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life Player RAW novel - Chapter 482
아카데미를 졸업하고부터 근무에 치여 살지 않는 날이 없었다.
그럼에도 노은아는 불평하지 않고 웃는 얼굴로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했다.
그녀가 세상 사람들에게 라고 불리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뿔이 났다.
‘클랜로드. 정말 너무하세요. 저도 아카데미 문화제를 보러가고 싶었는데….’
‘은아야, 그건 정말 미안하게 됐다. 근데 나도 노은하 시연 경기만 보고 바로 클랜으로 돌아왔어. 문화제에 놀러간 게 아니라 사전조사를….’
‘연화는 그날 은하랑 놀았다던데, 나도 은하랑 놀고 싶었는데….’
‘…….’
자신이 일에 치여 살던 중에.
레귤러스 클랜로드 구연수가 몰래 은하를 보고자 아카데미 문화제에 참석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다.
제일 친한 친구 류연화에게서.
때마침 그때 시간이 비었던 그녀도 문화제를 따라가게 됐다는 것까지.
은아는 자신을 쏙 빼놓고 가버린 클랜로드에게 원망 어린 시선으로 서운함을 표했다.
‘…그래. 놀다 와라. 됐지?’
‘정말이죠?’
‘그래, 정말이야. 내가 클랜원한테 일만 하라고 닦달하는 사람은 아냐. 오전 근무만 끝내고 오후는 마음껏 놀다 오라고. 왜, 용돈도 줄까?’
‘저야 주시면 감사하죠! 클랜로드! 제가 클랜로드 좋아하는 거 알죠?’
‘이럴 때만 좋아한다고 하고…. 왜 우리 클랜원들은 이렇게 얍삭한지 잘 모르겠다니까. 옜다, 가져가.’
‘저, 클랜로드, 그럼 저도 같이….’
‘창진이 너는 남자. 1명은 괜찮아도 2명은 좀 힘들어. 너는 내가 나중에 시간 따로 빼줄게.’
‘…네. 은아야, 너라도 문화제 잘…. 아, 벌써 갔네.’
서운한 눈빛 작전이 통했다.
구연수에게 오후 퇴근을 허락받은 그녀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얼굴을 바꿨다.
그러고는 오랜만에 자신의 모교를 찾은 것이다.
“진짜 오랜만이다. 바뀐 게 없네. 옛날 모습 그대로야. 아, 저기 있는 탑들이 문화제 기간에 임시적으로 설치했다는 거구나?”
고등아카데미 정문.
오랜만에 모교를 방문한 노은아는 그리움이 담긴 눈으로 주변 일대를 둘러보았다.
부스에서 일을 하는 학생들을 보니 학창시절의 추억이 떠오르는 한편, 저들과 같이 일하고 싶다는 마음이 절로 들었다.
” 아니야?”
“어, 진짜다. 노은아야!”
“아, 노은아 선배님! 오랜만이에요!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그러던 노은아는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이고 말았다.
업계에 데뷔한 지 대략 2년.
불과 2년도 안 되는 시간 동안에 그녀는 거의 네임드의 반열에 드는 인지도를 손에 넣은 것이다.
“안녕하세요! 노은아입니다!”
그만큼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들을 상대하는 방식에는 익숙해졌다.
노은아는 당황하지 않고 인사하고, 면식이 있는 후배들을 격려했다.
그러는 한편 그녀는 사람들을 피해 건물 뒤편으로 몸을 숨겼다.
“맨얼굴로 돌아다니기는 힘들겠네. 연화가 가면을 챙겨줘서 다행이야.”
노은아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는 벨트 파우치에서 얼굴을 반쯤 가리는 반가면을 꺼냈다.
그녀가 레귤러스클랜을 나올 때쯤 류연화가 챙겨준 것이다.
그녀는 연화의 배려를 고마워했다.
“그나저나 연화가 요 며칠 이상해. 문화제를 다녀오고부터였나? 갑자기 멍을 때리는 일이 많아졌고, 실수도 부쩍 늘어난 것 같고…. 문화제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반가면을 쓰고 중얼거리는 은아.
그녀는 최근 이상한 모습을 보이는 연화를 떠올리고 고개를 갸웃했다.
문화제에서 남동생하고 무슨 일이 있었나 싶었다.
“어쩐지 뭔가 부끄러워하는 느낌? 연화가 그렇게 허둥거리는 모습은 처음 봤다니까.”
