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life Player RAW novel - Chapter 436
요코하마로 출항한 지 이틀째.
학생들은 기상나팔 소리를 들으며 아침에 일어나 갑판 위를 이리저리 뛰어다녀야 했다.
배 후미에 특수 제작된 수영장에서 체력단련을 해야 하는 걸 포함해서.
예외는 오로지 노은하
한 명밖에 없었다.
“…잠이나 더 자야지.”
바깥에서 학생들이 악 소리를 내며 기합을 받는 것이 그에게는 달콤한 노랫말이 아닐 수 없었다.
은하는 잠결에 귀 밖으로 빠져나온 이어플러그를 도로 꽂아 넣었다.
시리우스 해운에서 지원하는 배는 흔들림도 느껴지지 않아서 안락하기 그지없었다.
아침 먹고 훈련하지 뭐.
사람이 어떻게 훈련만 하고 살 수 있겠어?
전날 밤.
학생들은 교관들의 가르침을 받아 물 위를 뛰어다닐 수 있을 정도로 보법을 익혀야 했다.
그때도 은하는 당당히 빠졌다.
몇몇 교관들과 플레이어들이 그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듯했지만 은하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어차피 신서영이 허락했으니까.
오늘 아침 훈련을 빠지는 이유도 그녀 덕분이었다.
정작 그녀는 한숨을 쉬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어우, 씨…. 아침부터 수영장에서 극기 훈련을 하는 건 진짜로 못할 짓이다. 은하야, 네가 부럽다.”
“잘하고 왔어?” “말도 마. 물에 빠져서 옷이 쫄딱 젖었잖아. 나는 샤워하고 밥 먹으러 갈 생각인데 은하 너는 어떻게 할 거야?”
“나는 알아서 갈게.”
“알았어. 나 갈게.”
학생들은 두 명이서 선실 하나를 배정받았다.
강시형과 같은 선실을 쓰는 은하는 머지않아 아침훈련을 마치고 들어온 그를 맞았다.
그러고 은하는 다시 잠을 잤다.
며칠 동안 제대로 자지도 못했기에 졸음이 가시지 않았던 탓이다.
“뭐야? 얘 아침은 먹었나? 에이, 모르겠다. 얘가 설마 안 먹었겠어? 세상에서 제일 쓸데없는 걱정이 은하를 걱정하는 거라던데…. 잠이나 자야겠다.”
벌써 아침을 먹고 돌아온 것인가.
잠결에 시형이 궁시렁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래도 은하는 눈을 뜨지 않았다.
강시형이 이층침대로 올라가는지 잠시 침대가 삐걱거리기는 했지만 그조차도 무시했다.
이참에 잠이나 푹 잘 요량이었다.
“…하야. 얘. 은하야.”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바로 가까이에서 두런두런 소리가 들려왔다.
“은하야, 이제 일어나야지.”
낭랑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린다.
은하는 잠결에 눈살을 찌푸렸다. 마음이 누그러지는 음색이었으나, 가까이에서 들리니 잠을 자는데 방해가 되었다.
은하는 휙 몸을 돌렸다.
“은하야….”
“…누구야.”
그럼에도 목소리는 떠나지 않았다.
결국 그는 반쯤 짜증이 섞인 투로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응대했다.
“나 이별이. 일어났어?” “…이별이? 윤이별?”
“이별이가 나 말고 또 누가 있니? 아까부터 노크해도 대답이 없어서 방으로 들어왔어. 기분이 나빴으면 미안해….”
은하는 다시금 몸을 돌렸다.
찌뿌둥한 얼굴로 눈을 뜨자 시야에 단발머리를 한 윤이별이 들어왔다.
그녀가 눈을 마주치자 그를 향해 눈웃음을 지었다.
은하는 반쯤 몸을 일으켰다.
“잘 잤어?”
“…어. 도중에 잠깐 일어났다 다시 잠이 들었던 모양이네. 이별아, 지금 몇 시인지 알아?”
“11시. 이제 곧 점심 먹을 시간이야.”
“…아침도 못 먹고 잤나 보네.”
깊이 곯아떨어진 듯했다.
은하는 부스스한 머리를 긁적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옷장을 열어 전날에 세정마법을 건 교복을 꺼냈다.
자체 세정마법까지 더해져 있어서 전날보다 한결 깨끗해져 있었다.
은하는 운동복 윗옷을 벗어던지고 구김살이 없는 와이셔츠를 입었다.
