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life Player RAW novel - Chapter 38
이제 4월도 얼마 남지 않았다.
은하는 창 밖에 내리는 비를 보며 감상에 잠겼다.
비가 오는 소리는 기분이 좋았다. 타닥타닥 바닥을 치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머릿속에서 울리던 비명이 거짓말처럼 들리지 않았다.
지금은 아니지만.
회귀 전, 자신을 미치게 만들었던 원인과 원성은 이미 머나먼 과거의 일이었다.
지금은 그저 빗소리가 좋았다. 눈을 감고 귀를 기울이면 아이들이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도─.
“─그럼 은하도 후보로 적어놓을게.”
“뭐?”
유지나에게 이름이 불린 은하는 탐취에서 깨어날 수밖에 없었다. 당황한 나머지 얼빠진 소리를 늘어놓은 그는 칠판에 적힌 큼지막한 글자를 발견했다.
“왜 그러니?”
“선생님, 제 이름이 왜 거기 적혀 있는 거예요?”
‘4반 회장선거’라고 형형색색으로 칠해진 큼지막한 글자. 그 밑에는 은하의 이름이 올라 있었다.
“뭐긴 뭐야. 너, 회장 후보라고 했잖아.”
“그러니까 누가? 왜?”
지나를 대신해서 대답한 사람은 짝꿍 민지였다.
은하는 민지가 몰래 장난을 친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왜 이래. 나 아니야.”
이미 몇 년이나 함께한 사이였다. 눈빛만으로 은하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읽은 민지가 볼멘소리로 항의했다.
“그럼 누군데.”
“누구긴 누구겠어.”
“최은혁이 또…!”
거기까지만 말해도 누군지 짐작이 갔다.
은하는 교실 맨 뒤에 앉아 있을 은혁을 찾았다.
“대장~!”
은혁은 은하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 마냥 손을 흔들고 있었다.
“하아….”
마음 같아서는 주먹을 날리고 싶었던 은하였지만, 순서를 헷갈려서는 안 됐다. 은혁을 때리는 일을 보류한 그는 일단 회장후보에서 사퇴하기로 했다.
“선생님! 저 사퇴할게요.”
“은혁이가 추천해준 거잖니. 은혁이의 성의를 무시하면 안 돼.”
“전 회장자격이 없는 사람인데요!”
“그런 소리가 어디 있니. 아이들이 얼마나 무궁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데!”
언제나 아이들에게 휘둘리기만 하던 지나가 평소와 다른 모습으로 말했다. 두 손을 모으며 아이들이야말로 국가 최대의 자원이라는 소리를 늘어놓는 중이었다.
지나의 이상론을 듣기를 포기한 은하는 회장선거에 사퇴하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먹민지 네가 미리 말을 해줬어야지!”
“난 말 해줬다 뭐. 그러게 누가 딴청 피우고 있으래?”
근데 왜 입 꼬리를 실실 올리고 있는 건데. 너도 최은혁이랑 한통속이었던 거 아니야?
흥! 난 모르는 일이거든?
오랜만에 허공에서 부딪치는 두 사람의 시선. 분위기를 감지한 아이들이 주변에서 책상을 최대한 당겼다.
좋아, 어디 너도 당해봐라.
“선생님! 은혁이랑 민지를 추천합니다!”
“한 사람만 추천해야지.”
“그럼 민지를 추천합니다! 민지가 얼마나 리더십이 뛰어난데요!”
“너 진짜 끝까지 해볼 생각이야?”
민지가 큰 소리로 항의했다.
덩달아 은하도 언성을 높였다.
“너, 너희들! 선생님이 싸우면 안 된다고 그랬지!?”
그리고 두 사람을 말리는 사람은 성격이 유약한 유지나였다. 그녀가 얼굴이 파래진 채로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두 사람을 말리는 데에는 부족했다.
넌 진짜 웬수다, 웬수.
두고 봐, 진짜.
짝꿍이 되었을 때부터 운수가 좋지 않았던 것이다. 이 이상 화를 낼 수도 없으니 두 사람은 일단 일시적으로 화해하기로 했다.
“민지는 회장에 입후보 하고 싶은 거니?”
“아니요. 저는 노은하를 추천할게요.”