그래도 마냥 나쁘지는 않았다.
은아는 은하의 이름을 듣고 얼굴을 새빨갛게 붉힌 류연화를 떠올리며 키득거렸다.
그 모습이 꽤나 정감이 갔었다.
“은하는 어디에 있으려나….”
그러다 은아는 벽에 등을 기댔다.
처음부터 혼자서 문화제를 보려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구연수에게 허락을 받았을 때부터 은하에게 연락을 준 참이었다.
오후에 시간이 나면 같이 문화제나 둘러보자고.
당연히 남동생의 대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예스였다.
“음…. 혹시 다른 애들이랑 보려다 나 때문에 약속 취소하진 않았겠지? 그러면 걔네들한테 미안한데….”
아카데미에 들어왔다고 톡을 보낸 은아는 은하의 답신을 기다리기로 했다.
한편으로는 자신이 은하와 시간을 같이 보내려는 친구들을 방해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며 걱정했다.
“그냥 혼자 돌아다닐까….”
은아는 모퉁이 너머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즐겁게 문화제를 둘러보는 사람들.
혼자 돌아다니는 사람은 한 명도 눈에 띄지 않았다.
저들 사이에 섞여 혼자 돌아다니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바로 그때.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으나으나」: 지금 바로 갈게!!! 어디야?(오후 04:52)
노은아의 얼굴이 환해진다.
이윽고 답장을 적어 내려간다.
☆
온태양은 31기 학생들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유망주로 알려져 있던 학생이었다.
하지만 그의 실력은 기대 이하라고 할 수 있었다.
검을 휘두르는 품세가 난잡했고, 체력을 배분하는 능력이 서툴렀다.
빈틈이 많았던 것은 당연지사.
최은혁은 대련을 시작하기 전부터 자신의 승리를 점치고 있긴 했지만, 설마 극명한 차이로 이기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때 온태양 얼굴 봤어? 창피해서 제대로 얼굴을 들지도 못하더라.”
“그야 나한테 이긴다고 선언했는데 이기지도 못했으니까. 쪽팔릴 만도 할 거야.”
그럼에도 은혁은 조금 전에 있었던 대련을 계속 복기했다.
분명 온태양은 자신의 적수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점점 내 움직임을 따라오고 있는 것 같았어.
은혁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온태양이 자신과 대련을 벌이면서 성장을 하고 있다는 것을.
멀리서 보는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가까이서 그의 성장을 목격한 그는 태연하게 자신의 승리를 좋아할 수 없었다.
뒤를 따라잡히는 듯한 감각.
만약 온태양의 체력이 좋았더라면 대련은 다른 양상으로 흘러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내년에는 어떻게 될지 몰라.
한 번 이겼다고 방심해서는 안 돼.
훈련, 훈련, 훈련.
앞으로도 계속 훈련을 하는 수밖에 없어.
최은혁은 온태양을 통하여 재능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그의 재능에 비해서 자신의 재능은 보잘 것 없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스승님이 말했던 대로다.
자신과 같은 사람은 끝없이 훈련을 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지 않으면 언젠가 온태양에게 따라잡히고 말리라.
“─괜찮아. 네가 더 강해.”
“뭐?”
그러던 중.
대회를 마치고 문화제를 같이 보던 서나가 대뜸 말을 꺼낸 것이다.
퍼뜩 정신을 차린 은혁은 그녀가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는 시선에 당황했다.
그러자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의 생각이 틀렸냐는 듯이.
“지금 내일 싸우게 될 민호에 대해 생각하고 있던 거 아니었어?” “아….”
“나는 네가 민호를 이길 수 있을지 걱정하고 있는 줄 알았지.”
그녀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는 그제야 자신이 내일 경기에서 숙명의 라이벌처럼 생각하고 있던 목민호와 싸운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을 전혀 하지 않는다는 건 거짓말이겠지.”
잠시 잊고 있기는 했지만.
은혁은 사실 대회에 나갔을 때부터 목민호를 경계하고 있었다.
시기와 기간은 다르다고 할지라도 같이 대장의 밑에서 검을 배우게 된 사이.
또한 대장이 언젠가 만들 파티에서 주력 딜러의 자리를 두고 다투게 될 라이벌.
그러다 보니 두 사람은 은연중에 서로에게 경쟁심을 품고 있었다.
“아니야. 사실 걱정이 되기는 해. 내가 강해진 만큼, 민호도 나처럼 강해졌을 테니까.”