“근데 이별이 네가 여기 웬일이야? 무슨 할 말이 있어서 그래?”
화장대를 찾는다.
은하는 화장대에 있던 아티펙트로 머리를 대충 정리하며 거울에 비친 윤이별을 바라보았다.
그때까지 멍하니 서 있던 그녀가 퍼뜩 정신을 차린 듯 버벅거렸다.
그러고는 볼멘소리로 대꾸했다.
“아까 식당에서도 보이지 않아서 혹시 아침도 안 먹고 자고 있는 건 아닌가 했지…. 그래서 같이 점심을 먹으려고 부르러 온 거야.”
“그래? 네가 오지 않았으면 점심도 못 먹을 뻔했네. 고마워.”
“아니야, 뭘. 그냥…. 너하고 같이 먹고 싶었던 것뿐인데….”
수줍어하며 고개를 숙이는 윤이별.
은하는 외견을 크게 바꿨으면서도 여전히 소극적인 것 같은 그녀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
한편으로는 넥타이를 찾았다.
그때 그녀가 옷장으로 달려가서는 넥타이를 가지고 왔다.
“자, 여기.”
“아, 고마워.”
윤이별이 배시시 웃는다.
그녀에게서 넥타이를 받은 은하는 와이셔츠 목깃을 정리했다.
근데 얘는 언제까지 여기에 있을 생각인 거지?
넥타이를 느슨하게 맨다.
그때까지도 윤이별은 그의 뒤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바지를 갈아입어야 하는 그로서는 난감한 상황이었다.
이윽고 그가 결심하고 윤이별에게 선실로 나가달라고 말하려 했을 때.
“은하야, 아직 자니? 나 들어가도 되지? 들어오지 말라고 해도 그냥 들어갈게. 혹시 옷 갈아입는 거면 미리 말….”
노크 소리가 들린 것이다.
은하는 반사적으로 안으로 들어온 정하양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선실 안을 확인한 정하양이 동그란 눈을 깜빡거렸다.
“응?”
그녀가 기이하게 고개를 꺾는다.
뭔가 잘못 보기라도 했다는 듯이.
이내 그녀의 시선은 그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윤이별에게 향했다.
“─이별이 네가 왜 여기 있니?” “…어? 어…, 그게….”
윤이별이 눈에 띄게 당황한다.
그러고는 동공 지진을 일으키면서 은하에게 구원의 신호를 보낸다.
결국 은하는 두 사람 사이에 끼어 알 수 없는 분위기를 중재할 수밖에 없었다.
“같이 점심 먹으러 온 거래. 근데 하양이 너는 무슨 일이야?” “나도 점심 먹으려고 부르러 왔지. 음, 이별이가 먼저 부르러 왔구나. 그렇구나.”
“무섭게 왜 이래. 얼른 돌아와.”
“아야! 치, 내가 뭘 했다고.”
정하양이 주억거린다.
은하는 그녀의 시선이 방황을 하자 냉큼 손날로 정하양의 리본 사이를 툭 하고 쳤다.
가볍게 친 것이건만.
정하양이 아프다고 투정을 부리며 은하에게 항의했다.
은하는 아무렇지 않게 넘겼다.
“잘 됐네. 이왕 이렇게 된 거 같이 점심 먹으면 되겠네. 다른 애들도 아직 점심 안 먹었지?”
“민지랑 은우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중이고, 카에데랑 구래는 지금 어디 있는지 잘 모르겠어. 아마도 교관님들한테 개인교습이라도 받고 있는 것 같아.”
“그럼 걔네 둘은 가는 길에 보이면 데리고 가면 되겠네. 이별아, 그래도 되지?”
“어? 으, 응! 당연히 되지!”
은하가 삐걱거리는 듯한 분위기를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은하는 내심 모르는 척, 두 사람이 이상한 짓을 하지 못하게 화제를 이끌어나갔다.
“원래 다 같이 밥을 먹는 게 제일 맛있는 법이야. 이별이 너도 그래서 날 부르러 온 것 같은데 잘했어.” “마, 맞아…. 밥은 다 같이 먹는 게 제일 맛있잖아. 아하하….”
“이참에 종평 동안에는 가능하면 다 같이 모여서 밥이나 먹자.”
알면서 모르는 척.
은하는 에둘러 윤이별을 밀어냈다.
그녀의 얼굴이 이내 시무룩해져도 은하는 애써 고개를 다른 방향으로 돌렸다.
