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life Player RAW novel - Chapter 478
열정 소실.
돌이켜보면 아카데미에 입학하려고 중학생 때 갖은 노력을 다했던 게 문제가 아니었나 싶다.
그때 인생에 써야 할 열정을 모두 쏟아 부은 것은 아닌가.
이천서는 마라도를 다녀온 이후, 자신이 은연중에 무시하고 있었던 남학생에게 브로치를 빼앗기고부터 그런 생각을 하고는 했다.
“─여기 아카데미에서만 판매하는 포도 솜사탕! 손이 끈적거리지 않고 떼어먹기 아주 편한 솜사탕입니다! 속는 셈 치고 한 번 먹어보세요!”
정말 운이 좋게도.
중등아카데미 3학년으로 편입하는 기회가 생겼다.
그때는 자신이 성공한 인생이라도 산 듯한 기분에 휩싸였었다.
하지만 그게 끝이었다.
기필코 아카데미에 입학하겠다는 목표를 달성한 이천서는 그 이후로 목적이 없는 삶을 살았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노력하는 법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결국 뒤처졌다.
“하, 씨…. 내가 지금 이걸 왜 하고 있는 거지. 올해 문화제도 이렇게 지나가는 구나.”
이천서는 한숨을 쉬었다.
마음 같아서는 이성 친구를 만들어 문화제를 풋풋하게 보내고 싶었다. 하다못해 작년처럼 노은하 사단의 친구들과 문화제를 보낸다거나.
하지만 그마저도 불가능했다.
친구들 대부분이 종합부문대회에 출전했기 때문이다.
여자들은 자기들끼리 짝을 지어서 문화제를 둘러보기로 했고.
반면에 그는 예선전에서 탈락해, 반에서 기획한 부서에서 일을 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여자애들도 요즘에는 날 벌레 보듯 무시하기나 하고…. 사람이 어떻게 은하랑 있을 때는 살갑게 대하면서, 은하가 없을 때는 얼굴을 싹 바꿔서 무시할 수가 있어?
내가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지?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이천서는 팔짱을 낀 채로 지나가는 연인에게 솜사탕을 건네며 생각에 잠겼다.
가지고 있는 열정을 모두 연소해 아카데미에 들어왔지만 기대와 다른 학창생활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인 것도 같다.
다들 너무 열심히 하는 거 아냐? 우리는 중등아카데미 출신이잖아. 그것만으로도 인생이 어느 정도는 보장되어 있는 거 아니야?
조금은 느슨해져도 되는 거잖아. 왜 그렇게 열심히 하려고 그러느냔 말이야.
사이에 끼어 있는 사람 숨 막히게.
다들 너무 열심히 산다.
하지만 아카데미에 들어가겠다는 목적을 완수한 그는 더 이상 노력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은연중에 자신에 비해 못하다고 생각하고 있던 강시형에게 따라잡히고 말았다.
거북이에게 추월당한 것이다.
학생들은 이제 당연하다는 태도로 노은하 사단의 가디언은 강시형이라 여기고 있었다.
이천서는 더더욱 의욕을 잃었다. 강시형을 꺾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만큼 노력하고 싶지는 않았다.
“포도 솜사탕 먹고 가세요! 평범한 솜사탕이 아닙니다! 동그랗게 뭉친 솜사탕을 포도처럼 만든, 아카데미 명물입니다! 손에 묻지 않아서 쉽게 먹을 수 있어요!”
그리고 몇 개월 전.
그는 마라도에서 황금브로치를 건 대련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상대는 고등아카데미 출신이었다. 단기간에 빠르게 성장하여 이천서를 몰아붙인 것이다.
이외에도 학생들은 종평을 통해서 놀랄 만한 성장을 이루어냈다.
그때 이천서의 자존심은 무너졌다.
자신이 고등아카데미 학생들에게도 뒤처졌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에는 이미 늦은 뒤였다.
노은하를 볼 면목이 없었다.
아니─.
─쪽팔려서 걔네들을 어떻게 봐. 은하 그놈도 나한테 잔소리를 할 게 뻔한데.
처음에는 리벤지 매치를 신청해서 황금브로치를 되찾으려고 했었다.
그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비공식적으로 리벤지 매치를 해서 세 번쯤 졌을 때쯤에 깨달았다.
