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life Player RAW novel - Chapter 458
플레이어 아카데미 설립 이전.
적색던전 조계사 대웅전을 공략한 플레이어들은 도시 한복판에 생겨난 호수 주위를 두르고 서 있었다.
몇몇 플레이어는 호기심을 보이며 수면 위로 얼굴을 내밀기도 했다.
수면 아래에서 웬 기이한 존재감이 감지된 것이다.
“어떤 것 같아?”
“…뭔가가 있기는 있군.”
당시 으로 추대받기 시작한 남궁성운.
그는 수면 속으로 손을 넣어서는 호수 전체에 마나를 퍼뜨리고 있는 소년에게 말을 걸었다.
아니, 소년이 아니다.
체내 마나의 영향으로 언젠가부터 성장이 멈췄을 뿐이다.
그러니 그의 입에서 나온 어투는 보이는 모습과 느낌이 사뭇 달랐다.
“여기에서 파악할 수 있는 걸로는 정보가 너무 적은데…. 물을 직접 들어내지 않는 이상 정확한 조사는 할 수 없을 것 같은데.”
“허…. 그래?”
정보가 너무 적다.
소년과도 같은 외견을 하고 있는 남자, 윤성진이 중얼거렸다.
남궁성운을 비롯해 그 대답을 들은 플레이어들이 아쉬워하듯 탄식했다.
“그럼 물을 들어내면 되지.”
그때 그동안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남자가 끼어들었다.
백서진.
언젠가부터 이라 불린 남자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무식하기 짝이 없군. 던전 공략도 바로 조금 전에 끝난 참인데 고작 호수 속에 뭐가 있나 확인하겠다고 물을 들어내겠다고?”
윤성진은 미간을 찌푸렸다.
며칠 동안이나 던전에 끌려다니며 고생을 해야 했던 그로서는 이제는 그만 쉬고 싶었다.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심정이었고.
바로 그때─.
“─하긴, 못 들어낼 것도 없구만. 호수 속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던 내가 멍청했어.”
“…미친놈.”
남궁성운이 대뜸 창을 내리쳤다.
그 순간, 호수가 반으로 갈라지며 수면 아래 속의 세상이 드러났다.
그리고 갈라진 표면을 얼려버렸다.
윤성진은 갑작스레 일어난 광경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하지만 그의 반응이 어떠하였든, 남궁성운과 백서진은 껄껄 웃었다.
저 뒤에서는 문준이 눈을 감으며 웃음을 참고 있었고.
“자, 이제 가까이에서 조사할 수 있겠지?”
“허….”
윤성진은 한숨을 흘렸다.
어쩔 수 없이 갈라진 호수 속으로 몸을 던진다.
이내 그를 따라 몇몇 플레이어들이 착지했다.
윤성진은 그들의 존재를 무시하며 기묘한 감각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아티펙트로군.”
“기운이 심상치가 않은데…. 이런 물건이 호수 속에 있었을 줄은….”
“기다려. 멋대로 움직이지 마.”
윤성진은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던 남궁성운을 막았다.
이윽고 주변에 녹아든 마나를 읽은 그가 말문을 텄다.
“트랩이 이중삼중…. 몇 겹인지도 알 수 없을 정도로 쳐져 있어.”
트랩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푸는 것 자체가 쉽지가 않다.
날을 잡고 풀어도 풀지 못할 수도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윤성진은─.
“─포기하지. 저건 아무도 못 풀어. 트랩에 비해서 봉인된 아티펙트를 얻을 매력이 있는지도 모르겠고…. 수지타산에 맞지 않아.”
윤성진은 단칼에 결론 내렸다.
사람들이 아우성을 치는 가운데.
그는 더는 미련을 보이지 않은 채 호수 바닥에서 올라왔다.
남궁성운은 트랩을 풀어보겠다며 아래에 남기로 했지만 딜러인 그가 풀 수 있을 리 없었다.
