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life Player RAW novel - Chapter 411
불의를 참지 마라.
정의는 나 자신을 위해 있는 거고, 나 자신을 위한 정의는 곧 사회에 가장 필요한 정의다.
그러니 내 안의 정의를 무시해서는 결코 아니 된다.
아버지는 위대하다.
어렸을 적부터 아버지의 등을 보며 어른이 되는 것을 꿈꿨던 온태양은 그 말을 가슴에 새겼다.
잘못된 세상을 바로잡기 위하여, 다른 사람들과 불의에 대항하는데 열정을 다했던 아버지.
아버지의 그러한 모습은 온태양의 가슴에 불을 지피는데 충분했다.
“우리 교복…, 엄청 비싼 거라더라. YH랑 루미너스에서 생산한 원단에 방수, 방화, 방전 같은 마법은 죄다 들어가 있대. 몸을 격하게 움직여도 쉽게 찢어지지 않는다고 그러고….”
“그만큼 비싸니까 제값은 해야지.”
“후원을 받지 않았으면 이 교복을 우리 돈으로 사야 했었던 거잖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무섭다.”
그러나 그에게 동경의 대상이었던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YH제당에 임금협상을 요구하다, 어느 날 돌연 건달들과 시비가 붙어 사망해버린 것이다.
너무나 허무하게, 운이 나쁘게.
어머니는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며 항의했으나, 아버지와 함께 노조에 가입해 있던 사람들은 안타깝게도 일이 그렇게 됐노라며 YH제당의 의사를 똑같이 전달했을 뿐이다.
동경하던 영웅은 그렇게 사라졌다.
“그런데 정말 후회 안 하는 거야? 괜히 나 때문에 너까지….”
“또, 또! 얘가 또 그 소리를 하네? 내가 아줌마 생각하는 것도 있지만, 그렇다고 널 따라 인생을 걸 만큼 내가 멍청하지는 않거든? 나도 정말 잘 살고 싶어서 들어온 거야! 괜한 오해는 노노해.”
“그냥…, 미안하니까 그러지.”
“너 때문에 그런 거 아니니까 제발 그러지 좀 말라니까. 또 이 이야기 꺼내면 내가 태희한테 확 일러버릴 거니까 그런 줄 알아.”
“…알았어. 고마워.”
고등아카데미 31기 온태양.
그럼에도 아버지가 그때 지펴놓은 불씨는 꺼지지 않았기에.
그는 자신의 손으로 잘못된 세상을 바로잡겠다는 정의감에 플레이어가 되기로 했다.
정치인, 기업가, 플레이어.
그가 세 가지 신분 중 가장 빨리, 가시적인 성과를 인정받을 수 있는 신분이 바로 플레이어였으니까.
어렸을 적부터 운동신경이 좋았고, 중학교에서는 마나를 다루는 것에 특출함을 보여주기까지 했으니.
무엇보다─.
─플레이어가 된다면 웬만해서는 돈에 시달리는 일은 없을 거야.
몬스터에게서 나오는 마석이 꽤나 비싼 가격에 매매된다고 했으니까.
내가 엄마랑 태희를 돌봐야 해.
사실 그가 플레이어가 되고자 하는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어머니 때문이었다.
KK건설에서 근무를 하다 불행히도 어머니가 마나 고갈증에 걸리고 만 것이다.
체내에서 마나가 빠져나가고 마는 불치병이다.
그럼에도 선녀정부는 산재로 인한 증상이라고 인정하기가 힘들다면서 KK건설의 편을 들어주었다.
보상금은 미미한 수준이었다.
“그리고…, 혹시 돈 부족하면 말해. 너한테 배정된 후원도 거의 대부분 아줌마랑 태희한테 돌리고 있잖아. 내가 보태주는 것까진 못하더라도, 아카데미에서 너 하나는 어떻게든 도와줄 테니까.”
