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life Player RAW novel - Chapter 41
봄소풍 날의 아침.
은하네 집안은 아침부터 부산스러웠다. 새벽녘에 일어난 어머니는 은하와 은아의 도시락을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은하 역시 어머니에게 모두 맡기기는 미안해서 은아와 도시락을 싸고 있었다.
“누나가 안 따라가도 잘 할 수 있지?”
“누나야말로 내가 수련회 안 따라가도 잘 할 수 있지?”
“나도 이제 12살이야!”
은아가 입술을 삐죽였다. 오늘만큼은 누나 행세를 하고 싶었는지 은하가 싸던 도시락까지 데커레이션을 해주고 있었다.
“조심해서 잘 다녀와.”
“응, 은하 너도.”
이제 버스를 타러 가야 한다며 가방을 메는 은아. 의자에서 폴짝 뛰어내려서는 뒤에서부터 은하를 끌어안았다.
오늘도 은하 성분 충전 완료!
은하 옷의 섬유유연제 냄새를 들이마신 은아. 그녀는 뺨에 입을 맞추고 나가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여간….”
“은하 너도 좋으면서….”
“싫다고는 안 했어.”
부엌에서 두 남매의 사랑을 보고 있던 어머니가 흐뭇하게 웃었다.
겸연쩍어진 은하는 태연한 투로 은아가 싸준 도시락을 가방에 넣었다.
“아우. 오바아.”
“은애야, 더 자지.”
“은애도 은하한테 인사하러 나왔나 보네.”
아침부터 소란을 떨었기 때문일까.
아직 자야 할 시간이건만, 은애가 졸린 눈을 비비며 기어오고 있었다.
은하는 잠에서 깬 은애를 덥석 안아 올렸다.
“아우.”
“은애야, 오빠한테 뽀~ 해야지?”
“아우아우.”
은하가 내미는 뺨에 입술을 부비는 은애.
은하는 여동생이 사랑스러워서 미소를 감출 수가 없었다.
오늘은 일진이 좋으려나.
아침부터 은아와 은애로부터 뽀뽀를 받았다. 매일 겪는 아침인데도 오늘은 유난히 반짝거리는 것 같았다.
“은애야, 아빠한테도.”
“아부.”
“은애는 이제 코 잔다네요.”
“…우리집 딸들은 왜 은하만 좋아하는지 몰라.”
“하하….”
“그래! 은하는 아빠한테 뽀 해줄 거지?”
…어쩔 수 없지.
은하는 아버지가 바라던 대로 해주었다. 아버지는 “이걸로 은아랑 은애한테도 뽀뽀를 받은 거야!”라며 희희낙락하고 있었다.
“그럼, 다녀올게.”
“조심히 다녀와.”
“아우.”
슬슬 북한산으로 떠날 시간이었다.
짐을 싼 은하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집을 나섰다.
“늦어!”
“딱 맞게 나왔잖아.”
이크, 큰일 날 뻔했네.
문 앞에서 민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은하는 그제야 아버지의 차를 타고 소풍지로 가기로 했던 약속을 기억해냈다.
다행히 그는 포커페이스로 민지의 의심을 얼버무릴 수 있었다.
아버지가 운전하는 차는 이른 아침을 가르고 나아갔다. 출근길을 피했기 때문인지,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북한산성입구에 당도할 수 있었다.
“은하야. 돈은 가지고 있지?”
“응, 엄마가 10000원 챙겨줬어.”
“그래? 그럼 엄마한테는 비밀이다?”
아버지는 차에서 내린 은하를 불렀다. 그는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더니 은하에게 10000원 지폐를 하나 주었다.
“친구들이랑 맛있는 거 사먹고! 아빠가 옛날에 겪어봐서 아는데, 돈은 없는데 먹고 싶은 게 있을 때가 제일 서럽더라.”
“응, 고마워, 아빠.”
“그리고 누누이 말하지만 혼자 먹지 말고….”
아이구, 아버지.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은 이야기거든요.
은하는 아버지가 하려던 말을 빼앗았다.
“혼자 먹지 말고 나누어 먹을 것. 먹을 거 가지고 싸우는 게 제일 멍청한 짓이라는 거지?”
“허, 이거 참. 내가 너무 많이 말했나 보네.”
은하가 이 말을 할 줄은 몰랐다.
나도 이제 늙었나 보네. 얼마나 말했으면 은하가 기억하고 있는 거야.