“풀 수 있는 거 아닌가?”
“귀찮아. 피곤해. 말 걸지 마라.”
백서진은 쓴웃음을 지어보였다.
윤성진은 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짜증이 섞인 어조로 대꾸했다.
그러고는 잠이나 자러가야겠다며 몸을 돌린다.
“흠…. 이봐, 준이, 성운이.”
이윽고 남궁성운이 아무 소득 없이 돌아오고.
그때까지 계속 생각에 잠겨 있던 백서진이 벗들의 이름을 불렀다.
“─이왕에 교육기관을
만드는 거, 뭔가 그럴싸한 전설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붉게 물든 이 땅 위에.
푸르른 희망을 가꾸는 교육기관을 세운다.
그것이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바람이었다.
☆
종평을 마친 학생들의 시간은 무척 바쁘게 지나갔다.
특히 예정보다 일본에 있는 시간이 길어진 학생들은 보충수업을 들어야 할 지경이었다.
그만큼 정신이 없었다.
“방학 때에는 좀 쉬어야지….”
드디어 1학기가 끝났다.
기말고사를 모두 마친 은하는 대뜸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시험공부를 하지는 않았다고 해도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이곳저곳으로 불려 다니기 일쑤였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훌쩍 흘렀다.
아빠한테 우는 소리를 듣지 않나, 누나한테 위험했다고 혼나지 않나, 교관들한테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추궁당하지 않나….
마나관리기구 본부에 불려가서는 토츠카노츠루기를 얻게 된 경위를 보고해야 하기도 했고.
그 외에도 이러쿵저러쿵.
은하는 일본에서 날뛰었던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다.
“이게 뭐야…. 마음 같아서는 이제 쉬었으면 좋겠는데 시험 끝나자마자 또 누구를 만나러 가야 하고….”
오늘 밤에는 아카데미에서 1학기 종강파티가 열린다.
종강파티가 의무참석은 아니라지만 이번에 참석하는 종강파티는 나름 의미가 있는 자리였다.
이번에는 참여할 생각이었다.
그러다 보니 그는 시험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내가 이 시간에 약속을 잡은 게 잘못이지….”
어찌 보면 자업자득이었다.
종강파티가 시작되기 전까지 제법 여유가 있다.
그래서 은하는 이 시간을 이용해서 그동안 미루고 미룬 한서연을 만날 생각이었다.
상대하기도 껄끄러운 사람이라서 아주 잠깐 얼굴만 볼 생각이었는데 덕분에 아카데미를 오가게 생겼다.
자신의 선택을 거듭 후회한 그는 약속장소에 먼저 와 있던 한서연을 찾았다.
“은하 왔니? 밖에 덥지는 않았고?”
“…괜찮아요. 별로 안 덥더라고요.”
종로구에 위치한 루미너스 스위트.
VIP 전용 객실에 들어선 은하는 자신을 살갑게 대하는 그녀를 보고 떨떠름한 얼굴을 했다.
그녀답지 않다.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건가 싶었지만 그럴 의도는 없어 보였다.
“네가 마시고 싶은 걸로 시켜. 아, 너 여기 스위트도 꽤 좋아했었지? 먹고 싶은 대로 마음껏 시켜도 돼, 내가 살 거니까.”
“…아뇨. 이따 종강파티가 있어서 먹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럼 저는 자바칩 프라푸치노로 마실게요.”
“아마도 그걸 먹으면 배가 불러서 종강파티에서 아무것도 먹지 못하게 될 것 같은데…. 뭐, 아무렴 어때. 네가 마시고 싶다는데.”
한서연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은하는 한서연이 그러거나 말거나 조용히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녀도 크게 신경을 쓰는 눈치는 아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은하가 주문한 음료가 도착했다.
“전화로도 이야기했었던 거지만…. 이번에 은하 너하고 따로 보자고 한 이유는 감사인사를 전하고 싶었기 때문이야.”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한 차례 재계가 들썩이기도 했다.