“괜찮아. 너한테 배정된 돈이니까 아라 네가 써야지.”
“아니, 뭐…. 너도 걱정이 되고…, 너희 아줌마랑 태희도 내 가족처럼 느껴져서 그런 거지. 혹시 모르지, 정말 가족이 될…아무것도 아니야!”
어머니의 병세는 계속 악화되었고, 여동생은 자신보다 4살이나 어렸다.
그러한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플레이어가 되어서 돈을 버는 것이었다.
한편으로는 병세를 치유할 수 있는 방안을 찾으면서.
결국 세상을 바로잡겠다는 신념과 금전적인 문제 때문에 플레이어가 되기로 결심한 것이다.
“아무튼! 우리가 여기 있다는 건 우리 재능을 인정받았다는 거잖아! 그러니 3년 동안 열심히 공부해서 어디에서든 우리를 데려가려고 하는 플레이어가 되는 거야! 너랑 나라면 할 수 있을 거야!”
그동안 입을 꾹 다문 채로 대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던 온태양은 자신의 소꿉친구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기운을 북돋아주기 위해서 일부러 부산을 떠는 모습을 보면서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조아라.
그녀는 자신의 사정을 이해해주고, 자신이 가는 길을 응원해주겠다면서 자신을 따라와 준 것이다.
“그런데 태양아. 아카데미에서는 어지간해서는 가만히 참고 있는 게 좋을 거야. 여기에 잘 사는 애들이 많이 다닌다고 하니까.”
“나도 알아. 하지만 그걸 그대로 넘기게 되면 세상은 바뀌지 않아. 누구 한 명이 잘못된 건 잘못됐다고 말할 줄 알아야지.”
“그건 네 말이 맞는데…. 그런 건 플레이어가 되고 나서 해도 괜찮지 않을까?”
“아니야. 우리 아빠가 말씀하셨어. 신념을 한 번 어기면 그걸로 끝이나 마찬가지라고. 그리고 손해를 보고 가만히 있는 사람은 호구야. 나는 절대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
“그래도…. 여기에 있는 동안에는 되도록 참는 게…. 야! 어디 가?”
“입학식 하러 가야지. 얼른 와.”
“치…, 지 혼자 멋진 척이야. 뭐, 멋지기는 하네. 같이 가!”
주변이 온통 신입생들이다.
온태양은 그들을 따라가는 덕분에 넓은 부지 안에서 입학식이 열리는 건물을 찾을 수 있었다.
이내 그가 줄을 서며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 할 때─.
“─쟤네가 걔네야?” “와…, 진짜 멋지다. 우리도 케이프 걸쳤으면 좋겠는데….”
“우리는 못 입어. 중등아카데미생 특권이라 하더라.”
갑자기 인파가 갈라졌다.
온태양은 앞에서 인파가 물러나자, 덩달아 뒷걸음질 칠 수밖에 없었다.
은연중에 눈살을 찌푸렸다 돌아온 그는 학생들이 만들어준 길을 너무 당연한 것처럼 지나가는 학생들을 쳐다보았다.
검은색 케이프를 어깨에 걸치고, 붉은색 넥타이를 하고 있다.
“…너무하네.”
“야, 조용히 해! 누가 들었다가는 어쩌려고 그래?”
중등아카데미 출신 학생들이다.
온태양은 한순간 눈살을 찌푸렸다.
조아라가 어깨를 탁 쳤음에도 그는 찡그린 얼굴을 도로 펴지 않았다.
한편, 두 사람은 학생들이 떠드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맨 앞에 가는 애가 노은하래.”
“노은하? 캐유플에 나온 그 애?”
“무섭게 생긴 것 같지는 않은데…, 왜 쟤를 피해야 하는 거지? 소문이 순 뻥 아니야?”
“저런 애는 우리 같은 애들한테는 관심도 가져주지 않겠지?”
노은하.
