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life Player RAW novel - Chapter 296
아카데미가 관리하는 던전인 만큼 적색던전 내부에는 몇몇 편의시설이 설치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지하 3층에서는 온천을 즐길 수 있다거나.
“아…, 너무 좋다. 피로가 싹 가시는 것 같지 않아?”
“그럼 내일 또 들어갈까?”
“빠르게 4층이랑 5층을 공략하고, 여기서 하루 쉬다가 다음날 아침에 돌아가면 되겠네. 그러자!”
온천에서 들려오는 소리.
천막을 친 온천을 뒤에 둔 창진은 띄엄띄엄 들려오는 소리에 청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먼저 목욕을 하는 여자들을 대신해 베이스캠프 주변을 감시하고 있어야 하건만.
거의 모든 신경이 등 뒤에 있는 온천에 가 있었다.
…은아가 지금 목욕하고 있어.
어찌할 수 없는 성적 호기심.
창진은 입가를 가리고 있는 두건을 콧등까지 끌어올렸다.
겉보기에는 주변을 탐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모습.
그러나 마음속에서는 수십 번이나 일어나는 번뇌와 싸우고 있었다.
그냥…, 볼까?
안 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감성과 이성의 충돌.
아직까지는 이성이 아슬아슬하게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성적인 타협점은 은아와 연화가 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하고 있었지만.
“근데…, 연화 너 피부 정말 좋다. 꼭 아기 피부 같아.” “은아 너도 그래. 등이 참 예뻐.”
“응? 그런가? 등은 본 적이 없어서 잘…꺄…!” “맨들맨들하고.”
“갑자기 만지면 어떡해!”
“미안…. 그럼 내 몸도 만질래?”
너희들 지금 뭐하는 거야?
연화가 대체 어디를 만졌길래….
느닷없이 들려온 쇳소리.
체내 마나를 발현하고 있던 창진은 바로 귓가에서 울리는 듯한 소리에 흠칫 몸을 떨었다.
다시금 못된 감성이 고개를 들려 하고 있었다.
“…습격인가.”
무슨 일이 생긴 게 틀림없다.
눈을 감고 번뇌를 떨쳐내려 하던 창진은 결국 현상을 왜곡하는 길을 택했다.
어쩌면 조금 전 비명은 무슨 일이 생긴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이곳은 던전이었다.
편의시설에 몬스터가 출몰하더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혹시 모르니까 상황을 보러─.
“─형, 지금 어디 가요?”
“…….”
한창진은 그런 식으로 핑계를 대고 온천으로 다가가려 했다.
그때, 같이 모닥불 앞에 앉아 있던 은하가 시큰둥한 얼굴로 한창진에게 물었다.
“설마 누나들이 있는 곳으로 가려 하는 건 아니죠?”
서슬이 시퍼렜다.
검은 가시나무의 힐트에 손을 올린 은하는 칼날처럼 시퍼런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대답 여하에 따라서는 베는 것도 주저하지 않겠다는 듯이.
“에이…, 내가 거기를 왜 가겠어. 그러다가 은아랑 연화한테 혼나고 말 텐데….”
“그럼 왜 일어났는데요?”
“목이 말라서 음료수라도 마실까 했지. 은하 너도 마실래? 사이다? 아니면 콜라?”
“…사이다로 주세요.”
다행히 그는 임기응변으로 은하의 의심을 넘어갈 수 있었다.
아이스박스에서 음료를 꺼낸 그는 하나를 은하에게 넘겨주었다.
“전부터 생각했던 건데 말이야…, 연화 네 머리칼 너무 예쁘다.” “그래? 나는 잘 모르겠는데….”
“이게 얼마나 예쁜데! 염색으로는 절대로 나오지 않는 색인걸?”
“어렸을 때는 머리카락 색 때문에 놀림을 받은 적도 있었고….”
“이렇게 예쁜데? 대체 누가 너한테 그랬다는 거야? 진짜 너무했다!”
“…고마워.”
다시 귀를 기울인 한창진.
창진은 은아가 하는 말을 듣고는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류연화의 머리칼이 아름다운 것은 인정하는 바였기에.
