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life Player RAW novel - Chapter 434
당시.
대구광역시에는 그야말로 지옥도가 펼쳐졌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도시에서 대규모 편재가 발생하고 말았으니, 몬스터들에게 점령을 당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하물며 몬스터에게 감염이 되면서 사람이 몬스터로 변모하는 현상이 발생하기까지 했었으니.
사람들은 어떻게든 도시를 벗어나 살 길을 마련하는 것에 급급했으나, 감염의 확산을 우려한 주변 도시가 대구로 통하는 길 자체를 봉쇄했다.
그러니 지옥도가 펼쳐졌을 수밖에.
그리고 멸망의 여파는 아직까지도 곳곳에 남아 있었다.
“…쟤네들이 정말 아카데미 학생이라고?”
“유망주라네.”
“아니, 아무리 유망주라도 그렇지 저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그러게.”
대구광역시의 터줏대감으로 통하는 반월당 클랜.
고등아카데미의 협력을 요청받아, 대구광역시 주변에서 미션을 치르는 학생들을 보조하려고 나선 그들은 떫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아니, 뭐…. 요즘 애들은 다 저래? 나 때는 몬스터 한 마리 잡는 것도 이만저만 고생이 아니었는데….”
“쟤네들이 특이한 거야. 아까 전에 다른 클랜이 하는 말을 들어보니까, 걔네가 맡은 애들은 평범하다더라. “허, 참….”
서울이 아니라 지방에 거점을 두고 활동하는 클랜은 아카데미에 입김을 불어넣기가 여간 쉽지가 않았다.
하여, 지방에 거점을 두는 클랜은 대다수가 지역 출신의 학생들에게 클랜 입단을 권유하거나, 오늘처럼 아카데미로부터 협력을 요청받을 때 학생들에게 은연중에 작업을 치고는 했다.
그리고 반월당 클랜 플레이어들은 협조를 해주는 조건으로 아카데미의 유망주들과 인연을 맺게 해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쟤네들이 우리 클랜에 흥미를 보일까.”
“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거지, 뭐…. 내가 봤을 때 나가리 같다만….”
그러나 지금에 이르러서.
반월당 클랜의 간부 플레이어들은 몹시 후회하고 있었다.
아카데미의 유망주라고 하더라도 현역에서 활동하는 플레이어들만큼 실력이 좋을 리가 없다.
그들에게는 경험도 부족한 데다, 아직 전투 스타일이 몸에 녹아들지 않았을 테니까.
그렇게 얄팍하게 생각하고 무작정 아카데미가 자랑하는 유망주들하고 파티를 맺게 해달라고 부탁한 것이 패인이었다.
“저게 말이 되냐….”
“…그러게.”
반월당 클랜의 플레이어들은 이제 거의 넋을 놓을 지경이었다.
자신들이 보조해줄 것이 없었다.
학생들이 편재를 찾아내는 속도가 비상한 것은 물론이요, 편재 해소도 깔끔하기 그지없었으니까.
게다가 몬스터가 갑자기 출몰해도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곧장 토벌해버리기까지 했으니.
“노은하라고 했던가…. 쟤는 그냥 베테랑 플레이어 뺨을 치네.”
“야…, 쟤 움직이는 거를 좀 봐라. 중간에 동선이 끊어지지가 않잖아. 저게 어떻게 학생이냐?”
노은하라고 했던가.
반월당 클랜의 플레이어들은 이내 와룡산에서 내려오는 몬스터들에게 검을 휘두르는 그를 바라보았다.
거의 신이 들린 듯한 경지였다.
잠시 눈을 뗀 사이에 사라지더니, 다른 곳에서 불쑥 튀어나온다.
그의 움직임을 주시하지 않는 이상 번번이 눈앞에서 사라지기 일쑤였다.
신묘한 보법이다.
단순히 이동속도를 빠르게 만드는 흔해빠진 보법이 아니라.
더군다나 검술은 어떻단 말인가.
“이야…, 낭비가 없네. 어떻게 저리 물 흐르듯이 검을 휘두를 수가 있는 거지? 저건 우리 클랜로드도 못하는 기술인데….”
“그러게 말이야…. 도대체 훈련을 얼마나 했으면 저게 되냐는 말이야. 와, 지금 봤냐? 마나 컨트롤만으로 바닥에 떨어져 있던 검을 띄워 올려 몬스터를 죽이는 거….”
와룡산에서 몬스터가 출몰했다.
소식을 듣고 다른 구역을 순찰하던 학생들이 가세한 상황에서 노은하는 혼자서 몇 마리의 몬스터를 죽이는 기행을 선보였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전투를 치르다 한 학생이 떨어뜨린 검을 조종하여 해당 학생에게 달려들던 몬스터를 꿰뚫어버렸으니.
멀찍이 떨어져서 가만히 보고 있던 플레이어들은 제 눈을 의심했다.