열등감 또한 있었다.
재작년, 은혁은 딜러 부문대회에서 그에게 패배한 기억을 아직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니 이번에는 반드시 이기겠다.
한편으로는 조금 불안했다.
이번에도 지는 것은 아닌가 하고.
“─그러게 괜찮대두.”
“…….”
“나한테는 은혁이 네가 제일 강해. 민호보다 네가 훨씬 강하다니까?”
그런데 서나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그의 승리를 단언하는 것이다.
은혁은 멍한 얼굴로 서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마치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에휴 하고 한숨을 쉰다.
그러더니 까치발을 들어서는 돌연 그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은혁이 너는 늘 그게 문제야.” “…뭐가?” “네가 너를 너무 과소평가하는 거. 주변에 잘난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괜히 기죽으려 하지 말란 말이야. 내가 그걸 못 볼 줄 알았게?”
“…….”
“정작 은혁이 너도 그 사람들처럼, 아니, 어쩌면 훨씬 잘났는걸. 근데 왜 맨날 한 발 물러서려고 하니?”
서나가 머리를 헝클어뜨린다.
은혁은 그녀의 손길을 받아들이며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그녀의 말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언제나 자신에게 부족한 것을 제일 먼저 찾고는 했으니까.
그리고 그것을 개선해나간다.
그에게는 그가 만나는 모든 이들이 부족한 것을 가르쳐주는 스승과도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자신을 낮추고 있다.
“─너 정말 잘났어. 나한테는 네가 제일 대단한 사람으로 보여. 그러니 너보다 강한 사람은 없다구.”
어렸을 적부터 소꿉친구처럼 지낸 진서나는 그것을 파악한 것이다.
그래서 낯부끄러운 말을 당당하게 말하는 것이다.
자신은 대단한 사람이라고.
“…고마워.”
낯간지러운 칭찬.
은혁은 자신의 가치를 드높여주는 서나의 칭찬에 쑥스러워했다.
그녀가 붉은 눈을 가늘게 모아서는 이제 정신을 차렸냐는 듯이 묻는다.
그는 눈빛으로 답했다.
그러다 의문이 일었다.
한 번 확인해보고 싶다.
“근데 서나야. 내가 제일 강하면, 대장보다도 강하다는 거지?”
진서나는 뭐라고 답할 것인가.
은혁은 청각을 곤두세우며 곧이어 그녀가 꺼내는 말을 들으려 했다.
결과는─.
“─얘는…. 당근 은하가 더 강하지. 너, 내가 아무리 띄워주려고 한대도
은하하고 비교하는 건 그래도 너무 많이 나간 것 아니니?” “그, 그렇지…?”
“은하 다음으로 네가 제일 강해. 그거면 충분한 거 아니야?”
“음….”
조금도 고민하지 않은 채로 대장의 이름을 입에 담는 진서나.
은혁은 무언가 뚱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러면 서나 너는 대장이 1등이고, 내가 2등인 거야?
지금 떠오르는 생각을 말했다가는 자신이 괜히 속이 좁은 사람인 것처럼 보일 것 같았다.
은혁은 속으로 끙끙 앓았다.
그런데 그녀는 마치 은혁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이─.
“─네가 1등이고, 은하는 0등이야. 내가 인심 팍팍 쓴 거 알지?”
진서나가 손으로 입가를 가리면서 웃는다.
은혁은 뚱딴지같은 소리에 뭐라고 답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다 속이 좁은 사람처럼 보여도 이것만은 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1등하고 0등의 차이는 뭐야?”
“음…, 글쎄….”
서나가 생각에 잠긴다.
이윽고 그녀가 두 손뼉을 치면서 그의 질문에 대한 답을 내놓는다.
“0등은 내가 도저히 평가할 수가 없는 사람이라서. 순위 외야.” “…1등은?”
“─내가 제일 높게 평가할 수 있는 사람이라서?”
서나가 장난스럽게 의문조로 말을 마친다.
이제 은혁은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들뜨는 감정을 억누르려 애썼다.
그러나 그것이 얼굴에 드러나고, 그녀는 진즉에 그것을 알아차렸다.
그럼에도 그녀는 그를 위해 조용히 입을 다물어주기로 했다.
“우리 솜사탕 먹으러 갈래? 대장이 천서네 부스에서 만드는 솜사탕이 맛있다고 하더라고.”