게다가 체내 마나의 영향으로 인해 신체가 변화하는 것은 플레이어로서 상당한 자질을 갖추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흔한 예로 유전자가 변질된 아인은 신체능력이 워낙 뛰어나지 않던가.
어라?
그러던 그는 옆에서 은하도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타이밍이 이상했다.
“왜요?”
“혹시 너도 지금….”
도청하고 있는 건 아니지?
창진은 목 언저리까지 올라온 말을 애써 삼켰다.
은하는 은아의 동생이었다.
경박한 모습을 보여줄 수 없었다.
만약 자신의 추측이 틀린 것이라면 은하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하게 될 것이다.
욕을 먹는 것은 기본이겠고.
어쩌면 은하가 은아에게 일러바쳐, 은아에게 경멸 받을지도 몰랐다.
“근데 궁금한 게 있는데….”
“응. 왜?”
“머리칼이 파란색이면, 아래는….”
“”…크흠…!!””
두 사람은 동시에 헛기침을 했다.
창진은 은하에게 고개를 돌렸다.
시선을 느낀 은하가 뚱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무슨 일이냐는 듯이.
에이, 아니겠지.
은하 실력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나한테 들키지 않을 정도로 도청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어.
한창진은 그러려니 넘기기로 했다.
그보다 온천에서 들려오는 대화에 집중하기로 했다.
마음속으로 주변을 탐지하기 위해 청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이라며 변명을 하고.
“…비밀.”
“괜찮아. 그러면 내가 직접 확인해보면 되지!”
“…응? 저, 저기, 은아야…아….”
“그냥 포기하면 편해. 내가 얼른 확인만 할 테니까 너는 가만히….” “이, 이러지 마.”
다시금 새된 비명이 들려왔다.
류연화의 비명이었다.
분명 무슨 일이 생긴 게 틀림이 없었다.
“”…습격인가.””
그렇기에 두 사람은 동시에 무기를 손에 쥐고 일어났다.
눈과 눈이 마주쳤다.
두 사람은 입을 다문 채로 서로를 응시했다.
“…형, 지금 어디 가려고요?”
“…은하 너는?” “”…….””
“사이다나 마실래요?” “사이다나 마시자.”
괜스레 겸연쩍어진 두 사람.
다시금 헛기침을 한 은하와 창진은 자리에 앉아서 사이다로 건배했다.
모닥불 옆에 놓아둔 사이다는 제법 김이 빠져 있어, 갈증을 해소하는 용도
에 지나지 않았다.
☆
파티는 두 명씩 보초를 돌아가며 서기로 했다.
둘이 쓰기에 넓은 3인용 텐트에서 서로 딱 붙은 채로 잠을 자고 있던 은하와 은아는 알람소리를 듣고는 몸을 뒤척였다.
“…잘 잤어?” “누나는 안 졸려?” “약간…, 졸린 것 빼고는 괜찮아. 그러니까 조금만 더 이대로 있자.”
은하는 머리맡에 있던 스마트폰을 집어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던전 안에서는 통신장비가 사용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시리우스그룹에서 개발한 스마트폰은 자체적으로 시간을 세는 프로그램이 설치되어 있었다.
시간대가 애매한 새벽녘이란 것을 확인한 은하는 다시 잠이 든 은아를 흔들었다.
“누나, 일어나. 슬슬 교대해야 하는 시간이야.” “5분만….”
“딱 5분만이다?” “응.”
침낭 속에 있던 은아가 꿈틀거리며 은하에게 바짝 붙었다.
다소 불편한 자세로 팔을 꺼낸 그녀는 그의 머리통을 끌어안았다.
은하는 은아의 숨결을 느끼는 채로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렸다.
저녁이 되기 전까지는 지하 5층을 공략할 수 있겠네.
사전에 플레이어 라이브러리에서 일부 데이터를 다운받아 스마트폰에 넣어둔 상태였다.
은하는 그중에서 이곳 던전에 대한 데이터를 읽고 있었다.
오랜 기간 관리되어 왔기 때문인지 던전에 대한 정보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누나 일어나. 이제 나가야 해.”
