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life Player RAW novel - Chapter 450
재앙이 지나간 자리는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바닷가와 인접해 있는 도시 일대는 그야말로 쑥대밭이 되었으며, 하필 요코하마에서 가장 큰 병원은 그만 편재에 노출되고 말았다.
환자를 이송하는 일은 불가능했고, 비상전력으로 병원을 운영하는데도 한계가 있었다.
몬스터들이 들이닥치기까지 했고.
대형병원의 기능은 그대로 마비가 될 수밖에 없었고, 비슷한 사례가 요코하마 전체에서 일어났다.
그러다 보니 피해를 산출하는 것도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으며, 결국 사람들은 죽어나가는 이를 세기보다 살아남은 이를 구하는데 열중했다.
“어디 다친 데는 없니?”
“…그건 내가 할 말이거든. 어때? 저 사람들이 뭐라 그래?” “멀쩡하대.”
“정말?” “눈으로 보고도 모르겠니.”
의료진들은 길가에 천막을 설치해 구조 활동을 펼쳤다.
도로는 부상을 입은 사람들로 인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한서현은 조그마한 병원의 개인실에 입원하고 있었다.
얘도 참 대단해.
여기 있는 동안 뭘 하고 다녔으면 일본정부에서 이런 편의를 봐주는 거지….
은하가 이곳에 오면서 신서영에게 사정을 듣자하니.
한서현은 일본정부의 보호를 받아 길바닥 응급센터가 아니라 병원으로 안내를 받았다고 한다.
설마 일본정부가 한국인에게 그런 배려를 해줄 줄 몰랐던 은하로서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는 환자복으로 갈아입은 그녀를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했다.
이내 은하는 키득거렸다.
아무렴 어떻단 말인가.
이렇게 살아 있으면 됐지.
“멀리 있어서 잘 모르겠는데?”
은하는 곧 능청을 떨면서 발걸음을 옮겼다.
현재 신서영은 규키에게서 획득한 마석과 스킬석을 제출하러 요코하마 마나관리기구에 간 차였다.
서현의 상태를 확인하던 의료진은 때마침 은하가 병실로 들어오자마자 병실을 나간 상황이었고.
어느덧 병실에는 이제 두 사람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가까이서 확인해야 할 것 같은데 어디 봐봐.”
“그래, 그러면 마음껏 보든가.”
은하는 그녀 앞으로 의자를 바짝 끌어당기며 앉았다.
한서현을 찬찬히 뜯어 살펴본다.
그녀도 시선을 피하지 않고 지긋이 은하를 쳐다본다.
“어떠니?”
“…오랜만에 봤는데에도 변한 게 하나도 없네.”
“네가 보지 못한 척하는 거겠지. 많은 게 바뀌었는데 못 알아볼 리가 없어.”
“어디가?”
“그건 네가 직접 찾아봐야지.”
마침 사람을 유혹하듯이.
한서현이 도발적인 미소를 짓는다.
눈빛이 강렬하다.
은하는 그녀로부터 고개를 돌리며 이불에 감싸여 있는 발을 찾았다.
그녀의 허락도 받지 않고 멋대로 이불 아래를 들춘다.
“발은?”
“네가 마법으로 치료해준 덕분에 조만간 다시 원래대로 돌아올 거래. 까진 데도 약을 발…, 뭐하는 거니.”
“발 만지는데?”
“얼른 손 떼.”
“싫은데.”
손으로 그녀의 발목을 지탱한 그가 붕대를 감은 발에 손을 댔다.
발가락과 발뒤꿈치만 삐죽 튀어나와 있다.
은하는 장난스레 그녀의 발가락을 콕콕 찔렀다.
한서현이 움찔한다.
그녀가 긴장하는 기색이 재미있어, 은하는 이내 손가락 끝으로 그녀의 발바닥을 한 차례 쓸었다.
“내가 하지 말랬지?”
