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life Player RAW novel - Chapter 451
플레이어들이 요코하마를 지켜낸 그날 저녁.
한서현은 아주 오랜만에 한도영과 진솔한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보냈다.
어쩌면 거의 태어나서 처음인 것 같기도 했다.
“네 약혼은 한국에 돌아가는 대로 바로 파기하게 될 거다. 그쪽에서도 지은 죄가 있으니 뭐라 트집을 잡지 못하겠지.”
“…네, 아빠. 고마워요.”
“너한테 고맙다는 소리를 듣는 건 정말 오랜만인 것 같네.”
그녀가 시리우스의 이름이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 알게 되었을 때부터.
한서현은 언제나 자신의 아버지를 시리우스그룹의 회장으로만 대했다.
그저 명령에 따를 뿐이다.
자신의 감정이란 시리우스에 있어 비합리적인 것에 지나지 않으니까.
그래서 그녀는 제 감정을 죽였고, 아버지에게 자신의 불만을 드러내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것이 오히려 화근이었다.
“일본에서 유학생활은 어땠니?”
“마냥 나쁘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어쩌면 귀중한 경험이 된 것인지도 모르겠고요. 그래도 신기했던 건…. 한국이나 일본이나 사람 사는 데는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더라고요.”
소통의 부재였다.
부녀는 그동안 착각하고 있었다.
아버지, 한도영은 이익만을 위해서 그녀의 약혼을 결정한 게 아니었다. 그의 결정에는 딸아이의 행복 또한 고려되어 있었다.
따라서 만약 그녀가 거부했다면, 그는 약혼을 철회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자리를 빌려, 두 사람은 서로가 생각하는 바를 이해할 수가 있었다.
“내가 그동안 너한테 무거운 짐을 떠맡기고 있었나 보다. 다 널 위한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오히려 그게 너를 힘들게 했던 모양이구나. 미안하다, 서현아.”
“아니에요. 저도 지금까지 말하지 않고 있었는데요. 정말 죄송해요.”
“정말…, 다행이야. 내 욕심 때문에 네가 어떻게 되었더라면 난….”
“아빠, 왜 울고 그러세요. 그리고 이렇게 살아 있잖아요.”
부녀는 서로를 마주보면서 울고, 또 웃었다.
그녀는 아버지가 자신에게 보내는 시선이 따스해서 미소를 지었다.
그동안 그녀는 의식적으로 가족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건 그렇고…. 서현이 넌 정말로 괜찮은 거니? 네 약혼이 파기되면, 그때는 너한테도….”
“괜찮아요.”
이내 한도영은 걱정스러운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주 오래 전에 맺어진 약혼이다.
정재계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을, 시리우스와 YH의 혼담이었다.
그러다 보니 약혼을 파기하게 되면 그녀나 최예장은 정재계 안팎에서 가십거리가 되고 말 것이다.
남자는 그나마 괜찮다.
문제는 이런 일에서 피해를 보는 사람은 주로 여자라는 것.
남을 헐뜯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근거도 없는 말로 그녀의 이미지를 실추시키려 하리라.
재계 2위를 차지하는 시리우스이니 그럴 일은 없겠지만 최악의 경우에 그녀의 혼사가 막힐 위험도 있었다.
“솔직히 저는…, 제 결혼 같은 데 관심이 없어요. 그러니 괜찮아요.”
“…그래.”
“물론, 그룹에 해가 될 수 있다면 저도 신경을….”
“아니, 그럴 것까지는 없어.”
하지만 애초 그녀는 결혼에 관심이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혼사가 막히더라도 상관이 없다는 투로 답했다.
물론 그룹의 영향이 가게 된다면 예외가 되는 일이기는 했지만.
그때 아버지가 그녀의 말을 막은 것이다.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거지. 내 인생이 아닌 네 인생이었는데….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는 이제 너한테 결혼을 강요하고 싶지 않아. 서현이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렴.”
“…….”
하고 싶은 대로 하렴.
그 말을 듣는 순간 한서현의 눈에 파문이 일었다.
한도영은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생각해보면 서연이는 어릴 때부터 내 뒤를 잇고 싶다고 했지만 너는 경영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었지. 내가 그걸 왜 이해해주지 못했을지, 참 한심하네.”
“…아니요. 아빠도, 엄마도, 언니도 절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있었는걸요. 너무 그러지 마세요.”