“나는 어제 아라랑 먹었는데….”
“…그럼 다른 데로 갈까?”
“됐어. 너는 아직 못 먹었다면서? 그럼 한 번 먹어보러 가자.”
“괜찮아?” “일일이 내 의견을 물어야 해?”
“…아니야. 나 솜사탕 먹고 싶어.”
“그래, 가자. 길은 알고 있으니까 이 누나만 믿고 따라오라구.”
“어…, 나도 길 아는….”
“그래? 네가 안내해줄 거야? 그럼 나 이제 눈 감고 걸어간다?” “눈은 왜 감고 걸어가는데?” “몰라. 눈 감고 걸어갈 거야. 얼른 나 넘어지지 않게 손이나 잡아줘.”
“근데 서나야, 혹시 지금 텔레파시 쓰고 있는 건 아니지?”
“응, 아니야.”
“근데 귀 사이에 스파크가….”
“잘못 본 거야.”
“음….”
“네가 잘못 본 거 맞지?” “응, 내가 잘못 본 것 같아.”
“다 은혁이 널 위해서 하는 거야. 자다가도 내 말을 들으면?” “…떡이 떨어진다?” “정답.”
은혁이 익숙지 않은 길을 안내하며 긴장한다.
한편 눈을 감고, 그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 진서나는 은혁이 모르게 텔레파시를 사용하고 있었다.
누구에게 보내는가 하면─.
[─파랑 오빠. 혹시 나한테 혼나고 싶은 거는 아니지? 내가 성경이랑 불경 하나는 정말 잘 외우는데.]근처에서 기척을 죽이며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던 사람들.
서나는 죽창을 들고 있는 사람들의 머릿속을 계속 방해했다고 한다.
☆
은아가 문화제에 놀러온다.
온태양의 경기를 보고 있던 도중에 문자를 받은 은하는 쌍수를 들고서 반기고 싶을 따름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최가인이 옆에서 통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는 것.
“난 이제 다른 약속이 있어서 그만 가볼게. 내일 봐.”
“응? 오늘 나하고 하루 종일 같이 있는 거 아니었니? 누구 만나는데? 정하양?” “하양이 아니야. 걔도 지금 바빠.”
“그러면 누구를 만나러 가는 거니? 얘기 좀 해주면 안 돼? 윤이별?” “아니야. 누나 만나러 가.” “누나? 누구 누나?”
“…우리 누나.”
대체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는지 모르겠다.
은하는 언짢아지는 기분을 참고서 그녀가 묻는 말에 그대로 대답했다.
내일 불꽃놀이도 같이 보겠다고도 말을 했는데 왜 이렇게 추근거리는 거지?
은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결국 그는 뒤에 최가인을 데리고 아카데미 정문으로 걸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흐음…. 은하 네 누나 말이구나. 그러고 보니 예전에 파티에서 보고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네.” “누나는 졸업했으니까 그렇겠지.” “그럼 이참에 너희 누나한테 한 번 인사 좀 하러 가야겠다.” “뭐?”
“너희 누나한테 점수를 따놔야지. 안 그래도 너희 누나하고 첫 만남이 좋지가 않았었는데 말이야.”
메주가 씩 하고 웃는다.
은하는 눈살을 찌푸렸다.
스티지안 아이로 세뇌를 해버릴까 고민을 해보았지만 달빛의 축복이 마법을 저항해낼 터였다.
결국 마법이 아니라 다른 방안으로 그녀를 따돌려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고집이 센 최가인이 자신의 뜻대로 움직여줄 리가 없었다.
“그냥 인사만 할게. 인사만 하고 돌아가지, 뭐.”
“…하….”
최가인이 그나마 뜻을 굽혔다.
은하는 그조차도 마음에 들지 않아 이제는 대놓고 한숨을 내뱉었다.
그래도 최가인은 마냥 좋다는 듯이 은하와 걸음을 나란히 한 것이다.
그리고 이윽고─.
“─은하야!” “누나!”
남매가 만나는 순간이 찾아왔다.
정문 근처로 걸어가던 그는 때마침 근처에 있던 노은아를 찾았다.
그녀가 손을 번쩍 들어서는 그에게 반갑다는 듯이 인사했다.
이내 은하에게 뛰어오던 그녀는─.