시리우스그룹의 후원을 바탕으로 뛰어난 재능을 개화한, 아카데미가 자랑하는 유망주.
그만큼 성격이 개차반이라고.
온태양도 언뜻 들어본 적이 있다.
그는 이내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노은하의 뒤를 쫓았다.
“…쟤네들 분위기가 장난 아니다. 과연 유망주, 유망주라고 그러나봐. 쟤네랑 친해질 수 있으면 좋겠다. 도움도 많이 받을 테고…, 그치?”
옆에서 조아라가 말을 붙였다.
온태양은 노은하 사단이라 불리는 학생들이 모두 지나가는 것을 보고 고개를 저었다.
자신하고 전혀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다.
그는 조아라와 달리 회의적이었다.
“노은하 빼고 나머지 애들은 모두 착하다고 하더라고.” “글쎄….”
“왜? 너는 아닌 것 같아?”
“유유상종이라고 했어. 좋지 않은 소문을 달고 다니는 애의 친구들이 정말로 착한지는 모르는 일이지.”
“그래도 착해 보이지 않았어?” “사람은 겉모습으로 판단하는 게 아니야. 그리고 아라 너도 봤잖아. 쟤네들은 애들이 길을 비켜주는 걸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어. 무엇보다 노은하라는 애는─.”
무엇보다 노은하를 언뜻 보았을 때 그는 무언가 찝찝함을 느꼈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었지만.
어째서인지 본능에 가까울 정도로 혐오감이 드는 듯했다.
“─이상하게 싫은 기분이야. 왠지 나랑 안 맞을 것 같아.”
기분 탓이라고 넘기고 싶지만.
머릿속에서 노은하에 대한 감상이 쉽사리 떠나지 않았다.
자신과 어딘가 닮은 것 같으면서, 정반대인 사람 같다.
☆
‘0’이라는 숫자 하나에 큰 차이가 존재한다.
학생들 사이에서는 우스갯소리로 ‘0’이 붙은 중등아카데미 학생들을 노블(Noble)이라고 부를 정도다.
그만큼 아카데미에서 중등아카데미 출신에게 지원해주는 혜택이 상당히 크기는 했다.
“…넥타이 진짜 답답하네.”
“은하야. 조용히 해야지.”
“맞아. 입학식이 끝날 때까지 조금 참는 것도 못하니?”
입학식 연설이 지루하다.
아카데미의 교장과 이사진, 그밖에 모종의 관계를 가지고 있는 이들이 참석한 자리였기 때문에 흐트러진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은하는 눈치를 보지 않고 목덜미를 매만졌다.
옆에 있던 하양이 점잖은 소리로 그를 타이르려 하고, 민지가 핀잔을 주었다.
그럼에도 은하는 한결 같았다.
“답답한 걸 어떡해…. 안 되겠다. 단추 하나만 풀어야겠어.”
“야! 교관님이 노려보고 있잖아!”
“서영 누나네. 괜찮아.”
“…은하야. 그래도 넥타이로 목은 가려야지.”
중등아카데미 학생들은 졸업하면서 졸업 기념이라는 명목 아래 붉은색 넥타이와 검은색 케이프를 선물로 받았다.
케이프는 의례용으로 쓰일 때 외에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학생들의 착용 빈도가 낮았다.
그에 비해 학생들은 넥타이만큼은 항시 착용하고 다녔다.
출신 구분을 하기 위해서지. 대체 아카데미가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차별을 조성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학칙에는 명시되어 있지 않다.
넥타이는 아카데미 기념품점에서 쉽게 구할 수 있다.
그럼에도 아카데미는 암묵적으로 넥타이는 중등아카데미 학생들만이 착용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회귀 전에는 나도 한 적이 없는데, 이걸 내가 하게 될 줄은 몰랐네.
은하는 이제 가만히 서 있지 않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디를 보나 학생들로 가득했다.