“그랬다면 다행이지만…. 어쨌든. 이제부터는 네 마음이 원하는 대로 살아갔으면 좋겠구나. 경영 같은 건 전부 서연이한테 맡기면 되겠지….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렴.”
한도영이 따스한 미소를 짓는다.
한서현은 부드러운 감정을 읽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럼…. 만약 제가 원하는 사람과 결혼을 해도 되는 건가요?” “…응? 아까 전에는 결혼 같은 건 관심도 없다고 그러지 않았나?”
“…그러니까 만약에요.”
그녀가 조용한 목소리로 더했다.
이런 질문을 받을 줄은 몰랐는지, 한도영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한참 고민에 잠긴다.
자신의 딸에게 격이 맞는 남자를 소개시켜주고 싶어 하던 한도영은 이윽고─.
“─그래, 네가 마음에 들어 한다면 그걸로 됐다. 나도 뭐라 말을 하지 않을게. 대신 나쁜 놈만 아니면 돼.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지?”
“그럼요. 저도 알아요.”
고심 끝에 답을 내린 한도영.
한서현이 키득 웃는다.
그러자 한도영도 웃음을 터뜨린다.
그러고는 은근슬쩍 찔러보는데─.
“─혹시 나도 아는 사람이니? 설마 약혼을 파기하자마자 새로 약혼을 맺을 생각은 아니지? 그건 좀….”
“그런 사람 없어요. 제가 만약이라 말했잖아요. 그리고 저도 생각 없이 그런 일을 저지르진 않을 거예요.”
“허허…. 그래, 네가 생각하는 게 있겠지. 나는 말리지 않으마.”
한서현은 끝까지 시치미를 뗐다. 그러는 한편 그녀의 입꼬리는 높이 올라갔다.
그는 더는 캐묻지 않기로 했다.
☆
요코하마는 현재 피해복구 작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그로 인해 고등아카데미 학생들의 일정은 모조리 취소되었다.
일본 아카데미와 교류를 하는 것도 취소된 건 당연한 일이었고.
하물며 항구가 반파된 것으로 인해 정해진 시일에 출항할 수 있을지도 알 수 없게 된 상황이었다.
결국 아카데미의 일정 자체가 그만 어그러져버리고 만 것이다.
“여기는 역이 근처에 있었는데에도 피해가 적었나 보네.”
“위층에 카구야 님이 계셨었거든. 사태 초기에 의 힘을 펼쳐서 피해를 최소화시켰다고 해.”
“아하, 그렇구나.”
다행히 카구야가 조치를 취해줬다. 인명구조작업을 도와준 보답으로서 학생들이 일본에 체류해 있는 동안 필요한 건 무엇이든 지원해주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덕분에 일정은 어그러졌다고 해도, 학생들은 돈에 구애를 받지 않고서 일본 시내를 탐방할 수 있었다.
“여기에도 한국 식당이 있네?”
“웬만한 백화점에는 하나씩 있어. 나도 가끔 한국 음식이 그리워지면 근처 백화점을 찾기도 했고….”
그런 상황에서 은하는 예외적으로 한서현의 전속 플레이어로 고용된 상황이었다.
물론, 전속 플레이어라고 하더라도 정작 하는 일은 그녀를 따라다니며 시내를 구경하는 것이었지만.
“역시 짬뽕은 국물이 이래야지…. 내가 이걸 얼마나 먹고 싶었는데.”
요코하마 타카시마야 백화점 8층.
아침부터 한서현과 시내를 구경한 은하는 8층에 위치한 한국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점원이 짬뽕을 가져왔다.
빨간 국물을 맛본 은하는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맛있니?”
“너는 모를 거야. 내가 이거 하나 먹겠다고 여기까지 온 거라니까?”
“알아. 오늘 몇 번이나 들었어.”
한서현이 픽 하고 웃었다.
그녀가 나무젓가락을 반으로 쪼개 짜장면을 휘젓는다.
그러고 사전에 받아놓은 앞접시에 은하의 몫을 덜어준다.
그녀가 한국에 있었을 때, 이따금 그와 밥을 먹으러 가면서 몸에 밴 행동이었다.
반면에 은하는 국물을 떠서는 대뜸 그녀에게 내밀었다.
“자. 어라?”