“으…, 아쉽다. 은하 너랑 잔 것도 정말 오랜만인데….”
어느덧 5분이 지났다.
은하는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그녀를 깨웠다.
졸린 눈을 뜬 은아는 아쉬워하며 침낭 밖으로 기어 나왔다.
“집으로 돌아가면 은애랑 셋이서 같이 자자.” “정말이지? 약속이야.”
“응, 약속.” “오랜만에 목욕도 같이 할래?”
“…그건 생각해볼게.”
눈을 반짝이며 묻는 은아.
은하는 어색하게 말꼬리를 흐렸다. 어렸을 적에는 그녀와 같이 목욕을 했던 적도 있었지만, 이제는 나이가 있었다.
그러나 은아는 그런 것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오히려 볼을 부풀리며 불만을 토로하기까지 했으니.
“은애랑은 같이 목욕도 하면서…. 노은하 너 그러는 거 아니야. 나도 너랑 남매라구.” “은애는 아직 어리잖아. 요즘에는 같이 탕에 들어가지도 않고 있고.”
“가족인데 뭐가 어때서?”
“그럼 엄마한테 한 번 물….”
“하긴, 은하 너도 이제 15살이지. 어쩔 수 없지, 아쉽지만….”
역시 은아는 어머니에게 꼼짝하지 못했다.
부풀어 오른 뺨에 입을 맞춘 그는 토라진 그녀를 달랬다.
어차피 은아도 장난을 쳤던 것인지 금세 화를 풀었다.
“연화야! 창진아! 피곤하지? 이제 우리가 지키고 있을게. 너희는 들어가서 편히 자.”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나? 그럼 불침번 좀 부탁해.”
“무슨 일 생기면 말하고.”
텐트를 나온 은아는 웃는 얼굴로 불침번을 서고 있던 연화와 창진을 대했다.
무기를 정비하고 있던 두 사람은 주변에 이상 징후는 보이지 않는다고 전했다.
은하와 은아는 두 사람을 대신해 모닥불 앞에 앉았다.
둘 다 피곤했나 보네.
두 사람이 텐트에 들어가고 안에서 뒤척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움직이는 기척은 완전히 사라졌다.
피로가 쌓인 나머지 금세 잠이 든 모양이었다.
“누나, 출출하지 않아?” “음…, 조금?” “우리 컵라면 먹을까?”
“응, 먹을래!”
감지망을 전개한 은하는 주변에서 몬스터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걸 확인했다.
그밖에 할 일은 없었던 데다 마침 배도 출출했기에 컵라면을 먹기로 했다.
은하는 은아가 텐트에 들어간 사이 주전자로 물을 끓였다.
“김치도 먹을 거지?”
“김치 좋지.”
라면이 설익었다.
은하는 은아가 라면과 함께 가져온 김치를 맛봤다.
국물을 들이켜니 몸이 뜨끈해졌다.
“누나, 전속 플레이어가 될 생각은 없는 거야?”
새벽에 라면을 먹을 때에는 말이 없는 법이었다.
국물이 바닥을 드러낼 때까지 먹은 은하는 국물을 마시며 몸을 녹이던 은아에게 물었다.
마침 은아도 라면을 다 먹은 참이었다.
김치를 아삭거리던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을 대신했다.
“전속 플레이어가 될 생각은 없어. 내가 플레이어가 되려는 것은 주변 사람들을 지키고 싶기 때문이니까.”
“누나가 그러면 어쩔 수 없지만…. 코코아 마실래?”
“응, 부탁해.”
은아의 선택을 존중하기는 했지만, 될 수 있으면 그녀가 안전한 삶을 살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내린 결정을 번복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두 손으로 머그컵을 감싸고 있는 그녀는 그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왜? 내가 불안해?” “…엄청.”
“은하 네가 내 실력을 아직 몰라서 그래. 서영 언니랑 혜림 언니한테 배우면서 실력이 얼마나 늘었는데.”
은아는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엉덩이를 들썩여 그의 옆으로 간 그녀가 조심스레 코코아를 마셨다. 이윽고 그녀는 몸을 기울여 어깨를 기댔다.