“─…….” “어머, 언니 오랜만이에요. 저 기억하시죠? 저는 최가….” “나도 알아, 네 이름. 최가인이지? 그래, 안녕.” “…아, 저 기억하고 계셨구나. 와, 정말 기뻐요. 그…, 저번에 파티에서 만났을 때에는 제가 예의가 없었죠? 그때 일은 사과드릴게요. 사실 그때 좋지 않은 일이 있어서….”
발걸음을 멈춘 노은아.
그녀의 눈이 가늘어진다.
은하를 만난 기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간다.
상실된 감정을 대신하듯 그 자리에 언짢음이 차오른다.
“…누나?”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노은아가.
은하는 누나의 태도를 보고는 그만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불렀다.
그녀가 너무 낯설게 느껴져서.
그러나 그의 부름에도 그녀는 결코 응답하지 않았다.
“─그래. 알면 됐어.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으니까.”
“아, 다행이다. 저는 혹시나 언니가 오해를 하는 건 아닌가 해서….”
“그러면 이제 용건은 끝난 거지?”
“…….”
갤럭시그룹의 직계를 상대로.
은아는 최가인을 쌀쌀맞게 대했다.
그제야 최가인은 노은아의 태도가 살갑지 않은 것을 알아차린 듯했다.
전혀 예상치도 못한 대접을 받은 그녀가 눈을 크게 뜬다.
노은아가 입을 연다.
“─용건이 끝났으면 이제는 그만 가주지 않을래?”
“아, 사실은 제가 저번부터 언니랑 친해지고 싶어서….”
“내가 왜?”
“…네?”
“내가 굳이 너하고 친하게 지내야 하는 이유라도 있니? 난 싫은데.”
“…….”
노은하는 입을 다물었다.
어째서인지 최가인이 노은아에게 쩔쩔매고 있다.
최가인의 성격답지 않다.
그러면서도 이해는 되었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지금 은아에게 잘 보여야 하는 입장이었을 테니까.
그런 반면 은아는 눈치가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고는 공세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째 공세가─.
“왜. 내가 은하 누나인 줄 알았으면 그때 뭐 잘 보이기라도 하려고 그랬니?”
“…….”
“굳이 안 그래도 되는데. 어차피 한 번 보고 말 사이인데 하하호호 잘 보여야 할 필요는 없잖아.”
“…그건 혹시 모르는….”
“응? 나는 한 번만 볼 건데? 왜? 우리가 앞으로 더 볼 일이 있나?”
“…….”
“근데 너는 왜 여기에 있는 거니? 나는 은하하고 만나기로 약속했지, 너랑 만나기로 약속한 적 없는데.”
─폭력적이다.
은하는 은아가 싸늘한 얼굴을 하고 사람을 상처 입히는 말을 하는 것을 처음 보았다.
그가 이 상황에서 개입하지 못하고 멍청하게 지켜보고 있는 이유였다.
그러는 사이 최가인의 얼굴은 점점 새빨갛게 물들어갔다.
그녀답지 않게
참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 최가인은 분을 참지 못했다.
그녀가 홧김에 소리치려는 찰나─.
“─너 지금 눈 똑바로 뜨는 거니? 미쳤니? 미쳤구나. 내가 졸업했어도 아카데미 선배인 건 변하지 않아.” “……!!”
“기수 사이에 예의는 지키자는 말, 아카데미 들어와서 지금껏 한 번도 들은 적 없어? 눈 안 까니?”
최가인이 뭐라고 화를 내기도 전에 재빨리 선수를 치는 노은아.
은하는 노은아에게서 상상도 못한 욕설을 듣고는 충격을 받았다.
그럼에도 은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상황을 정리해나가고 있었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괜히 훈련 잘하고 있는 은하한테 집적대지 좀 말아줄래?”
“…….”
“내 동생 잘생긴 건 알아봐선….” “……!” “왜. 할 말 있어? 속에다 담아둬. 말하지 않아도 돼. 듣고 싶지 않아.”
“…큭…!”
“이제부터 은하하고 약속이 있으니 너는 그만 빠져주지 않을래?”
노은아가, 자신의 누나가.
그야말로 귀신의 탈을 쓰고서는 최가인을 울렸다.
은하는 분해하면서도 제대로 말도 하지 못하고 도망치는 그녀를 보고 그만 얼이 나갔다.
아직도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은하야.” “…어.”
그때 노은아가 불렀다.
정신을 차린 은하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그녀는 거짓말처럼 가면을 바꿔 쓰고 있었다.
“나 쟤 싫어. 쟤는 안 돼.”
