망친다면 괴물로부터 도망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은…혁아?”
“…뛸 준비나 해.”
버리고 도망칠 수 없잖아!
자신이 동경하던 사람은 몬스터로부터 사람들을 구하는 플레이어, 용사이지 않았던가.
그런데 고작 여자애 하나도 지키지 못하는 자신이 용사가 되겠다는 말이나 하고 다닐 수 있을까.
무엇보다 그녀를 버리고 살아남는다고 평상시처럼 즐겁게 지낼 수 있을까.
모른다. 복잡한 일은 그에게 무리였다.
유치원생인 그가 알고 있는 것은 단 하나.
그녀를 버리고 도망치고 살아남은 자신은 자신이 지금까지 알던 자신이 아닐 거라는 것.
“뛰어!”
정신을 차리고 은혁은 하양에게 신호를 보냈다. 숨을 몰아쉬던 그녀는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그의 손을 붙잡고는 따라오고 있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오직 괴물로부터 피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무작정 도망친 곳은 놀이터였다.
건물을 한 바퀴 돌아 놀이터에 도착한 은혁은 자신의 실수를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놀이터는 주변이 탁 트여 있었다. 이래서는 숨을 장소도 찾기 어려웠다.
“이, 이제 어떻게 해….”
“…어, 어른들이 구하러 와줄 거야. 그때까지만 숨어 있으면 돼.”
“그럼 미끄럼틀 안에 숨어 있을까?”
은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쩐지 괴물은 미끄럼틀에 숨어 있더라도 손쉽게 찾아낼 것만 같았다. 그렇게 되면 제대로 도망치지도 못하고 붙잡힐 게 뻔했다.
“저기로 올라가자.”
그가 떠올린 것은 정글짐이었다.
괴물은, 몬스터는 어차피 자신들이 어디에 있더라도 찾아내고 말 것이다.
그럴 바에는 제한된 공간을 유용하게 활용하며 도망칠 수 있는 정글짐이 제일 좋을 것 같았다.
“너 먼저 올라가.”
“으, 응.”
은혁은 정글짐에 오르는 하양을 밀어 올렸다.
그리고 그도 그녀를 따라 올라가려 했을 때에는,
키륵
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허리춤에 찬 헝겊주머니에서 도끼를 꺼내들고는 정글짐에 오르는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먼저 올라가 있어.”
“너, 너는…! 너도 올라와야지!”
“어른들이 올 때까지 내가 상대하고 있을게.”
“하지 마! 그러지 말고 올라와!”
정글짐을 오른 하양이 소리쳤지만 은혁은 그 말을 듣지 않았다.
“후우….”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
정글짐에 올라가 있으면 운이 좋으면 둘이, 최소한 한 사람만은 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자신은 정글짐을 오르지 않고 괴물을 상대하는 일을 택했다.
땅에 두 발을 붙이는 순간 후회했다.
무서웠다.
무섭지 않을 리가 없었다.
손이고 발이고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그럼에도 은혁은 괴물을 상대하기 위해 등에 차고 있던 장난감 칼을 뽑아들었다.
그래, 칼.
이 칼만 없었더라면, 괜히 플레이어를 꿈꾸지만 않았더라면 정글짐에 올랐을 텐데.
장난감 칼이더라도 검을 차고 다니는 순간부터 그는 용사처럼 누군가를 지키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고블린을 상대하고 있고.
“…더, 덤벼. 삐─도 안 되는 게.”
은혁은 동경하는 플레이어, 강현철이 내뱉었던 대사를 떠올리며 괴물을 도발했다.
아직도 삐─가 뭔지는 모르겠다. 단지 상대를 도발할 때 쓰는 나쁜 말이라는 건 짐작할 수 있었다.
괴물이 알아들은 걸까.
입가를 끌어올리던 괴물이 순간적으로 얼굴을 굳혔다.
눈을 번뜩인 괴물이 도끼를 고쳐 잡으며 달려들었다.
괜찮아. 훈련대로 하면 돼!
달려드는 괴물을 보며 크게 숨을 참았다.
뻣뻣하게 굳은 몸이 잘 움직이지 않았다. 머리로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몸은 괴물이 바로 가까이에 왔을 때에야 움직이고 있었다. 동작 역시 연습을 하던 것과는 다르게 굉장히 느렸다.
괴물이 눈 먼 공격에 당할 리가 없었다. 작게 입가를 끌어올린 괴물은 장난감 칼이 머리 위를 스쳐지나가는 순간을 노려 칼 밑면을 후려쳤다.
“아…!”
손에서 벗어난 장난감 칼이 공중에서 빙그르르 원을 그리며 떨어졌다.
“아….”
끝났다.
크게 흔들리는 동공을 감출 수가 없었다.
키륵 키륵 크륵
싱겁다는 듯이, 이제 장난은 끝났는지 묻는 것처럼.
뒤로 물러선 괴물이 쇠를 긁는 듯한 소리를 지껄이고 있었다.
“아….”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온갖 생각으로 뒤죽박죽이던 머릿속이 이리도 조용해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머리가 뜨거웠다. 뒷목이 후끈 달아올랐다. 시야가 흔들리고 이대로 눈을 감아버릴 것만 같았다.
그래, 눈을 감으면 편하겠지.