지금 수준에서는 상대를 이기는 건 불가능하다고.
“어쩔 수 없지. 반성한다는 의미로 당분간 걔네들하고 최대한 어울리지 말아야지. 나만 대련에서 지겠어? 은근슬쩍 나한테 쪽을 주는 애들은 안 빼앗길 것 같아?”
그럴 바엔 차라리 언젠가 자신처럼 황금브로치를 빼앗기게 될 친구들이 나오기를 기다리자고.
그때 가서 자연스레 노은하 사단에 다가가는 것이다.
그때가 되면 은하도 뭐라고 쪽을 주지는 않으리라.
최근에 훈련을 하느라 바쁘다면서 노은하 사단과 어울리지 않는 것은 전략적인 후퇴라고 할 수 있었다.
어디 한 번 두고 보라고.
그가 그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마법으로 만들어서 몸에도 좋은 포도 솜사탕! 남자랑 여자랑 둘이서 오붓하게 먹기 좋습─어?”
“뭐야. 너 여기서 일하고 있었어?” “은하야? 옆에는 누구….”
“…안녕?”
때마침 노은하가 부스를 찾아왔다.
아무 생각 없이 솜사탕을 홍보하던 이천서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이내 곁에 서 있는 여성을 보고 눈이 크게 떠졌다.
우와….
절로 감탄사가 나오는 미모다.
감정의 동요를 보일 것 같지 않은 여성이었다.
가까이 다가가는 것조차도 용기가 필요할 것 같은 여성.
그런데 푸르른 머리칼이 눈에 띄는 여성은 겉으로 보이는 인상과 달리 선뜻 살갑게 인사를 건넨 것이다.
자신을 은하의 친구라고 인지했기 때문이리라.
그렇다고 하더라도 천서는 마음이 들뜨는 기분이었다.
혹시 나한테 관심 있는 거 아냐?
괜한 오해를 품는다.
상상의 나래에 빠진다.
그리고 지금까지 늘 그랬듯─.
“─여기서 솜사탕을 파는 거야?”
“어? 어, 어어….”
“…손에 묻지 않는 솜사탕? 우리 이거 하나 먹을까?” “그래, 좋아.”
“그럼 천서야, 둘이 먹게 하나같은 2인분으로 줘.” “…다 먹을 수 있을까?”
“둘이서 나눠먹을 거니까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음…. 그래, 은하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천서야, 알겠지?”
─노은하가 찬물을 끼얹었다.
이내 꿈에서 깨어나게 된 이천서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대체 노은하는 전생에 뭘 했으면 주변에 저런 여자들이 많은 것인지 모르겠다.
상대 여성은 자신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것처럼 노은하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결국 이천서는 별 수 없이 그에게 솜사탕을 건넸다.
그런데 이번에는─.
“─자, 누나 먼저 먹어봐.”
“고마워. …맛있다.”
“그래?” “응. 너도 하나 먹어봐.”
“음…, 꽤 맛있네.”
두 사람이 자리를 떠나지 않고서 눈앞에서 염장을 지르고 있다.
천서는 포도알처럼 뭉친 솜사탕을 서로 번갈아가며 떼어먹는 모습을 부럽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솜사탕을 만들고 있는 자신과 달리 노은하는 청춘을 즐기고 있었다.
“─응? 뭐야? 갑자기 왜 내 냄새를 맡고 그래? 냄새나? 역시 샤워라도 하고 올 걸 그랬나.” “그냥…. 냄새가 좋아서. 안 씻어도 냄새 나지 않으니까 괜찮아.”
“아까는 냄새가 좋다면서? 그런데 냄새가 안 난다고?” “…좋은 냄새가 나는 것 같다고. 땀냄새는 안 나고.”
“그런가? 나는 잘 모르겠는데.” “은아하고 비슷한 냄새야.”
“누나랑 같은 섬유유연제를 써서 그런 건가….”
서로 몸을 붙여서 솜사탕을 먹던 두 사람.
그때 그녀가 솜사탕을 먹다 말고 뜬금없이 은하의 체취를 맡았다.
그녀가 코를 그의 목덜미에 가져가 킁킁거린 것이다.
은하는 솜사탕을 먹다가 놀랐고, 이천서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노은하가 부러워 죽겠다.
“누나는 뭐 쓰는데?”
