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life Player RAW novel - Chapter 390
중등아카데미라면 몰라도.
고등아카데미에서 사람이 죽는 건 그리 드문 일도 아니다.
고등아카데미 학생들은 법에 의해 준성인이자, 준플레이어의 대우를 받는다.
여기서 준플레이어란 의미는 만약 전시에 이르는 상황이 발생했을 시, 보충 투입되는 전력으로 사용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고등아카데미의 학생들이 아카데미 던전에서 사망한 사건은 언론에서 비중 있게 다뤄질 내용은 아니었다.
사망한 학생들의 이름 중 홍진우의 이름이 거론되지 않았다면.
[저…, 회장님. 저희도 지금 샅샅이 수색하고 있는데 말이죠, 던전 안이 개변을 일으키고 있어서….]“변명 따위는 집어치워! 너희한테 쏟아 부은 돈이 얼마인데 이 정도도 못해주겠다는 거야!”
[지금 던전이 개변 중입니다. 이게 아주 희귀한 사례인데, 이번 일로 던전 안에 마나가 충만해 있다 보니 던전이 새로….]“야─!!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냐! 내 손주가 그 안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단 말이야! 얼른 던전에 들어가서 내 손주 데리고나오라고, 빌어먹을 새끼들아!!”
정확히 말하면, 단군그룹의 직계 홍진우의 실종.
단군그룹의 회장 홍준일은 그렇게 믿고 있었다.
믿고 싶어 했다.
[회장님. 제가 설마 회장님 마음을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회장님….]고등아카데미 029&29기 학생들은 아카데미 던전에서 종평을 치렀다.
그런데 예년과 다르게 던전 안에서 격변이 일어난 것이다.
던전에서 구출된 학생들에 의하면, 몬스터가 갑자기 폭주해서는 길목을 틀어막았다고.
덕분에 학생들은 집단을 이뤄가며 몬스터들을 뚫고 나아가야 했다며.
그러다 학생들과 몬스터의 전투로 던전 내부에 마나가 가득 차는 일이 발생했고.
이후 던전 내부에서 대규모 편재가 각 층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그로 인해 많은 이들이 사망하고, 많은 이들이 실종되었다.
하지만 던전에서 실종되었다는 건 거의 사망했다는 뜻과 진배없었다.
[홍진우 학생이 그리 되기 전까지, 같이 파티를 이뤘다는 학생들에게서 이야기를 들으셨을 겁니다.]“…그래서, 뭐. 걔네가 죽었대? 어? 안 죽었다고! 떨어졌다고 했잖아!”
[떨어진 곳이 문제입니다. 그곳은 경계세계입니다. 아직까지도 그곳은 어떤 세계인 것인지 파악할 수 없는 미지의 세계입니다. 한 번 떨어지면 돌아올 길이 없는 곳입니다.]헌데 홍진우가 실종된 방식은 다소 애매한 구석이 있었다.
그와 최심부까지 도달한 학생들이 언론에 인터뷰한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전투 도중 발을 헛디뎌 그만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고 한다.
그곳이 하필 경계세계였다.
던전은 현실과 세계선을 달리한다. 따라서 던전 내부에서 현실세계로, 반대로 현실세계에서 던전 내부로 통신을 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마나가 짙은 지대에서도 원활하게 통신이 가능한 텔레파시로도 아예 불가능한 일이었다.
경계세계도 마찬가지.
오히려 더했다.
현실과 경계세계는 던전의 존재를 사이에 끼고 있다.
간극이 하나 더 떨어져 있다.
“…정말. 정말, 방법이 없는 건가?”
[죄송합니다. 회장님. 저희 쪽에서 최대한 방법을 강구하고 있습니다만 현재로선 경계세계에 도달할 방법을 찾을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아마도 세계선을 넘는 과정에서 반발작용이 발생해서….]“그게 무슨 소리야. 똑바로 말해, 내가 미치는 꼴 보기 전에!”