검을 자유자재로 조종하는 솜씨가 워낙 예사롭지 않다.
단순히 훈련만으로는 해낼 수 없는 경지였다.
결국, 경험의 산물이란 것이었으니 그들은 더더욱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아카데미가 많이 굴리나 보네. 나 때하고 비교가 안 되네….”
“애들 좀 작작 굴릴 것이지, 원…. 저런 식으로 싸우게 하다가 언젠가 사람이 죽어나가겠다.”
플레이어들은 쯧쯧 혀를 차는 한편 내심 몸서리를 쳤다.
실력지상주의가 만연하는 업계에서 노은하와 같은 사람들이 세상으로 나오게 될 걸 생각하니 끔찍하기만 했다.
자신의 실력에 대한 자괴감은 물론 새파란 신인들의 기세에 꺾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자존심이 상할 수밖에 없으리라.
그리고 그것은 자신들만이 아니라 저들도 마찬가지일 터.
“쟤네, 31기라고 했던가?”
“노은하는 031기라더라.” “우리도 이런 심정일 정도인데…, 동기수인 애들은 참 안 됐어. 평생 저런 애하고 비교를 당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러게. 애들 눈치 보는 거 봐라. 저런 모습을 보여주는데 기가 죽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 오히려 쟤네들이 대단한 거 아니냐?”
저희들끼리 대화하던 플레이어들은 곧 노은하와 파티를 맺은 학생들을 찾았다.
노은하에 비견할 바는 못 되지만, 제법 준수한 실력을 보여주고 있는 학생들이었다.
탕─!
사람이 살지 않는 건물 옥상에서.
스나이퍼는 노은하의 동선에 맞춰 몬스터를 저격하고 있었다.
노은하의 움직임을 쫓는 눈썰미가 굉장했다.
그때 옆에 있던 스나이퍼가 단번에 아니라고 부정했다.
“저건 눈으로 쫓고 있는 게 아냐. 스코프로 빠르게 움직이는 물체를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럼 지금 보여준 건 뭔데?”
“아마도 대략적인 동선을 파악해서 자의적으로 추론하는 거겠지. 근데 그게 또 얼마나 힘든 일인데….”
제대로 다듬어지지 않았다고 하나, 저 나이를 고려했을 때 놀랄 만한 실력이었다.
재능의 영역인 셈이다.
스나이퍼는 전투가 끝나는 대로, 건물 옥상에 있는 남학생과 대화를 나눠보고 싶을 정도였다.
“와우, 파쿠르가 예술인데?”
“아인이라서 그런가? 움직이는 게 제대로 다듬어지지 않고 날 것 같은 느낌을 주는데…. 그래도 대단하네.”
그때, 플레이어들은 주저하지 않고 온갖 지형지물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몬스터와 전투를 벌이는 학생에게 눈길을 돌렸다.
꼬리가 없는 아인이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은 그녀가 아인이란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그녀가 텔레파시를 보낸 것이다.
[저기 있는 놈은 내가 해결할게!]그제야 그들은 그녀가 망설임 없이 건물 고층에서 점프해 근처에 있는 지형지물로 착지하는 전투 스타일을 이해했다.
그러면서도 그녀가 보인 파쿠르는 지형이 복잡한 빈민가에서 태어난 아인들의 파쿠르보다 뛰어났다.
무엇보다 그녀는 유연성을 이용한 동작을 선보이기까지 했다.
“저기 있는 애도 제법 하네.”
“그러냐? 나는 눈물 나려 하는데. 저런 애들 사이에서 진짜 애쓴다.”
마지막으로 양 손에 단검을 들고서 착실하게 몬스터 하나를 상대하는 여학생.
정석적인 전투 스타일을 펼치는데, 그것을 군더더기 없이 소화한다.
몬스터를 상대하는 전투 스타일을 완벽히 체득한 듯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녀의 존재감은 노은하나 다른 파티원들에 비하면 그리 크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녀는 맡은 바를 다하며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애가 참 대견하네. 나 같았으면 자괴감이 들었을 텐데….”
“그러게.”
범재는 천재를 이기지 못한다.
그런 세상이고, 업계다.
그럼에도 저들에게 지지 않으려고 용을 쓰는 모습이 애틋하기만 했다.
“잘 한다!! 그래! 그렇게 하는 거야!”
“칼을 휘두를 때에는 상대에게만 집중하는 거야! 주변을 볼 여유는 좀 더 익숙해지고 나서 해도 좋아!”
대다수가 범재로 구성되어 있는, 대구광역시를 거점으로 두고 있는 클랜에 소속된 플레이어들은 모두 한 마음으로 그녀를 응원했다.
“…저 아저씨들이 뭐라는 거야?”
정작 그녀에게는 와닿
지 않는 듯 했지만.
