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life Player RAW novel - Chapter 303
대개 서포터를 지원하는 학생들은 고등아카데미 3학년 인턴 과정에서 병원을 선택하려 하지 않는다.
의학과 마법은 비슷해 보이면서도 구조 자체가 완전히 달랐으니까.
일반적으로 병원은 일이 많은 데다 전문적으로 의학을 공부하지 않은 플레이어 아카데미 출신에게 심하게 텃세를 부리기도 했고.
국내에서 빅5 중 하나로 통하는 앨리스병원은 의사들의 콧대가 매우 높은 데다가.
그들 사이에서 얼마 전 인턴으로 들어온, 플레이어 아카데미 출신의 노은아는 주목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물며 그녀에 대해서는 병원장의 낙하산이라는 소문까지 돌았다.
그런데 그녀는 인턴생활을 하면서 콧대 높은 의사들도 수그러들 만한 실력을 보여주었다.
그녀의 나이를 고려하면 칭찬받아 마땅한 실력이었다.
더군다나 그녀는 명랑한 마음씨와 얼굴마저 예쁘기까지 했으니.
아직 병원 물이 제대로 들지 않은 인턴과 경력이 짧은 레지던트들이 그녀를 아이돌마냥 찬양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라고 할 수가 있었다.
몇몇 전문의들도 그녀를 칭찬하며 의대를 갓 졸업한 학생들과 그녀를 비교하기도 했고.
그러나 그녀의 활약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었다.
“이번에 들어온 인턴 말이야. 왜, 겁도 없이 덜컥 우리 병원에 지원한 아카데미 출신 있잖아….”
“아…, 네.”
“실력이 괜찮기는 한데 말이야…, 날 무슨 쓰레기 쳐다보듯 보는 것 같다니까.”
“…기분 탓이겠죠.”
“에이, 아니, 아니야. 자네, 내 감을 못 믿어?”
앨리스병원 3층 남자화장실.
흉부외과 김 교수는 볼일을 보면서 옆에 있던 소변기에서 볼일을 보던 호흡기외과 박 교수에게 운을 뗐다.
아무 감정도 담기지 않은 것처럼.
마치 소변을 보듯 흘러 보내듯이.
그러나 박 교수는 친하지도 않은 김 교수가 갑자기 말을 거는 이유를 얼추 짐작하고 있었다.
정치란 회의석상에서만 오가는 게 전부가 아니었다.
힘을 가진 자들의 정치란 이렇게 일상생활 속에서, 남을 짓밟는 것에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행해지는 것이었다.
“박 교수도 이제 슬슬 결정을 해야 할 것 같은데…, 누구 줄을 타는 게 좋을지 말이야….” “…누구 줄이라뇨. 제 바람은 그저 더 많은 사람들을 살리고 싶은 것뿐입니다.”
“에이…, 사람이 그렇게 정직하면 오래 못 살아. 물이 너무 맑으면, 물고기가 살지 못한다는 말 몰라?”
김 교수는 병원장의 라인에 있는 사람이었고, 병원 내에서 그 정도로 힘을 지닌 사람이었다.
반면에 박 교수는 정치생활에 대해 염증을 앓고 있는 사람이었다.
괜히 정치싸움에 끼어들었다가는 머리만 아파질 거라는 생각에 그는 김 교수가 하는 말을 모른 척했다.
그럼에도 김 교수는 끈질겼다.
“이번에 그 애…, 박 교수 밑에서 일한다면서?”
“…어제부로 들어왔습니다.”
“거기는 인재가 많아도 일에 치여 바쁠 텐데 말이야….”
김 교수가 쯧쯧 혀를 차며 바지를 추슬렀다.
박 교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냥 넘어가면 좋으련만, 아무래도 김 교수는 노은아를 단단히 찍은 것 같았다.
이렇게 완고한 태도를 보여줘서는 거절을 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병원 내에서 힘이 없는 박 교수는 결국 김 교수의 말을 들어줘야 하는 입장이었다.
아무리 정치가 싫다고 하더라도, 제 목숨은 보전해야 했으니까.