031기 300명, 31기 1500명을 더해 1800명이 입학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고등아카데미 3학년이 되면 1200명이 추가적으로 편입하면서, 졸업하는 시기에는 3000명 정도가 세상에 나가게 된다.
여기에도…, 유정이는 없구나.
며칠 전에.
그는 신서영에게 간곡하게 부탁해 입학명부를 얻을 수 있었다.
이유정의 이름은 없었다.
은하는 잠깐 침울해지기는 했지만, 어쩐지 이렇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품고 있기도 했다.
그나마 빠르게 기운을 차릴 수가 있었던 이유다.
그리고 대신 명부에는─.
─ 베베를 빼고, 온태양의 파티원이 전원 입학했어.
온태양, 조아라, 윤이별, 아리엘, 봉구래.
기다리고 있던 이들이 아카데미에 입학한 것이다.
그래서 은하는 일부러 아카데미를 돌아다니며 그들과 인연을 트려고 노력했다.
결국 한 명도 만나지 못했지만.
오늘만 다가 아니니까.
차근차근 만나면 되지 뭐.
은하가 지나갈 때면 사람들이 연신 파도처럼 갈라졌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서나의 이야기를 듣자하니 덕분에 자신의 악명이 더 올랐다고 한다.
결국 황금기수의 다른 유망주들을 본 것만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은하야. 네 악명 또 오르고 있어. 얼른 넥타이 안 조일래?] [야! 치사하게 너 혼자 그러기냐? 나는 차은우하고 목삐리리 때문에 못하고 있는데!]은하는 격식을 차려 진행돼야 하는 입학식에서 텔레파시나 보내고 있는 여우와 늑대를 무시했다.
그리고 반항하듯이 넥타이 줄을 더 느슨하게 풀었다.
신서영의 눈초리가 따갑다.
하지만 그녀는 텔레파시를 사용하지 못한다.
[─이걸로 고등아카데미 입학식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그러는 틈에.
긴 연설이 끝이 났다.
연단 위에 있던 사람들이 뒷문으로 자리를 빠져나갔다.
은하는 자신을 힐끗 쳐다본 다음 등을 돌리는 이들의 시선에도 결코 굴하지 않았다.
어차피 아카데미 관계자들 중에서 그를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은 더는 아무도 없었다.
☆
“전원! 자리에 착석!”
“다들 각 잡아!”
입학식이 끝났다고 다가 아니다.
학생들은 이제 플레이어가 되는데 열과 성의를 다할 것임을 맹세하는 발대식을 치러야 했다.
입학식이 학생들이 아카데미 관계자들을 만나는 자리라면, 발대식은 교관들을 만나는 자리였다.
“여러분, 입학 축하해요. 3년 동안 아카데미에서 원하는 바를 이루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교관들이 분위기를 압박하는 한편.
신서영은 마이크를 쥐고서 발대식의 취지에 대해 설명했다.
개강은 다음 주에 이뤄질 것이며, 내일부터 3일 동안 발대식 준비가 있을 거라는 내용이었다.
“발대식 외에도 여러분이 3일 동안 처리해야 하는 수속 절차는 상당히 많아요. 그러니 저희들의 지시를 잘 따라와주면 좋겠어요. 모두 그렇게 할 수 있죠?”
“”””네─!!!!””””
“응, 목소리 좋네. 다음 설명부터는 1학년 총괄 교관님이 하실 거예요. 그럼 여러분, 다시 한 번 입학한 거 축하해요!”
의 인기는 대단했다.
그녀는 다른 용무가 있는 것인지, 학생들의 새된 함성을 받고 자리를 떠났다.
그 자리를 대신하는 총괄 교관이 아카데미 생활수칙에 대해서 설명을 시작했다.
“…031기 학생은 31기 학생보다도 아카데미 생활이 기니까 모르는 건 031기 학생에게 물어보면 됩니다.”
“031기 학생에게 의지하세요.”
