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life Player RAW novel - Chapter 494
시간을 되돌려 1년 전, 선력 11년.
더운 여름날이었다.
그러다 보니 그늘이 지지도 않은 놀이터는 한산하기만 했다.
오직 두 사람이 놀이터 중심부에 서 있을 뿐이었다.
“왜…, 갑자기 헤어지자고 그러는 건데? 어?”
“…미안해.”
“그러니까 이유를 알려달라고.”
교복을 입고 있는 남녀.
남학생은 땀을 흘려가며 그녀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기만 했다.
“너도 나 좋아한다고 했잖아. 근데 이러는 게 어디 있어. 그래서 내가 예진이하고…, 아오, 진짜…. 왜 또 울고 그래?”
남학생은 욕설을 내뱉으려다 말고 한숨을 토했다.
여학생이 울먹거리고 있었으니까.
이윽고 그녀가 눈물을 터뜨렸다.
“네가 뭘 잘못했다고 울어? 울고 싶은 건 나란 말이야, 나….”
“미, 미안…. 나도 모르게 그만….”
남학생은 억울함을 곱씹었다.
그러고는 여학생이 눈물을 그치는 때를 기다렸다.
이내 그녀의 울음이 잦아들었다.
“지, 집에 가서 잘 생각해봤는데…. 여, 역시 우리는 사귀면 안 될 것 같아. 예, 예진이한테 미안해서….”
“…네가 꼬셨잖아. 네가 토요일에 나하고 영화 보러가자고.” “…그건…, 너랑 친해지려고….”
“이제 와서 날 나쁜 놈으로 만들고 그러네. 그래, 좋다 이거야. 그런데 너도 나 좋다고 했었잖아. 주변에는 비밀로 하고 사귀자고 제안했던 건 바로 너고.”
“그, 그건…. 예진이한테 미안하고, 다른 사람들한테 눈치가 보여서….”
“근데 이제 예진이 귀에 들어가니 다른 사람들 눈치가 신경이 쓰여서 무섭다? 그럼 나는 뭐가 되는데.”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아오….”
윤이별이 다시 눈물을 흘린다.
남학생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화를 참기만 했다.
끝끝내 그녀가 싫다고 하니 결론이 나온 셈이다.
“─그래, 헤어지자. 헤어져. 앞으로 다시는 보지 말자.”
남학생은 그녀로부터 몸을 돌렸다.
바닥에 떨어져 있었던 빈 깡통을 홧김에 세게 차버린다.
그길로 씩씩거리며 놀이터를 빠져나가려고 한다.
바로 그때─.
“─저, 저기….”
“또 왜?”
윤이별이 남학생을 불렀다.
남학생은 눈살을 찌푸리며 그녀를 뒤돌아보았다.
그녀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면서 우물쭈물한다.
그러더니 눈물자국이 남은 얼굴로 겸연쩍게 웃으며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우리는…, 사귀지 않았던 거지? 오늘부터 4일, 그것도…, 없었던 걸로 하자.”
“허, 참…. 그런다고 예진이가 그걸 믿을 것 같아? 븅.”
“그래도…. 우리 사이에는 아직…, 아무 일도 없었던 거잖아. …그치?”
☆
노은하 사단이 연말마다 주최하는 파티는 어느덧 아카데미 학생들이 가장 참여하고 싶어 하는 파티로서 자리매김했다.
그만큼 성공을 바라는 학생들에게 노은하 사단과 친분을 다질 수 있는 자리가 매력적으로 느껴진 것이다.
“…미안. 나는 잠깐 다른 데도 좀 둘러보고 올게.”
사실상 천상천하 유아독존으로서 통하고 있는 노은하를 제외하고.
노은하 사단 내에서 학생들로부터 가장 많은 호의를 사고 있는 사람은 앨리스그룹의 직계 정하양이었다.
파티가 시작되자마자 학생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그녀는 이내 주변에 양해를 구하며 자리를 빠져나왔다.
그들을 상대하느라 피곤했다.
“하양아, 괜찮아?”
“응…. 나는 괜찮아. 다른 애들은 지금 뭐하고 있어?”
“이제 곧 아리엘이 나올 차례라서 무대 앞에서 대기타고 있어. 우리도 그쪽으로 갈까?”
“…아니야. 나는 그냥 조용한 데서 쉬고 있을게.”
“그래, 쉬고 있어. 내가 음료라도 가져올까?”
“응. 고마워, 서나야.”
“아니야. 나도 마시고 싶었는걸.”
워낙 많은 학생들이 참석하다 보니 무대행사까지 있었다.
취기가 오른 학생들이 무대에 올라 신나게 노래를 부르는 중이었다.
무대 쪽을 힐끗 쳐다본 정하양은 고개를 저으며 복도 쪽에 나 있는 소파에서 잠시 쉬기로 했다.
파티가 시작되고부터 계속 그녀를 보좌하고 있던 진서나는 음료수를 가져오겠다며 자리를 떠났다.
“응? 왜 여기 있어?”
“…안녕. 잠시 쉬고 있었어.”
그러던 그때.
