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life Player RAW novel - Chapter 293
한 해가 흘렀다.
선력 10년.
가족들과 맞이한 새해는 평화로이 흘러갔다.
이런 나날이 앞으로도 계속되기를, 무심코 그런 마음이 들었을 정도로.
아버지의 품은 무거운 짐을 내리고 지금 이 순간을 즐거이 살아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했다.
어머니의 품은 잠시 숨을 돌려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누나의 품은 그에게 다시금 행복을 잃을 수도 있을 거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여동생의 품은 너무 좁아서 자신이 아니면 지키지 못할 거라는 쓰라림을 인지시켜주었다.
그밖에도 여러 사람들이.
힘들면 쉬어도 괜찮다고 다독이고, 벌써 안주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해주었다.
마지막으로 한서현은─.
“와줘서 고마워.”
“당연히 와줘야 하는 거 아니야?”
─전부를 지킬 수 없는 것이라고, 따끔한 현실을 가르쳐주었다.
은하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게 된 한서현을 만나러 인천
국제공항 제1여객터미널을 방문했다.
“출국처리는 다 끝났어?”
“게이트에 들어가서 처리할 것만 남았어.”
“캐리어는?”
“너 비행기 안 타봤니?”
“응.”
멍하니 창가에 서 있던 한서현은 손에 들고 있던 여권을 보여주었다.
초록색 여권 사이에는 항공권이 끼어 있었다.
은하는 쓴웃음을 지었다.
저 항공권이 마치 자신의 무력함을 알려주는 것 같아서.
원하는 미래를 거머쥐기란 힘들고, 바라는 대로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쉽지 않다는 사실을 가르쳐주는 것 같아서.
“은하도 왔구나. 아침부터 오느라 힘들지는 않았어? 서현이가 정말로 인복이 많은 모양이야.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와줘서.”
“우리 서현이가 인복이 많은 줄을 몰랐니? 예장이 너는 서현이에 대해 잘 모르는 구나?” “왜 이래? 내 약혼자에 대해서는 아주 잘 알고 있거든.”
“아무렴 언니인 나보다 더 잘 알고 있겠니.”
“아오, 누나는 진짜 밉상이다.”
그리고 그녀에게서 떨어지지 않는 YH그룹의 직계 최예장.
은하는 그와 악수를 나누는 한편, 다시금 입을 다문 한서현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그녀는 작별인사를 하러 온 이들을 형식적으로 대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풍파에 시달리며 자신을 버려야만 하는 삶을 살았던 하백련을 떠올리게 했다.
“…근데 너는 왜 울고 있냐?”
“울긴 누가 운다고….”
“그럼 눈에서 흐르는 건 뭔데?”
“콧물이다, 짜샤…!”
한서현에게 인사를 마치고 돌아온 공백기는 은하의 옆에서 눈물콧물을 질질 짰다.
은하는 그에게서 의외의 면을 보고 이전 삶에서 기억하던 그에 대해서 겉으로만 알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형 공청기가 의젓한 면을 지녔다면 동생 공백기는 정이 많은 편이었다.
서현의 전속이 되기를 꿈꾸고 있던 그는 아직도 그녀의 유학이 믿기지 않는 눈치였다.
“…근데…, 넌 안 슬프냐?”
“아예 못 만나는 것도 아닌데 뭘.”
슬픔이라는 감정은 잘 모르겠다.
다만 무력감만은 알겠다.
은하는 애써 거짓말로 둘러댔다.
자신의 나약함을, 무력함을.
…미안하다.
아직도 기억이 선명했다.
한서현이 시리우스를 적대하면서 자신의 유학을 막을 수 있느냐고.
그때의 대답은 지금도 여전했다.
한 번을 물어도, 두 번을 묻더라도 그는 같은 대답을 내릴 것이다.
그것은 할 수 없노라고.
“왜 그러고 있어?”
“오빠야….”
그러던 때였다.
은아가 그의 얼굴에 손을 댔다.
은애가 그를 꼭 껴안았다.
따뜻한 온도와 그만한 질량감.
그걸 느낀 그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럼에도 자매의 걱정은 어딘가로 떠나지 않았다.
그럴수록 온기가 몸을 둘러싸고, 무게감이 어깨를 짓눌렀다.
“…괜찮아, 별 거 아니야.”
“괜찮기는…. 은하 너는 이제부터 나한테 맡겨.” “…누나? 뭘 맡기라는….”
그러다 은하는 당황했다.
난데없이 무언가를 결심한 것처럼 은아가 얼굴을 굳혔기 때문이다.
뭐라 말하려는 그를 막은 그녀는 굳혔던 얼굴을 활짝 펴고는 한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얘들아, 우리 뭐라도 마시러 가지 않을래!?”
“언니! 은아 언니! 나는 코코아가 마시고 싶어!!”
“응? 그럴까…, 모두 서현이 보러 아침부터 와줬으니까…, 그래 그럼 내가 쏠게.”
“아니, 서연이 누나, 이왕 쏘는 거 서현이의 약혼자인 내가….”
“누가 쏘는 거면 어때! 은하 너는 어떤 거 마실래?”