“어떤 거?”
“섬유유연제.”
“…라일락, 이었나?”
“어디? 나도 맡아볼래.”
“안 돼. 땀내 나. 아까 대련을 하고 씻지 않아서….”
“나도 안 씻었거든요?” “…그래도 안 돼.”
“와…, 나만 당한 기분이야.” “그럼…, 다음에 맡게 해줄게.”
“…어? 그냥 장난 친 거였는데….”
“아…, 미안. 몰랐어. 저기, 음…. 한 번 맡아볼래?”
길게 자란 연푸른 머리칼을 잡아선 선이 예쁜 목덜미를 드러내는 여성.
이천서는 조용히 감탄사를 흘렸다.
마치 화보를 보는 기분이었다.
가판대가 앞을 가로막고 있었기에 가까이에서 보지 못하는 게 정말로 안타까웠다.
그런데 노은하는─.
“─아니야, 괜찮아. 우리 누나한테 혼날라.”
“그럼 은아한테는 비밀로 할게.” “…장난이지?” “응, 장난이야.”
“깜짝 놀랐네. 누난 너무 진지해서 장난을 치는 건지 아닌 건지 도통 모르겠다니까?”
“음…, 그런가?”
이천서는 절로 욕이 나왔다.
어째서 들이대지 않는 것인가.
여성도 싫어하는 기색은 아닌 것 같았건만.
그는 은하가 뒤로 내빼는 모습에 절로 복장이 터졌다.
어째서 하늘은 저런 기회를 제대로 활용도 하지 못하는 그에게 주는지 모르겠다.
혹시 중요한 순간에 내빼는 기술이 여자애들한테 먹히는 건가?
그러다 이천서는 하나의 깨달음을 떠올리게 되었다.
어쩌면 노은하의 주변에 여자들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그가 확실하게 호감표현을 하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고.
요컨대, 상대의 애를 타게 만드는 것이다.
…애를 타게 만드는 기술.
나쁘지 않네.
나도 한 번 써먹어 볼까?
혹시 모르는 일이잖아. 그러다가 누구 한 명이 엮일지도….
이천서는 심도 있게 고민했다.
‘될 놈은 뭘 해도 된다’는 법칙이 존재하는지도 모르고.
그러는 사이 두런두런 대화를 하던 은하와 여성이 자리를 뜨려고 했다.
“천서야, 솜사탕 잘 먹을게. 그럼 우리는 간다.”
“아, 어어…! 재미있게 놀아!”
“종합부문대회도 힘내고.” “…나 떨어졌는데.”
“뭐야. 너 떨어졌어?” “…몰랐어?” “아, 미안. 요즘 정신이 없어서…. 그러고 보니 들었던 것 같아.”
떠나면서까지.
은하가 아무렇지 않게 쪽을 준다.
천서는 자신에게 관심을 주지 않는 은하의 태도에 황당해했다.
조금, 실망했다.
그러나 실망도 잠시였다.
자신을 류연화라고 소개한 그녀가 작별 인사를 건넨 것이다.
“나중에 또 봐요.”
“아, 네! 다음에 또 만나요! 저는 문화제 동안 계속 여기 있을 거니까 혹시 시간되시면….”
“가자, 누나.”
“응.”
물론, 그녀 역시 그에게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만.
이천서는 흥분해서 손을 흔들다가 멀어지는 두 사람을 보며 허무하게 손을 축 늘어뜨렸다.
그러다 눈이 번쩍 떠졌다.
“…은하야. 너 돈 안 내고 가지 않았냐?”
이거 완전 날강도다.
이천서는 처연하게 중얼거렸다.
☆
어려서 부모를 여의었다.
9살, 선녀정부가 출범하기 이전.
도시가 불길로 뒤덮였더랬다.
생명의 규격을 벗어난 몬스터들은 세종시의 작은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렸다.
‘…….’
류연화.
그녀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죽음을 직면한 그 순간에 기프트를 자각했기 때문이다.
주변 일대를 모조리 얼려버리면서 플레이어들이 도착할 때까지 자신을 보호할 수 있었다.
‘─얘야, 우리집으로 오겠니?’
그리고 그때.
그녀는 자신의 스승을 만났다.
달리 갈 곳이 없던 그녀는 그렇게 남궁성운이 건넨 손을 잡았다.