김민지는 옅은 웃음을 터뜨리고는 다시 몬스터와 싸우는데 집중했다.
☆
지난밤도 고생을 해야 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점은 친구들이 어느 정도 합을 맞출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덕분에 은하는 그들의 지원을 받아 몬스터를 토벌하는데 집중할 수가 있었다.
“오늘은 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게 뭐야….”
대구광역시를 거점으로 활동하는 클랜의 플레이어들을 놀라게 하며 미션을 완수했다.
은하와 친구들은 시청 부근에 있는 YH호텔에서 안락한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우씨, 이게 뭐야. 아침에 일어나서 깨끗이 샤워한 보람이 없잖아! 완전 더럽혀졌어….” “그렇게 말하면서 내 옷에 닦으려 하지 말지?” “노은하! 그러면 나 서운해? 이런 나라도 받아줘야 하는 거 아니야?”
“내가 더 서운하거든?”
종평을 시작하고 네 번째 날.
이날은 이른 아침부터 버스를 타고 부산항으로 출발하는 것밖에 일정이 없었다.
그래서 은하는 버스에서 잠을 마저 잘 생각이었다.
그런데 하필 부산에 도착하기 직전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고속도로를 점유한 몬스터 무리가 도로를 봉쇄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바닥을 진흙탕으로 만들어놓았다.
“하…, 갑자기 소주가 땡긴다. 나 그냥 집에 가고 싶어졌어. 노은하도 상대를 안 해주고 말이야.”
“…술 좋아하나 보네.”
“이거 왜 이래! 내가 이슬 없이는 못 사는 사람이거든? 정말 나한테 관심이 없구나?”
“그 이슬이, 그 이슬이었냐….”
역시 자신은 운이 없다.
그때 은하는 자신의 운을 한탄하며 다른 학생들과 함께 진흙탕에 빠진 버스를 끄집어내려고 힘을 썼다.
그로 인해 학생들의 몸은 진흙으로 뒤범벅이 되고 말았다.
지금 은하에게 생떼를 부리고 있는 아리엘도 여기저기에 진흙이 묻어 있었다.
붉은빛에 가까운 분홍색 머리칼이 탁하게 얼룩져 있었다.
그래도 제때 도착해서 다행이네.
하마터면 4일 뒤에나 오는 배를 타고 갈 뻔했어.
종평을 시작하고 하루도 빠짐없이 아리엘의 투정에 시달려야만 했던 은하는 그녀를 무시하기로 했다.
그녀를 상대하다 보면 점점 기운이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이전 삶에서 온태양은 대체 어떻게 아리엘을 다뤘는지 궁금함이 생길 정도였다.
한편으로는 진흙을 뒤집어썼지만 배가 출항하기 전에 부두에 도착해 안도했다.
아카데미의 성격상, 배를 놓치면 다음 배가 출항하는 때까지 미션을 시킬 게 뻔했으니까.
“아무튼 얼른 배에 타서 씻었으면 좋겠는데….”
“이제 보니 센스 있네? 좋아, 좋아. 나 누가 머리 만져주는 거 좋아해. 사양 말고 들어와, 들어와.” “너 정말 사람 힘들게 하는 구나?”
은하는 아리엘의 머리를 털어주며 거대한 컨테이너를 싣고 있는 배를 올려다보았다.
시리우스 해운에서 지원하는 배로, 학생들이 타고 갈 배였다.
그것을 올려다보고 있자니 정말로 일본으로 떠나야 한다는 게 실감이 났다.
“애들아, 승선 소속이 처리됐으니 얼른 배에 올라타렴!”
어느덧, 시리우스그룹의 관계자를 만나러 간 신서영이 돌아왔다.
바람을 타고 공중에서 호버링하는 그녀가 살가운 어투로 소리쳤다.
덧붙여 그녀도 진흙투성이였다.
은하의 소행이었다.
학생들이 뒤에서 버스를 미는 반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지켜본 그녀가 야속하게 느껴졌기 때문에 홧김에 저지른 것이다.
서영 누나가 뭐라고 하네.
그냥 무시하자.
은하는 자신과 눈을 마주치자마자 단번에 얼굴을 바꾸는 신서영에게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고작 이런 장난을 쳤다고 뭐라고 할 사람도 아니었다.
그래서 은하는 신서영의 눈초리를 당당히 받으며 배에 올라탔다.
갑판 위에는 먼저 배에 타 있던 학생들이 있었다.
기차를 타고 간 학생들이었다.
정하양이 그를 반겼다.
“너 꼴이 그게 뭐니? 나 없는 동안 많이 힘들었나 봐.”
“말도 마. 오늘 아침에 오는 길에 무슨 일이 있었냐하면….”
진흙을 뒤집어쓴 은하를 보고서는 작게 키득거리는 정하양.
