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life Player RAW novel - Chapter 43
세상사에는 위아래가 존재한다.
세나가 아버지로부터 처음 받았던 교육이었다.
이 세상에는 신분이 귀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신분이 천한 사람도 있는 것이라고.
아버지는 고귀한 사람은 사람을 부릴 줄 알아야 하며, 미천한 사람은 고개를 숙일 줄 알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러니 사람은 분수에 맞게 행동할 줄 알아야지.”
당시 5살에 불과했던 세나는 아버지의 교육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녀는 사람을 높낮이로 대해야 한다는 말이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사람들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를 통해 신분의 귀천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아가씨.”
“저녁을 준비했습니다.”
“이제 주무실 시간입니다.”
세나는 아버지로부터 교육을 받게 된 이후, 고용인들의 태도가 깍듯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전이라면 그녀가 투정을 부릴 때마다 어르고 달랬던 사람들은 그녀가 하는 말이 무엇이건 의문을 표하지 않고 따랐다.
“저게 갖고 싶어.”
“저거 먹고 싶어.”
“싫어. 내가 거기를 왜 가니?”
“몰라. 알아서 해.”
“그걸 내가 해야 하니?”
그녀는 고귀한 사람이었고, 고용인들은 미천한 사람들이었다.
고귀한 사람인 그녀는 미천한 고용인들을 부릴 줄 알아야 했으며, 미천한 고용인들은 고귀한 주인에게 머리를 조아릴 줄 알아야 했다.
사람 사이에 귀천이 존재한다는 깨달음을 얻은 결정적인 계기는 사내파티에서였다.
세나는 아버지를 따라 참여한 파티에서 사내임원들의 정중한 인사를 받았다. 그들이 데려온 아이들은 그녀의 손발이 되기를 자청했다.
그녀는 고귀한 사람이었고, 그들은 자신이 부려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렇듯 사람 사이에 귀천이 존재한다면, 세상 모든 일에는 위아래가 존재하는 것이다.
유치원에서도 변화가 있었다.
친하게 놀던 아이들은 언젠가부터 그녀를 대하는데 조심스러워졌다. 가장 친한 사이라고 생각했던 소꿉친구마저 공주님처럼 대접해주니 얼떨떨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이들의 변화를 받아들이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깨달았을 때에는 모든 사람들이 그녀를 그런 식으로 대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다 궁금해졌다.
고귀한 사람이란 과연 무엇인지를.
그것을 알게 된 계기는 소꿉친구의 생일파티에서였다.
“우리 집 강아지야. 이름은 밍밍이라고 해. 어때? 귀엽지?”
어렸을 때부터 가정부인 어머니를 따라 저택에 놀러오던 동갑내기 소꿉친구.
이전처럼 친근하게 다가온 소꿉친구는 그녀를 자신의 생일파티에 초대했다.
유난히 하얀 드레스를 입고 있던 소꿉친구는 집에서 기르는 강아지를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세나는 강아지를 끌어안고 행복해하는 그녀를 보고 덩달아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 문득 장난을 치고 싶어졌다.
그녀는 별 생각 없이,
“응, 귀엽네. 이거 나 줄래?”
“…어? 우, 우리집 개인데?”
“그래서? 나 안 줄 거야?”
“그, 그게….”
“난 네가 내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별 생각 없이 꺼낸 말이었는데.
세나는 소꿉친구의 얼굴이 처참히 일그러지는 모습을 보고, 자신과 그녀와의 차이를 알게 되었다.
그녀는 고귀한 사람이었고, 소꿉친구는 미천한 사람에 불과했다.
그리고 미천한 사람인 소꿉친구는,
“…아, 아니야. 다, 당연히 줘야지. 우, 우린… 친구잖아? 그, 그치?”
고귀한 사람에게 머리를 조아릴 수밖에 없었다.
세나는 눈물을 흘리며 강아지를 건네는 소꿉친구를 보면서 벼락이 치는 듯한 깨달음을 얻었다.
요컨대 고귀한 사람은 무엇이든 가질 수 있는 사람이었고, 미천한 사람은 고귀한 사람에게 무엇이든 내줘야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묘한 쾌감이 일었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왜 울고 그래? 내가 꼭 나쁜 짓을 하는 것 같잖아.”