“…그동안 잘 지냈나 보네. 힘이 뭐 이리 세? 어우, 아파….”
“아프지도 않으면서 아픈 척하지 말아줄래?”
한서현이 발을 쭉 뻗어서는 대뜸 은하의 가슴을 찼다.
은하는 일부러 아픈 척을 하면서 그녀의 발에서 손을 뗐다.
한서현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냥 지냈어. 너는 잘 지냈니?”
“나도 그냥 지냈지.”
거의 3년 만에 만난 것이다.
두 사람은 그제야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은하가 툭 하고 화제를 풀어놓자, 서현도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그녀답지 않게 말이 많다.
하지만 은하는 그녀의 그런 모습도 보기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였다.
“서현아─!!”
그가 그녀에게 요코하마에 오게 된 이유를 들려주고 있었을 때쯤.
난데없이 병실 문이 벌컥 열려서는 한 남자가 숨을 헉헉 쉬며 뛰어든 것이다.
한도영이었다.
머리는 헝클어질 대로 헝클어지고, 땀을 바가지로 흘리는 남자는 곧장 침대 위에 있던 그녀에게 뛰어갔다.
“…아버지?”
“다행이다. 정말…, 정말 다행이야. 네가 거기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내가 얼마나 널 걱정했는데….”
한서현의 눈이 휘둥그레진 사이.
한도영은 그녀를 덥석 끌어안았다.
직전에 자리를 피한 은하는 그에게 자신이 앉
고 있던 자리를 내주었다.
저 아저씨도 여기에 있었을 줄은 몰랐는데….
시리우스그룹의 회장 한도영.
은하는 그가 일본에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런 한편, 자신이 알고 있는 그가 사업가적인 모습이 아니라 어디에나 있을 법한 부모의 모습을 보이는 걸 신기하게 생각했다.
한서현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아, 아버지…. 이것 좀….”
“살아 있어줘서 정말 고맙다. 어디, 어디 다친 데는 없는 거지?”
한도영에게 껴안긴 채로 당황하는 한서현.
은하의 눈치를 보고 있던 그녀는 이내 아버지의 걱정 어린 한 마디에 흠칫했다.
이윽고 허공을 헤매던 그녀의 손이 조심스레 아버지의 등을 더듬는다.
옷 주름을 살며시 잡은 손이 이내 한도영의 등살을 꽉 쥔다.
“…무서웠어요.”
“그래, 그래. 많이 무서웠을 거야. 그래도 살아 있어줘서 정말 고맙다. 만약에 네가 어떻게라도 됐었으면 난…, 난…!”
한서현이 흐느낀다.
은하는 그녀가 우는 모습을 보며 등을 돌려주었다.
곧이어 한도영까지 울먹인다.
은하는 그들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병실을 나가기로 했다.
어차피 일본에 머물러 있는 동안, 숱하게 그녀를 보게 될 터였다.
은하가 조용히 문을 여는데─.
“─최예장?”
그녀의 병실을 찾은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은하는 병실 앞에 서 있던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이름이 불린 최예장이 멈칫한다. 우왕좌왕하는 시선이 그를 피해서 병실 안으로 향한다.
“아, 아아, 서현아! 마침 아버님도 여기 계셨군요. 정말로 다행이야…. 거기서 너하고 헤어질 때 내 가슴이 얼마나 철렁했는데….”
최예장이 어색하게 그녀를 부른다.
그제야 한도영의 포옹에서 벗어난 한서현이 고개를 빼꼼 내밀어서는 최예장을 바라보았다.
…응?
그녀가 눈을 깜빡거린다.
이내 그녀의 눈에 이채가 깃든다.
병실 한복판에서 눈물을 터뜨리는 최예장이나 한서현을 껴안고 있는 한도영은 모르는 듯했으나.
이 모든 상황을 덤덤히 보고 있던 은하는 한도영의 어깨 위로 고개를 빼꼼 내민 한서현이 드러낸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쟤가 무슨 생각인 거지?