그날 이후로, 그녀는 그의 밑에서 철저하게 창술을 배워나갔다.
‘─잔잔한 수면은 언제나 고요하지. 연화 너도 그처럼 명경지수와 같은 마음을 지닐 줄 알아야 한단다.’
‘…네.’
하루하루가 수련의 반복이었다.
그녀는 언제나 창을 마주하는 삶을 살아야 했다.
남궁성운의 문파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그녀와 같은 삶을 살아가면서 굳은 신념을 확립해나가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그녀의 성격도 자연히 그들처럼 과묵해지고, 진지해졌으며, 일상을 구가하는 사람들과는 다른 삶을 보냈다.
‘쟤가 걔야?’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의 가 되었다니 대단하네.’
‘가까이 다가가기 무섭네. 딱 보면 말도 걸지 말라는 분위기를 풍기고 있잖아.’
그녀가 사람을 대하는데 서투른 건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세상 사람들도 그녀에게 호기심을 보이기만 할 뿐, 살갑게 다가오려 하지 않았다.
이따금 그녀에게 다가오
는 이들은 대개 겉으로 보이는 분위기 때문에 겁을 잔뜩 먹고 있고는 했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그녀에게서 의 후예라는 인식을 가지고 접근하는 업계 관계자들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친구라 할 수 있는 존재가 한 명도 없었다.
노은아를 만나기 전까지.
‘너 정말 잘 뛴다! 나처럼 마나를 사용하지 않고 달릴 줄은 몰랐어!’
저도 모르게 얼굴이 풀리는 미소.
세상 사람들에게 사랑받을 것 같은 그녀는 아카데미 입학 시험장에서 선뜻 말을 걸어왔다.
류연화는 사람을 대하는데 서투른 자신에게 몇 번이고 다가와준 그녀가 무척이나 고마웠다.
그리고 지금─.
“─아, 다음에는 저거 보러 갈까?” “그래, 좋아.”
─그녀의 남동생이 옆에 있다.
노은하.
류연화는 은하를 처음 보았을 때, 은아를 많이 닮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분위기 자체가 달랐다.
그야말로 정반대였다.
은아가 사람들의 경계심을 허물고, 어떤 사람이든 포용하는 분위기라면 은하는 사람들에게 경계심을 세우고 그들을 자신의 기준으로 재단하려는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와…, 어딜 가나 누나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정말 많은데? 이거 어디서 가면이라도 사야 되는 거 아니야?”
“…미안. 불편하지?”
“아니, 전혀. 나도 마찬가지라서. 봐봐, 저 사람들도 날 알아보고는 이쪽으로 오려 하고 있잖아.”
“그러게. 다른 데로 갈까?”
“일단 다른 데로 이동하자. 아마도 여기 어딘가에 가면이 있을 거야. 우리 그거 쓰고 다니자. 안 그래도 저녁이라 사람들이 아까보다 많아진 것 같아.” “응, 그래.”
그럼에도 같은 점이 있기는 했다.
그녀에게 다가오는 사람들은 대개 그녀에게 겁을 집어먹고는 했는데, 은하는 은아와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그녀를 호의적으로 대했다.
그리고 은하를 천천히 알아가면서 그가 보기와 다르게 세심한 부분도 배려해줄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있었다.
“─이건 어때? 누나랑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은하는 은아를 대할 때면 다정하고 어수룩한 면모를 보여주고는 했다.
그 모습이 귀엽고, 묘하게 은아를 닮은 느낌이었다.
그녀뿐만이 아니라 마음을 허락한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듯싶었다.
그리고 이제는 자신도 언젠가부터 그에게 그런 미소를 받고는 했다.
류연화는 파티회장에서 쓰일 법한 반가면을 착용하고 그에게 물었다.
“어때?”
“응, 잘 어울리는데?”
은하가 엄지손가락을 척 든다.
그녀는 아무런 고민도 하지 않고서 새하얀 반가면을 고르기로 했다.
이내 그는 마술사를 떠올리게 하는 반가면을 골랐다.
두 사람은 그렇게 반가면을 쓰고 문화제를 마저 둘러보기로 했다.
하지만 반가면을 쓰고 있었음에도 두 사람을 알아보는 이들도 있었다.