하양은 화장실에서 나온 윤이별과 마주쳤다.
두 사람은 내심 당황했다.
그날,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이후 두 사람의 관계는 점점 서먹해졌기 때문이다.
“그, 그럼 난 들어갈게.”
“…이별아.” “응?”
쭈뼛거리면서 당장에라도 자리를 뜨려고 하는 윤이별.
정하양은 황급하게 몸을 돌리려는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가 어정쩡하게 멈춰섰다.
정하양은 소파에 등을 기댄 채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이별이 네가 날 어려워하는 건 이해할 수 있어.”
“…….”
“하지만 우리 관계 때문에…, 우리, 다른 애들은 끌어들이지 말자. 응?”
“…그게 무슨 소리니?”
“그냥…. 은하는 우리 둘 때문에 다른 애들까지 사이가 멀어지는 걸 좋아하지 않을 거야.”
고등아카데미 입학을 기점으로.
노은하 사단의 그늘 아래로 들어온 학생들의 수가 급격히 늘어났다.
은하와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 수도 당연히 늘어났고.
그로 인해 좋은 점이 있었냐 하면, 나쁜 점도 없지 않아 있었다.
노은하 사단에 소위 파벌이라는 게 생긴 것이다.
“나는 멀리해도 괜찮아. 그래도…, 다른 애들까지 멀리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나는 멀리한 적 없어.” “그럼 다른 애들하고도 리엘이나 민지처럼 친하게 지내줬으면 해.”
남학생들이야 파벌을 만드는 것에 크게 흥미를 가지고 있지 않았고, 민호와 은혁이 학생들을 잘 관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여학생들은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노은하 사단에 있는 여학생의 파벌은 크게 나눠서 셋.
하나는 정하양을 위시하고 모여든, 중·고등아카데미 귀족파.
하나는 윤이별을 위시하고 모여든, 고등아카데미 출세파.
하나는 차은우를 위시하고 모여든 중립파.
“…노력해볼게.”
“그리고 남자애들하고도 대화해봐. 다들 좋은 애들이야. 은하도 분명 그러기를 바랄 거야.”
“…….”
세력은 처음에는 정하양의 파벌이 강성했다.
그런데 김민지가 윤이별과 시간을 같이 보내는 일이 늘어나게 되면서 그녀의 파벌도 자연히 세력이 커져 노은하 사단 내에서 불화감을 조성하게 되었다.
이에 성격 좋은 차은우가 배수빈, 호시미야 카에데 등을 내세우면서 두 파벌을 중재하는 파벌을 만들게 된 것이고.
사실, 정하양이 마음만 먹는다면 노은하 사단에 불만을 가지고 있는 학생들을 처리하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단지 그것은─.
─은하가 바라는 게 아닐 테니까. 은하는…, 전부 다 수용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
그러니까 내가 그걸 도와야 해.
이전에 은하에게 어렴풋한 구상을 들은 적이 있던 정하양.
따라서 그녀는 이 자리를 빌어서 윤이별에게 부탁했다.
그런데 윤이별은 정하양의 부탁이 명령을 받는 기분이었던 듯싶었다.
“나도 은하를 방해할 생각은 없어. 내가 알아서 할게.”
“…….”
“그리고 나 오늘 고백할 거야.”
윤이별이 파르르 떨던 얼굴을 고쳐 그녀에게 선고한다.
그러고는 이죽거린다.
“하양이 너는 정말 이대로 가만히 있을 거니?”
“…나는…, 안 할 거야.”
“알았어. 나중에 후회하지 마.”
윤이별이 휙 하고 몸을 튼다.
하양은 멀어지는 그녀를 바라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
고백?
고백이야 하고 싶다.
하지만 동시에 겁이 났다.
은하가 또 이전처럼 밀어낼까봐.
한 번 거절을 당했던 그녀는 끝내 용기를 내지 못했다.
게다가 그는 지금 자신을 밀어내려 하고 있지 않은가.
고백이란, 확신이 있을 때야말로 하는 것이다.
어설픈 고백은 관계를 박살낼 수 있는 법이다.
만약 그렇게 되었다가는 노은하가 지금까지 이룩한 인간관계 상당수가 날아가게 되고 말리라.
정하양은 그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 또한 지금까지 구축한 입지를 잃게 될 것이다.
─네 마음을 정말 모르겠어.
네가 정말…, 미워.
미워서 좋아하고, 좋아해서 미운 노은하를 지키기 위해.
정하양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다.
그런 식으로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 변명했다.
“이별이 쟤가 요새 왜 저러지…. 하양아, 너무 걱정하지 마. 이별이는 내가 잘 다독여볼게.”
“응…, 부탁할게.”
정하양은 뒤늦게 화장실에서 나와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김민지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은하의 부탁 때문에 그녀를 계속 챙기고 있는 김민지.
마음은 정하양파요, 몸은 윤이별파. 그러나 그녀가 궁극적
으로 추구하는 방향은 노은하의 마음에 맡긴다는 차은우파였다.
결국 소꿉친구들 사이에 끼이게 된 김민지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면서 윤이별을 쫓아갔다.