“아, 아니…야.”
세상 모든 것이 내 것이 된 듯한 쾌감.
가진 것도 지키지 못하는 사람에게서 뺏어오는 쾌감.
그리고.
“됐어, 필요 없어. 너 가져. 나는 이게 어디가 귀여운지 모르겠다. 이름도 이상하고.”
“아….”
그 사람의 소중한 가치를 더럽혔을 때의 쾌감.
사람을 굴복시키고, 절망에 빠뜨렸을 때의 쾌감.
“나는 고귀해.”
고귀한 사람은 가진 자였다. 무엇을 가지더라도 용서되는 사람.
미천한 사람은 가지지 못한 자였다. 무엇을 가지더라도 지키지 못하는 사람.
그녀는 가진 자였다.
“다 내꺼야.”
마치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그날이 오기 전까지는.
“방계 주제에.”
“뭐?”
“천한 것이. 어디서 말도 없이 손을 대려 그래? 안 돼, 넌 손대지 마.”
“분수도 모르는 주제에.”
KK그룹의 연말파티.
초등학생이 되는 해를 앞둔 세나는 고귀한 신분에도 상하가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룹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은 그녀가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세나는 그저 친구들이 자신에게 그랬던 것처럼, 후계자들을 돋보이게 하는 꽃에 지나지 않았다.
“건방지구나. 네 분수를 알아라.”
그리고 그룹의 회장으로부터 떨어진 불호령.
어른들이 웅크린 맹호라고 수군거리던 KK그룹의 김건 회장.
그는 후계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위계를 지키지 않고 행동하던 그녀를 건방진 아이로 평가했다.
그가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은 냉담 그 자체.
그녀가 미천한 사람을 물릴 때에 짓던 시선이었다.
그날, 세나는 깨달았다.
신분에는 귀천이 존재하며, 고귀한 신분에는 또다시 귀천이 존재한다는 것을.
세상은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세나는 신분의 귀천에 병적으로 사로잡혔다.
후계자들을 만난 이후 자존심이 크게 상한 그녀는 자존심을 채우기 위해 자신보다 못난 아이들을 괴롭히고 괴롭혔다.
“분수를 알아야지.”
그녀의 심기를 심히 거스르는 아이는 서나였다.
세나는 몬스터나 다름없는 서나와 같은 반에서 지내야한다는 것이 죽는 것보다 싫었다.
마치 자신이 아인 따위와 같아지는 것 같아서.
서나는 세나와 이름도 비슷했다. 누군가 농담 섞인 소리로 자매가 아닌지 떠들었을 때에는 속이 불 같이 끓어올랐다.
서나의 존재를 인지할 때마다 KK그룹의 연말파티에서 당한 수모마저 떠올랐다.
그러니 철저하게 괴롭혔다.
너와 나는 같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네 분수를 깨닫고 나에게 조아리라는 뜻을 담아.
하지만 그녀는 완전히 만족하지 못했다.
노은하…!
그는 그녀의 힘이 통하지 않는 상대였다.
그가 말을 듣지 않을 때마다 자존심이 바닥으로 떨어졌던 그날이 떠올랐다.
그것을 잊기 위해서라도 그녀는 그를 굴복시키고 싶었다.
“더 위로 가야 해?”
“어, 더 위로 가. 그 근처에 있을 거야.”
그의 콧대를 꺾을 기회는 바로 지금이었다.
세나는 담임인 지나를 매수해 1등 상품이 적힌 쪽지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냈다.
임용된 지 얼마 되지 않은 그녀는 세나가 휘두르는 힘에 굴복한 것이다.
“멀리 있네.”
이름도 모르는 남자아이는 산 위를 쳐다보고는 혀를 내둘렀다.
“그래서? 지금 안 가겠다고?”
“아, 아니야….”
여기서 그녀의 말을 거스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남자아이는 반이 다른 아이였다. 다른 남자아이들이나 여자아이들도 그랬다.
이들의 공통점은 부모님이 세나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회사와 어떤 식으로든 연관되어 있다는 것.
예를 들면, 남자아이의 아버지는 세나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회사에 근무하고 있었다.
“나는 여기서 쉬고 있을게. 너희가 얼른 다녀와.”