그는 새삼 시간의 변화를 깨닫고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은하에게 손을 흔든 그는 주차장에서 차를 돌렸다.
☆
집결지는 북한산성 탐방지원센터였다. 은하와 민지가 도착했을 때에는 미리 도착해 있던 선생님들이 피켓을 들고 서 있었다. 거기서 1학년 4반의 피켓을 찾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얘들아~! 이제부터 출석번호를 부를 테니까 한 명씩 손을 들어야 해!”
지정된 시각이 지났다. 피켓을 들고 있던 지나가 출석번호 1번부터 아이들을 호명했다. 친한 아이들끼리 모여 있던 아이들은 이름이 불릴 때마다 손을 들고 높은 소리로 답했다.
모두 왔나 보네.
이윽고 지나는 4반 아이들을 이끌고 탐방지원센터를 지났다. 오전 일정은 둘레길을 따라 대서문, 보리사를 둘러보는 것이었다.
“얘들아~! 이제 점심을 먹을게!”
보리사까지 둘러본 지나는 다른 반 아이들이 돗자리를 피는 것을 보고는 아이들을 불렀다.
조별로 행동하고 있던 아이들은 한차례 모여, 보리사 쉼터 인근에서 점심을 먹으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싸! 이제 도시락 먹는다, 도시락!”
“밥이다! 밥!”
봄소풍의 하이라이트는 누가 뭐라 하더라도 도시락이었다.
돗자리를 깔고 앉은 아이들은 저마다 집에서 가져온 도시락을 자랑했다.
“와~! 은하 도시락 좀 봐!!”
“엄청 맛있어 보이는데!”
자리를 돌아다니며 서로의 도시락을 비교하고 있던 아이들이 은하의 도시락을 보고 눈을 빛냈다.
은하의 도시락은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소시지와 감자, 은하가 좋아하는 베이컨 볶음밥과 달걀말이로 이루어져 있었다. 아침에 은아가 심혈을 기울여 데커레이션을 했기 때문인지 먹기도 전부터 군침을 흘릴 것만 같았다.
누나, 이건 언제 쓴 거야.
그러다 은하는 베이컨 볶음밥에 뿌린 케첩을 보고는 허겁지겁 아이들을 물렸다.
은하야 사랑해♥
-은아가
그만 흐뭇해지는 메시지였지만, 다른 아이들에게 보이기에는 부끄러웠다.
“이런 걸 시스콤이라 한다지? 시스콤~ 시스콤~”
“시끄러워. 그러면 네 도시락은 어떤데?”
민지의 도시락은 평범했다.
김이 빠졌다.
“하양이, 네 도시락 정말 예쁘다! 근데 혼자 다 먹을 수 있어?”
“헤헤, 아빠가 다 같이 나눠먹으라고 많이 싸주셨어.”
하양의 도시락은 혼자 먹기 부담스러운 양이었다. 아이들은 산을 오르면서 하양이 낑낑거렸던 이유가 바로 5층으로 이루어진 찬합 도시락 때문
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양이 찬합을 하나하나 열 때마다 먹음직스러운 음식이 모습을 드러냈다. 문어처럼 끝이 쪼개진 소시지, 큼지막한 새우튀김, 경단처럼 동그란 함박스테이크. 마지막으로 만화 캐릭터의 얼굴을 본뜬 볶음밥은 누구나 감탄을 하게 만들었다.
하양은 가방에서 앞접시까지 꺼내며 정석훈의 솜씨와 준비가 얼마나 완벽한지 보여주었다.
“잘 먹을게!”
“와, 맛있겠다!”
도시락에 제일 먼저 손을 댄 사람은 민지와 은혁이었다. 은하는 아이들이 음식을 입에 넣은 후에 젓가락을 내밀었다.
흠, 역시.
정석훈의 실력은 어디를 가지 않았다. 그가 만든 음식을 입에 넣으니 마나가 소량이나마 회복되고 있었다.
“…맛있네.”
서나는 정석훈의 음식을 처음 먹어보았다. 아이들로부터 미리 들었던 대로 도시락을 모두 비우고 싶을 정도로 맛있었다. 더군다나 몸이 건강해지는 기분도 들었다.
그래도 안 돼.
저거는 엄연히 하양의 도시락이었다. 염치없이 그녀의 도시락에만 손을 뻗을 수는 없었다.