시리우스그룹과 YH그룹의 긴밀한 동맹이 끊어졌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시리우스그룹의 직계 한서현과 YH그룹의 직계 최예장의 약혼이 파기되었다.
“서현이의 파혼이 결정돼서 이제 시리우스와 YH는 완전히 남남이 됐어. 음…. 이제는 원수지간이라고 해야 하나? 예정되어 있거나 이미 진행 중인 프로젝트들도 중단됐고.”
시리우스그룹이 파혼을 제안했다.
결격사유는 최예장에게 있다면서.
이에 YH그룹은 구체적인 근거를 요구하는 일 없이 시리우스그룹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약혼파기를 수락했다.
호사가들은 여러 억측을 내놓으며 YH그룹이 무언가 잘못을 저질렀고, 직계인 최예장에게 어딘가 하자가 있을 거라는 소문을 퍼뜨렸다.
한편 최예장은 칩거 중이라 한다.
시리우스그룹이 적절히 대응했어.
공개적으로 망신을 준다고 해도, 거기에는 한계가 있을 테니까.
은하는 돌아가는 흐름을 파악했다.
YH그룹으로서는 그룹을 잇게 될 최예장이 약혼자를 버려가면서까지 저 혼자 살아남으려고 했던 모습을 세상에 공개하고 싶지 않았으리라.
그래서 시리우스그룹이 제시하는 조건이 아무리 말이 안 된다고 해도 받아들이게 되었을 터.
설령 최예장에게 하자가 있을 거란 말이 나온다고 하더라도.
왕이 될 자격이 없다는 것보다는 남자가 될 자격이 없다는 게 낫다.
YH그룹이 굽힌 이유이리라.
무엇보다 시리우스그룹은 한서현의 이미지를 지켜냈어.
진흙탕 싸움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시리우스그룹은 교묘하게도 상황을 잘 조절했다.
결국 최예장이 혼자 모든 잘못을 뒤집어쓰게 되면서 한서현은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을 수 있었다.
뒷말이 나올 수는 있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그녀의 혼삿길이 막히지는 않은 것이다.
“우리는, 서현이 약혼이 잘 되기를 빌었어. 서현이한테 행복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거든…. 근데 이번에 아버지 말씀을 들어보니까 우리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더라.”
한서연이 처연하게 읊조린다.
언제나 남의 위에 서 있던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며 이야기했다.
마치 고해성사를 하는 것처럼.
은하는 묵묵히 그 이야기를 들으며 음료를 마셨다.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만약. 만약에 그때 은하 네가 서현이를 구해주지 않았더라면 아마 우리 가족은 평생 죄책감을 느끼고 살아갔을 거야. 그걸 견디지 못하고 YH그룹 새끼들을 공격하는 데에만 혈안이 됐을지도 몰라.”
만약 한서현이 죽었더라면.
미래는 필시 그렇게 됐을 것이다.
그제야 은하는 자신이 알고 있던 미래가 어떠한 원인에서 기인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최예장을 공격하는데 혈안이 되어, 시간이 지날수록 총명함을 잃어가던 한서연은 더는 존재하지 않으리라.
그는 자신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는 그녀를 보며 확신했다.
“그래서 너한테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어. 서현이를 구해줘서 정말로, 정말로 고마워.”
“…….”
타인의 위에 서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던 한서연이.
그동안 누군가에게 고개를 숙이는 일이 없었을 그녀가 고개를 숙인다.
은하는 정중한 태도로 고개를 숙인 그녀의 모습을 보고 내심 놀랐다.
“은하 너는 우리 가족의 은인이야. 내가 그동안 너한테 억지를 부리고, 너를 힘들게 했던 것도 사과할게. 이전에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계속, 시리우스그룹은 널 위해서라면 뭐든 마다하지 않을 거야.”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이건 내 결정만이 아니야. ‘우리’가 결정한 일이야.”