“…따뜻한 아메리카노.”
“시럽도 넣어서?”
“…응, 듬뿍.”
자연스럽게 말문을 틀며 분위기를 환기시킨 노은아.
은하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묻는 그녀를 떨떠름하게 쳐다보았다.
저 눈빛이 어떤 의미를 뜻하는지 파악하기 위해.
괜찮아, 누나한테 다 맡겨!
오빠, 나한테 다 맡겨!
모르겠다.
알 수 없었다.
도대체 무엇을 맡기라는 것인지.
공항 어디에 몬스터라도 출몰했단 말인가.
아직 애구나?
커피도 제대로 못 마시고.
은하는 시선이 은아에게 몰린 사이 서현과 눈이 마주쳤다.
살며시 미소를 지은 그녀가 입술을 움직였다.
은하도 재빨리 무언으로 대꾸했다.
그녀의 얼굴이 조금은 나아졌다.
“나는 여기 있을래.”
“그러면 누가 나랑 서현이 걸….”
“에이, 당연히 예장이 네가 서현이 커피도 챙겨야지.”
“은아 누나, 서현이 혼자 두기에는 내가 걱정이 돼서….”
“그러면 누구 한 명한테 남으라고 말하면 되지. 안 그래, 서연아?”
“…응, 그러네. 그러면 은하 네가 서현이랑 있어줄래?”
어느새 상황이 순식간에 변했다.
은하는 최예장의 등을 떠밀어서는 카페를 찾으러 가려 하는 은아에게 시선을 교환했다.
두 사람은 눈빛으로도 대화가 되는 남매지간이었다.
은하야, 파이팅!
…….
은하는 그저 눈을 깜빡였다.
대화가 통하지 않았기에.
혹시나 해서 은애에게도 보냈지만, 그녀에게서도 같은 대답이 나왔다.
“허….”
은하는 멀어지는 사람들을 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어느새 항공기가 보이는 자리에는 자신과 서현밖에 없었다.
서현은─.
“─계속 서 있기만 할 거니?”
의자에 앉아서는 자신의 옆자리를 툭툭 두드렸다.
☆
“손.”
이제는 스스럼없이 내미는 손.
은하는 한서현이 잡아달라는 손을 말없이 잡았다.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서 항공기를 바라보고 있기만 했다.
“나 떠나.”
“나도 알아.” “하고 싶은 말은 없니?”
“잘 다녀오고.”
“응.”
은하는 그녀에게 무엇을 말해야 할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떠오르지 않았다.
단지 형식적인 인사밖에.
그녀 역시 아무 말도 없었다.
그래서 침묵이 길어졌다.
꼭 붙잡은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는 너무나 무거웠다.
필시 이 온기는 손을 놓는 순간, 너무나 무거운 나머지 바닥 아래로 꺼져버리리라.
“─미안해.”
그러던 은하는 무거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어찌하지 못하는 무력감에서 나온 사과의 말.
말하고도 속이 편해지지 않았다.
“뭐가 말이니?”
“그런 게 있어.”
그녀가 물었기에 더더욱.
은하는 대충 얼버무렸다.
그녀는 괜히 추궁하지 않았다.
단지 몸을 옆으로 기울였을 뿐.
오른쪽 어깨에 무게감이 전해졌다. 동시에 온기가 몸을 덮였다.
아마도 그녀도 느끼고 있으리라.
이 온기를 얻기 위해서는 이만한 무게감을 견뎌야 한다는 걸.
따뜻하면 따뜻할수록.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 것인지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가서 전화는 못할 거야.”
“그럼 톡으로 해.”
“자주 연락도 못할 거야.”
“오는 대로 답장해줄게.”
“…응.”
국내에서도 마나 농도가 올라가면 통신장애가 발생하고는 했다.
비일비재하게 발생하는 일이었으니 국가 간의 통신은 더더욱 활발하게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처럼 자주 연락을 주고받지는 못할 것이다.
“전에도 말했지만…, 내가 떠나면 본격적으로 너한테 접근하려 하는 사람들이 생길 거야.”
“…이미 몇 번이고 들었어.”
“걔네들 중에는 손에 넣지 못하면 부숴버리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어.”
“그때는 내가 부수면 되지.”
해가 바뀌었다.
3월부터는 2학년이 된다.
올해부터는 힘들어질 것이다.
본격적으로 움직여야 했으니까.
은하는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서현의 시선을 응시했다.
“─조심해.”
직계의 충고였다.
다른 직계들을 얕보지 말라고.
그녀가 자신의 팔을 잡아당기면서 말했다.
눈동자 속에 자신이 비쳤다.
세상에 초연한 것처럼 보이더니.
아까는 탁한 눈을 하고 있더니.
“─그럴게.”
은하는 고개를 끄덕이려 했다.
그때─.
“─너희, 붙어서 뭐하고 있니?”
“꺄─!!”
“─!!”
불현듯 뒤에서 나타난 한서연이 자신의 등장을 알린 것이다.
서로에게 집중하고 있던 두 사람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특히 한서현은 깜짝 놀란 나머지 은하를 향해 쓰러졌다.