은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한서현이 이윽고 한도영의 귀에 무언가를 속삭인다.
“뭐라고!?”
갑작스레 화를 내는 한도영.
엉엉 울고 있던 최예장이 흠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난 한도영이 불 같은 얼굴을 하고서 최예장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아, 아버님…?”
“내가 어디서 네 아버님이야!”
“…네?”
“네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서현이를 맡긴 거였는데 이제 보니 내가 보는 눈이 없었구나!”
“무, 무슨 말…아악…!”
“더러운 자식….”
한도영이 최예장의 얼굴에 서슴없이 주먹을 때렸다.
방어자세도 취하지 않고 얻어맞은 최예장이 엉덩방아를 찧으며 바닥을 굴렀다.
한도영은 분이 풀리지 않는 것인지 바닥을 구르는 그에게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이게 무슨 일이래?”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모르겠다.
은하는 눈앞에서 일어난 일을 보며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도 한 가지 알 수 있는 사실이 있었다.
시리우스그룹 회장이 되는 사람이 YH그룹의 직계를 때려버린 것이다.
이것은 시리우스그룹과 YH그룹의 사이가 틀어진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었으니─.
“─당장 내 눈 앞에서 썩 꺼져라. 자세한 설명은 귀국하는 대로 바로 네 애비 앞에서 할 테니까 그렇게 알고 있고.”
한서현과 최예장의 약혼이 파기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시리우스그룹 회장 한도영이 직접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
지금까지 한서현은 생각했다.
시리우스의 왕으로 군림하고 있는 아버지 한도영은 딸인 자신에게도 무척이나 엄격하다는 것을.
실제로 그녀가 어렸을 적부터 겪은 아버지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땀이 범벅이 되어 자신을 끌어안았을 때─.
─아….
그녀는 자신의 생각이 잘못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을 끌어안은 아버지의 몸에서 격렬한 떨림이 있었다.
목덜미를 타고서 흘러내리는 땀은 아버지가 자신을 보러오기 위해서 얼마나 열심히 뛴 것인지 알 수가 있을 정도였다.
“살아 있어줘서 정말 고맙다. 어디, 어디 다친 데는 없는 거지?”
자신이란 존재는 시리우스그룹의 장기말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던 한서현은 아버지의 말을 듣는 순간 울컥하는 감정을 어찌하지 못했다.
그래서 자신의 의무를 자각한 이후 처음으로 소리를 내어 엉엉 울었다.
그러자 아버지도 운다.
모두 다 내 잘못이라고 말하면서 아버지가 다독인다.
“…보고 싶었어요.”
“나도, 나도 많이 보고 싶었단다. 오면서 얼마나 후회했는지 몰라…. 이럴 줄 알았으면 널 이런 곳으로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 널 그냥 내가 계속 데리고 있는 거였는데…. 정말, 아빠가 미안해.”
“아빠….”
노은하가 있기는 했지만.
그녀는 한도영을 꼭 끌어안으면서 그의 감정을 느꼈다.
그러자 한도영은 그녀를 더욱 더 힘껏 끌어안았다.
“─최예장?”
그러던 중.
최예장이 병실에 들어섰다.
이내 한도영의 어깨 너머로 그를 본 그녀의 머리는 차갑게 식었다.
“아, 아아, 서현아! 마침 아버님도 여기 계셨군요. 정말로 다행이야…. 거기서 너하고 헤어질 때 내 가슴이 얼마나 철렁했는데….”
자신이 한 짓은 기억나지 않는 척, 자신의 무사에 안도해하는 최예장.
한서현은 그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 않았다.
잘못된 것이 아니다.
기업가라면 당연히 상황에 따라서 때로는 비굴하게 굴기도 해야 했다. 그래야 이익을 얻을 수 있으니까.