“박 교수 과에…, 간당간당한 놈들 있지?”
“…네.”
“그럼 이번에 새로 들어온 인턴이 담당하게 해. 걔네들 담당하는 거야 어차피 별 거 없을 거 아니야.” “…알겠습니다.”
더 이상 가망이 없다고 판정받은 환자들.
김 교수는 의사도 치료하지 못하고 고통을 참는 약만 투여 받는 이들을 관리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의대를 갓 졸업한 사람들에게는, 특히 사람을 살리기 위해 의사가 된 이들에게는 더러운 간계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에게는 책임이 없다고 해도, 결국 그들은 자신들이 담당하게 된 환자의 죽음을 지켜봐야 했으니까.
자신이 맡는 환자를 지켜보는 것은 숙련된 의사들에게도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신입에게는 이만한 괴롭힘이 따로 없었다.
“노은아 인턴은…, 병원장님께서 잘 봐달라고 말하신 걸로 아는데요. 그래도 되겠습니까?”
“들어보니 병원장님이 알고 계시는 분의 손녀의 친구의 언니라던데…. 그거는 모르는 사이나 진배없지.”
김 교수는 콧방귀를 끼었다.
노은아의 인맥이 사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소리였다.
그렇더라도 병원장의 지인이란 건 다름없었음에도.
병원장의 성격을 잘 알고 있다는 김 교수는 흐르는 물에 손을 씻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병원장님 말을 무시하는 건 아니야. 한 번 빡세게 굴려 놓아야 주변에서 낙하산이니 뭐니 떠들지 않을 거 아니겠어?”
“이미 실력으로 입증….”
“잠깐 거기서 일을 하게 놔뒀다가, 내가 내 밑으로 데려갈 테니 자네는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네.”
박 교수는 김 교수의 생각이 뻔히 보였다.
노은아를 일부러 힘들게 한 다음, 자신이 그녀를 위로하면서 어떻게든 그녀의 마음을 사겠다는 것일 터.
그야말로 악취미였다.
거울 앞에 선 박 교수는 얼굴을 굳혔다.
거울 너머로 그의 얼굴을 확인한 김 교수는 껄껄 웃으며 세면대 물을 잠갔다.
“자네는 너무 맑아서 탈이야.”
물기가 묻은 손을 탈탈 털어내던 김 교수는 그 손을 박 교수의 어깨에 문질렀다.
“자네한테 기대하는 게 많아. 이따 점심 같이 먹을 거지?”
“…알겠습니다.”
박 교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김 교수가 나간 뒤에야 홀로 남은 박 교수는 대뜸 한숨을 쉬었다.
“처자식도 딸린 놈들이….”
사실은 김 교수를 포함해서 벌써 세 번째나 되는 청탁이었다.
차가운 물을 얼굴에 끼얹은 그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이미 노은아는 당장 오늘내일 하는 환자들을 돌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이미 몇몇 사람들을 치유하기까지 했다.
박혜림의 라는 이명은 완전히 틀린 게 아니었다.
☆
언젠가 박혜림은 말한 적이 있었다.
살릴 수 있는 사람보다 살려야 하는 사람이 더 많고, 살릴 수 없는 사람들은 그보다 더 많이 있다고.
그들은 자신들이 이러는 사이에도 세상 어딘가에서 죽어나가고 있을 것이라고.
‘그러니 은아야, 살리지 못하는 걸 두려워하지 마렴. 괜히 너 혼자서 끌어안으려고 하지 말고.
누구보다도 뛰어난 서포터는 바로 지키고 싶은 사람은 반드시 지키는 사람이란다.’
죽음은 언제나 가까이에 있다.
그러니 죽음을 두려워 말라.
박혜림의 가르침이었다.
오늘도 환자 한 명의 임종을 본 은아는 그녀의 가르침을 되새기며 마음을 되잡았다.
괜찮아, 나는 괜찮아.
죽은 사람만 있던 것은 아니었다.
기운을 차린 사람들도 있었다.
그 사람들이 고맙다고 말할 때는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역시, 자신은 서포터를 지망하기를 정말 잘했다고.