어색하게 젓가락을 내려놓은 그녀는 가방에서 꺼낸 김밥 한 줄을 베어물었다. 오늘 아침, 그녀가 남아 있던 재료로 만든 참치김밥이었다.
“참치김밥이네? 나도 하나만.”
“내 것도 먹어.”
“마음은 고마운데, 너희 어머니 솜씨가 영….”
“지금 여기까지 와서 나랑 싸우시겠다?”
“솔직히 우리 엄마 솜씨가 최고지. 인정?”
“우리 엄마도 맛있게 만들거든!”
은하에게 소고기김밥을 들이미는 민지. 어쩔 수 없이 하나를 집었지만, 은하는 김밥을 먹는 건지 소금을 먹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어때? 어때어때?”
“응, 우리 엄마가 최고야.”
먹민지 얘는 입맛이 어떻게 된 거야.
이리도 짠 김밥을 태연하게 먹는다니. 은하는 학을 떼며 민지로부터 벗어났다. 하양이 유자차를 건네지 않았다면 입에 소금을 묻히고 살았을 것이다.
“맛있다!”
“이거 라면이랑 먹으면 딱이겠다!”
한편, 하양과 은혁은 서나의 참치김밥을 먹고 있었다. 특히 은혁이 입맛에 맞는지 맛있다고 연발하며 입에 집어넣고 있었다.
다행이다.
서나는 아이들이 아침에 만든 김밥을 마음에 들어 하는 모습을 보며 속으로 안심했다. 오늘 하루 내내, 점심시간이 오지 않기를 기다리던 그녀는 이제 긴장을 풀고 아이들과 어울릴 수 있었다.
세나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어휴, 도시락이 그게 뭐니.”
“그러게 말이야. 그거 먹고도 살 수 있겠어?”
“세나 도시락이랑 너무 비교된다~”
파벌을 이끈 세나가 근처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세나의 파벌은 본격적이었다. 아침부터 그녀를 따라다니던 남자는 아이들이 앉을 수 있는 접이식의자를 설치하고, 햇볕을 피할 수 있는 파라솔까지 설치했다. 테이블까지 설치한 건 기본이었다.
“아….”
세나가 부리는 남성이 가져온 도시락은 서나가 주눅이 들게 했다. 서나가 직접 만든 참치김밥과 세나의 전속요리사가 만들었다는 런치박스는 심하게 비교되었기 때문이다.
“도시락이라면 이래야지. 누가 그런 거나 먹고 다니니?”
“잘못 먹으면 배탈 날걸?”
“정하양이 가져온 도시락도 세나에게는 상대가 안 되는데?”
파벌에 속하는 아이들이 일부러 들으라는 식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이들이 하하 호호 웃는 소리는 은하와 점심을 먹던 아이들의 분위기를 가라앉게 했다.
이렇게 나오겠다?
가만히 있을 은하가 아니었다. 빈정이 상한 건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세나는 어머니와 은아가 준비한 도시락마저 모욕한 것이다.
그가 이전처럼 살기를 쏘아 보내려는 찰나,
“흥! 컵라면이 최고지! 컵라면이랑 김밥이 얼마나 맛있는데!”
은혁이 무슨 소리냐는 식으로 반문했다. 그는 한 손에는 빨간색 컵라면을, 다른 한 손에는 뜨거운 물이 담긴 보온병을 들어 보였다.
“컵라면?”
“너 도시락 안 싸왔어?”
세나가 눈살을 찌푸렸다. 컵라면을 먹는 이유를 납득할 수 없었다.
반면에 민지는 은혁이 가방에서 꺼낸 컵라면과 햇반, 유부초밥을 보고는 혀를 내둘렀다.
“엄마가 컵라면이 최고라는데?”
“…하긴, 컵라면이 최고지.”
너희 어머니, 도시락 싸는 게 귀찮았던 거야.
사실을 말할 수 없었던 은하는 그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은혁이 이 자식, 언제부터 내놓은 자식 취급을 받았던 거야?
은하는 당분간 지옥훈련을 줄여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은혁은 설익은 컵라면을 만끽하고 있었다.
“대장! 국물이 참 맛있다! 대장도 한 번 먹어볼래?”
“…그거 김밥이랑 같이 먹으면 맛있을 것 같기는 하네.”
“나, 나도 사실 라면 챙겨왔어.”
“진작 얘기하지 그랬어! 여기 물 있어!”