“근데 너 지금까지 잤구나? 머리가 그게 뭐니?”
“이것도 정리한 거야. 흉을 보려면 네가 내 머리라도 감겨주든가.”
“치. 저기 있는 아티펙트를 준 게 누구인데 그런 말을 하는 거니?”
“됐고, 밥이나 먹으러 가자.”
“응!”
“이별아, 안 가?” “아, 응! 갈게! 같이 가!”
은하는 태연하게 행동했다.
먼저 정하양을 내보내고, 뒤이어 윤이별을 내보냈다.
그리고 은하도 흐름대로 행동하다 결국 괴상한 패션을 하고 식당으로 가게 되었다.
한편, 그간 이층침대 위에서 계속 잠을 자고 있는 척을 했던 강시형은 몸을 뒤척였다.
세 사람이 나간 것을 확인한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한숨을 쉬었다.
“휴…, 무서워서 혼나는지 알았네. 근데 은하는 어떻게 저런 상황에서 아무렇지 않게 행동한 거지? 정말 담력이 세나 보네. 나라면 무서워서 아무 말도 못했을 것 같은데….”
강시형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 퍼뜩 깨달은 게 있었으니.
“근데 얘들아…. 너희들, 나는 쏙 빼놓지 않았냐? 설마 내가 있는지도 몰랐던 건 아니지?”
자연스런 은신을 터득했다고 한다.
☆
밥이 입으로 넘어간 건지 아니면 코로 넘어간 건지 모르겠다.
우 정하양, 좌 윤이별.
양쪽에 두 사람을 두고 밥을 먹은 은하는 가시방석에 앉은 것만 같은 기분을 피할 수 없었다.
‘몰라. 나는 모르는 일이야. 그냥 이대로 모르는 척이나 할래.’
‘은하야,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을 것 같지만 힘내.’
오죽하였으면 앞자리에 앉아 있던 민지가 측은한 눈길로 그를 보았을 정도였다.
그녀의 옆에서 밥을 먹고 있었던 차은우도 덤으로.
“내가…, 내가 뭘 잘못했다고….”
결국 은하는 흔치 않게 점심식사를 남기고 말았다.
양옆에서 하양과 이별이 집어주는 반찬을 먹다가 포기했다.
자신의 점심인데, 도저히 마음대로 먹을 수가 없었다.
이따 저녁을 먹을 때에는 민지나 은우 옆에 앉아서 먹어야지, 원….
일본에 갈 때까지 걔네 둘 사이에 끼어 있을 생각을 하니 이건 정말 아니야.
시리우스 해운이 지원해주는 만큼 점심식사도 질이 굉장히 좋았으나.
싸구려 초코바나 먹고 있는 은하는 몹시 처량한 심정이었다.
뱃속이 다소 허전하기는 하였지만 별 수 없이 훈련을 하고자 갑판으로 나섰다.
“쟤는 또 왜 여기에 있어?”
뙤약볕인 시간대에.
배 선두에 먼저 온 사람이 있었다.
은하는 그늘에도 들어가지 않고서 직사광선을 받는 채로 배가 향하는 방향을 바라보는 호시미야 카에데를 발견했다.
그녀가 바라보는 수평선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국궁을 손에 쥐고 멍하니 생각에 잠긴 듯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은하는 카에데에게 다가갔다.
그제야 수평선을 바라보던 그녀가 눈길을 돌렸다.
상대가 은하란 것을 파악한 그녀가 무뚝뚝한 어조로 대답했다.
“아니, 별로.”
“뻥 치시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그리고 은하는 호시미야 카에데의 심기를 달구는데 선수였다.
그가 거드름을 피우며 받아치자, 아니나 다를까 그녀가 발끈했다.
그럼에도 은하는 물러서지 않은 채 어깨를 활짝 폈다.
“그냥 해본 소리인데.”
“…너 정말 짜증나는 애구나.”
“리더한테 못 하는 말이 없어.”
“하….”
상대할 가치도 없다.
카에데는 마치 그런 식으로 말하듯 긴 한숨만을 거듭했다.
“그래서 왜. 무슨 일인데?”
하지만 은하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가 자리를 떠나지 않는 것을 확인한 그는 난간에 상체를 맡기며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이윽고 고개를 들어서는 조금 전에 그녀가 보던 수평선을 더듬는다.
저 너머에 있는 것은 하나밖에 없었다.
“일본에 가게 돼서 혹시나 기분이 싱숭생숭하고 그래서 그런 거야?”