은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니 괜찮다.
“힘들지? 커피 마셔.”
“아, 고마워요, 언니.”
3층 라운지에 앉아 있던 은아는 임도희가 건넨 커피를 마셨다.
당분 하나 들어있지 않은 커피는 며칠 사이 쌓인 피로를 잊을 만큼 매우 씁쓸했다.
그러나 그녀는 알 수 없는 갈증을 해소하려고 시원한 커피를 단숨에 들이켰다.
“캬~!”
“이게 맥주니? 무슨 커피를 맥주 마시듯이 마시니?”
“헤헤…, 목이 말라서….”
“한 잔 더 마실래?” “아니에요! 괜찮아요!”
은아는 손사래를 치며 임도희의 호의를 거절했다.
그녀가 많은 이들의 죽음을 보면서 웃음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모두 임도희 덕분이었다.
까칠하게만 보였던 그녀는 은근히 사람을 잘 챙겨주는 성격이었다.
“은아 네가 지금 뭐 때문에 얼굴이 어두운지 모르지는 않겠는데, 그것만으로도 잘한 거야.”
“…그럴까요?”
“교수님들도 안 될 거라고 포기한 사람들이 희망을 가질 수 있게 하고 기운까지 차리게 했는데 당연한 거 아니야? 나는 네 마법을 보고나서 의대에 진학했던 것이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는걸? 분명 나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그랬을걸?”
“저는 오히려 언니가 더 부러웠는데요?” “응? 내가 왜?”
“제 마법으로 구할 수 있는 사람은 적지만…, 언니의 힘으로 구할 수 있는 사람은 더 많잖아요.”
은아는 종이컵을 꼼지락거렸다.
겸연쩍게 웃은 그녀는 인턴을 하며 자신이 깨달았던 부분을 요목조목 되짚었다.
“치유마법은 어디까지나 대상자의 치유능력을 높이는 것밖에 못해요. 사람들이 다쳤을 때, 서포터가 결국 할 수 있는 방법에는 제한이 있는 거예요.”
“그래도 너희는 얼마 걸리지 않고 응급환자들을 치료할 수가 있잖니? 찢어진 살갗이 단시간에 원상복구가 되는 건 현대의학으로는 불가능해.” “서포터는 마나를 매개로 대상자의 치유능력을 자극하면서, 대상자가 죽을 때까지 보유하고 있는 치유능력을 가불해오는 거예요.”
“으, 그러면 사양인데…. 잘못하면 피부 노화가 빨리 올 수가 있다는 뜻이잖아?”
“그리고 혜림 언니가 말해줬어요. 의술을 다룰 줄 아는 사람은 덧셈과 뺄셈 두 가지를 다 할 수 있지만, 서포터는 기본적으로 덧셈밖에 못한다고요.” “덧셈? 뺄셈?” “네, 언니.”
처음에는 은아도 임도희처럼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인턴으로 지내면서 서포터의 한계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다.
서포터의 치유마법은 어디까지나 강화시키고, 보강하고, 증식시키는 일 뿐이었다.
무언가를 잘라내고 빼내는 작업은 서포터의 마법으로는 불가능했다.
“예를 들면, 암 같은 경우에는…, 쉽게 말해서 세포가 계속 증식하는 거잖아요?”
“응, 그렇지.” “만약에 치유마법을 암 환자에게 사용해버렸다가는 체내의 암세포가 훨씬 빠른 속도로 증식해버리고 말 거예요. 마법으로는 어딘가에 있을 암세포를 잘라내는 메커니즘을 쉽게 떠올릴 수가 없거든요.” “…잠깐. 쉽게라니…, 그 말은 지금 메커니즘을 떠올릴 방법만 있다면 마법으로 암을 치료할 수 있을 거란 뜻이니?”
“음…, 어딘가에 있지는 않을까요? 원리를 이해해서 구현화할 수 있는 서포터가 세상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르죠.”
“에이, 좋다 말았네.”
돌연 눈을 빛내던 임도희는 그대로 소파에 몸을 파묻었다.