[…세계선을 넘는 과정에서 신체가 끝내 압력을 견디지 못해 폭발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으아아아아아아악─!! 내 손주!!! 우리 진우 찾아와, 얼른!!!”
경계세계, 돌아올 수 없는 세계다.
단군그룹에서 경계세계에 들어갈 플레이어들을 물색하고 있었지만, 거액을 준다고 해도 들어가겠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아니, 있기는 했다.
돈만 받고 튀어버려서 인천 바다에 생매장을 당한 플레이어가.
“…부탁이네. 부탁이니까, 제발…. 제발 내 손주 좀 찾아주게.”
[…네. 노력해보겠습니다.]혈압이 오른다.
홍준일은 민머리를 벅벅 긁어대다 책상에 머리를 박았다.
그는 전화를 끊고, 책상에 엎드려 꺼이꺼이 흐느꼈다.
“진우야…, 진우야, 내 새끼….”
이래서는 안 된다.
얼마를 쏟아 붓는 일이 있더라도, 금쪽같은 손주를 찾아야 한다.
만약 손주가 죽었더라도, 그렇다면 시체라도 찾아야 했다.
던전에서 할애비를 기다리고 있을 손주가 얼마나 불쌍한가.
그리하여 홍준일은 단군클랜에게 다시금 경계세계에 들어갈 지원자를 찾아보라고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때─.
“─…….”
집무실에 있는 모든 전화가 동시에 울음을 터뜨렸다.
전화는 모두 자신에게 연결이 되는 것들이었다.
단군그룹의 회장에게.
다시 말해, 홍진우를 잃은 슬픔을 인터뷰하겠다는 빌어먹을 기자들이 전화한 게 아니란 소리였다.
홍준일은 눈시울이 벌게진 채로, 멍하니 전화기 소리를 들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던 스마트폰을 잡았다.
지금 이 순간─.
“─어. 왜….”
이 감각을 모르지 않았다.
쌓아온 세월이 말해주고 있었다.
좋은 전화는 결코 아니라고.
[…회장님.]무겁게 내려앉은 소리.
아니, 모든 것을 내려놓은 소리.
단군그룹의 회장은 그 소리를 듣고 자신의 직감을 확신했다.
무언가 일이 잘못되고 있음을.
“…뭐? 다시 말해봐.”
[단군생명과 단군유통을 포함한, 단군그룹의 모든 계열사가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믿기지 않는 소리였다.
황급히 전화를 끊은 홍준일은 곧장 비서실장을 불러 상황을 파악했다.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상대방은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단군그룹을 쑤시고 있다고.
차명계좌와 유령회사를 앞세웠기에 추적을 하는데 시간이 걸릴 거라고.
그뿐만 아니었다.
“…….”
홍준일은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상황을 파악할 수 없었다.
뒤이은 정보를 들으니 검찰청에서 단군그룹의 불법거래 현황에 대해 전방위로 압수수색이 들어간다고.
“뭐냐…, 뭐냐, 이건 뭐냐고!!”
홍준일은 고함을 질렀다.
눈에 보이는 것들을 때려 부수면서 화를 냈다.
선녀정부가 개입했다는 건 그만큼 선녀정부를 움직일 수 있는 존재의 짓이렷다.
다시 말해, 재계 10위 이내에 드는 그룹의 소행일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
“뭐냐…, 뭐냐…. 대체 뭐냐고….”
홍준일은 머리를 싸맸다.
적을 특정할 수가 없었다.
그에게는 적이 워낙 많기도 했고, 적이 한 명이라고 단정할 수만도 없었다.
그러다 생각이 미쳤다.
홍준일은 내선전화를 사용해서는 비서실로 연결했다.
[…회장님?]“당장! 당장 지금 막아! 막으라고! 검찰청은 나중에 처리해도 되니까, 돈이 얼마나 들어도 개미 새끼들의 공격부터 방어해!”
적은 그들만이 아니다.