“─류연화 플레이어! 만나서 정말 영광입니다! 혹시 시간이 되신다면 짤막하게나마 인터뷰를 해주실 수 있을까요? 저희는 월간 플레이어의 문화부에서 나온….”
근처에 있는 탑에 올라가 전경을 둘러보려고 했을 때였다.
쫓아오는 사람들을 잘 따돌렸다고 생각하고 있었더니 어딘가에서 불쑥 기자들이 튀어나왔다.
월간 플레이어.
류연화도 익히 아는 잡지사였다.
레귤러스클랜과 협력관계를 맺은, 플레이어 업계의 메이저 잡지사.
그러다 보니 그녀는 그들의 제의를 매몰차게 거절할 수 없었다.
대신 옆에 있던 은하를 살폈다.
“괜찮아?”
“누나 하고 싶은 대로 해. 괜찮아.”
“그럼 아주 잠깐이라면….”
“감사합니다! 저 혹시…, 괜찮으면 옆에 있는 노은하 학생하고도 같이 인터뷰를 할 수 있으면….”
“저는 안 해요.”
“잠시라도….”
“안 해요.”
“잠시….”
“놉.”
연화는 인터뷰 요청을 수락했다.
기자들이 은근슬쩍 은하에게서도 인터뷰 제의를 요청했지만, 은하는 그들의 제의를 칼 같이 거절했다.
“…그럼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문화제에 찾아와, 종합부문대회 시연경기에 갑작스레 개입한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기자들이 주로 물은 질문은 주로 그녀의 근황에 대한 것이었다.
클랜 생활은 마음에 드는지.
이라는 이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아카데미 동기인 노은아, 한창진 플레이어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오늘 문화제를 찾은 이유는 뭐고, 어쩌다 종합부문대회 경기 도중에 난입하게 되었는지 등등.
그녀는 최대한 생각을 정리해서는 답변했다.
“류연화 플레이어와 노은하 학생은 인연이 참 많은 것 같네요. 앞으로 계속해서 서로 절차탁마하는 관계를 이어나갈 수 있으면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ㅇㅎㅇㅎ 팬이거든요. 응원하겠습니다.” “ㅇㅎㅇㅎ?”
“나중에 한 번 검색해보세요. 그럼 마지막 질문 가겠습니다.” “네.”
“류연화 플레이어는 뛰어난 미모로 뭇 남자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는 걸 알고 있나요?”
“…처음 들었는데요. 저는 별로…, 예쁘지 않은데….”
“에이, 겸손도 지나치면 별로에요. 업계에서 노은아 플레이어가 툭하면 류연화 플레이어한테 예쁘다고 말을 하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걸요?”
“아….”
“류연화 플레이어는 이런 점에서는 굉장히 둔감한 모양이네요. 좋아요. 그래서 말인데, 류연화 플레이어의 이상형을 알고 싶습니다!”
여성 기자가 콧김을 뿜어댄다.
류연화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면서 예상치 못한 질문을 받고 주춤했다.
그동안 그녀가 받은 질문은 대부분 몇 번 대답해본 적 있는 질문이거나 예상 범위 내에 있는 것들이었다.
그런데 설마 플레이어와 관계없이 이상형에 대해 물어올 줄은 몰랐다.
“저도 잘 모르는데….”
류연화는 말꼬리를 흐렸다.
이상형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대답하기 곤혹스럽다.
하지만 기자는 눈을 빛내면서 얼른 답을 알려달라고 보채고 있다.
결국 그녀는 이상형에 대해 막연한 대답을 꺼낼 수밖에 없었다.
“배려심이 많은 사람이었으면…, 그거면 좋겠어요.” “얼굴은 안 보나요?”
“저도 예쁜 편은 아니라 생각해서 얼굴은 딱히….”
“…결국 얼굴은 본다는 소리네요? 제가 말했죠? 예쁘다고.”
“…은아가 더 예뻐요.”
“흠…. 취향차이가 있겠지만 일단 인정하고 넘어갈게요. 얼굴은 별로 보지 않는다. 그리고 또 있나요?”
“음….”
류연화는 생각에 잠겼다.
배려심이 많은 사람이면 좋겠다. 그 말을 꺼낸 이유는 그래야 상대가 말수가 적은 자신을 이해해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윽고 그녀가 띄엄띄엄 입을 열었다.
“…다정하고 착했으면 좋겠어요.”