한서연은 시리우스그룹이 앞으로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그의 후원을 계속할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뭣하면 시리우스의 이름을 마음껏 사용해도 상관없다고.
너무나 파격적인 제안이다.
은하는 예상을 넘어서는 이야기에 그만 당황하고 말았다.
그런데 한서연이 ‘우리’를 강조한 것이다.
이는 시리우스그룹의 모든 직계가 그를 지지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럼 제가 그룹을 달라고 하면 정말 줄 거예요?”
“왜? 갖고 싶니? 네가 원한다면야 시리우스그룹을 내줄 수도 있어.” “…….”
“그만큼 우리 가족한테 서현이가 소중한 사람이라는 뜻이야.”
은하가 농담을 꺼내자, 한서연이 그제야 그녀다운 모습을 보였다.
그럼에도 은하는 한서연의 태도가 이전과 다르게 살가워져서 좀처럼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룹차원은 그룹차원인 거고…. 개인적으로도 은하 너한테 뭐라도 해주고 싶은데 혹시 지금 필요한 건 없니? 사양 말고 말해봐.”
“딱히 없는데….”
“대가를 바라고 주는 것도 아니고, 그냥 내가 고마워서 주려는 거니까 의심하지 않아도 돼. 내가 이걸로 퉁치겠다는 것도 아니야.”
“음….”
그룹 차원이 아니라 한서연 개인이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다.
은하는 거듭 감사를 표하고 싶다는 그녀를 매몰차게 대할 수 없었다.
시리우스그룹의 직계가 이 정도로 굽히고 들어오니 뭐라도 받아줘야 했다.
정말 없는데….
은하는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시리우스그룹에게서 받아낼 무언가를 찾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면 지금 한서연에게서.
“아.”
“왜? 뭐 생각 난거라도 있어?”
그런 생각이 미쳤을 무렵이었다.
은하는 마침 한서연에게서 받아낼 보상을 떠올렸다.
미래를 위해 필요한 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보상이었다.
“누나네 집에는 온실이 있잖아요.” “응, 그렇지.”
은하는 몇 번 시리우스그룹 본가, 평창동에 있는 저택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드넓은 저택에는 온실이 있었고, 거기서 다양한 식물들이 자라나고 있었다.
한서연과 그녀의 어머니 최수빈이 관리하는 온실이었다.
은애가 거기를 엄청 좋아했지.
지금도 기억이 났다.
은애가 시리우스 본가를 찾을 때면 제일 먼저 온실을 찾고는 했던 게.
평소에 보지 못하는 식물을 보고 신이 나서는 방방 뛰던 여동생.
그곳 온실이 오죽 마음에 들었으면 혼자서라도 시리우스그룹의 본가를 찾아가려 할 정도였다.
물론, 한서현이 유학을 가고 나서 온실을 찾는 일은 뜸해진 듯했지만.
“…혹시 은애가 온실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게 허가해 달라고 말할 생각인 건 아니지? 그거라면 이미 서현이가 유학 가기 전에 말해놔서 허가할 것까지도 없어. 굳이 눈치를 볼 필요도 없이 은애가 원할 때면 언제든지 찾아와도 돼.”
“그건 저도 알고 있어요. 그런데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지만 어떻게 눈치를 안 볼 수가 있겠어요.”
“하긴, 그것도 그러네.”
한서연이 이상하다는 투로 말했다.
은하는 그녀의 오해를 정정했다.
그러자 그녀가 순순히 긍정했다.
“시리우스 본가 온실에는 국내에서 자라지 않는 식물도 있는 걸로 알고 있어요.”
“응, 그렇지. 어머니가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는 부분 중 하나야. 아마 우리만큼 희귀식물을 보유하고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을걸? 무엇보다도 우리 온실에는….”
“그 온실에서만 자라고 있는 꽃을 은애가 기를 수 있게 해주세요.”
“음….”
초록이와 햇님이라고 했던가.