단군이 흔들린다는 것을 포착하고, 지금 공격하는 세력에 합류하게 될 계산주의자들도 모두 적이 되리라.
정말로 전방위에서 공격이 들어올 것이다.
어서 방어를 해야 했다.
“막아! 막아! 막으…어허헉…!”
머리에 피가 쏠렸다.
얼굴이 새빨개질 대로 소리를 친 홍준일은 그러다 억 소리를 내고는 바닥에 쓰러졌다.
“…진…우야….”
그날, 단군그룹의 회장 홍준일이 뇌졸중으로 별세했다.
아침드라마 같은 일이 발생했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하여 승계분쟁이 일어났다.
선녀정부가 단군을 포위하고.
재계그룹이 단군을 공격하고.
내부에서는 분쟁이 일어나고.
세상이 미쳐 돌아갔다.
☆
본업은 회사경영이요, 겸업으로는 카페운영이니.
그게 언젠가부터 정석훈의 일상이 되고 있었다.
처음에만 해도 앨리스그룹의 회장 민준식이 시키는 일을 도와주었을 뿐이었건만.
회사를 경영하는데 있어서 뜻밖의 재능을 ‘발각’당한 그는 민준식에게 벗어나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
“후우….”
“왜? 많이 피곤해?”
“좀…. 그래도 카페 일을 하니까 마음은 편안하네.”
정석훈은 어깨를 두드리며 한숨을 쉬었다.
이내 뒤에서 발소리도 없이 다가온 아내 민수진이 그의 어깨를 주물러 뭉친 부분을 풀어주었다.
살며시 미소를 지은 그는 느긋하게 흐르는 시간을 즐겼다.
“…아빠!”
“오, 가람아. 이리 온.”
그때, 바닥에서 장난감 자동차를 가지고 놀고 있던 아이가 정석훈을 찾았다.
올해 5세가 되는, 정하양의 남동생 정가람.
정석훈보다 어머니를 더 닮은 듯한 아이는 하양이 아카데미에 들어가며 민준식의 사랑을 거의 독차지하고 있다시피 했다.
더군다나 민준식의 자식들 중에는 결혼한 사람이 민수진밖에 없었기에 다른 직계들의 관심까지 듬뿍 받고 있었다.
결국 아주 먼 미래에, 앨리스그룹 회장이 되는 아이.
가람을 무릎 위에 앉힌 정석훈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가람이가 잘할 수 있을까?”
사실 정석훈이 앨리스그룹 경영에 참가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정가람 때문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는 포션을 만들고 카페를 운영하며, 가족들과 조용히 살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정가람의 입장을 고려하면, 가만히 놀고 있을 수는 없었다.
앨리스그룹의 직계들이 정가람에게 호의적이기는 하나, 그룹 계승에는 직계들의 힘만이 우선시되는 것이 아니다.
그 직계를 보필할 방계들의 힘도 마냥 무시할 수 없었다.
“우리 가람이가 얼마나 똑똑한데. 잘할 수 있을 거야. 가람아, 그치?”
“그치이?” “그리고 당신이랑 내가 있는 데다, 하양이가 가람이한테 힘이 되려고 엄청 노력하고 있잖아. 근데 당신이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되지.”
“…그렇겠지.”
어깨를 주무르던 민수진이.
그대로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정석훈은 그녀의 품에 안긴 채로, 그녀가 하는 말을 긍정했다.
다 잘 될 것이다.
그를 위해 자신이 힘을 내고 있고, 아내가 도와주고 있고, 남동생에게 흠뻑 빠진 하양이 노력하고 있다.
그러니 가장인 자신이 이리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정석훈은 다시금 다짐했다.
그러던 그때─.
“─아버님이시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시지?”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정석훈은 민준식의 번호를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화를 지체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그는 바로 민준식의 전화를 받았다.
[어, 나네. 지금 통화 괜찮나?]“네, 아버님. 말씀하세요.”