“…맛있네. 왜 그러니?”
“아니. 웬일로 네가 불평하지 않고 먹는 구나 싶어서.”
그러자 머리칼을 넘기며 조심스레 국물을 맛보는 한서현.
은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아는 그녀였다면 주저하면서 뭐라고 불만을 토했을 것이다.
그러고는 결국 어쩔 수 없다는 척 받아 마셨겠지만.
그런데 그녀가 아무런 불만 없이 그의 스푼을 입에 댄 것이다.
“이런 걸 가지고 뭘 그러니?” “…어째 일본에 있던 사이에 되게 털털해진 것 같다?”
“나는 원래부터 이랬어.” “아닌데….”
“짬뽕만 먹지 말고 탕수육도 한 번 먹어봐.”
“…….”
놀라운 일이 하나 더 있었다.
그녀가 자신의 젓가락으로 탕수육을 집어서는 그에게 내민 것이다.
은하는 그녀답지 않은 행동에 놀라 눈을 깜빡거리며 그녀가 입에 넣은 탕수육을 우물거렸다.
“어때? 맛있니?”
“…맛있네.”
그녀가 식탁에 팔을 얹고 묻는다.
탕수육을 삼킨 그는 그녀의 질문에 멍하니 답했다.
은하는 오랜만에 만난 그녀가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았다.
이 누나 뭐지?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은하는 연신 눈을 깜빡거렸다.
이내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시간이 그녀를 바꾼 것이라며 자기 멋대로 결론을 내렸다.
“자, 누나도 먹어.”
“누나라 부르지 말랬지.”
“어때?”
“…맛있네.”
“그리고 짜장면은 단무지하고 같이 먹어야 맛있는 거야.”
“…고마워.”
괜히 장난을 치고 싶어진다.
은하는 그녀가 싫어하는 ‘누나’라는 말을 사용하여 장난을 쳤다.
그러면서 그녀가 자신에게 한 듯이 탕수육을 입 안에 넣어주고, 나아가 짜장면에 단무지를 얹어주었다.
어느새 두 사람은 젓가락을 움직여 서로에게 반찬을 집어주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왜?”
은하가 떠먹여준 짬뽕을 우물거린 그녀가 뒤쪽을 곁눈질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원형테이블.
그곳에는 조금 전에 은하가 부른 친구들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다름이 아니라 그녀가 한국음식을 맛보게 해주겠다는 말을 듣고 그가 친구들이 생각나서 부른 것이다.
“내가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데…. 저 사람들이 모두 네 파티에 들어갈 사람들이니?”
“응, 맞아.”
한서현이 궁금해하며 물었다.
은하는 선뜻 대답했다.
그러자 그녀는 아예 고개를 돌려선 자신이 본 적 없는 친구들의 얼굴을 면밀히 살폈다.
도중에 윤이별의 눈을 본 그녀는 흠 하며 말꼬리를 흐렸다.
“내가 아는 사람들까지 더한다면 10명이 넘어갈 것 같은데.”
“그렇지, 뭐…. 어쩌다 보니 사람이 많아지게 되더라고.”
“파티 규모는 아니네.”
은하는 어깨를 으쓱였다.
모두 그의 욕심 때문이었다.
유망주들을 모으고 모으다 보니까 인원이 늘어나고 말았다.
은하도 인지하고 있는 사실이다.
파티라 부르기에는 규모가 너무나 커져버렸다는 것을.
“그래서 일단 2~3개 파티를 묶은 연대를 만들까 생각도 하고 있어.”
“그럴 바엔 차라리 연대가 아니라 클랜을 만드는 게 낫지 않겠니?”
한서현이 지적했다.
은하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말이 일리가 있기는 했다.
파티나 연대나 인원만 다를 뿐이지 주어진 권한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에 비해 클랜에 주어지는 권한은 상당히 많았다.
예를 들어, 전시상황에서 클랜은 소규모 단위에 해당하는 파티 같은 집단보다 우위에 있었다.
하지만 파티는 독립적인 행동권이 부여돼.
그러나 권한만큼 책임이 따른다.
클랜은 국가의 요청에 응해야 하고 때로는 이권다툼에 휘말려야 했다.
반면 파티는 경우에 따라 독립적인 행동권을 부여받을 수가 있었다.