“음…. 그건 누구나 그런 생각을 할 거라고 생각하는데….” “아, 잘 먹는 사람이면 좋겠어요. 저는 잘 먹는 편이 아니라서….”
“오케이, 잘 먹는 사람.”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이면 좋겠고 마음의 여유로움이 넘쳤으면 좋겠고 그리고 또….”
“오, 술술 나오네요? 좋아요, 좋아. 그런데 외적인 부분은 없나요?”
“음….”
다정하고 착한 사람.
잘 먹는 사람.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
마음이 여유로운 사람.
어느 순간부터 그녀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이상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어렴풋이 이상형을 그려보니 말이 술술 나온 것이다.
그녀도 신기해서 고개를 갸웃거릴 정도였다.
“…저보다 키가 컸으면 좋겠어요.”
“류연화 플레이어 키가….” “저는 170이에요.”
“그럼 키가 170은 넘어야겠네요. 그리고요?”
“머리칼은 갈색이고….”
“오, 뭐야. 이번엔 구체적이네요.”
“…그러게요?”
“그리고 또?”
“지금 생각해보니까 저도 얼굴을 보는 것 같아요. 귀여운 사람이면 좋겠어요.”
“저도 귀여운 사람 좋아해요. 또?”
“그리고 또…. 저보다 강한 사람?”
“…네?”
“…어?”
자신보다 강한 사람.
그 말을 내뱉은 류연화나 기자는 거의 동시에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류연화는 눈을 크게 떴다.
머릿속에서 어렴풋이 그려나가던 이상형이 점점 선명해졌다.
“…….”
“하긴, 저도 강한 사람을 좋아해요. 그래야 남성미가 넘친다고 하려나? 그런데 류연화 플레이어는 강해서, 남자들의 허들이 엄청 높겠네요.” “…네.”
“근데 뭐…. 찾아보면 어디 있겠죠. 혹시 또 모르는 일이죠. 가까이에 있는 건지도.”
기자가 미소를 짓는다.
류연화는 그녀의 호의적인 미소에 뭐라 답을 하지 못했다.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이상형을 계속 곱씹을 뿐이었다.
“참고로 몇 살까지 허용하세요?”
“…4살까지.”
“4살 차이는 사주를 보지도 않고 결혼할 수 있다는 말도 있으니까요. 나이 차이도 적당하네요. 음…, 그럼 류연화 플레이어는 연상이 좋나요? 연하가 좋나요?”
“…연하.”
“아하, 오빠라고 부르는 것보다는 누나 소리를 듣는 게 좋구나?”
“…네.”
“네, 알겠습니다. 류연화 플레이어,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기사는 다음 달에 나갈 것 같아요. 그때 제가 따로 연락을 드릴게요. 그리고 마지막 질문은…. 제가 좀 적당히 커트해서 내보낼 거예요.”
“…어떻게요?”
“음…, 그냥 두루뭉술하게? 처음에 류연화 플레이어가 말했던 것처럼 얼굴도 별로 따지지 않고, 성격은 다정하고 착하고, 배려심이 많고…. 그렇게 나갈 거예요. 이렇게 해야 나중에 뒤탈이 없을 테니까요.”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러면 데이트하시는데 방해해서 정말 죄송해요. 저희는 이만 돌아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인터뷰가 끝이 났다.
류연화는 멀어지는 기자들을 보며 뒤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그를 돌아보았다.
따분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던 그가 그녀를 보고는 표정을 바꾼다.
류연화는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왜 그래?”
“…어?”
“왜 멍하니 있어? 혹시 뭐 안 좋은 질문이라도 받은 거야?”
“아니, 그건 아니야.”
은하가 다가와서 물었다.
그녀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가 걱정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데─.
─내가 왜 이러지?
제대로 눈을 쳐다보지 못하겠다.
어쩐지 얼굴이 후끈거린다.
가면을 쓰고 있어서 다행이다.
류연화는 어색하게 얼버무리면서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갔다.
발걸음이 조급하다.
엇박자다.
그럼에도 그녀는 은하를 뒤로하며 탑을 올랐다.
“─저 누나가 왜 저러지?”
그녀의 뒤를 따라가면서.
은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날, 문화제 첫 번째 날은 그렇게 지나갔다.
리라이프 플레이어 479(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