“…….”
“그러니까 쟤랑 놀지 마.” “…나도 쟤 싫어.”
“그러면 내 말 들어줄 거지?”
“…응.”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은하는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으로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그녀의 얼굴이 환해진다.
그러고는 그동안 만나고 싶었다며 은하를 대뜸 끌어안는다.
이제는 은하가 키가 커서 그녀가 은하에게 끌어안긴 듯이 보였지만.
그는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내가 아는 누나가 맞구나.”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아까는 딴 사람 같아서….”
꿈에라도 나올 것 같다.
은하는 자신의 품에 안긴 은아가 조금 전에 그런 식으로 화를 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러자 그녀가 키득거렸다.
“나 원래 무서운 사람이야. 그걸 이제 알았어?”
“에이, 거짓말….” “거짓말이 아닌데. 무서운 누나는 싫어?”
“아니, 그건 아닌데…. 방금 전에는 깜짝 놀라서….”
“네가 웬 이상한 애를 데려왔으니 내가 화를 낸 거잖아. 엄마였더라면 나보다 더 화를 냈었을걸? 어디서 저런 애를 데려온 거냐고.” “…아무래도 누나하고 엄마한테는 여자친구를 보여주지도 못하겠다.”
“왜. 누구 데려올 여자라도 있고? 말해봐. 누군데? 내가 사람 잘 봐. 내가 딱 보고 판단해줄게.”
“…어디까지나 만약에.”
은아가 품안에서 싱글거린다.
은하는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자신의 감정을 샅샅이 파헤치려는 그녀의 눈빛이 부담스러웠다.
그러다 그는 뒤늦게 현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음….”
“왜 그래?” “근데 누나 어떡하지? 최가인 쟤, 갤럭시그룹의 직계야. 잘못했다가는 누나한테 불똥이….”
“몰라. 아빠가 알아서 하겠지.” “…응, 아빠한테 맡기면 되겠지.”
우려했던 문제는 너무나 빠르게도 결론이 났다.
은하는 아버지에게 맡기기로 했다.
그러는 한편, 걱정인 게 아직 하나 남아 있었다.
최가인 얘, 괜히 나한테 히스테리 부리는 거 아니야?
달빛의 축복을 얻기 전까지.
은하는 최가인의 비위를 맞춰줘야 했다.
그런데 오늘 일을 계기로 그녀가 히스테리를 부리지는 않을 것인지 걱정이 되었다.
“무슨 걱정을 하는데 얼굴이 그리 심각해졌어?” “…지금부터 누나랑 뭐하고 놀지 걱정하는 중.”
“피, 얘가 또 장난을 치네? 나는 어디든 좋아. 아무 데나 가자.”
에라, 모르겠다고.
은하는 내일의 은하에게 맡기기로 했다.
어차피 계획을 하루 남겨둔 차.
내일이면 최가인에게 굽실거리는 관계도 끝이 난다.
그러니 일단 눈앞에 있는 사람에게 집중하도록 하자.
은하는 은아의 손을 잡으며 걸음을 옮겼다.
“…은하야, 또 왔어? 어, 근데…. 옆에 계신 분은 설마….”
“안녕? 은하 누나 노은아라고 해! 은하 친구라면서?” “안녕하세요…! 저는 고등아카데미 1학년 이천서라고 합니다! 은하하고 중등아카데미 3학년부터….”
“입으로 일하지 말고 손으로 얼른 솜사탕이나 만들어서 줘.”
“은아 누님! 여기 있…! 왜 은하 네가 가져가는 거야….”
“어때? 맛있어?”
“와, 신기하다. 대박.”
“내가 찾아낸 데야. 그리고 여기, 친구 할인도 있어서 공짜다?” “얘 또 돈 안 내네….”
그리하여─.
“─동작 그만! 신고를 받고 왔다. 여기에 반동분자의 기질을 보이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왔는데, 너희는 피의자로서 묵비권을 행사할 권리는 존재하지 않고…. 얼레? 은아 누나? 누나가 왜 여기 있대?” “죽창! 죽창! 죽창!” “야, 이것들아! 번지수를 틀렸잖아! 신고한 녀석이 누구야!? 그럼 누나, 재밌게 놀다 가!”
─문화제 세 번째 날이 저물고.
문화제 네 번째 날이 밝는다.
꽃을 꺾기 위한 계획의 날이 오고, 인연과 인연이 뒤엉키는 날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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