그래서 회귀 전에 안개꽃 파티는 선녀 임가을에게 독립적인 행동권을 인정받아서 별개로 행동하는 것이 가능했다.
앞으로 몇 년 뒤에 연달아 일어날 재앙을 고려한다면 은하는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는 권한을 가진 파티가 제격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파티를 만들려는 이유가 뭐니?”
그러나 한서현은 그가 감추고 있는 의도까지는 모르는 상태였다.
그래서 의문을 표한 것이다.
은하는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 그가 꺼낸 답은─.
“─내 마음대로 하고 싶으니까.”
은하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점들이 움직이고 있다.
복구작업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앞으로 몇 년 뒤에는 한국에서도 이와 같은 광경을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보다도 심하리라.
“클랜을 만들려면 절차도 복잡하고 시간적, 금전적 비용이 많이 들잖아. 전시상황일 때에는 마나관리기구의 통제 아래에 들어가야 하고…. 종종 회의에 참석도 해야 하는 데다….”
그 외에도 파티를 만들려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가 파티를 선호하는 이유는 회귀 전에도 파티를 운영한 전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 번 해봤으니 두 번째는 당연히 더 잘 운영해나갈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네가 최종적으로 이루고자 하는 바는?”
그때 한서현이 그의 말을 잘랐다.
진지한 어조였다.
은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누구든 내 사람을 건드리지 못할 힘을 손에 넣을 거야.”
애매모호한 말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굳이 부연설명을 요구하려고 하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부정하지도 않았다.
“분명 네 힘이라면 할 수 있겠지. 근데 그거 아니?”
오히려 그녀는 긍정했다.
그리고 다음 말을 꺼내기 위해서 운을 떼었다.
“너 지금 뱅뱅 돌려하고 있어.” “…뱅뱅 돌아?”
“그래, 뱅뱅. 왜 편한 길을 놔두고 일부러 어려운 길을 가려고 하는 거니?”
이해할 수 없다며 눈살을 찌푸리는 한서현.
은하는 할 말을 잃었다.
오히려 그가 그녀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 그녀가 한숨을 쉬었다.
“파티가 아니라 클랜을 만든다면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수월하게 나아갈 수 있을 거야. 그런데 나는 네가 왜 파티에 집착을 하는 건지 잘 모르겠어.”
“파티는 쉽게 만들 수 있는 데다, 거추장스러운 문제도….”
“파티는 클랜에 비해서 진입장벽이 낮기도 하지. 그만큼 주어진 권한은 클랜에 비해 턱없이 낮고.”
“하지만 독립적인 행동권을….”
“그래, 파티의 장점은 네 말처럼 유연성이 있다는 거야. 때에 따라서 독립적인 행동권을 부여받기도 하고 귀찮은 의무 같은 것도 면제되기도 하니까.”
은하가 뭐라고 말한다.
서현은 정확히 요점을 짚어내서는 그의 말을 반박한다.
그녀가 입술을 움직인다.
“그런 대신에 파티는 명령체계에서 클랜보다 위에 설 수는 없어. 만약 클랜보다 높은 위치에 서려 한다면, 모든 클랜이 명령체계를 거스르려는 파티를 가만히 내버려둘 것 같니? 왜 일부러 만들어도 되지 않을 적을 만들려고 하는 거니?”
“…….”
“네가 궁극적으로 어느 위치까지 노리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남의 위에 서려하는 사람은 그만큼 아랫사람을 다스릴 줄도 알아야 해. 근데 어느 누구 밑에도 속하지 않은 파티가 누군가를 다스린다고 할 때, 다른 사람들이 그걸 인정해줄 거라 생각하는 거니?”
“그건….”
“무엇보다─.”
“…….”
“─파티가 사람 열 명을 구한다면 클랜은 사람 백 명을 구할 수 있어. 거국적으로 살려는 사람은 당연히 거국적으로 움직여야지. 도대체 왜 소국적으로 움직이려고 하는 거니?”
“아….”
마지막 말을 듣고.
그는 망치로 머리를 거하게 한 대얻어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일하지 말고 부릴 줄 알아야지. 아래에서부터 개혁을 할 게 아니라 위에서부터 개혁을 해야 하는 거고. 너에겐 그럴 힘이 있잖니.”
노은하가 겪어온 삶이란 아랫사람들의 삶이었다.