“선생님. 왜 저는 입후보해야 하고, 얘는 입후보 안 해도 되는 건데요?”
“너희가 그러면 회장선거가 장난처럼 느껴지잖니.”
어차피 초등학교는 어린애들 소꿉장난이 아닌가요.
은하는 목 언저리에서 내뱉으려던 말을 참았다.
“지금 회장으로 입후보하려는 사람이 은하 밖에 없는데. 다른 애들은 없니? 한 학기 동안 4반을 위해 봉사할 사람?”
두 사람의 다툼으로 반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았다. 도안유치원을 나온 아이들이나 평소 어울려 놀던 아이들이야 두 사람이 다퉈도 그러려니 넘어가는 분위기였지만, 다른 아이들은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눈치였다. 특히 다른 유치원에서 나온 아이들은 두 사람에게 싸늘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뒤늦게 저지른 실수를 깨달은 민지는 얼굴이 빨개진 채로 고개를 푹 숙였다.
괜스레 미안해진 은하는 끙 소리를 내며 입을 다물었다.
“선생님. 저 입후보 할게요.”
그런 분위기에서 입후보를 자청한 아이는 세나였다. 그녀는 아이들의 쏟아지는 시선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손을 들었다.
“그, 그래. 세나 말고 더 입후보할 사람은 없니?”
세나가 입후보를 한다니 회장선거에 나가려던 몇몇 아이들이 손을 내렸다. 아이들은 괜히 그녀의 눈 밖에 나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 이따 5교시에 회장선거를 할 테니까 은하랑 세나는 회장이 되면 반을 위해 어떻게 할 건지 잘 생각해보렴.”
숨이 막히게 답답했던 시간이 끝을 고했다. 아이들은 종소리가 울리자마자 자리에서 우르르 일어났다.
“하기 싫다. 아무것도.”
비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거의 넋이 나간 채로 책상에 엎드린 은하는 회장이 될 마음이 죽어도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세나가 회장이 되기를 응원하고 푹 쉬고 싶었다.
아이들이 가만히 둔다면.
역시 그럴 리는 없었다.
“대장. 나는 대장이 이 반에서 짱이 돼야 한다고 생각해. 내가 대장을 짱으로 만들어줄게!”
은혁은 막무가내였다. 그는 기회는 지금 뿐이라는 것처럼 눈을 빛내고는 교실에 남아 있던 남자아이들을 찾아다녔다. 그대로 아이들을 붙잡고서는 은하가 회장이 되어야 하는 이유를 차근차근 설명하기 시작한 것이다.
“흠, 그렇구나!”
“나도 은하가 회장이 되면 좋겠어.”
“은하가 회장이 되면 매일 체육시간이 있다고!?”
원래 공약을 지키는 사람은 없다지만 너무한 거 아니야?
“저거 정말 날 골탕 먹이려는 건 아니겠지?”
은하가 그러거나 말거나 은혁은 되지도 않는 말로 남자아이들을 홀렸다.
“나, 나도 은하 네가 회장이 되면 좋겠어.”
“나도. 투표할게.”
화장실을 다녀온 하양과 서나가 은하에게 표를 행사하기로 했다.
전혀 반가운 소리가 아니었던 은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나도 몇몇 아이들한테 물어볼게.”
“원래 초등학생 회장선거가 이리 치열한 거야?”
은하는 친한 아이들에게 다가가는 민지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스케일이 전교회장 선거가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아마 네가 회장이 될 거야.”
“어째서?”
어느새 하양도 사라지고 없었다.
서나와 둘만 남은 은하는 비가 내리는 창밖을 내다보며 물었다.
“남자애들은 아마 너한테 투표할 거야.”
이유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파벌에 얽매이지 않는 남자아이들이라면 은혁이 충분히 포섭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리고 여자애들도…. 세나를 싫어하는 애들은 많거든.”
“흠….”
서나는 반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던 것만이 아니었다. 교실 끝에서 쥐 죽은 듯이 지내던 그녀는 오히려 그 점을 살려 아이들의 교우관계를 관찰하고 있었다.
세나는 이 반에 군림하는 작은 여왕이었다. 민지의 파벌이 와해된 이후, 그녀는 발언권이 강한 파벌을 이끌고 있었다.