마찬가지로 모름지기 기업가라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지난 일을 잊고 상대와 화해할 수도 있어야 했다.
아쉬운 쪽이 굽히는 것이다.
“─아빠.”
“응?”
그렇다면 지금 아쉬워하는 사람은 과연 누구인가.
둘 다였다.
어떤 관점에서 한서현에게 목숨을 빚지게 된 최예장은 시리우스그룹의 영향력을 얻기 위해서라도 무릎을 꿇어야만 하는 입장이었다.
또한 갤럭시그룹을 넘어서기 위해 YH그룹과 동맹을 맺으려고 하는 시리우스그룹은 달갑지는 않더라도 최예장의 화해를 받아줘야 했다.
그것이 서로에게 윈윈이었다.
“왜 그러니?”
“쟤가 절 밀었어요.”
“…뭐?”
“그게….”
그러나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한서현은 현재 자신이 느끼고 있는 감정을 시험하고 싶었다.
한도영이 누구의 편을 들 것인지.
결과는 그녀가 바랐던 대로.
그녀에게서 귓속말로 사정을 들은 한도영은 불같은 얼굴을 하고서는 최예장을 냅다 패버린 것이다.
“개 같은 놈이 어디서 내 딸을….”
한서현은 아버지의 새로운 면모를 알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시리우스란 대국을 지배하고 있는 나라의 왕이 아무리 이익을 위해서 지켜야 할 것을 포기하고 자존심을 굽히겠는가.
그것은 소인배나 할 짓이었다.
자식을 파는 왕에게 과연 국민들이 충성할 것이란 말인가.
한서현은 꽁무니가 빠지게 도망친 최예장을 보고 가슴이 후련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카구야 님에게 부탁해보면 어쩌면 증거자료를 찾을 수 있을 거야.
찾아보면 목격자들도 있을 테고….
어찌됐든 시리우스그룹의 회장이 무작정 YH그룹의 직계를 때렸다.
사실을 놓고 보았을 때는 오해를 사기 충분한 대목이다.
하지만 배경을 제대로 파악한다면 YH그룹에서도 딴지를 걸 수 없게 되리라.
오히려 YH그룹으로서는 어떻게든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시리우스그룹에 굽혀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자신의 목숨이 제일 중요한 상황에 최예장의 선택이 죄를 저질렀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도의적인 책임은 피할 수 없을 테니까.
그룹의 이미지를 위해서라도 필시 고개를 숙이게 되리라.
어찌됐든 이걸로 YH하고 관계는 틀어지게 되겠네.
한서현은 은하의 손을 꼭 잡고서는 고맙다고 고개를 숙이는 한도영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때마침 YH와 사업부문이 겹치는 루미너스그룹이 있었으니까.
시리우스에게 손해는 없다.
그러니─.
“─은하야.”
한서현은 이내 가벼워진 마음으로 노은하를 불렀다.
한도영에게 손을 붙잡혀 있던 그가 무슨 일이냐는 듯이 눈을 깜빡인다.
분홍색.
그의 눈에서 어렴풋하게 묻어나온 감정을 포착한 그녀는 피식 웃으며 그에게 제안한다.
“─일본에 있는 동안…, 내 전속이 되어주지 않겠니?”
오랜만에 만났다.
조금 더 같이 시간을 보내고 싶다.
그녀는 무언가를 퍼뜩 깨달았는지, 허탈한 얼굴을 하는 아버지를 그냥 무시하며 노은하만을 바라보았다.
가만히 자신을 쳐다보며 서 있던 은하는 이내─.
“─그래, 좋아.”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한서현은 은하의 대답을 들으면서 그가 보내오는 색을 감상했다.
분홍색이다.
사람을 포근하게 만드는 색.
몇 년 전만 하더라도 감정이 없이 무채색의 세상을 보여주던 청년은 이제는 어렴풋한 분홍색의 세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리라이프 플레이어 4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