은하는 그녀를 받아주려다가 뒤로 넘어가버렸고.
“…언니, 이게 뭐하는 짓이야?”
“조심하라고. 너희 둘이 친한 건 잘 알고 있지만, 약혼자도 있는데 적당히 선을 지켜줬으면 좋겠어.”
“…….”
입술을 훔치며 일어난 한서현.
자신의 언니를 노려본 그녀는 이내 자신의 커피를 낚아채고는 화장실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서현아 어디가!”
“화장실이요. 왜요, 오빠도 따라오게요?”
“아니, 그건….”
황급히 최예장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한서연은 여동생이 한두 번 화를 낸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무렇지 않게 여겼다.
“은하야, 괜찮아? 자, 네가 마시고 싶다고 했던 거.”
“…어…, 고마워.”
자리에서 일어난 은하는 은아가 가져온 커피를 받았다.
손가락으로 자신의 입술을 더듬던 그는 시럽이 듬뿍 담긴 커피의 맛을 보았다.
커피가 뜨거웠다.
그만큼 달콤했다.
“─잘 있어.”
서현이 화장실에서 돌아오기까지는 한참 시간이 걸렸다.
그녀는 은하에게 인사를 건네고는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눈도 안 마주치네, 저거.
대체 누가 어린 건지 모르겠다.
은하는 그녀에게 톡을 보냈다.
아직은 스마트폰을 쓸 수 있다.
그렇기에 답장도 금세 왔다.
「서현」: 얼른 잊너(오전 11:16)
「서현」: 잊어(오전 11:17)
정말 누가 어린 건지 모르겠다.
☆
“나? 커서 뭐가 되고 싶냐고?”
“은하 너는 오랜만에 만나서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졸려….”
이날은 민지의 주선으로 초등학교 동창회를 열기로 했다.
공기를 불면 입김이 나오는 날씨.
점퍼 속으로 몸을 파묻은 은하는 오랜만에 연금술 콤비와 백현율을 만났다.
인근 중학교로 진학한 세 사람은 1년 사이에 부쩍 성장해 있었다.
그러나 현율은 잠을 못 잔 나머지 등을 굽히고 있었지만.
그 모습조차 한 폭의 그림과 같아 마주치는 사람들마다 그에게 시선을 보내고는 했다.
“나? 나는 화학자가 되고 싶어.” “나는 수학자.”
방학에도 학교와 학원을 다닌다는 연금술 콤비.
오랜만에 바람을 쐬러 놀러왔다는 두 사람은 쾌활하게 이야기했다.
그러면서도 고개를 꾸벅꾸벅하는 현율을 챙기는 것을 잊지 않았다.
“백현율 너는?” “졸려….”
“현율이는 그림을 그릴 수 있으면 무슨 일을 해도 좋대.”
“그리고 또 하루에 12시간은 자고 싶다고 하더라.”
“현율이답네.”
“”그치?””
“”””어휴….””””
연금술 콤비가 깔깔 웃었다.
다른 친구들은 한숨을 쉬었다.
은하는 대화를 나누며 웃고 떠드는 그들을 천천히 따라갔다.
눈이 내렸다.
연금술 콤비와 현율을 처음 만난 진파랑은 어느새 앞으로 뛰쳐나가 눈을 맞으며 놀았다.
그것이 꼭 첫눈을 맞은 강아지처럼 보였다.
일행은 다시금 웃음을 터뜨렸다.
어느새 잠에서 깨어난 현율은 가방에서 꺼낸 스케치북에 그의 모습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래, 너희는 웃어라….”
은하는 조금씩 내리는 눈을 맞으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구름이 상당히 끼어 있었다.
아무래도 노래방에서 나와 있으면 길가에 눈이 제법 쌓여 있을 것만 같았다.
“…….”
은하는 아카데미를 떠올렸다.
2학년이 되면 더 바빠질 것이다.
031기 내에서 죽여야 하는 놈들을 정리해야 했기 때문에.
1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는 차분히 자신에게 걸림돌이 될 만한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을 구분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미래에 문제가 많았던 놈들 위주로 살펴보았으니까.
어떤 이는 개선의 여지가 있었고, 어떤 이는 역시 죽여야 했다.
…피바람이 불겠어.
그러니 저들은 웃어줬으면 좋겠다.
이 추운 날에도 화기애애하게.
추위는 자신이 막아줄 것이니.
“근데 호시미야 카에데하고는 결국 말도 나눠보지 못했네….”
해야 할 일이 참 많았다.
온태양의 동료 중 한 명인 호시미야 카에데와 아직 만나지도 못했다.
올해에는 만났으면 싶었다.
친해지면 금상첨화고.
그리고 이제….
누나도 내년이면 졸업이구나.
친구들과 제법 떨어졌다.
은하는 앞으로 발을 내딛었다.
저 멀리서 친구들이 자신을 부르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은하는 스마트폰을 꺼냈다.
「류연화」: 아카데미 던전에 가지 않을래?(오후 02:13)
류연화도 이제 곧 졸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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