“아카데미 생활도 힘들었겠지만, 플레이어 업계는 더 힘들 거야.”
“힘들어도 괜찮아.” “괜찮지 않을 정도로 힘들 거야.”
은하는 모닥불에 마른 가지를 넣고 대꾸했다.
한 번 삶을 살았던 그는 앞으로 세상이 얼마나 힘들어지는지 알고 있었다.
힘들다는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힘들어질 것이다.
서울은 몬스터들에게 침공을 받고, 언젠가 구마가 나타나 전국 곳곳에 테러를 일으킬 것이다.
그밖에도 이 나라에는 숱한 문제가 발생한다.
“그래도 괜찮아. 힘들어도 참아야지.”
그럼에도 은아는 망설이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한 손을 움직여 은하의 손등 위에 얹으면서.
“힘들어도 참겠다고?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어?”
“나한테는 힘이 있으니까. 그래서 주변 사람들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어.”
“그런 건 나한테 맡겨.”
은하는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가 그렇게 결심을 하는 만큼 플레이어가 되는데 의미가 있는지 좀처럼 와 닿지 않았다.
힘들면 포기하면 된다.
그녀가 굳이 고통을 감내할 필요는 어디에도 없었다.
모두 자신이 짊어지면 되니까.
참는 것은 자신으로 족했다.
“─그러면 은하 넌 누가 지키게?”
“뭐…?”
“은하 너도 주변 사람들을 지키러 플레이어가 되려는 거잖아.” “…응.”
“근데 네가 주변 사람들을 지키면, 누가 널 지켜주는데?”
“…….”
자신은 누군가에게 지켜질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은하는 그 질문을 받고는 당황해서 할 말을 잃었다.
진지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할 말을 찾아 헤맸다.
“나는…, 괜찮아.” “나는 안 괜찮아.”
겨우겨우 입을 움직이는 은하.
반면에 은아는 단호하게 답했다.
그를 붙잡은 손에 힘을 준 그녀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플레이어가 되려는 이유는 은하 너를 지키고 싶기 때문이야. 은하 너는 나한테 말해주지 않아도,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을 할 생각인 거잖아. 그렇지?”
“…….”
의심의 여지없이 말하는 노은아.
흔들림 없는 눈을 마주한 은하는 뭐라 말을 하지 못했다.
그녀에게는 한 번도 말한 적이 없었건만.
남매이기 때문인 것일까.
그녀는 자신을 꿰뚫어보고 있는 것 같았다.
“네가 싫다고 해도, 나는 할 거야. 왜냐하면 난 네 누나니까. 동생이 위험해지는 건 절대 못 봐. 그러니 다음부터는 그런 말은 하지 마.” “…알았어. 고마워.”
은아의 의지는 확고했다.
그녀의 의지를 꺾을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은하는 무겁게 주억거렸다. 손을 뒤집어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자신을 붙드는 힘이 마치 자신에게 전하는 것 같았다.
너는 혼자가 아니라고.
“은하 너는 아카데미를 졸업하면 어떻게 할 거야? 파티를 만든다고 했지?” “응.”
“그럼 그때 나도 넣어줘.” “…생각해볼게.”
“생각이고자시고, 나는 네가 만든 파티에 들어갈 거야. 혜림 언니도 조건부로 레귤러스클랜에 들어와도 된다고 허락해줬단 말이야.”
그러나 홀로 감수해야 하는 길.
아니, 그녀는 절대로 걷게 해서는 안 되는 길.
은하는 그녀의 손을 놓지 않으려고 힘을 주었다.
이전 삶에서는 구하지 못한 그녀를 다시는 잃지 않겠다는 듯이.
누나의 도움을 받지 않을 정도로 강해져야 해.
강해져야 했다.
믿을 만한 동료들을, 쓸 만한 장기말을 모아야 했다.
그것이야말로 자신이 지키려 하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길이었다.
그렇기에 이 던전을 찾았다.
“아무튼! 자리 비워놔야 해. 그리고 아카데미에서 힘든 게 있으면 내게 꼭 말하고.”
“…응, 고마워.”
이 던전 어딘가에는 히든 피스가 숨어 있다.
리라이프 플레이어 2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