은아는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나도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으면….
은아는 고개를 저었다.
자신의 스승도 이르지 못한 진리에 자신이 다다를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러니 그저 바랄 뿐이었다.
적어도 은하를 지킬 수 있는 힘을 지닌 사람이 되기를.
그것이 그녀가 서포터가 될 것을 결심한 이유였다.
“그래도 주말이라 점심 먹을 시간은 있네. 은아 너는 어떡할래? 지금 우리 오빠가 이쪽으로 오겠다는데 너도 같이 점심 먹을래?” “우와! 언니, 오빠도 있었어요?”
“나랑 전혀 닮지 않은 사람이지만 오빠라면 오빠지, 뭐.” “나중에 사진이라도 보여주세요! 저는 오늘 남동생이랑 같이 점심을 먹기로 했어요.” “남동생? 네가 맨날 말하고 다니는 은하라는 애? 도대체 얼마나 멋지면 너한테 들이대는 사람들한테 관심도 보이지 않는 거니?”
“에이, 저는 그런 건 아직 생각이 없다니까요.”
“뭐, 네가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 그래도 이건 명심해.” “어떤 거요?” “절~대로 김 교수 근처에는 얼씬 거리지 마. 너도 이제는 알겠지만, 자기보다 직급이 낮은 여자한테는 손장난이 안 좋은 사람이니까.”
자리에서 일어난 임도희가 말했다.
손가락으로 지목당한 은아는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병원에 떠도는 소문 정도는 알고 있었다.
병원장과 친분이 깊다는 김 교수가 직위와 권위를 이용해서 성추행을 시도하고 있다고.
“…네, 명심할게요.”
은아는 처음 그 소리를 들었을 때 어째서 김 교수를 신고하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인턴을 하게 되면서 세상은 가진 자의 편이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다.
그동안 가진 자의 위치에 서 있던 그녀는 병원에서 최하층에 위치하는 인턴이 되면서 알게 된 것이다.
하양이네 할아버지한테 말할까.
임도희를 보낸 은아는 이내 생각에 잠겼다.
오지랖이 넓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자신은 일개 인턴일 뿐이니까.
마냥 한쪽 말만 들을 수도 없었다.
어쩌면 소문이 떠돌고 있는 만큼, 윗사람들은 눈치를 채고 있으면서도 묵과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럴 때…, 은하라면 어떻게 할까.
그러다가 그녀는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은하의 행동은 너무 뻔했다.
필시 자신에게 문제가 되지 않으면 그대로 지나칠 것이다.
그럼 나도 그렇게 해야 하나?
그녀가 다시금 생각에 잠겼을 때, 라운지로 들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모두 다 병원장님 덕분이지요. 덕분에 조용하고 편안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하하하, 너무 일만 하시면 건강에 좋지 않습니다. 시간이 나는 틈틈이, 이렇게 근방이라도 산책을 해줘야 하지요.” “네, 명심하고 또 명심하겠습니다. 회장님께는 제가 말씀 잘…, 어?”
별안간 끝이 높게 올라간 어조.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던 은아는 그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이윽고 그녀의 눈이 커졌다.
“…은아야?” “…여름 언니?”
☆
“그럼 나는 잠시 여동생을 만나고 오마. 하양이를 잘 부탁한다.” “네, 정원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은하는 등을 돌리며 걸어가는 임도훈에게 손을 흔들었다.
초등학교 교사였던 임도훈은 작년, 하양이 중등아카데미에 입학한 뒤에 앨리스그룹의 전속 플레이어가 되었다.
이제는 뭐라 불러야 할지 애매해진 관계였지만, 그럼에도 은하는 그를 선생님으로 대하고 있었다.
“근데 임도훈 선생님한테 여동생이 있었어? 그럼 똑같이 안경을 쓰고 뚱한 얼굴을 하고 있는 건가?”
“음…, 그러게. 나도 선생님한테 여동생이 있다는 이야기는 오늘 처음 들었어. 게다가 여기에서 근무하는 레지던트라니….”