하지만 모든 아이들이 그녀가 반에서 군림하는 걸 수긍하지는 않았다. 그녀의 횡포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아이들도 더러 있었다.
“…하기 싫은데.”
“난 네가 좋다고 생각하는데.”
“귀찮아.”
“너답네.”
서나가 피식 웃고는 자리로 돌아갔다.
쉬는 시간을 끝내는 종이 울리고 수업이 시작되었다.
은하는 비가 그치지 않는 창밖을 멍하니 내다보았다.
☆
이변은 점심시간에 일어났다.
“우와~! 이게 무슨 냄새야?”
“햄버거다! 햄버거야!”
“와, 햄버거가 왜 우리 반에 왔지?”
점심을 먹으러 가던 아이들은 햄버거를 잔뜩 싸들고 온 남자를 반짝이는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얘들아. 이거 우리 아빠가 쏘는 거야. 맛있게 먹어.”
세나는 정장을 입은 남자 앞에 선 채 콧대를 세우며 이야기했다.
“와~! 세나 짱이다!”
“햄버거! 햄버거!”
“오늘 점심은 햄버거다!”
학교식당의 점심이 맛있다지만 아이들의 입맛은 어디를 가지 않았다.
세나는 햄버거에 열광하는 아이들의 환호를 당연하다는 투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는 아이들에게 햄버거를 돌리라고 남자에게 턱짓으로 명했다.
“너희도 도와주렴.”
“응.”
“그래.”
“역시 세나야.”
세나의 파벌에 속하는 여자아이들도 햄버거를 돌리는 남자의 뒤를 따랐다. 4반에 군림하는 여왕인 그녀만이 교탁에 서서 교실을 둘러보고, 그녀를 모시는 아이들은 남자가 손에 들고 있던 봉지에서 음식을 나누어주었다.
“세나를 회장으로 뽑아줘.”
“세나가 회장이 되면 달마다 햄버거를 산대.”
이들은 햄버거와 콜라를 돌리면서도 세나의 이름을 빼먹지 않았다.
허, 참. 누가 보면 어디 국회의원 선거라도 나가는 줄 알겠어.
은하는 햄버거를 뇌물로 아이들의 환심을 사는 세나에게 혀를 내둘렀다. 그로서는 고작 초등학생 회장선거에 햄버거까지 돌리며 회장이 되려 하는 그녀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세나는 햄버거를 들고 있던 남자를 교탁까지 불러서는 몇 개를 교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고는 친위대에 속해 있던 여자아이를 한 명 불러서는 햄버거와 콜라를 들고 따라오라고 명하는 것이 아닌가.
세나가 무슨 속셈인지 궁금했던 은하는 잠자코 지켜보았고,
어라? 이거 봐라?
세나는 친히 발걸음을 움직여 은혁, 하양, 서나, 민지, 마지막으로 은하에게 햄버거를 나누어주었다.
“자. 소중한 한 표를 부탁해.”
은하는 햄버거를 건네는 세나가 입 꼬리를 끌어올리는 의미를 모르지 않았다.
그것은 분수를 알라는 의미의 비웃음이었다. 사람을 위에서부터 내려다보는 시선인 동시에 자신보다 하등한 사람을 짓밟는 데에서 비롯하는 쾌감이었다.
“어린애가 벌써부터 이런 짓이나 하고 다니고….”
은하는 기가 차서 햄버거에는 관심도 두지 않았다.
민지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자신이 은하에게 투표할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거만하게 표를 행사하라며 건네는 햄버거를 쳐다보고는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누구를 거지로 알고….”
민지는 세나가 건넨 햄버거를 넙죽 받아먹을 정도로 머리가 나쁘지 않았다. 드라마를 보고 단련된 그녀가 세나가 직접 햄버거를 나누어준 의도가 무엇인지 모를 리가 없었다.
이것은 일종의 메시지였다.
천한 너희들은 그냥 짜져 있으라는.
이런 식으로 누군가의 악의를 받게 될 줄은 몰랐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것도 아닌 행동에서, 이토록 복잡한 악의가 담겨있을 줄은 생각지 못했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비참한 기분을 맛볼 것이라는 것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당해야 했던 민지는 어떤 식으로 감정을 표출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잊어, 다. 지금은 다 잊어도 돼. 신경 쓰지 마.”