[다른 건 아니고…, 방금 준일이가 죽었다는 연락을 받아서 말이야.]“…네?”
준일이.
그 말을 들은 정석훈은 기억에서 이름의 주인을 찾아 헤맸다.
민준식이 종종 이야기를 했기에, 그는 준일이라는 이름이 단군그룹 회장의 이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고는 숨을 삼켰다.
단군그룹의 회장이 별세했다.
그러다 정석훈은 비상하게 머리를 굴리고 또 굴렸다.
“언제 가셨답니까?”
[오늘 점심 무렵이라더군. 쯧, 자기 손주가 던전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에 훅 가버렸다는 모양이네. 그 심정,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하필 이런 때 가버리다니 말이야….]고등아카데미 학생들이 던전에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들 중에는 단군의 직계를 포함해 꽤나 영향력 있는 사람들의 자녀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어제부로 언론이 꽤나 시끌벅적했다.
더군다나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세력이 단군을 공격하고 있는 실정이었고.
선녀정부는 아직까지는 소극적인 제스처를 취하고 있는 중이었다.
정부측 교섭은 아버님이 하신 게 틀림없어.
정체를 알 수 없는 세력은 정확히 짐작이 가지 않지만.
선녀정부가 어째서 소극적인지는 짐작이 갔다.
그는 배후에 민준식이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민준식은 임가을과 꽤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러한 상황에서 단군그룹 회장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면─.
“─내부에서 싸움이 일어나겠네요.”
[그래, 맞네, 맞아. 그쪽은 지금, 난리도 난리가 아니라더군. 지 아빠 죽은 건 생각도 안 하고….]홍진우가 죽고, 홍준일이 죽었다.
홍진우는 언젠가 홍준일의 자리를 이어받게 되거나, 그의 아버지에게 이어받게 될 존재였다.
그만큼 승계 구조가 확고했다.
그렇기에 단군그룹에서는 지금까지 승계분쟁이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상황이 이렇게 돼버렸으니, 쥐 죽은 듯이 지내던 후계자들이 득달같이 달려들 만도 했다.
더군다나─.
[─단군 클랜로드 장봉전이 자기도 회장이 될 수 있는 자격이 있다면서 언론 플레이를 하려 한다는군. 허허, 집안이 완전 망했어. 이런 걸 보니 내 자식들은 회장 자리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게 참 용하단 말이야.]“하하….”
석훈은 영혼 없는 웃음을 흘렸다.
앨리스그룹의 직계들이 희한하게도 경영활동에 참가를 하고 있지 않아 자신이 민준식의 대리를 맡고 있는 실정이었다.
덕분에 일에 치여 살고 있다.
[어쨌든, 내 그래서 말일세. 원래는 이번 일을 내 선에서 처리할 셈이었는데, 생각이 바뀌었어.]“네? 바뀌셨다는 것은….”
[내가 예상하고 있던 것보다 판이 더 커져버렸어. 그런데 이 상황에서 내가 친구 녀석이 일궈놓은 것들을 뺏어오기에는 좀 미안하기도 하고, 그렇다고 내부에서 분탕을 쳐대는 준일이 애들이 못마땅하기도 하고, 솔직히 기회가 있는데 놓치고 싶지 않아서 말일세─.]서론이 너무 길다.
정석훈은 안경을 벗었다.
경험상, 이런 경우에는 민준식이 자신에게 꽤나 버거운 일을 주고는 했다.
아니나 다를까.
[─자네, 이참에 화려하게 데뷔해보지 않겠나? 내 자리, 이제 그만 가져가게.]드디어 올 때가 왔구나.
정석훈은 무릎 위에 앉은 정가람의 머리에 손을 얹으며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아빠?”
“아무것도 아니야. 네…, 회장님.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하, 이제 자네한테 이런 식으로 회장님이라고 불릴 일은 없겠구만. 그러면 얼른 내 서재로 찾아오게나. 그리고─.]