여동생이 시리우스 본가 온실에서 가장 마음에 들어 하던 꽃이었다.
일전에 한서연이 했던 말에 따르면 시리우스그룹이 최초로 발견하고, 꽃의 신비로움에 취해 외부에 절대 공개하지 않는다는 꽃.
은하는 시리우스그룹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꽃을 언급했다.
“이거 혹시 비유적인 표현인 것은 아니지?”
“제가 왜 그런 부탁을 하겠어요. 순수한 의미에서 집에서 길러보게 씨앗이라도 달라고 말하는 거예요.”
“흠….”
한서연은 선뜻 답하지 못했다.
입술을 삐죽 내민 그녀가 말꼬리를 흐렸다.
그룹의 상징을 내주는 것인 만큼 망설여지는 듯싶었다.
“은랑화를 주는 건 어렵지 않아. 문제는 은랑화가 자생할 수가 있는 환경조건을 알 수 없어서 기르는 건 무리일 거라는 거야.”
하지만 그의 예상은 틀렸다.
그녀가 생각에 잠겨 있었던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한서연은 시리우스그룹이 그동안 갖은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은랑화를 다른 곳에서 기르는 걸 실패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우리도 번식시키고 싶지 않아서 온실에서 관리하고 있던 게 아니야. 할 수만 있다면 어떻게 번식하는지 알고 싶을 정도라고.”
“그래도 괜찮아요.”
“뭐?”
한서연이 가능할 리가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럼에도 은하는 태연했다.
은애가 길러보고 싶다는데 내가 뭘 어쩌겠어.
은애 소원이니까 들어줘야지.
여동생의 소원을 이루어줄 뿐이다.
무엇보다 여동생은 기프트를 통해 동식물과 대화를 나누는데 일가견이 있었다.
집에도 은애가 따로 기르는 식물이 몇 개 있을 정도였다.
은애라면 잘 할 수 있을 것이다.
은하는 은애를 자랑스럽게 여기며 되레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은애가 한 번 길러보게 해주세요. 여동생이 그런 걸 좋아하거든요.”
“괜히 실망만 할 텐데…. 알았어. 네가 부탁하는데 어쩌겠니. 나중에 우리집으로 와서 가져가도록 해.”
“네, 고맙습니다.”
결국 한서연은 그의 부탁을 완고히 거절하지 못했다.
그녀는 에휴 하고 한숨을 쉬고는 빨대를 입에 댔다.
이내 음료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그녀가 은하를 불렀다.
“그런데 은하야.”
“네?”
슬슬 아카데미로 돌아가야겠다.
음료를 마저 마시고 이제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던 은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서연은 조금 전과 다를 바 없이 살가운 미소로─.
“─혹시 또 부탁할 건 없니?”
“…없는데요?”
“정말 없어?”
“정말.”
“에이, 있는 건 아니고?”
“정말 없는데요.”
꼭 유도심문을 하는 것 같다.
은하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친절해도 너무 친절하다.
은하는 의심의 눈초리로 한서연을 쳐다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는 태연하게 은하에게 말을 걸었다.
“에이, 너무 빼도 재미없어. 혹시 사랑의 큐피드 같은 것은 필요하지 않니?”
“…….”
“내가 그런 거는 정말 잘하는데…. 내가 평창동의 마담뚜라 불리는 걸 네가 알려나 모르겠다. 너는 지금 주변에서 들어오는 약혼제의 때문에 난처한 위치에 있는데….”
너무나 자연스럽게.
한서연이 턱을 괴며 미소 짓는다.
이에 은하는 마시고 있던 음료를 삼키지도 못하고 도로 뱉었다.
이윽고 그는 벌레 씹은 얼굴로─.
“─누나 결혼부터 신경 써야 하지 않을까요? 마담뚜는 무슨….”
“…썅. 죽을래?”
한서연에게 비수를 꽂은 은하.
한서연은 결국 처음으로 은하에게 거친 소리를 내뱉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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