밑에서 위를 바라보기만 했던 그는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감각에 좀처럼 익숙해지지 못했다.
당연히 사고방식도 그러했다.
그렇기에 그는 지금도 회귀 전에도 ‘거국(巨國)’을 꿈꾸고 있었으면서도 ‘소국(小國)’적인 행동만을 행했다.
“애초 네가 제대로 공만 세운다면 클랜이더라도 독립적인 지휘권한을 부여받을 수 있을 거야. 그렇다면 너는 일개 클랜뿐만 아니라 산하에 속해 있는 집단을 지휘할 수 있게 되겠지.”
반면에 한서현은 어떤가.
시리우스그룹의 직계인 한서현은 태생이 윗사람인 삶을 보냈다.
당연히도 그녀가 세상을 바라보는 사고방식도 거국적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그의 사고방식이 비합리적이라고 평가한 것이다.
그리고 비합리적이라는 말은 대개 비효율적이라는 말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었다.
“이제 알겠니?”
“…어.”
은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의견이 더 효율적이란 걸.
그럼에도 문제가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클랜을 만드는 절차는 복잡해. 클랜전용 사무실도 구해야 하고…, 재무건전성 심사도 통과해야 하고 입성하는 시기에 지역 클랜들하고 알력싸움을 하기도….”
“왜 이리 약한 소리를 하는 거니. 너답지 않게.”
“…….”
“리더가 모든 걸 해야 할 필요는 없는 법이야. 그런 건 행정관한테 맡기면 되는 일 아니니? 사무실이야 구하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고…. 재무건전성은 그룹의 후원만 있으면 쉽게 통과할 수 있잖니.”
“그렇게 그룹의 후원을 받게 되면 통제를 받아야 하는 거잖아.” “그건 네가 하기 나름이지 않을까. 그게 정 싫으면 은하 네 자금만으로 만들어도 되는 일이고. 그럴 만한 돈이 없는 것도 아니잖아. 왜 자꾸 약한 소리를 하니, 넌.”
말문이 터진 겸에.
한서현이 은하의 비수를 찌른다.
은하는 아무 반박도 못했다.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질 정도로.
“한 번…, 생각해볼게.” “그래, 그럼. 내 생각에는 아무래도 클랜을 만드는 게 나을 것 같지만.”
일단 은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차분히 생각해보기로 했다.
파티가 더 도움이 되는지.
아니면 클랜이 더 도움이 되는지.
만약에 클랜을 만들게 된다면…. 행정관을 고르는 것도 일이겠네.
한편 은하는 속으로 끙끙 앓았다.
행정업무를 해본 적이 없는 그는 모든 업무를 행정관에게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행정관의 위치는 무시할 수 없게 된다.
실질적인 클랜로드라고 보더라도 무방하리라.
결국 그가 클랜을 만들 생각이라면 유능하면서도 자신의 명령을 따를, 배신하지 않는 행정관을 포섭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마침 그의 마음을 읽듯─.
“─만약에 행정관이 필요하게 되면 나한테 말해. 내가 해줄게.”
“어?”
“나도 어렸을 적부터 경영수업을 받은 사람이야. 언니만큼은 안 돼도 클랜 행정처리 정도는 할 수 있어. 그리고…. 내년부터는 한국에 있는 대학에서 클랜 행정관 교육을 받을 생각이니까.”
한서현이 말했다.
은하는 귀를 의심했다.
“…너희 집에서 허락해준대? 아니, 그룹 경영은 안 해도 된대?”
말도 안 된다.
시리우스그룹 직계가 일개 클랜의 행정관을 맡아주겠다니.
시리우스그룹이 가만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는 것인가.
그러나 그녀는 은하의 그런 의문을 단번에 날려버렸다.
“─아버지도 허락한 일이야.”
당당히 아버지를 팔며.
한서현은 미소를 지었다.
☆
한서현이라고 했던가.
무척 예쁜 사람이다.
은하와 창가자리에 나란히 앉아, 그에게 미소를 짓는 그녀를 보면서 윤이별은 문득 떠오른 생각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어떤 사람이니?”
동시에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저 사람이 대체 누구이길래.
은하가 오늘 하루 종일 그녀하고 시내를 돌아다녔던 것인지.
또한 저 두 사람은 어째서 저리도 정답게 음식을 나눠먹고 있는 건지.
꼭 연인 같다.