은하는 녹초가 된 것처럼 푸념을 늘어놓았다.
정하양은 은하의 푸념을 오냐오냐 받아주었다.
그녀가 허공에서 손을 휘저으면서 세정마법을 전개했다.
눈에 확연히 달라 보일 정도로 곧 은하의 상태가 말끔해졌다.
다른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양이 너희 그룹은 어땠어?” “우리 그룹? 음, 별 문제는 없었어. 며칠 동안 기차를 타고 가는 것도 나름 재미있었고.”
“그래, 참 좋겠다.” “내가 운이 좋은가 봐. 그러니까 앞으로는 내 말만 듣는 건 어때?”
“너도 나랑 같이 일본으로 가는 건 똑같거든?”
“치, 그래도 나는 기차를 탔잖아.”
“그래, 너 운 좋다.”
은하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를 오랜만에 만난 그는 그렇게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었다.
한편 그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던 강시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기차를 타고 가길 잘했네.”
마음고생도 마음고생이지만.
배에 올라탄 친구들을 보아하니, 몸 고생이 훨씬 심했던 듯하다.
그러니 고생을 할 바에는 차라리 마음고생을 택하겠다.
강시형은 깨달았다.
☆
아카데미 학생들이 일본에 온다.
한서현은 시리우스그룹의 회장이자 자신의 아버지인 한도영에게 그러한 이야기를 전해들었다.
“…그래요?”
다만 그녀의 반응은 무덤덤했다.
그러고는 평소와 다를 바가 없이 최대한 사람들의 접근을 멀리하며 방 안에 틀어박혔다.
사람들이 자신에게 보여주는 색이 때로는 그녀를 힘들게 했으니까.
「I Miss You」
천장을 바라보며 침대에 드러누운 그녀는 자신의 스마트폰 케이스에 인쇄된 글귀를 더듬었다.
도쿄에 오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우연히 지나가던 가게에서 발견한 케이스였다.
시리우스 디바이스의 스마트폰과 우연히도 규격이 맞아서 구입했다.
당시에 시리우스 디바이스의 신형 스마트폰만 들고 일본으로 유학을 오기도 했었으니까.
“…….”
규격이 맞았던 것도.
이상하게 글귀가 와닿던 것도.
전부 우연이었다, 우연.
사실은 일본에 오고 무의식적으로 누군가를 애타게 찾고 있었으면서.
우연이란 걸 갈구하고 있었으면서.
한서현은 곧 스마트폰을 쥔 손목에 차고 있는 팔찌로 눈길을 돌렸다.
장식도 없이 푸른 보석만 딱 박힌, 볼품없는 팔찌였다.
그럼에도 그녀는 늘 팔찌를 차고 있었다.
“다 부질없는 짓인데….”
이윽고 그녀는 쓴웃음을 지었다.
모두 부질없었다.
괜한 기대를 해서는 안 됐다.
어차피 실현되지 않을 걸 알기에.
괜히 더 불행해질 수도 있었기에.
그래서 그녀는 아주 어렸을 적부터 무언가를 기대하지 않았다.
알아서 뭐하는데.
어차피 소용없는데.
아카데미 학생들이 일본에 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녀가 무덤덤하게 반응한 이유도 그와 같았다.
괜한 기대를 하고 싶지 않아서.
그래서 그에게 일본에 오냐는 톡을 보내지도 않았다.
한편으로는 그에게서 톡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으면서.
…내가 왜 기다리고 있는 거지?
문득 그런 생각이 미쳤을 무렵.
한서현은 인상을 썼다.
그녀는 곧 무심결에 떠오른 바람을 머릿속에서 지우기로 했다.
어차피 자신은 운이 없었다.
시리우스그룹의 통제를 받고 있는 자신에게 우연은 요원한 일이었고, 오직 필연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따지고 보면 그를 처음 만난 것도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지 않았던가.
아버지의 부하직원의 아들이었다는 필연.
그러니 먼 바다를 건너서 이곳에서 그를 만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우연이지, 필연이 아니다.
나한테 그런 일이 일어날 리 없어.
기대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기대한다.
그녀는 어떻게든 생각을 떨치고자 방 밖에 대기하고 있을 수행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아가씨.]“조만간에 아버지랑 예장 오빠가 온다고 했었는데….”
[네.]“그때 요코하마로 안내하려고요. 카구야 님께서도 바다를 좋아하시니 회담장소로도 어울릴 것 같고….”
[네. 그러면 전망이 좋은 곳으로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부탁해요.”
[네, 알겠습니다.]직계의 의무를 다한다.
한서현은 한없이 불운함을 느끼며 몸을 옆으로 뉘였다.
전화를 끊은 스마트폰의 케이스가 눈에 들어온다.
이윽고 그녀는─.
“─네가 보고 싶어.”
자신의 나약함을 토했다.
리라이프 플레이어 4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