“31기 학생들은 동기라고 하더라도 031기 학생들을 선배처럼 대해야 아카데미 생활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을 겁니다.”
“아카데미는 실력제일, 신분평등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아카데미에서 실력 외에 학생들을 압박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차이를 두지 않는다고 하는 한편 차이를 두고 있다.
은하는 교관의 설명을 흘려들었다.
말도 안 되는 개소리였으니까.
2, 3학년이 되면 달라지겠지만….
초반에는 중등아카데미를 졸업한 학생들의 실력이 더 뛰어날 수밖에 없어.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나지 않는다.
손에 쥐고 태어나는 수저 자체가 다르다.
세상이 실력으로 만회할 수 있는 세상이라고는 하지만 시작 지점이 완전히 다른 법이다.
아카데미도 마찬가지다.
“아, 은하야. 너 먼저 가야 할 것 같아.”
“왜? 무슨 일인데?”
“지금 도준이한테 연락이 왔는데, 발대식 준비하는 일로 몇몇 애들이 모이자고 해서….”
“아, 그러겠네. 알았어.”
학생들의 나이도 이제 17세다.
그들도 눈치가 없지는 않다.
총괄 교관의 설명을 들은 그들은 불만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양이나 다른 친구들의 얼굴 역시 어두운 건 매 한가지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하양은 발대식을 지휘하기 위해 먼저 자리를 떠났다.
발대식이…, 그냥 발대식이 아니지.
내 기억으로는 기선 싸움이 장난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발대식, 교관과 학생들의 시작점.
하지만 발대식을 준비하는 과정은 031기 학생들과 31기 학생들의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은하가 기억하기로, 회귀 전에는 031기 학생들이 발대식을 빌미로 31기 학생들을 기선 제압했다.
자신의 권위를 유지하려는 이들과 조금이라도 자신의 권위를 높이려는 이들의 눈치싸움이었다.
“하양이 마음고생이 심하겠네.”
“그럼 네가 도와주면 되잖아. 네가 거기서 마나라도 방출해주면 애들도 기가 죽어서 아무 말도 못할 거라 생각하는데 말이야.” “못할 건 없지만…. 그렇게 되면 애들이 나를 무서워하지, 하양이를 무서워할까?”
“하긴…, 그건 그러겠네.”
은하는 입학식장을 나서며 민지와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었다.
특성상, 사고가 많은 아카데미는 규율과 기강을 강조한다.
그런데 1800명이나 입학했다.
사람이 많은 만큼 어떠한 문제가 일어날지 예측할 수 없으니 각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어떻게 보면…, 학생들의 자치를 보장해주면서 규율을 잡는 것까지 학생들한테 떠맡기는 것 같고….
은하는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혀를 쯧 하고 찼다.
아카데미가 1800명을 관리하면서, 300명을 집중적으로 관리한다.
300명은 1500명을 집중 관리하고, 1500명 중의 출신이 좋거나 특출한 일부가 나머지를 관리할 것이다.
그런 식으로 보이지 않는 계급에서 위에 위치한 학생들이 아래에 있는 학생들을 관리하게 한다.
관리 체계가 복잡하게 보이면서도 참으로 단순명료하다.
이래서는 가장 밑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이 진정으로 누군가의 관리를 받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째 그것이─.
─이 세상이랑 똑같은 것 같네.
비선실세가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라고.
은하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럴 리야 없겠지만.
은하는 이내 말도 안 되는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기로 했다.
☆
고등아카데미 31기 윤이별.
입학식을 끝마친 그녀는 신속하게 기숙사로 복귀하는 중이었다.
발대식 준비는 내일부터이니 일단 오늘은 기숙사에서 푹 쉬기로 했다.
“…앞으로 넥타이를 맨 사람들은 조심해야겠다.”
한 반에 60명씩.
반을 배정받은 그녀는 조금 전에 임시적으로 반 대표를 맡은 학생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031기 학생이 고등아카데미 출신 학생들에게 간략한 오리엔테이션을 전파한 것이다.