은하와 하양은 접수처로 향했다.
두 사람은 사전에 임도훈을 통해 은아가 점심을 먹을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 달라 부탁해놓았다.
아니나 다를까.
접수처에 하양의 이름을 언급하자 간호사는 깜짝 놀라며 두 사람에게 고개를 숙였다.
두 사람은 쓴웃음을 지었다.
“죄송해요. 말도 없이 이렇게 불쑥 찾아와서….”
“아, 아닙니다. 언제든 찾아오셔도 되는 걸요. 노은아 인턴을 호출하도록 하겠습니다.”
깍듯이 말하는 간호사.
하양은 혹시나 해서 챙겨온 과자를 접수처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러던 중─.
“─응? 너 노은하 아니니?”
“어?”
접수처에 있던 간호사 중 한 명이 은하에게 아는 척을 한 것이다.
이름이 불린 은하는 처음 고개를 갸웃거렸다.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러면서 희미하게 기억이 날 듯한 사람이었다.
“나, 나, 나 모르겠니!? 너 예전에 여기에 입원했었잖아.” “…아…! 간호사 같지 않던 누나!”
“욘석이!”
은하는 그제야 기억이 났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이탈리아 대사 젠코 마이론과 싸우다 다쳐 입원한 일이 있었다.
그때 VIP 입원실에 입원해 있던 은하는 무료한 시간을 때우기 위해 어느 간호사와 잡담을 나눴던 적이 있었다.
여전히 이름은 기억나지 않았지만.
이제 와서 이름을 물어도 실례였고 이름을 알려줘도 기억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근데 누나가 여기에 왜 있어요? 누나는 VIP 전담 아니었어요?”
“그게…, 행실이 안 좋다는 이유로 밀려났거든.”
개의치 않고 말하는 간호사.
돌이켜보면 그녀는 늘 그랬다.
덕분에 자신이 무료한 입원생활을 보내는데 도움이 되었지만.
“그러고 보니 여기는 아직도 미역국이 맛없어요?”
“왜? 또 먹고 싶니? 요즘에는 나름 맛있는 것 같던데. 정 먹고 싶으면 이따 누나들 휴게실에서 미역국 좀 먹다 갈래? 근데 몇 년 안 본 사이 키가 훨씬 커졌구나? 이제는 정말 남자가 되었네?”
“누나는 이제 아줌마가 되었네요.” “뭐? 임마?”
은하는 간호사의 말을 받아쳤다. 그러고는 미역국은 나중에 시간되면 먹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바로 그때.
…어라?
묘한 감각이 뒷목을 콕콕 찔렀다.
은하는 뒤를 돌아보았다.
“왜?”
“아무것도 아니야.”
하양이 웃고 있었다.
기분 탓이었던 모양이다.
은하는 한순간 팔에 돋은 소름을 쓸어내리며 은아를 기다리려 했다.
그런데 기다리는 은아는 계속해서 나오려 하지 않고, 담배냄새가 나는 의사가 접수처로 다가온 것이다.
“여기가 놀이터야? 일들 안 하고 웬 애들이랑 잡담이나 떨고 있어?” “””죄송합니다!”””
“하여간…, 이것들이 완전히 빠져 가지고, 원…. 야, 너희들은 근데 왜 접수처 안으로 들어와 있냐?”
“저, 김 교수님 그건….”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접수처로 터벅터벅 들어온 의사.
한창 간호사들을 꾸짖던 의사는 곧 멀뚱멀뚱 서 있던 은하와 하양에게 삿대질을 해댔다.
뭐야, 이건?
이상하게 한 대 때리고 싶은 얼굴.
은하는 뚱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의사가 눈빛의 의미를 눈치 챘는지 어처구니가 없는 웃음을 흘렸다.
그러고 뭐라 말을 하려 하는데─.
“─함부로 들어와서 정말 죄송합니다. 은하야, 일단 나가 있자.”
하양이 괜한 싸움이 번지기 전에 은하를 끄집어낸 것이다.