서론이 길다.
또 버거운 일을 주려는 것인가.
정석훈은 침음을 삼켰다.
하지만 그의 예상과는 다르게─.
[─올 때 가람이도 같이 데려오게. 늙어서 그런지 손주가 보고 싶구만. 하양이도 시간 되면 들리라 하고.]“네…, 그러겠습니다. 아버님.”
정석훈은 허허 웃었다.
☆
단군그룹의 회장이 사망했다.
집무실에서 홍진우의 죽음을 끝내 받아들이지 못하고 뇌졸중으로.
은하도 이것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다.
뭐…, 득이 되면 득이 됐지 실이 될 리는 없겠네.
집으로 들어가기 전.
스마트폰으로 기사를 살피고 있던 은하는 홍진우의 사망을 시작으로 떠들썩해진 세상을 되새겼다.
원하는 흐름을 만들었다.
이제는 그 흐름이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도록 지켜보는 일만 남았다.
부디, 유도준과 민준식이 약속대로 일을 제대로 처리해주기를 바랄 뿐.
“다녀왔습니다! 엄마, 나 왔어!”
그래서 은하는 한결 편한 마음으로 집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아무도 반기지 않았다.
아버지는 회사에 있는 모양이었고, 은아는 레귤러스 클랜에서 활동을 하고 있는 중인 듯했다.
결국 집안에 있는 사람은 은애와 어머니, 할머니 세 사람 뿐이란 것.
“어머, 왔니.”
“…네.”
어째 분위기가 싸하다.
거실에 들어선 은하는 빨래를 개다 환한 미소로 반기는 어머니를 보고 멈칫했다.
저 미소, 모를 리가 없다.
노씨 가문 여자들 특유의 미소다.
그 미소가 자신에게 향한다는 것은 자신이 무언가 잘못을 했다는 거고.
문턱에 우뚝 멈춰선 은하는 살며시 눈알을 굴렸다.
할머니…, 할머니는 뭔가 힌트라도 주실 거야.
할머니에게 구원의 신호를 보냈다.
할머니는 나는 모른다는 식으로, TV를 보며 작게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
그것으로 깨달았다.
할머니는 방관하겠다는 것을.
그렇다면 그는 차선책으로 은애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기로 했다.
소파에 앉은 은애에게 눈을 향한 은하는 곧─.
“─…안녕?”
“못 안녕.”
노은애, 초등학교 3학년.
팔짱을 낀 그녀가 차가운 미소로 그를 반기고 있었다.
어느새 노씨 가문의 비장의 기술을 몸에 익힌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훌륭한 성장을 기쁘게 여길 수가 없었다.
“오빠.”
“…어. 왜?”
“얼른 여기 서봐.”
“…이렇게?”
소파에서 일어난 은애가 은하에게 자신이 서 있는 위치를 가리켰다.
그는 그녀가 가리키는 대로 섰고, 그녀가 환한 미소로 올려다보았다.
“에잇!”
그리고 은애는 은하가 방심한 틈에 소파로 넘어뜨렸다.
그대로 벌렁 자빠진 은하의 위로 은애가 올라탔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오빠는 응? 나한테 한 번 맞아야 해!”
“…뭐야!? 은애야, 왜 이래!?”
여동생이 가 됐다.
은애는 옆에 있던 베개를 들고는 은하를 미친 듯이 때렸다.
아프지는 않았으나 깜짝 놀란 그는 그녀의 전투적인 모습에 방어자세를 취했다.
“아프면 아프다고 말을 해야지! 왜 그걸 숨기고 끙끙 앓아! 앓기는!” “그래, 은애야. 잘하네. 엄마 속이 다 후련하다.” “얘, 그래도 아프지 않게 때리렴. 둘 다 다치겠다.”
노은애가 씩씩거렸다.
어머니는 그녀를 더 부추겼으며, 할머니는 방관하기만 했다.
“오빠! 잘못했어, 안 했어!?”