요약하자면, 아카데미에서 편안히 생활하려면 웬만해서는 넥타이를 맨 중등아카데미 학생들에게 다가가지 않는 게 좋을 것이라고.
“근데…, 같은 031기 학생들끼리도 눈치를 보고 그러는 거구나.”
아카데미는 실력을 지향하는 한편, 계급 간의 차이가 존재한다.
입학하기 전부터 그걸 듣기는 했던 윤이별은 오늘 오리엔테이션을 통해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고 경쟁하는 분위기가 얼마나 심각한지 알 수가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아카데미에 온 걸 후회하고 있었다.
“나는 그냥 성적도 잘 나왔고…, 파인그룹에서 후원도 해준다 해서 지원한 거였는데….”
그밖에 다른 이유가 있기도 했다.
아카데미에 입학한다면 중학교 때 자신을 알고 있는 사람과 마주치지 않을 것 같아서.
결국 분위기가 엄하다고 하더라도 아카데미에 다녀야 했다.
아까 오리엔테이션에서 그랬는데.
노은하 사단 애들한테 다가가는 건 자유이지만 되도록 노은하란 애한테 다가가지 않는 게 좋을 거라고.
윤이별은 다시금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을 돌이켰다.
그때 031기 학생의 얼굴은 파랗게 질려 있었다.
그것만으로 소문으로만 알고 있던 노은하라는 존재가 얼마나 무서운지 알 수 있었다.
바로 그때─.
“─어?”
“…어?”
남자 기숙사 그리고 여자 기숙사로 나뉘는 길목에서.
윤이별은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작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자신에게 장갑을 건네주었던 사람이다.
“안녕?”
“아, 아…, 안녕하세요. 아…, 맞아. 031기라고 하셨지…, 참.”
남학생의 얼굴을 보고 한 번.
그가 넥타이를 불량하게 맨 것을 보고 다시 한 번.
깜짝 놀란 윤이별은 허둥거리면서 쭈뼛거렸다.
전이야 몰랐다지만 031기 학생을 건드려서는 좋을 것이 없다는 것을 공부한 그녀는 행동거지가 조심스러워졌다.
그녀가 그러거나 말거나.
남학생은 편하게 말을 걸어왔다.
“그날은 잘 들어갔어? 장갑은 잘 가지고 있지?”
“아…, 네에…. 지금 방에 있어요. 바로 가져올게요!” “나중에 줘. 거기 갔다가 또 민지 잔소리 듣기는 싫으니까.”
깜빡깜빡.
참 희한한 사람이다.
윤이별은 눈을 깜빡거리며 격식을 차리지 않는 그를 바라보았다.
이런 사람도 031기구나.
그래, 모든 사
람이 다 그러리라는 법은 없는 거야.
편견에 사로잡히면 안 되겠다.
윤이별이 그렇게 다짐했을 때─.
“─노은하! 얼른 안 오고 뭐해?”
“대장! 지금 들어가야만 대욕장을 편하게 이용할 수 있다니까!?”
“그냥 쟤 버려.”
저 멀리서 남학생 셋이 소리쳤다.
그녀와 대화를 나누고 있던 남자는 그들을 돌아보고는 한숨을 쉬었다.
“알았어, 간다, 가. 나 간다.”
“아…, 네. 안녕히 가세요….”
“다음에 봐.”
남학생이 저 멀리서 기다리고 있던 남학생들을 향해 걸어간다.
윤이별은 멀뚱히 서서는 사라지는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퍼뜩 깨달았다.
“…어? 어어? 방금 뭐라 했더라? 노은하라고 하지 않았나?”
말도 안 된다.
그렇게 착해 보이던 사람의 이름이 노은하라니.
분명 아카데미에는 노은하가 두 명 있는 것이리라.
윤이별은 그렇게 현실을 부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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