이건 꿈일 거야.
다음에 일어나면 분명 아무것도 없던 것처럼─.
“아, 아아….”
“은혁아…!”
현실을 부정하고 정신을 잃던 은혁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그만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게 꿈이 아니라면?
이게 현실이라면?
이대로 눈을 감으면 끝나는 건가.
싫다. 이대로 죽기는 싫어.
무서워. 누가 좀 도와줘. 아빠 엄마.
왜 왜 왜. 내가 원하는 건 뭐든 이루어졌잖아!
근데 왜 내 말을 안 들어주는 거야!
“으혀아…! 흑, 얼른 올라와….”
정글짐 위에서 하양이 그를 부르며 울먹이고 있었다.
키륵 까륵
괴물의 시선이 하양에게 향했다. 이미 은혁에게는 볼 일이 없다는 듯이 괴물은 정글짐으로 향했다.
살았다.
그 순간 죽음의 공포가 사라졌다.
저도 모르게 안도하는 자신이 있었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하양이 고블린으로부터 도망치는 사이에 어른들이 구하러 올 거라는 안일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 이대로 하양이가 시간을 벌어주면─.
“─웃기지 마! 삐─도 안 되는 게! 그만 꺼져!”
말도 안 된다.
말도 안 됐다.
몸이 둔한 하양이 고블린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괴물에게 찍힌 하양은 도망치지도 못하고 잡아먹힐 것이다.
운이 좋으면 자신은 살아남을지도 모른다. 배가 부른 괴물이 넘어가줄 수도 있고, 그 사이에 어른들이 구하러 와줄 수도 있었다.
그래, 구하러 와줄 거야.
구하러 와줄 테니까,
구하러 와줄─.
“─웃기지 마!”
자신은 플레이어가 되고 싶은 거지, 누군가를 희생해서 살아남고 싶은 게 아니었다.
괴물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지금 이 순간 괴물은 체내 마나가 풍부한 하양보다 굴하지 않는 기세를 보이는 그에게 흥미를 가졌다.
녀석이 입맛을 다셨다. 기다란 혀로 입술을 훔치고는 눈빛으로 묻고 있었다.
정말 저 아이를 지킬 거냐고.
은혁의 대답은 변함없었다.
“삐─도 안 되는 게!”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
그토록 움직이지 않았던 몸이 어째서 이 순간만큼은 마음먹은 대로 움직이고 있는지.
두 손에는 아무것도 없는데. 그런데도 은혁은 괴물을 향해 뛰어들고 있었다.
입가를 끌어올린 괴물은 이 또한 유흥에 불과하다는 식으로 그에게 달려들었다.
괴물과 은혁 사이의 거리가 점점 좁혀지고,
이윽고 괴물의 도끼가 그에게─,
“아, 아아….”
“은혁아…!”
도끼날이 눈앞으로 들어오는 순간.
그 사이의 틈을 노려 순식간에 나타난 형체.
“잘했어. 네가 진짜 남자야.”
─어?
바람이 불었다.
쏴아아 하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던 세상에서 한줄기 목소리가 들리고, 부드러운 바람이 감싸는 것만 같았다.
“와….”
눈앞에는 괴물과 대치한 은하가.
“위….”
위험해!
소리치기도 전에 은하는 몸을 굴려 조금 전 자신이 떨어뜨린 장난감 칼을 주워들었다.
“까불지 마라.”
한 순간이었다.
푸른 기운으로 일렁이는 칼이 뛰어오른 괴물을 좌우로 갈라버린 것은.
죽음에 대한 공포를 주었던 괴물은 너무도 허무하게, 가루가 되어 흩날리는 바람 속으로 사라졌다.
“와….”
작은 감탄이 일었다.
은혁이 바라던 모습이 바로 거기에 있었다.
이야기에 나오는 용사가 마왕을 물리치는 것처럼─.
꿈에도 그리던, 되고 싶던 자신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바로 거기에 있었다.
“어…. 으아, 와, 와…. 요, 용사님. 진짜 용사님이 있었어…!”
“뭐야 왜 이래! 떨어져 좀!”
놓치고 싶지 않았다. 살았다는 기쁨과 꿈꾸던 사람을 만났다는 흥분에 은혁은 자존심이고 뭐고 다 집어던지고 은하에게 매달렸다.
“어허허허허…! 용사님, 용사님…!”
“으아아아아앙…! 무서웠어…!”
어느새 정글짐에서 내려온 하양도 은하를 껴안고 있었다.
왜 이래. 내가 먼저 안았어!
은혁은 자리를 빼앗으려 파고드는 하양을 밀어내려는 듯이
은하에게 매달렸다.
하양도 가만히 당하고 있지 않았다.
은혁은 눈물을 흘리는 하양이 그를 노려보는 눈빛을 못 보지 않았다.
이게 진짜. 누가 구해준 건데.
왕자님한테서 떨어져!
은하가 무슨 왕자님이야! 용사님이지!
은하에게 안긴 두 사람은 그가 모르게 눈빛으로 다투고 있었다.
☆
─그때부터였다.
얼마 남지 않은 미래에 우스갯소리로 은하사단이 거론되기 시작하는 것이.
은혁이 평생을 바쳐 은하를 쫓겠다고 다짐한 것이.
리라이프 플레이어 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