“아얏! 왜 때리고 그래.”
은하는 그런 그녀의 이마에 꿀밤을 때렸다.
그녀는 아직 인간의 악의를 견디기 버거운 나이였다.
벌써부터 타인의 악의에 상처받을 필요는 없었다.
무력함을 느낄 필요도, 비참함을 느낄 필요도.
그러니 모르는 게 나았다. 벌써부터 타인의 악의에 물들어 그들과 똑같은 사람이 될 필요는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저 애는 대단하네.
세나는 같은 나이인데도 아이들을 괴롭히는 데에는 탁월했다. 그녀는 자신이 가진 힘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괜히 부잣집 아가씨는 아니라는 건가.
분명 그녀는 어렸을 적부터 어지간한 교육은 받고 자랐을 터였다.
그나저나 다른 애들은….
민지도 이 모양이었다. 은하는 다른 아이들이 걱정이 되어 교실을 둘러보았다.
대다수의 아이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햄버거를 넙죽 받아먹고 있었다.
반대로 은하에게 표를 행사하겠다고 주장했던 아이들은 말로 표현할 수는 없어도 햄버거를 받고 모종의 감정을 느낀 모양이었다.
햄버거에 잘못은 없다. 잘못은 없는데….
“에잇! 너 다 먹어!”
“헉! 정말? 고마워! 잘 먹을게! 나중에 딴 소리 하기 없기다!”
“나도! 나도!”
심각하게 고민하던 은혁은 결국 다른 아이에게 햄버거를 넘겼다.
왠지 이대로 먹었다가는 자신의 존재가 하찮게 여겨질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우, 점심 먹으러 가고 싶은데….”
하양은 마나를 제어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담력이 커졌다. 감각적으로 사람들의 의도를 알아차리는데 능했던 그녀는 세나의 의도를 눈치 채고 있었다.
책상 위에 놓인 햄버거는 거들떠도 보지 않은 채, 그녀는 친구들과 점심을 먹으러 갈 생각만 했다.
“…후우.”
평소에는 자신을 무시하던 세나가 다가와서는 직접 햄버거를 건넸다.
교회에 가져가서 아이들에게 줄까, 말까.
연신 귀를 쫑긋거리며 고민하던 서나는 드디어 결론을 내렸다. 그녀는 교회에 가져가지 않기로 선택했다. 처음부터 햄버거를 먹는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군침을 흘리는 아이들이 그것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평상시에는 그녀에게 말도 걸지 않았으면서도, 애들이 이때만큼은 너도나도 말을 걸어왔다.
말없이 햄버거를 넘겨준 서나는 은하에게 살며시 손을 흔들었다.
“…다행이네.”
의외였다. 다행이기도 했다.
아이들은 처음 겪는 악의를 의연하게 받아넘긴 것이다.
마치 부모가 된 것처럼 은하는 아이들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럼 이걸 어떻게 할까.
가만히 넘길 생각은 없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당하면 배로 갚아주는 것이야말로 노은하가 아니었던가.
그는 회장이 되었을 때의 포부를 말하는 세나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제가 회장이 되면….”
…하아, 내가 어려서 참는다. 노은하, 성격 많이 죽었네.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지만 다음은 없다.
명심해. 내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죽일 수 있다는 걸.
“…어?”
연설을 하던 중, 전류가 온몸을 흐르는 감각을 느낀 세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다리를 타고 무언가가 흘러내리는 것을 느끼고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어? 어라?”
소름이 돋았다.
방금 그건 뭐였지?
꺼림칙한 감정을 잊기 위해 팔을 쓸어내렸지만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황급히 연설을 마치고는 햄버거를 가져온 남자를 불렀다.
점심시간이 끝나도록 세나는 돌아오지 않았다.
☆
점심시간이 끝나고 시작된 회장선거.
“그럼 반장은 과반수 21표를 얻은 세나로 할게!“
회장은 결국 세나가 되었다.
그리고 은하는 부회장으로 나서는 후보가 없었던 관계로 부회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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