1등 상품을 참 멀리에도 배치해놨네.
숨이 차오른 세나는 벤치에 손수건을 깔고 앉았다.
“우, 우리도?”
“저기는 너무 먼데….”
“조금만 쉬었다 가면 안 될까?”
여자아이들이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그녀들 역시 산을 오르는데 힘이 부친 건 매한가지였다.
“그럼?”
세나가 짧게 되물었다.
아이들은 그녀가 뒷말을 하지 않아도 유추할 수 있었다. 부모님으로부터 세나와 친하게 지내라고 들었던 그들이었다.
“아, 아니야. 우리가 다녀와야지. 지금 다녀올게.”
“세나 너는 여기서 쉬고 있어. 우리가 다녀올게.”
아이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산을 올라야 했다.
세나는 눈초리에 힘을 풀었다. 이제 아이들이 1등이 적힌 보물을 들고 올 때까지 쉴 생각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꺄아아아아─!!”
아이들이 기겁하며 뛰어 내려오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세나가 언짢은 투로 눈초리를 세웠다.
곧 아이들의 뒤를 쫓아오는 검은 형체를 발견했다.
몬스터!
몇 마리나 되는 사냥개들이 산 위에서부터 뛰어내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꺄, 꺄아아아─!!”
아이들 사이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
녀석이 치켜든 앞발이 천천히 다가왔다.
세나는 아직도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른 채, 눈앞에 드리우는 발톱을 바라보고 있었다.
슬로우모션처럼 다가오는 발톱.
날카로운 송곳이 닿기 직전,
몬스터가 힘이 빠진 것처럼 바닥에 엎어졌다.
“어, 어?”
그제야 몬스터에게 죽을 뻔했던 상황을 인식한 세나.
“─뭐야, 너였어?”
그리고 별 거 아니라는 투로 은하가 쓰러진 사냥개 앞으로 나타났다.
그는 마치 평소 하는 행동인 것처럼 쓰러진 몬스터의 숨통을 끊어놓았다.
“죽고 싶지 않으면 산 아래로 내려가.”
“어… 어?”
“난 이미 말했다. 나머지는 네가 알아서 해.”
“어, 어….”
“그리고 네가 데리고 다니던 아저씨, 상태가 심각하니까 내려가는 대로 바로 치료받고.”
세나는 하루 종일 데리고 다니던 고용인을 찾았다.
고용인은 아이들이 뛰어내려왔던 산 위에서 떨어져나간 팔 하나를 부둥켜안고 있었다.
눈물과 콧물로 뒤덮인 고용인의 얼굴이며, 피가 쏟아지는 팔뚝을 이리저리 흔들며 내려오는 모습이 참으로 기괴했다.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고 싶은 모습이었다.
“나머지는 네가 알아서 해. 난 간다.”
“기, 기다려!”
안 돼. 붙잡아야 해!
세나는 자리를 뜨려던 은하를 붙잡았다.
그를 이대로 보냈다가는 끔찍할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아서.
“너, 너는 어디 갈 건데?”
“내가 그걸 왜 말해야 하는데. 방해하지 말고 꺼져.”
“뭐?”
“방해하지 말고 꺼지라고.”
세나는 은하를 붙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그에게서 풍기는 살기를 견딜 수가 없었다. 다리에 힘까지 풀며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난 간다.”
은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졌다.
그제야 세나는 긴장이 풀렸다. 다리를 타고 미지근한 무언가가 흘러내렸지만 지금은 알 바가 아니었다.
“아, 아가씨…! 팔이, 제 팔이 떨어졌어요! 살려주세요!”
그녀 앞에서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고용인도 알 바가 아니었다.
세나는 그저 은하가 사라진 자리만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갖고 싶어.”
갖고 싶다.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않는 그를.
누구에게도 검을 휘두를 것 같은 그를.
세나는 이 순간, 노은하라는 존재의 가치를 알아보았다.
그는 액세서리였다. 자신의 가치를 드높일 아주 예쁜 액세서리.
만약 그를 가질 수만 있다면, 자신을 하찮게 여겼던 후계자들에게조차 고개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소유욕에 불이 붙었다.
리라이프 플레이어 0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