“고마워.”
세나의 파벌이 점심으로 무엇을 먹든 알 바가 아니었다.
은혁이 가져온 컵라면이 아이들의 관심을 사로잡았다. 식욕을 자극하는 매콤한 냄새에 은하도 침을 삼켰을 정도였다.
두 번째로 컵라면을 꺼내든 사람은 서나였다. 은혁에게 물을 받은 그녀는 라면이 익기까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 하나 당기네. 매점에서 파려나.”
“아까 보니까 매점에서 파는 것 같더라, 대장!”
“그럼 매점 다녀올게. 여기 컵라면 먹을 사람? 오늘 우리 아빠가 쏘라고 했는데.”
“나! 나도 컵라면 먹어보고 싶어!”
“나도.”
민지와 하양이 번쩍 손을 들었다. 부모님으로부터 용돈을 받아 주머니가 두둑했던 은하는 사야 할 컵라면 수를 셌다.
컵라면을 먹고 싶어 하던 건 이들만이 아니었다.
“나도! 나도 매점 가야겠다!”
“컵라면 먹으러 갈 사람!”
“나! 나는 짜파게티 먹을래!”
“이 바보야, 자장명은 공화춘이지!”
“생생우동도 맛있는데!”
4반 남자아이들을 시작으로, 1학년 아이들이, 더불어 다른 초등학교의 아이들까지 매점으로 뛰어가는 사태가 일어났다.
매점은 컵라면으로 때 아닌 호황을 맞았고, 제일 먼저 달려간 은하는 컵라면을 사수할 수 있었다.
“컵라면이 진리였네.”
“역시 컵라면이야!”
“나도 다음에는 컵라면 가지고 와야겠다!”
더 이상 전속요리사가 만들었다는 런치박스는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세나를 따르는 아이들조차 면을 후루룩 거리는 소리를 듣고는 입맛을 다실 정도였다.
“이익…!”
세나는 꽉 쥐고 있던 포크로 접이식 테이블을 찍었다.
☆
“시발! 이게 뭐야!”
북한산 백운대를 오른 등산객은 산 아래를 내다보다 기겁하고 말았다.
산 저 밑에서 검은 형체가 무리지어 뛰어오고 있었으니까.
“모, 몬스터가 여기에 왜…!”
서울은 코쿤으로 보호를 받고 있다. 코쿤 내부에서 몬스터가 출몰하는 일이 있기는 하더라도, 이전처럼 몬스터가 다발적으로 출몰하는 일은 현저히 줄어들었다.
더군다나 서울 상공에 전개된 마나 감지 시스템이 편재된 마나의 현황과 몬스터의 출몰을 알려주지 않던가.
그런데 산 아래에서부터 달려오는 저것들은 뭐란 말인가.
아무런 연락도 받지 못한 등산객은 떨리는 시선으로 등을 돌렸다.
어서 도망쳐야 한다. 살려면.
마음이 급했다. 등산객은 왔던 길을 허겁지겁 내려갔다.
“으헉!”
그러다 발이 미끄러져 산 아래로 굴러 떨어졌고,
“큭…! 히익…!”
하필이면 맞은편에서 올라오던 몬스터 무리와 맞닥뜨리고 말았다.
“사, 살려….”
동공이 보이지 않는 붉은 눈. 입술을 씰룩이는 녀석들은 낮게 드릉거리며 적의를 드러내고 있었다.
“사, 사람 살… 컥…!”
몬스터에게 자비는 없었다. 그렇지 않더라도 며칠을 굶은 몬스터들이었다.
녀석들은 등산객이 미처 소리치기도 전에 달려들었다. 톱니처럼 날카로운 이빨이 등산객의 몸을 헤집었다.
등산객의 형체는 더 이상 찾을 수 없었다. 몇 마리나 달려들었으니 사체는 온전치 못했다.
크르릉
피가 뚝뚝 떨어지는 살점을 질겅거리는 몬스터 무리.
그런데도 허기는 충족되지 않았다.
피 맛을 본 녀석들이 이제는 동족마저 잡아먹으려 들었다.
나아가라. 앞으로.
내려가라. 남으로.
무리를 통솔하는 이가 나타나지 않았으면.
나아가라. 앞으로.
내려가라. 남으로.
통솔자가 명했다.
크릉
그릉
무리가 답했다.
무리는 일제히 산을 뛰어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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