한편─.
“─노은하가 어디가 좋다고 저렇게 기 싸움을 벌이는 건지….”
하양과 이별의 기 싸움 때문에.
화장실 안에서 계속 상황을 보던 호시미야 카에데는 한숨을 쉬었다.
“그나저나 리엘이 얘는 어디에서 이런 옷을 가져와서….”
국궁이라도 있으면 그나마 마음이 진정이 되겠건만.
아리엘의 권유를 이기지 못하고서 졸지에 등이 파이고, 옆트임이 난 드레스를 입은 호시미야 카에데.
그녀는 거울에 비치는 모습을 연신 확인하며 안절부절못했다.
☆
눈이 내린다.
은하는 발코니에 서서 호수 전경을 바라보았다.
호수 위로 떨어지는 눈발을 보니 아무래도 쌓일 듯싶었다.
“17살도 이렇게 지나가네. 이제…, 코쿤이 부서지기까지 2년밖에 남지 않은 건가.”
등 뒤에서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파티회장에서 학생들이 술에 취해 고래고래 노래를 부르는 있다.
은하는 눈을 감아서는 노랫소리를 조용히 감상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걸어 나가야 하는 미래를 되짚고 또 되짚었다.
“…진짜 재밌게들 노네. 쟤네들은 그렇게 마셨으면서 안 힘드나?”
자신이 계획했던 바대로 이루어진 미래가 있었는가 하면.
자신이 예상치도 못하게 흘러갔던 미래도 있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그에게 이롭게 작용했다.
은하는 이대로 자신이 원하는 대로 미래가 흘러가기를 바랐다.
“─여기서 뭐해?”
바로 그때.
그는 바로 가까이에서 들린 소리에 눈을 떴다.
윤이별이 미소를 짓고 서 있었다.
“…그냥. 바람 좀 쐬고 있었어.”
“우와, 눈 오는 거 봐. 예쁘다.”
“그러게.”
은하는 당황한 감정을 숨겼다.
그녀는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자연스럽게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때 생각난다.” “그때? 언제?”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윤이별.
눈이 내리는 걸 보고 작게 감탄한 그녀가 시선을 돌려 미소를 지었다.
자른 지 얼마 안 된 듯한 단발.
렌즈를 낀 눈동자는 인상 깊을 만큼 눈길을 끌었다.
“우리…, 처음 만났을 때.” “그러고 보니 이때쯤이었나.”
“아니야. 크리스마스이브였어.” “그랬나.”
“응. 그랬어. 1년 조금 지났지.”
윤이별이 힘을 주며 말했다.
은하는 가볍게 호응하고는 입김을 토했다.
“그때 네가 나한테 장갑도 줬잖아.”
“…그러네. 그랬던 것 같네.”
“그때, 사실은 정말 두근거렸어.”
윤이별이 담담한 어조로 말한다.
은하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는 계속해서 추억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네가 나를 믿는다면서, 날 지켜주려고 했던 것. 그때 정말, 정말 기뻤어.”
“─넌 내 친구였으니까.” “그래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그는 굳게 다물고 있던 입을 떼며 말했다.
그러자 그녀가 입술을 삐죽 내밀며 투정을 부렸다.
그녀가 다시 표정을 고친다.
표정이 부드러워진다.
“─그래도 괜찮아. 나는 네가 좋아. 네가…, 너무 좋아. 널 좋아해.”
“…….”
온갖 감정이 함축되어 나온 듯한 윤이별의 고백.
그녀가 이내 부끄러워하며 눈꼬리를 휜다.
미소가 곱다.
사랑을 머금은 시선이 오직 은하 한 명만을 바라보며 반짝인다.
하지만 은하는 그녀의 시선을 마냥 바라볼 수가 없었다.
─듣고 싶지 않았는데.
배수빈이 폭죽이라도 터뜨려주면 좋으련만.
은하는 낭패감을 느끼고 있었다.
윤이별을 밀어냈다고 생각했더니, 그녀가 기어이 고백을 해왔다.
“─미안.”
괜히 윤이별에게 상처를 줄까봐.
아니, 그녀가 떨어져 나갈까봐.
그래서 말하고 있지 않았건만.
은하는 필사적으로 감춰두고 있던 단 두 글자를 꺼냈다.
“…그럴 것 같았어.”
윤이별의 미소가 슬픔에 잠긴다.
은하는 물기가 차오르는 것 같은 눈동자로부터 고개를 돌렸다.
“그래도…. 그래도 네가 좋은 걸 어떡해.”
“…….”
“나한테…. 기회를 주면 안 돼?”
하지만 은하는 발걸음을 뗄 수가 없었다.
윤이별이 그의 손을 덥석 잡아서는 그를 보내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은하가 뒤를 돌아보았을 때.
그녀가 한 줄기 눈물을 떨궜다.
그녀의 입술이 파르르 떨린다.
“…딱 1년만. 1년만…, 나랑 한 번 사귀어주면 안 돼? 그러면…, 더는 널 귀찮게 굴지 않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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