“잘못했어! 내가 미안해!”
“안 돼…! 또, 또, 또 거짓말하고! 내가 오빠 거짓말하는 것도 모를 줄 알아!? 응!?”
“아니야! 진짜라니까!”
“또~오~! 거짓말!”
한참이나 맞으면서.
은하는 깨달았다.
초등학교 3학년은 무섭다는 걸.
이만큼이나 때렸으면 지칠 만도 했는데 은애는 전혀 지치지 않았다.
“…진짜 미안해.”
다행히도 시간이 지날수록 은애가 때리는 힘이 조금씩 약해졌다.
은하는 그런 여동생이 안쓰러워서 최대한 진지한 목소리로 사과했다.
이 마음이 그녀에게 전해지도록.
“…진짜…, 너무해….”
은애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결국 그녀가 울음을 터뜨렸다.
곧장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그녀를 꼭 끌어안아주었다.
처음에는 은하를 밀쳐내려고 하던 은애는 서서히 그의 품에 안겼다.
“제바알…, 거짓말도 치지 말고…, 아프지도 말란 말이야….”
“그래, 미안해. 내가 다 미안해.”
“이것 봐…, 이것 봐…. 내 말은 또 안 듣고…. 이번에는 집에 얼마나 있을 거야?”
“…미안. 일요일에는 돌아가야 해.”
“나빴어, 진짜….”
은애가 은하의 가슴을 꼬집었다.
은하는 그것을 참으며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아픈 것보다 여동생을 다독이는 게 더 중요했다.
“…좋아. 대신에 오빠는 쉬어야 해. 어디 나가지도 말고, 집안에서 계속 쉬고 있어야 해! 생각도 안 하고.”
“그래, 그럴게.”
“…정말? 정말이지!?”
“그래, 내가 그냥 가만히 있을게.”
“…거짓말이 아니네. 알았어.”
은애의 화가 풀렸다.
은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착각이었으니─.
“─어?”
“일요일이 될 때까지 계속 여기서 누워만 있어야 해.” “은애야?”
여동생은 작은 악마 같은 미소로 다시 그를 소파에 눕힌 것이다.
은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여동생은 사전에 준비한 듯한 이불을 덮어주며─.
“─이제 푹 쉬어! 다들 오빠 얼굴 보고 싶어 했으니까 방에 들어가지 말고 일요일까지 여기서 쭉!”
“…잠은 방에서 자도 되지 않아?”
“No~!”
노은애는 완고했다.
결국 어머니와 할머니가 참고 있던 웃음을 터뜨릴 정도로.
“예전부터 생각했었는데, 오빠는 아카데미에 들어가고 제대로 쉬지 못한 것 같아. 그러니까 아프지!”
“…….”
“이참에 푸~욱 쉬어! 내가 옆에서 오빠 하인이 되어줄 테니까!”
제대로 쉬어라.
은애의 말이 맞기는 했다.
그녀의 말대로, 은하는 언젠가부터 마음 편히 쉬지 못하고 있었다.
언제나 미래를 고민하기만 했다.
시간은 아직 많았으니 조금쯤이야 쉬어도 됐으련만.
계속해서 자신을 채찍질했다.
“…알았어.”
그래서 은애를 걱정하게 했다.
가족을 걱정하게 했다.
그것을 깨달은 그는 순순히 그녀의 걱정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번 주말은 그냥 푹 쉬지, 뭐.
세상이 뒤숭숭하다.
사회구조가 바뀌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은하는 마음 편히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마침 던전에서 잠을 자지 못해서 얼마나 피곤했던가.
그러니─.
“─너도 이리 와.”
“오빠, 나 이제 10살이야. 10살.”
“내 하인이 되어준다면서. 그런데 이것도 못 해줘?”
“…치이, 어쩔 수 없네!“
─세상이 변하든 말든, 좀 쉬자.
그는 은애를 끌어안고 잠을 자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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