의사는 접수처를 나오는 그를 힐끗 흘겨보다가, 흥미를 잃었는지 이내 간호사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은하에게 아는 척을 했던 간호사에게 향하는 의사의 손길이 어쩐지 기묘했다.
“신 간. 자꾸 이럴 거야? 저번에도 탕비실을 클럽으로 만들지를 않나, 환자랑 싸우려 하지를 않나…. 자네 예전에 꽤 놀았나봐?”
“…아니요. 안 놀았어요.”
어깨를 툭툭 치던 손길이 천천히 팔뚝을 쓰다듬고 있었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미끄러지는 손길은 더 아래로─.
“─이거 뭐야?”
“어?”
은하는 의사의 손목을 잡아챘다.
미간을 찌푸린 채로.
“…너 뭐하는 짓이니?”
한편, 정신을 차리고 한껏 점잖게 말하는 의사.
힘을 주어 그의 손을 쳐낸 의사는 곧이어 얼굴을 굳혔다.
“지금 뭐했냐?” “허허…, 이게 지금 반말을 하네? 야, 이 새끼 뭐하는 놈이야? 누구랑 아는 사이야, 대체?”
“…노은아 인턴 동생이라 합니다.”
의사가 이를 갈며 묻자, 간호사 중 한 명이 조용히 첨언했다.
의사의 얼굴이 분노로 불그스름해졌다.
“노은아 인턴? 허 참…, 은아 걔는 동생도 싸가지가 없구만. 근데 얘가 병원에는 웬일이야?”
“노은아 인턴과 약….”
“지금 누나한테 뭐라 그랬냐?”
화가 난 것은 의사만이 아니었다.
그동안 남자를 빤히 쳐다보고 있던 은하 역시 발끈했다.
그의 몸에서 흘러나온 살기는 이내 의사의 몸을 천천히 더듬어가면서 목을 조이려 했다.
“이게 어따 대고 큰 소리야!?”
반면 무언가 위험한 감각을 직각한 의사가 본능에 따라 주먹 쥔 손을 들어올렸다.
어리석은 본능이었다.
살기 위해서는 엎드려야 했건만.
바보 같이 덤벼들고 말았다.
그러나 이미 그의 주먹은 은하에게 떨어지려 했고, 살기는─.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이변은 일어나지 않았다.
어느새 은하
의 앞에 나타난 하양이 의사를 지키기 위해 방벽을 전개한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 멀리서 보기에는 의사가 그녀를 때리려 하는 모습과 다름없었으니.
“…흠….”
“어? 왜 그래, 오빠?”
의사는 운이 없었다고 할 수 있다.
한쪽에서는 임도훈과 여동생으로 추정되는 레지던트가 걸어오고 있는 상황이었으며.
“은하야?”
“…하양이 네가 왜 여기에 있니?”
“…….”
다른 한쪽에서는 웬 늙은 의사와 눈에 띄는 외모를 하고 있던 여성과 은아가 걸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김 교수, 자네 지금 뭐하고 있는 거야?”
“…….”
당황함이 역력한 노인의 목소리.
그러자 벽에 가로막힌 주먹을 쥔 의사는 마치 공포영화의 장면처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뒤돌아보면 죽는데도.
그럼에도 의사의 본능은 어리석은 나머지 우를 범하고 말았다.
“워, 원장님…, 이건 그….” “상황으로 봐서 누가 잘못했는지는 명확히 알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무언가 변명을 하려던 의사.
그러나 노인의 옆에 서 있던 여성은 그의 말을 가로챘다.
병원장에게 미소를 지은 그녀는─.
“─제가 좋아하는 병원에서 하필 이런 모습을 보게 될 줄이야, 조금 실망스럽네요.”
“…….”
혼이 사라진 얼굴이 있다면 아마도 병원장과 같은 얼굴을 하고 있을 것이다.
핼쑥해진 병원장은 망연자실한 채 입만 뻐끔거리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는 말을 이었다.
“현명하신 병원장님께서는 모쪼록 공명정대하게 해결해주실 거라 굳게 믿고 있답니다.”
선녀 임가을은 말했다.
리라이프 플레이어 3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