“…….”
말이 없다.
그녀의 성격대로라면 필시 대답할 가치도 없는 물음이었다면 자리를 피했을 것이다.
반대로 정곡을 찔린 거라면 그대로 침묵을 지키며 남아 있을 테고.
후자였다.
그동안 호시미야 카에데를 지켜본 은하는 그렇게 확신했다.
“말해봐. 무슨 생각을 하는데?”
호시미야 카에데는 법률적으로는 한국인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녀는 혼혈이었다.
어쩌면 혼혈로서 이 세상을 살아온 그녀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묻노라면 그녀는 국민이되, 정당한 국민으로 취급을 받지 못했던 한국인이 아닌, 일본인이라고 대답할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그녀는 일본으로 가는 걸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 거란 말인가.
“그냥…. 할아버지가 얘기해주셨던 일본이란 나라가 어떤지 궁금해서. 할아버지가…. 아니야.”
“왜 말을 하다 말아? 그냥 얘기해.”
“…할아버지가 돌아가고 싶어 하신 고향이라고. 거기를 내가 간다는 게, 기분이 묘해서 그런 거야.”
마치 누군가에게 그동안 꾹 눌러온 삶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인지.
호시미야 카에데는 은하의 재촉을 이기지 못한 척 말을 꺼냈다.
그는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꺼내는 그녀의 얼굴이 눈에 띄게 풀어지는 모습을 보았다.
“가능하다면 할아버지의 가족들을 찾고 싶지만…, 그건 무리겠지.”
“찾아서 뭐하려고?”
“…그러게.”
은하가 넌지시 물었다.
이윽고 그녀는 바닷바람을 맞으며 씁쓸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찾아서 무엇을 하고 싶다는 건지 자신도 모르겠다는 어조였다.
그녀도 알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뿌리는 멀어서 보이지 않는 수평선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자신이 밟고 있던 땅에 있는 것이라고.
“만약에 찾고 싶어지면 도와줄게. 지금은 힘들지도 모르지만 언젠가 한중일이 협력하는 날이 오게 되면 말이야.”
“…필요 없어.”
“그래, 그럼.”
그럼에도 그녀가 원한다면.
그녀를 도와줄 용의가 있었다.
하지만 카에데는 단답으로 표했다. 이제는 그들을 찾는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의미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의미가 된다 하더라도 할아버지의 인생을 전할 뿐이다.
그녀의 인생을 전하는 게 아니라.
그녀의 뿌리를 찾는 것이 아니라.
그녀는 지금 여기에 있다.
호시미야 카에데라는 존재는 단지 그녀가 겪어온 시간과 그녀가 만난 사람으로 정의된다.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혈연으로 존재가 정의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일본에 있는 동안 나하고 맛집이나 찾으러 다니자. 넌 여기서 제일 일본어를 잘하잖아.” “내가 왜 너 같은 애랑….”
“어차피 할 일도 없을 거 아니야.”
“…거기에 있는 동안에 계속 너만 따라다닐 생각은 없어.”
“그럼 종종 따라다녀.”
“그 정도는 뭐….”
은하는 그녀에게 장난을 걸었다.
카에데가 찌뿌둥한 얼굴로 그에게 대꾸했다.
싫어하는 듯한 기색은 없었다.
은하는 작게 키득거렸다.
“근데 너 점심은 먹었어?”
“아니. 아직인데 왜.”
“그럼 나랑 밥이나 먹으러 갈래?” “너 밥 먹은 거 아니었어?”
“…또 배고파졌나봐.”
“뱃속에 거지가 들었나 보구나.”
시간과 만남이 존재를 정의한다.
그런 의미에서 호미시야 카에데란 존재는 앞으로 새로이 정의되리라.
이제 그녀는─.
“지금 참치가 튀어 오른 거 너도 봤지?”
“꽤 크던데.”
“저거 다시 튀어오를 것 같은데, 저거 한 번 잡아보자.”
“말이 되는 소리를 하지 그래. 왜 내가 네 말을 들어야 하는….”
“호우!”
─별 따기
“내가 왜….”
“역시 호시미야 카에데보다 나은 작살이 따로 없다니까! 솜씨 하나는 끝내주는데?”
“닥쳐.”
─아주 훌륭한 작살이다.
은하는 국궁을 쥐고 부들부들 떠는 그녀를 보며 깔깔거렸다.
리라이프 플레이어 4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