“나도 잘은 몰라. 시리우스그룹의 직계라는 것 정도?”
김민지는 대수롭지 않다는 것처럼 그녀에게 대꾸했다.
은하가 아니라 지금 눈앞에 있는 짬뽕이 더 중요하다는 것처럼.
“은하랑 어렸을 적부터 알고 지낸 사람이야. 우리하고 접점이 없어서 이제는 그냥, 저렇게 예쁘게 생긴 사람도 있구나 생각하는 정도?”
민지가 말을 보태며 면발을 후루룩 흡입한다.
맛있게 잘 먹는다.
그에 반해 윤이별은 조금 전부터 한 젓갈도 먹지 못하고 있었다.
면발이 퉁퉁 불 지경이다.
“저 언니, 정재계에서는 꽤 유명해. 엄청 예쁘잖아. 그래서 아주 예전에 YH그룹의 최예장 오빠가 언니랑 약혼한다는 소식에 한창 들썩이기도 했었어.”
“…약혼?”
바로 그때였다.
차은우가 단무지를 아삭거리면서 그녀의 호기심을 풀어준 것이다.
윤이별은 은우에게 시선을 돌렸다.
은우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서현이 어떠한 사람인지 자세히 알려준다.
“근데 음…. 이건 확실하지 않아서 뭐라 말할 수 없을 것 같아.”
“얘기해줘.”
“음….”
너무 남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것을 퍼뜩 깨달은 차은우는 이내 난감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에도 윤이별은 완고했다.
결국 그녀의 시선을 이기지 못한 은우가 말을 이었다.
“돌아가는 상황으로 보면 아무래도 둘 사이가 틀어진 것은 아닐까 해. 음…, 미안, 여기까지만 할게.”
차은우가 어색하게 웃는다.
윤이별은 더 이상 캐물을 수가 없었다.
대신에 그녀는 한서현과 노은하를 바라보았다.
나한테는 저렇게 안 웃어주면서….
저렇게 음식도 안 얹어주고….
노은하의 얼굴이 유난히 자상하다. 더군다나 그가 그녀의 짜장면 위에 단무지를 얹어주는 모습이 너무나도 눈이 부시다.
부럽다.
괜히 질투심이 솟구친다.
그래서 그녀가 한서현이란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눈여겨보며 흠집을 찾아내려는 그때─.
─어?
눈이 마주쳤다.
한서현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윤이별은 당황해서 허둥거렸다.
그러나 한서현은 여유로운 미소로 그녀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이내 그녀가 은하가 보는 앞에서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긴다.
그러고는 수줍어하듯 입을 벌리며 은하가 건네는 탕수육을 먹는다.
모두 다 내숭이다.
그녀가 맛있다고 말하는 것 같다.
그러는 한편으로 한서현은 은밀히 자신을 곁눈질하면서─.
─우, 웃었어!?
윤이별은 보았다.
아주 찰나에 불과한 순간에 그녀가 자신을 향해서 입꼬리를 끌어올린 모습을.
“…윽….”
윤이별은 젓가락을 부르쥐었다.
한서현은 더는 그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지만.
그녀는 연신 한서현을 노려보았다. 눈이 마주치면 이번에는 눈싸움에서지지 않을 생각이었다.
분하고, 또 분했다.
“─너무 그러지 마.”
“…어?” “너무 그러지 말라고.”
그러던 때였다.
그동안 조용히 짬뽕을 먹고 있던 정하양이 입을 연 것이다.
윤이별은 어리둥절했다.
“은하랑 오랜만에 만나는 거니까 우리 너무 그러지 말자.”
정하양이 쓴웃음을 짓는다.
어딘가 애달프기도 했다.
그럼에도 꾹 참고 있는 듯했다.
나는…, 싫어.
하지만 윤이별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정하양을 이해할 수도 없었고.
하양이 너한테는 은하가 그것밖에 안 되는 거니?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내 윤이별은 다시금 확신했다.
역시 그를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사람을 자신밖에 없노
라고.
정하양도, 그녀도 아니다.
노은하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그를 가장 많이 좋아하는 자신밖에 없다.
한편─.
“─난 서현 언니가 무섭더라….”
정하양은 몸을 오들오들 떨었다.
한때 한서현에게 가르침을 받았던 그녀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한서현은 적으로 돌려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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